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国境の長いトンネルを抜けると雪国であった。夜の底が白くなった。信号所に汽車が止まった。)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문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오랜 세월에 걸쳐 회자되어온 명문장이라 하지만 뭐 내겐 딱히 그리 감동적이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인가? 하지만 그의 많은 소설을 관통하는 탐미적 기술(記述) 방식을 고려하면 마치 하나의 눈부신 그림이 눈 앞에 좌악 펼쳐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만큼은 애써 부정할 생각이 없다.
『설국』은 여느 소설들과는 달리 선과 악이 따로 없는 데다 극적인 로맨스나 반전(反轉)도 없는, 그야말로 무색 무취의 작품이라 한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의 성격이나 언행을 절제된 시각으로 간결하게 묘사하면서 인간사의 허무를 담백한 수채화적 기법으로 그려낸 수작이라 평해지고 있다는데...
주인공 시마무라(島村)는 물려받은 유산으로 생계 걱정이 없고 가끔 무용 관련 글을 쓰고 번역 작업이나 하는 한량으로 자식까지 둔 가장이다. 그는 겨우내내 눈 내리는 온천 지역에 살고 있는 고마코(駒子)라는 기생을 만나러 들르곤 한다. 뭐 둘 사이의 관계는 서로가 아주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시마무라는 그녀를 찾고 그녀 또한 함께 하는 동안 시마무라를 감싸주고 마음을 나눈다. 시마무라에게 설국은 처자식이 있는 현실을 떠나 전혀 새로운 세상을 사는 것이 되는데, 소설의 첫 문장은 바로 이러한 현실과 이상향의 경계를 구분 짓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가운데 시마무라는 고마코가 왜 게이샤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면서 그녀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한층 더 이해하고, 또 열차 속에서 환자 유키오를 보살피는 어린 요쿄(葉子)의 순수한 성정에 어쩔 수 없는 끌림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소설의 전편에 깔린 허무주의는 시마무라에게 어떤 깊은 사랑도 허용하지 않으니 그렇게 이야기는 종국을 향해 서서히 다가간다.
시마무라와 고마코가 차가운 밤거리를 함께 거닐면서 올려다 본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은 은하수를 묘사한 장면은 작가의 탐미적 묘사 기법의 백미라 할 것이다. 단지 은하수의 아름다움만 그리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속에 동화되어고 어우러져 가는 시마무라와 고마코의 모습 또한 한편의 파노라마라 할 것이다.
소설은 밤 늦은 시각 순회영화를 상영하는 고치공장의 화재로 요코가 죽는 데서 끝나지만, 그녀의 한 많은 죽음마저도 밤하늘을 수놓은 은하수와 함께 아름다운 환상의 세계처럼 그려지고 있으니, 어릴 적에 부모와 조부모, 그리고 누이까지 잃어 천애고아로 자랐던 작가가 보기에 죽음은 그저 인간이면 으레 거쳐 지나가야 할 통과의례 정도로 보였을지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