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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10:1-15
찬송가 찬송가 484장 ‘내 맘의 주여 소망 되소서‘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에스라를 중심으로 신앙 개혁을 시작합니다. 먼저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건축했고, 각종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며 성전을 봉헌했습니다. 그 후에 그들은 은과 금과 그릇들을 성전에 예물로 바쳤습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예전 모습을 이제 다 회복한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에스라와 함께 일하던 지도층이 그에게 나와 이르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심으로 따라야 했던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이 으뜸이 되어, 이방 여인들을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그들과 영적으로 혼합되었다고 보고했습니다.
엎드러진 에스라(1)
이 소식은 명백한 죄악이었기에 에스라의 마음을 참담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기 위해 모든 구색을 갖추었지만, 실상 그들의 영적인 상태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고, 여전히 죄악속에 머물며 죄악 가운데 포로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지도자였던 에스라는 막중한 책임을 지고 하나님의 성전 앞에서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보고합니다.
(1)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에스라는 맥이 빠졌을 것입니다. 에스라 9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들은 에스라의 모습을 ’기가 막혀 앉았다‘라고 두어번 반복해서 표현합니다. 기가 막힌 사람은 다리에 힘을 줄 수 없고, 온 몸에서 맥이 빠져 두 발로 서 있는 힘 조차 없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 1절에서 그의 모습은 엎드려 있었던 것입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회복을 위하여 전력으로 달려왔고, 게다가 7장 10절에 의하면, 그는 한 가지 굳게 마음을 먹은 부분이 있는데, 바로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했었습니다. 그러나, 율례와 규례를 누구보다도 잘 지키고 가르쳐야할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영적인 상태를 보아하니,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는 볼보듯 뻔해 보였을 것입니다. 에스라에게 모든 일은 막혀 보였고, 소망이 끊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성전 앞에서 울며 죄를 자복하는 일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의 모습이 얼마나 가련하고 절박했던지, 원문은 그의 동작마다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붙여 독자들의 시선이 그가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하는‘ 행동을 생동감 있게 보게 만듭니다. 또한 이러한 동사들은 재귀형 용법을 사용해서, 에스라가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하는‘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그의 자발적인 모습이란 사실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마치 잠시 뒤로 사라져 없어져 보이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에스라가 죄를 자복하며 울던 장소는 성전 앞이었고, 이곳은 이스라엘 백성 중 남녀노소 모두가 다닐 수 있는 공적인 장소였기에, 그들은 에스라가 죄를 자복하는 모습을 선명하게 보았고, 그의 기도 소리를 뚜렷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에스라와 동일한 눈물을 흘리며 죄를 자복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희미하게 흐려진 소망의 불꽃에 다시 불씨를 붙여 점점 타오르게 하셨습니다. 우리말 성경엔 그들은 ’통곡‘했고, 에스라는 ’울었다‘고 표현되었지만, 원어에 두 표현은 ’울다‘에 해당하는 ’바카’ (בָּכָה)를 원형으로 합니다. 그러니까, 에스라와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며, 이방 여인들과 혼합되어 있던 그들의 영적인 상태가, 하나님 앞에서 다시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로 연합되어 갔던 것입니다.
절망중에 소망을 발견할 수 있는 공동체(2-4)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공동체에게 소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이상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내디딜을 수 없어 보이는 칠흑같은 절망 속에서도 낙관적인 미래를 소망할 수 있습니다.
(2-4)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이는 당신이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에스라에게 스가냐의 입술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다’고 말해 줍니다. 이 말의 원어적 뉘앙스를 최대한 옮겨보자면, 단순히 어떤 일이나 상태가 끝나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는 의미의 ‘아직도’라는 표현보단 ‘오히려 지금’이라는 고무적이고 소망 가득한 표현입니다. 스가냐가 소망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어기고 이방 여인들과 통혼한 잘못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공동체를 돌보시며 소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 일에 증인입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더 이상 교회 공동체에 소망이 없다는 비관적 해석을 내놓습니다. 통계적으로 교세가 감소하고 있는 추세이고, 해마다 문을 닫는 교회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난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앞으로의 미래인 어린 아이들부터 젊은 사람들까지 교회에 관심을 두지 않고, 교회에 나가는 일은 인생을 허비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붙잡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굳이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이미 사회적으로는 선한 일을 하는 단체들이 많이 있음으로 교회의 기능이나 존재 가치가 필요한지에 대한 의구심을 내놓습니다.
