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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5장은 바로 사랑과 미움의 이야기입니다
고전13장은 이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이 왜 빛을 싫어하고 진리를 미워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미워할까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복을 받았으면 다른 사람에게 뭘 주겠습니까? 복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복밖에 없으니 축복하는 일 밖에 없을 겁니다.
다른 사람을 저주하고 정죄하는 사람은 가지고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죠.
내가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남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싸우는 것은 싸울 기질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싸울까요?
아니면 꼭 싸울 일이 생기기 때문에 싸우는 걸까요?
사실은 우리 속에 싸움의 기질이 있기 때문에 싸울 기회가 생기면 싸우는 겁니다.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생명이 없고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는 짓은 남을 미워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사랑이 없으니까요.
고린도교회는 세상에 치우친 교회로서
그 사랑이 없기 때문에 하는 일이 남을 정죄하는 것뿐입니다.
요15장의 말씀 속에 깊은 진리가 있다는 것을 안 것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우리가 요한복음 전체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기를 원합니다.
요한복음을 통해 우리의 심령에 분명한 신앙의 기준이 확립이 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쌓이면 그것은 하나님이 성공하신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요한복음은 육화된 우리 인간을 영화시키기 위한 말씀입니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음으로 범죄하고,
그로 말미암아 ‘아담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창3:19)하시므로
흙만 파먹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아담의 운명을 하나님께서 정해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땅에서 나서 땅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육화된 인간의 운명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모든 종교는 자기 스스로 하늘에 올라가려고 하지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롬3:23)입니다.
그런데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1:1) 하시던 그 말씀이신
이 분이 육신으로 오셨을 뿐 아니라 진리의 성령 곧 보혜사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 오셔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신다는 복음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시록 2장, 3장은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인데
‘귀 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분들이 성경을 법조문으로 된 책으로만 들을 줄 알지
성령이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모른다는데 심각함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께서 speaker로 말씀하시지만 본체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내심을 받은 사도요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음향기기가 몸체하고 speaker하고 같이 붙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잘 모르지만 실제로 엠프 따로 스피커 따로 있는 겁니다.
본체는 바로 하나님이시고 예수그리스도는 본체의 영광입니다.
주님이 본체의 형상으로서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도 성령님은 본체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은 성령을 통해 살아계시는 Living Word이고,
성경은 기록된 말씀 곧 Written Word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는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딤후3:16)으로
다시 말하면 살아 있는 말씀을 성경 속에 숨을 불어 넣듯이
후우하고 불어 넣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통해서 성령의 음성을 같이
들어야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되는 겁니다.
성경은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까지도 주님이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육화된 인간이 영적인 인간으로의 전환이
쉽지 않으므로 이 진리가 어렵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고방식이 변하지 않고 개념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행동이 변하지 않는 겁니다.
우리에게 요한복음이 어두우면 내가 성령 안에 있는 것,
그리고 성령 안에서 생명을 공급받고 성령으로 움직이는 것과
성령 안에서 나의 기도가 응답되는 것,
성령 안에서 중보하고, 성령 안에서 감사하고,
성령 안에서 전도하는 것이 뭔지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 의지대로 말하고 뇌의 기억력에 따라 성경말씀을 말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령께서 그가 말하는 것을 보증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이 임재하지 않으면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보면 반드시 두 증인이라야 법적 효력이 있습니다.
어떤 이단처럼 둘씩 짝을 지어 증인이 되었지만 성령님이 우리 속에서
내가 증거 하는 말씀을 보증해 준다면 나 혼자 있어도 두 증인이 됩니다.
성령과 나 둘이서 두 증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맞습니까?
밖으로는 예수님이 말씀하시지만 아버지가
그 안에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두 증인이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언제나 그 분의 말씀이 효력이 있었던 것처럼 성령님께서
내가 증거하는 성경의 말씀을 인정해 줄 때 두 증인으로 효력이 있어서
마귀의 참소가 벗겨지고 그 전도가 사람들에게 먹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곧 아들의 복음을 통해서 죽었던 사람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 말씀을 아무리 인용해도 그 사람에게
결정적인 능력으로 나타나질 않고, 거듭남이 안 되고 회개가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알고 있는 성경적 지식을 열심히 전하는데
자기 혼자 전하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그 전하는 말씀을 인정을 해 주지 않는 거죠.
그래서 보통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당신은 기도원 가서 기도를 하고 성령 받아야 해”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재판에 있어서 변호사가 열심히 육법전서에 의해 피고가 법에 저촉이
되지 않는다고 변호를 해서 검사의 입을 막아버리면 무죄입니다.
검사는 계속 고소합니다. 그런데 죄인들은 스스로 죄인을 변론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오시면 그분은 죄인을 위해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시기 때문에
능히 죄인을 변론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영이 내안에서 계시고 내가 성경말씀을
통해서 그 분과 함께 변론해야 마귀란 검사의 입이 막히는 겁니다.
