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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아는 사람의 부탁으로 숙제를 잠시 대신해주느라 쓴 글입니다 이 책은 모두가 한번을 읽어보면 좋을듯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안 읽은 관계로 인해서 잠시 개인적인 생각을 적어본 것입니다. 많은 비판도 좋고 이글을 계기로 많은 생각도 하시길 바랍니다. 아마도 초벌로 막쓴글이라 문맥이 이상하거나 오타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과학 혁명의 종착점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고)
1. 들어가는 말
작금의 흐름을 한마디로 뭐라 표현을 하면서 시작을 할까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패러다임’이 아닌가 싶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회자되는 용어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그 용어의 정확한 기원도 알지 못하면서 아니 그 정확한 개념적인 의미도 무시한 채 너무 남발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한다. 개인적으로도 이 말은 매우 많이 사용하고 있고 요즘 시대의 트랜드 혹은 흐름이 어떠한가 하면 할 때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고 치부해 버린다.
과학이라고 하면 보통 생각할 때 매우 합리적이면서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과학은 다른 모든 학문에 비해서 덜 추상적이고 엄밀하여 과학적 기법을 다른 학문들이 많이 이용하는 경우도 볼 수 있고 이를 인문학에서 사용할 때 사회과학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한 좋은 기회가 생겼다. 바로 이 책을 읽고 그에 대한 주관적인 생각을 정리하면서 음미해 보는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사실 토마스 쿤이란 학자는 다른 유명한 학자들과는 달리 별다른 논문을 많이 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회적인 활동을 지나치게 많이 하는 사회 참여적인 인물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가 쓴 몇 권의 책 특히 「과학혁명의 구조」는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지금도 꼭 한 번 읽어볼 만한 고전 중의 고전으로 추천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볼 때 지나치게 양적인 성과물을 요구하는 현대의 급박함은 학문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할 뿐이고 깊이 있는 사고를 바탕으로 한 연구는 어려운 여건으로 흘러가지 않았나 한다. 이러한 시점에서 자연과학 아니 사회과학까지 포함하여 어떻게 학문이 발달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큰 획을 긋는 저자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은 많은 반성과 앞으로 공부를 하거나 사회현상을 바라볼 때 편견에 빠지지 않는 방법을 제공해 주는 것 같아서 매우 든든한 감이 들었다.
열린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열린 사회를 만들게 되고 결국에는 좀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본다. 패러다임에 대한 논쟁은 과거에도 있어왔지만 이처럼 커다란 반향을 불러온 유래가 없었기에 더욱 관심을 끌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글을 쓰면서 패러다임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아직 많은 화두는 던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깊은 성찰이 부족한지라 좀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좀더 관련된 많은 글들을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은 개인적으로 책을 읽고 나서 느낀 점들을 그나마 논리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패러다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정의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을 하려고 한다. 그리고 난 후 패러다임이란 것이 학문에 미친 영향을 생각해보고 이러한 광풍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 이어진 사회에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는가를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과연 패러다임이란 변화가 정태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동태적인 것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비교 분석을 해보는 것도 매우 의의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에 대한 다분히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해 보도록 한다. 또한 패러다임의 논쟁에 대해서 과연 이러한 논쟁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가를 고민해 보기로 한다.
2. 패러다임이란
1) 개념의 정리
먼저 쿤의 이론에서 패러다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패러다임에 대한 명확한 규정과 완벽한 일의적인 정의는 어렵다. 그것은 많은 여러 가지 기본적인 이론과 법칙, 그리고 개념들로 뒤범벅이 된 지식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과학도들은 실제로 문제를 풀면서 그 당시의 패러다임을 익히게 되니까 이러한 예제들도 그 하나의 요소가 될 수 있다. 기본 법칙을 적용하는 표준적인 방법, 법칙들과 자연현상을 연관시키는데 필요한 실험기술과 장치도 패러다임의 규성요소가 된다. 뿐만 아니라 정규적 연구의 방향을 제시하는 형이상학적인 원리들도 패러다임의 기본 요소를 이룸으로써 이론의 정확성, 간결성, 체계성 등을 중시하는 그 분야의 가치관, 과학자 사회의 공유된 관념, 관습까지도 하나의 패러다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원래의 패러다임은 사례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떤 요인으로부터 다양하면서도 일견 상호간의 무관한 듯한 사례가 나타나는 경우 그 관련된 계열이 모두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더 나아가서 다양한 관념을 상호간 연관시켜서 질서를 형성하는 시스템 내지 구조를 일컫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쿤의 주장한 개념에서는 보통 기본형, 표준형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기원은 언어학에서 차용한 개념인데 한 동사의 기본형에서 온갖 활용형이 파생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여러 가지 과학적인 인식과 모델이 생겨나게 된다. 따라서 과학적 인식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이론, 나아가서 과학자들의 공유된 가치관과 관습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 그 패러다임의 개념적인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패러다임은 쉽게 정의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과학도들은 명문화된 규정에서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교육 과정 속에서 은연중에 습득하는 것으로 본다. 교육과정에서 과학연구의 결과를 평가하는 그 분야 과학자 사회의 가치관에 대해서도 인식을 할 필요성이 있다. 따라서 그 사회의 패러다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자 사회에 대한 이해가 요구되며 쿤의 과학지식 이론에서는 과학자 사회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이 중요하다.