뼈 아프게도, 이러한 말은 결코 허황된 게 아닐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고 듣는 교회의 영적인 상태는, 주님의 신부임에도 불구하고 세속적 가치관을 신랑으로 맞이하여 영적으로 세상과 혼합되어 주님 앞에 음란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말하는 교회에 대한 비관적인 평가는 우리가 귀를 막고 눈을 가린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공동체엔 소망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멸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앞서 새벽기도회에서 살펴본 역대하 8장 1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악한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면, 그들의 기도를 듣고, 죄를 사하며, 그들의 땅을 고칠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전통적으로 역대기와 에스라는 동일한 기자가 기술한 것으로 보고 있고, 성령께서는 기자에게 하나님께선 죄인의 회개를 듣고 계신다는 진리의 줄기를 간직하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모습을 에스라 책 말미에 길게 할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겐 ‘오히려 지금’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듣고 있고, 그들의 죄를 사하며, 그들을 고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여 교회가 현재는 영적으로 세상과 통혼한 모습일지라도 소망이 넘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끊임없이 ‘회개하라’는 초청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정죄가 아닙니다. 회개는 영원한 소망으로의 초대입니다.
교회인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신앙적으로 거꾸러 넘어짐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예배에 감격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신앙고백에 진한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도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회복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앞에서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 우리를 멸시하지 않으시며,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일에 증인입니다. 통계적으로 세상의 일들이 승승장구하고, 교회에 비해 세상의 단체나 기관들이 훨씬 더 그럴듯하게 보일지라도,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하지 않는 이상, 종국에 그들에겐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에스라(5-8)
소망을 발견한 에스라는 빠졌던 기운을 회복했습니다. 그는 엎드렸던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5-8) 이에 에스라가 일어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대로 행하기를 맹세하게 하매 무리가 맹세하는지라 이에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서 일어나 엘리아십의 아들 여호하난의 방으로 들어가니라 그가 들어가서 사로잡혔던 자들의 죄를 근심하여 음식도 먹지 아니하며 물도 마시지 아니하더니 유다와 예루살렘에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들에게 공포하기를 너희는 예루살렘으로 모이라 누구든지 방백들과 장로들의 훈시를 따라 삼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그의 재산을 적몰하고 사로잡혔던 자의 모임에서 쫓아내리라 하매
에스라의 기도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독대하기 위하여 성전 앞에서 일어나 여호하난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근심했습니다. 한편으로 이런 에스라의 모습이 너무 무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 통곡했고, 본문 2-3절에 나온 결심처럼, 이방 여인들과 소생들을 다 내보내기로 다짐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에스라는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떡과 물을 입에 대지 않고 더욱 거세게 기도했습니다. 게다가 삼일 내에 예루살렘으로 모이지 않으면 재산을 적몰하고 모임에서 쫓아낼 것이라는 완강한 모습마저 보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 회복의 관건이, 단순히 성전을 구축하는 것에 달리지 않았다는 점을 우리들에게 밝혀주며,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하는 진정한 회개란 자발적인 행동을 빼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에스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있던 백성들에게 삼일 내에 예루살렘으로 모이라 한 이유는 그들을 회개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강력한 영적인 지도자라 하여도, 사람들에게 회개를 명령해 감행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회개는 백성 스스로가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스스로 겸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7절에 나온 ‘모이다’라는 단어는 원문에서 ‘스스로’라는 의미가 함의된 문법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온 백성은 예루살렘으로 삼일 이내에 스스로 모이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 누구도 우리를 대신하여 회개케 해줄 순 없습니다. 아무리 그가 존경받는 목회자라고 하여도, 그는 우리에게 회개를 권고해줄 뿐, 대신하여 실행해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겐 삼일 이라는 시간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에게 회개하는 시간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멈출지 모르는 인생의 촌각을 다투는 동안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이야 말로 세상 가운데 흔들리지 않고 소망을 붙잡는 자입니다.