그때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더 할 말 있어? 마귀가 '할 말 없습니다' 하면
‘그러면 피고는 무죄’하고 자유가 선포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전도입니다.
거기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도 이걸 터득하는 데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제가 강도사 때 이미 교인들이 백 명, 백 이십 명, 이렇게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주일 날 이렇게 몰려오는 사람들을 보면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꼭 어미가 아기에게 빈 젖을 빨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아이구 강도사님 은혜스러워요
말씀이 너무 좋아요 하면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주일을 지내고 목양실에 혼자 앉아 있으면 얼마나 답답했던지...
그때의 제 고민은 왜 우리 성도들에게
성경적인 복이 안 일어나느냐는 거였습니다.
저 성도들에게 왜 성경적인 감격이 없고, 성경적인 기쁨이 없고,
성경적인 감사와 회개와 상한 심령이 없느냐 이것이 그 당시 제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왜 제게는 그걸 안주십니까?
강도사 주제에 주일날 백 명, 백 이십 명 오고,
사례비 주고 도서비 주고 목회활동비 주는 것이 다 귀찮아졌습니다.
주님 이것 다 가져가셔도 좋으니까 제발 성경이
약속한 복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40일 금식을 감행했습니다.
그리스도, 십자가, 성령, 새 언약, 피, 등등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
구원에 관한 말씀, 부활에 관한 말씀 이런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 봤습니다.
그때부터 무슨 일을 하던지 저 혼자 승리하려고 하는 긴장에서
주여 해방시켜 주옵소서 하는 이 기도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친 다음 성령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므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를 할 때 그 자리에서 구원의 감격을 맛보며
하나님의 사랑이 과연 이렇습니까 하고 고백하며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는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니 강아무개 목사는 일본에서
일부러 비행기 삯을 들여서 부부가 함께 와서 어떻게 하면
그런 역사가 일어납니까 일본 사람들에게 나도 그런 역사를
좀 일으켜야 되겠는데 나도 좀 가르쳐 주세요 하고 부탁을 해서
3박 4일 동안 저하고 같이 지내면서 말씀을 나눈 적도 있습니다.
성도에게 이 땅에서 되고 있는 일은 천국에 그대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도 거기에 연결되어 있고,
우리의 예배도 연결되어 있고, 전도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타락하여 육화된 존재지만 그리스도의 속성은
그분과 같이 되도록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신학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공유적인 속성이 있고
비공유적인 속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공유적인 속성만은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확실하게 상속으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소원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이런 복을 받지 못하는가?
우리가 처음 신앙을 할 때는 거의 대부분 하나님이 표적을 보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이 어리면 어떤 사물이나 현실화
시켜주는 그 무엇을 얻으려고만 합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믿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표적을 주십니다.
그 표적을 보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걸 믿게 되고 그 다음부터는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것을 내게 사실화 시킬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표적신앙에 오래 동안 빠져버린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곧 약속된 그 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 약속이 내 안에
나타나서 생명의 역사를 느끼는 자각증세가 있는 것을 믿음의 실상화라고 합니다.
이런 웃지도 못할 이야기도 있지요.
어떤 목사님이 독일에 가서 이렇게 설교를 했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그러니 믿음으로 원하는 것을 마음속으로 그리십시오.”
그렇게 설교를 하고 와서 그 다음 해에 가서 보니까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 말씀 듣고 수지맞았어요.
저는 빨간 자동차를 타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목사님 말씀을 듣고 마음속에 빨간 자동차만 그리고 있었더니
하나님이 빨간 자동차를 주셨습니다. 바로 이 차입니다.” 하더랍니다.
히11장의 믿음은 그렇게 믿으라고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빨간 자동차를 원했습니까?
저 멀리서 오는 메시야를 바라보고 실상화 시켰을까요?
믿음의 선진들이 빨간 자동차를 원했습니까? 아니지요.
앞으로 오실 메시야를 믿음으로 바라보고
그 메시야를 만난 것처럼 실상화 된 믿음으로 본향으로 갔습니다.
그것이 바로 히11장이 하고 싶은 말씀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표적과 기사들로 인해 자신의 필요에 따른 그 무엇을
현실화 시키는 믿음을 갖고 있으니까 그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모르는 것입니다.
표적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서 불러내시는 단계인데,
잘못하면 많은 성도들이 거기에 너무 오래 동안 머물므로 어린 믿음을 가지고,
사물이나 육체의 소욕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지금의 기독교의 큰 문제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평안이나 삶의 안전이나 어떤 안락한 환경을 보상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찾아가서 얻는 것이
고작 그런 것들뿐이라면 그게 나의 수고의 보상이라면
나는 지금이라도 복음 전하는 일을 당장 그만 두겠습니다.