3) 패러다임 변화과정
쿤의 과학관은 과학과 역사를 접목하려는 시도를 보였다는 점이다. 쿤은 “역사를 일화나 연대기 이상의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본다면, 그 역사는 현재 우리가 가진 과학관에 결정적인 변혁을 가져다 줄 것이라”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실제 탐구 활동 자체의 역사적 기록에 근거한, 전면적인 새로운 과학의 개념을 찾는 것이다,”라고 본다. 그가 주장하는 과학 혁명 구조의 변화과정을 간단하게 살펴보는 것은 이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데 있어서 매우 기본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간단하게 언급을 하고자 한다.
① 전과학(pre-science):
이 단계는 패러다임이 등장하기 이전에 해당한다. 이 단계에서는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신념과 가치관, 기술을 망라하는 패러다임이라는 것에 대해서 하나의 보편적인 견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패러다임이나 잠재적인 패러다임도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는 어떤 과학의 발전에 관련되는 한에 있어서 모든 사실들이 동일하게 적절한 것으로 간주된다.
초기단계에서는 몇 가지의 특이한 자연관 사시의 계속적인 경쟁이 시작된다. 이들 여러 관점을 지닌 학파간의 대립이 발생하는 것은 어느 한쪽이 반드시 옳고 다른 쪽이 그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차이는 세계를 보는 관점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점차 한 개인에서 시작하여 그 설득력의 범위가 커질수록 그 이전의 견해들은 점차 관심의 대상에서 벗어나게 된다. 결국 공통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게 되면 그 패러다임이 생존을 하게 되고 오히려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면 전 과학의 단계는 종결되고 정상과학의 단계가 나타나게 된다.
② 정상과학(normal science):
어느 패러다임이 그 위치를 획득하게 되는 것은 전문가 집단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몇 개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다른 이론보다 우수하기
때문에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론보다 우수하다고 해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거나 하나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쿤에 의하면 정상과학은 “어떤 특정한 과학자 집단이 연구사업의 기초로 인정하고 있는 하나 혹은 그 이상의 과거의 과학적 업적에 확고한 기반을 둔 연구”이다. 즉 공통의 패러다임에 기반을 둔 정상과학의 연구자들은 과학연구에 있어서 동일한 원칙과 기준을 가지게 되고 이러한 것이 패러다임의 내에서 과학 활동을 하는
과정과 연구 활동의 정당성 여부를 결정하는 역학을 한다. 패러다임이란 용어는 쿤의 세계에서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이전에는 패러다임에는 과학에서 기본이 되는 이론과 법칙들, 기본적인 법칙을 다양한 상황에 적용하는 일반적인 방법, 도구적인 기술, 형이상학적인
원리와 이론의 선택과 평가, 비판과 관련된 원리 등이 모두 포함되었다. 그래서 쿤이 사용한 패러다임이라는 용어가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애매한 성격이 있다는 비판을 많이 받아왔다.
정산과학에 흡수되어 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속해서 활동하는
패러다임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서는 안 된다.그래야 그 패러다임의 입장에서 세밀하게 자연을 연구하는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정산과학은 보수적이며 성공한 논리를 확장하고 기존의 체계
안에서 존재하는 문제들을 제거하기 위해 힘을 쓸 뿐이다. 만일 패러다임이 일치하지 않는 연구결과들은 과학자들이 실수를 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경우에도 이론에서
잘못을 찾기보다는 과학자에게서 잘못을 찾는다. 이러한 과정이 점차
시간이 감에 따라 누적적으로 작용을 하게 되어 정상과학이 성장하는
모습은 누적적인 형태를 지니게 된다.