두려워 떠는 공동체(9-15)
본문 9절에서 15절에 의하면, 에스라의 권고에 반응한 모든 사람들은 삼 일 내에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 앞으로 모였습니다. 그리고 에스라의 권고에 따라 이방 여인들을 끊어 버리겠다고 큰 소리로 대답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떨고 있었습니다. 큰 비와 이 일 때문에 떨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들이 모인 구월 이십일은 폭우성 비가 내리는 우기였습니다. 게다가 이 때는 기온까지 크게 내려가 굉장히 추운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궂은 날씨 때문에 떨기도 했겠지만, 그들은 ‘이 일’ 즉 이방 여인들과 통혼한 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망을 발견한 공동체의 특징은 두려워 떠는 모습에 있습니다. 성경에는 경외하는 모습을 두려워 떠는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실제로 경외라는 단어(פחד)는 두려워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외함으로 떠는 두려움은 피하고 숨고 싶은 의미가 아니라, 존경심과 거룩함을 바탕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영원한 소망이 있음을 발견한 자에게 두려워 떠는 모습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교회 공동체에는 떨림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공동체는 사람이 세운 계획으로 운영되는 곳이 아닌, 거룩하고 순결하며 하나님의 깊은 곳까지 통달하시는 성령님이 이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진정으로 안다면, 교회 공동체는 떨림이 없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목소리가 옳다고 주장할 수도 없는 곳입니다. 더 나아가, 교회인 우리 개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하루를 살아야 할 책임이 있고, 삶의 터전을 거룩한 부르심의 장소로 여겨야 합니다. 그곳에서 주님의 향기를 드러내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때론 상황과 형편을 지혜롭게 대처하기 위해 앞 날의 계획도 해야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 위에 하나님 앞에 떨어야 합니다. 인생을 꽉 쥐고 있던 우리의 손아귀의 힘은 하나님을 두려워 떨 때 느슨하게 풀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가치있고 존재하는 하나님 안에서의 소망을 붙잡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안에는 이러한 떨림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떠는 떨림없이 세속적 가치관을 끊겠노라 큰 소리 치는 모습은 우리 안에 없었습니까? 때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떠는 것보다 세상 앞에서 큰 비를 맞으며 매서운 추위 때문에 떨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며 그분 앞에서 가증한 일을 끊어버림으로 당신과 동행하겠노라 다짐하는 복음의 증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의 영적인 모습은 암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던 일을 행했고, 제사장들 마저도 그 일을 앞장서 가담했습니다. 에스라는 좌절하여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소망이었음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들을 멸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당신 앞에 서도록 도우시는 좋으신 분이십니다. 오늘도 우리 안에 세속적 가치관과 통혼한 모습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하시고, 세상이 아닌 하나님만을 두려워 떨 줄 아는 영적인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에스라는 하나님의 성전 앞에서 엎드려 있었습니다(1). 기운이 빠져 설 힘이 없을 때 에스라는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디에서 엎드러 힘을 구하고 있습니까?
2. 스가냐는 지쳐 쓰러진 에스라를 도우며 소망이 있다고 말해줍니다(2-4). 신앙생활 속에서 공동체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나에게 소망을 발견케 하는 신앙의 동역자가 있습니까? 구역이 있습니까? 또한 나는 그들에게 어떠한 존재입니까?
3. 에스라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사로잡혔던 자들에게 삼 일 내에 예루살렘으로 모여 회개하라 명합니다(7-8). 회개가 영원한 시간속에 주어지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4. 모든 백성은 하나님의 성전 앞에서 ‘큰 비’와 ‘이 일(이방 여인과 통혼한 일)’로 인해 두려워 떨었습니다(9-15). 소망을 발견한 자가 궁극적으로 떨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육체가 경험한 추위로 인한 떨림이었습니까?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인한 떨림이었습니까? 우리는 ‘큰 비’와 ‘이 일’ 사이에서 무엇 때문에 떨고 있습니까?
(작성:김대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