만약 내가 바라는 것이 이생뿐이라면 지금이라도
나는 선교하는 일을 그만 두고 차라리 돈을 열심히 벌겠습니다.
다윗의 신앙은 요즘의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같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잘 믿으니 위대한 왕이 되게 하셨다.
내가 하나님을 잘 믿으니 음악을 잘 하게 하셨다.
내가 하나님을 잘 믿으니 시를 잘 짓게 하셨다.
내가 하나님을 잘 믿으니 싸움을 잘하는 장수가 되게 하셨다”가
아니고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구원의 즐거움을 주셨다고 노래합니다.
그는 주를 노래할 수 있는 복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잔의 소득이시니
그가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시16:5)
다시 말하면 다윗이 가진 자산 총액이나
평생 얻는 소득은 오직 여호와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껄떡거림이 없답니다(시23:1)
시편 23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상징적 존재로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영혼도 소생시키는 분이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갈 때에
나는 너의 목자야 하고 말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위로 하십니다.
거기서 주님은 위로의 목자이십니다.
그리고 원수의 목전에서도 상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기름을 머리위에 부으시고 잔을 넘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평생에 반드시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지겹게 따르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성도가 여호와의 집이 되어서
하나님을 얻는 것이 인생의 종국적인 이득임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눈에 보이는 현실을 얻는 것,
그것을 믿음으로 얻는 것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런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런 것은 우리를 세상과 죄와 사망에서 불러내시고,
우리를 위로하시는 한 순간의 표적일 뿐 그것은 영원한 믿음의 증거가 아닙니다.
우리를 고난을 통해 세상에 나그네로 살게 하심은
제발 이제 눈에 보이는 것을 복으로 삼지 말고,
환난과 고난 가운데 내게 애써 부르짖어 봐라 세상에 있는 그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주어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찬양하고
나의 위대한 업적을 너희를 통해 나타내게 하려함이라는 주님의 뜻입니다.
그런 주님의 위대한 뜻이 우리들을 향하고 있음을 잊지 마세요.
모든 종교의 동일한 목적은 그 신앙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을 자기의 것으로 현실화 시키려는 노력입니다.
여기에 걸려들어 찌들어 타성이 붙으면 그 신앙은 참 어려워집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육신적인 필요에만 갖다 사용하려고 계속 노력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대다수의 설교가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그러나 요나의 표적은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던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요나로
바뀌었다는 사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질적인 변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지만, 나는 이들에게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마16:4)’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 하나님의 능력의 그 십자가의 도,
바로 십자가의 호 로고스, 십자가의 신기한 방법을 자신에게 적용할 때,
아프고 힘들고, 통곡과 눈물과 함께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몹시 괴롭지만
나의 자아와 욕심을 포기하고, 그 전에는 나의 능력과 나의 지혜로 살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통과한 후부터는 나의 능력과 나의 지혜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지혜가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의 지혜보다 낫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의 강함보다 낫습니다.
그래서 연약한 자를 부르셔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없는 자를 들어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것은 바로 요나의 표적,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표적이란 말입니다.
없는 자를 부르셔서 요나의 표적으로 뻥튀기 하여 부자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는 아담 안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쓸모없는 인간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대속의 은총에 실리니까
하나님의 쓸모가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어서 하나님의 업적을 드러내더란 말입니다.
비록 내가 약하지만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 저 부자보다
더 부자가 되게 하실 것이다 저 큰 자보다 더 크게 하실 것이다가 아닙니다.
누가 그 키를 한 자나 더 크게 하실 것이며
하루에 밥을 다섯 여섯 그릇 먹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대식가가 아닌 다음에 말입니다. 그게 아닙니다.
요나의 표적은 변화의 표적입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나온 요나는 다른 요나였습니다.
십자가의 표적은 소유의 복이 아니라 존재의 복으로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14장의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육화된 인간을 영화 시켜
요한복음 15장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맺는 가운데 얻는 복이 바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기 이전과 이후와 같은 패러다임이라는
그 점을 꼭 기억하시면서 이제부터는 요한복음 16장에
우리 한번 함께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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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최근에 글이 길어지고, 어렵습니다.
그렇치만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습니다.
듣다보면 "믿음의 실상"으로 성령님께서 인증하시고, 보증해 주실줄 또한 믿습니다.
아멘!
핳렐루야!
안녕하세요
궁금한 점이
있는데요
진리의 영이 오심이 곧 성령세례인가요?
참 좋은 질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안에 잠겨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그 영을 마시는 것이 성령세례입니다
(고전12:13)
성령은 그리스도와 연합이 실상(참)이 되게 하시므로 진리의 영이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면 생명의 성령이라고 말씀합니다(롬8:2)
@瑤翰 김요한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신앙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