③ 위기(crisis)
정상과학에서는 이론이나 사실에 있어서 새로운 것의 발견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새로운 미지의 현상은 계속해서 발견되고 혁신적인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패러다임의 기본적인 이론과 모순이 되는 변칙적인 돌연변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를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으면 인정할 수 있게 된 요소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결국 이러한 돌연변이가
기존의 정산과학으로서의 패러다임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경우에
이르게 되면 혼동의 위기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돌연변이가 등장하게 되면 과학자들은 과거의 패러다임에 대한 신뢰가 줄어들어 그에 대한 대안을 생각하기 시작하지만 자신들을
위기에 처하게 만든 패러다임을 공식적으로 부정하는 단계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대안적인 패러다임을 수용하지 않고 하나의 패러다임을
버리는 일은 기존에 자신들이 신봉하는 과학 자체를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쿤은 “일단 과학이론이 패러다임의 지위를 얻으면 그 이론에 대치될 다른 후보이론이 나타날 때에만 무용하다고 선언된다.”라고 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위기를 어떻게 해쳐나가야 할 것인가? 쿤은 과학자들이 이러한 위기를 해쳐나가는 모습을 세 가지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먼저 위기를 초래한 문제가 정상과학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이 되는 경우, 둘째는 돌연변이가 현재의 발전 상태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이 되어 다음 세대에 위기가 끝나는 경우, 셋째는 새로운 후보 패러다임이 출현하여 과학자들에게 수용이 되면 과학혁명이 일어나게 되고 새로운 정상과학이 전개되는 경우로 나누었다. 물론 이러한 과학자들의 대처에 대한 모습에서 다양한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④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
이러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 패러다임을 과학자들이 수용하면 과학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과학혁명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이를 말한다. 그러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이는 낡은 패러다임을 정비하거나 확장함으로써 얻어지는 누적적인 과정이 아니라 패러다임의 일부까지도 변화시키는 하나의 재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이가 완료되면 그 분야에 관한 관점과 방법, 목표 등이 변화하게 된다. “과학혁명은 낡은 패러다임이 전적으로 아니면 부분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서 대치되는 비누적적인 방법에 따른 발전과정이다.”라고 쿤은 역사적인 사례로 코페르니쿠스, 뉴튼, 라보아제, 아인슈타인 등의 이론을 제시하면서 예를 들고 있다. 쿤은 산소의 발견을 그 예로 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라부아지에는 산소를 발견함에 있어서 그 때까지의 연소개념은 총체적으로 전복하고 새 패러다임을 열었다. 과학 혁명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정상과학에서 누적된 성과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과학혁명은 정상과학을 연장하는 선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불연속적으로 , 비약적으로 , 단절적인 발생을 하게 된다. 이때의 기존의 것은 철저하게 부정되고 단절된다. 어찌 보면 인간의 역사와 개인적인 삶도 정상적인 안정의 시기와 압축적인 비약의 시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비약의 시기에는 그 전까지의 정상적인 발전과정이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순식간에 바뀌게 된다.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은 “혁명의 와중에서 보내는 20일은 평상시의 20년과 맞먹는다.”라고 했다. 그 정도로 혁명의 시기는 많은 것을 바꾸는 단계로 그 충격이 매우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2) 패러다임 전환의 의의
쿤의 과학관은 근본적으로 과학이라는 학문의 발전과정이 점진적이고 진보적인 측면의 축적이라는 관점에서 탈피하여 혁명에 가깝다는 점을 제시하여 기존의 귀납주의적인 접근법에 대한 도전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그의 발전 모델에 의하면 과학 혁명이란 하나의 패러다임이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교체되는 과정 속에서 비축적적인 결과물이라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토마스 쿤이 말한 과학자들의 접근방법은 끊임없이 그들의 전제를 비판하고 반증하는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은 확실하다고 믿고 그 믿음의 전제하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일에 전념하게 되면서 정상적인 과학 활동이 성립된다. 이러한 공통의 패러다임에 근거하여 퍼들을 푸는 방식이 바로 정상적인 상태에서 과학 활동이라고 본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비록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곧 바로 그 패러다임이 반증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패러다임은 계속 유지되고 오히려 그러한 상황을 예외적이고 변칙적인 경우로 몰아 부치게 된다. 그러다가 점차 이러한 변칙성이 증가하게 되면 기존의 패러다임은 위기에 봉착하게 되고 일부의 새로운 선각자가 희생을 감수하면서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잠시 동안 양 패러다임 간의 경쟁이 시작되고 그 경제에서는 한계를 많이 드러내게 된 기존의 패러다임은 불리한 위치에 처하게 된다. 결국 새로운 패러다임이 승리를 하고 다시 정상과학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이를 간단히 표현하면 구 패러다임의 존재→ 위기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 → 경쟁 →새로운 패러다임 →새로운 정상과학과 같이 과정을 밟아간다.
이와 같이 쿤의 과학혁명이 구조에 대한 이론이 과학관에 혁명적이었던 것은 이러한 구조에 있어서 몇 가지 설명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쿤은 패러다임은 연구를 함에 있어서 하나의 방향과 지표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고 본다. 그와 동시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세계관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관찰을 통한 방식은 동일한 것을 다르게 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바로 패러다임이 다르면 언어의 의미도 달라지기 때문에 두 패러다임은 동일한 잣대로 비교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쿤의 이론에 입각해 보면 과학이라는 학문은 주관성을 배제한 객관성이 매우 중요한데 이러한 객관성이 부정되면서 오히려 상대적인 측면의 시각이 존재하는 것이다. 오히려 두 패러다임이 존재할 때 경험적인 관찰에 의해서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 집단의 주관적인 신념에 의해서 결정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하는 것은 마치 종교의 개종과 같이 심리적인 요인이 많이 작용한다고 하여 어느 측면으로 보면 과학의 합리성마저 부정하는 결과가 된다.
3. 패러다임이 학문에 미친 영향
1) 자연과학에 끼친 영향
과학의 발전은 보통 점진적으로 나아간다고 할 수 있겠다. 이는 일개의 한 개인에 불과한 힘은 역사의 거대한 물결에 대한 겸손한 마음을 가지게 되고 뉴튼이 말한 바와 같이 자신의 위치는 거대한 모래사장의 하나의 모래 한 알과 같다고 한 것과 일치한다. 따라서 과학에서의 새로운 발견은 결점을 고쳐주고 지식을 더욱 완전하게 하며. 진리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결국 과학사를 되돌아보면 거기서의 발전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생각은 바로 그릇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쿤의 사상이다. 그에 의하면 과학의 발전은 새로운 진리로 나아가기 위한 점진적이며 시행착오적인 과정이 아니라 ‘패러다임의 이동’으로 표현되는 일련의 혁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패러다임이란 무엇이 중요한 문제들이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에 대해서 과학계가 공통으로 인식하고 있는 일련의 가정과 방법, 관련된 문제들을 말한다. 이에 쿤의 연구에 의하면 패러다임은 완고하다는 것이고 다른 패러다임이 대체하는 과정은 점진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 아니고 바로 급작스럽게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의 발전은 유기적인 성장보다는 급격한 전환들을 통해서 일어나게 된다.
정상과학의 대부분은 과학자가 자신의 시간을 다 바쳐서 매진하는 활동을 통째로 의미하는데 이것은 기본적인 가정이 세상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있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바탕을 기본으로 하는 정상과학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꺼려하게 된다. 이러한 정상과학은 어느 순간에는 기존의 알려진 규칙과 과정에 의해서 예상한 대로 들어맞지 않게 되는 때에 예측이 빗나가게 되는 일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서 새로운 전제하에서 일련의 연구가 다시 시작되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의 시작은 매우 미약하게 마련이다. 결국은 전문적인 전체의 변동이 발생하게 되는데 바로 이때를 과학 혁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과학 혁명은 정상과학에서의 전통에 얽매인 활동에 붙여진 전통을 깨뜨리는 보완적인 작용을 한다.
2) 사회과학에 끼친 영향
사회과학도 하나의 과학에 속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과학과 맥락을 같이 하면서 보면 된다. 단지 자연과학과는 다른 차이점이 자연과학은 실험을 통해서 통제된 변수들을 조정하여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사회과학이란 것은 인간들이 이루어 구성되어진 사회라는 것을 포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단지 이러한 분석의 기법에서 과학이라는 수단을 도입하여 분석하게 된다. 이러한 통계와 계량적인 접근법은 귀납적인 접근을 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 자체가 결국은 과학이라는 방법론 속에서 자연과학과 일맥상통하게 된다. 자연과학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은 기존의 통설에 무조건 저항하는 과정 속에서 우연히 발생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천동설에 무조건적인 반대 아닌 반대를 하다가 코끼리가 뒷걸음질 하다가 커다란 발견을 한 것과 유사하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연구를 하고 있고 그러다 보면 새로운 성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다른 접근법을 시도하게 되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유연히 발견된 것이고 그 결과는 바로 단절적인 과학의 혁명의
과정이 되는 것이다. 사회과학도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사회과학인
경제학을 예를 들면 기존에는 접근법이 사람들의 경제적인 행동에 대한 인식론적인 연역적 접근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논리적인 근거와 실증적인 증거가 불충분하게 되었다. 그러나
통계와 계량적인 기법이 발전하고 컴퓨터의 등장으로 좀더 세련된 실증분석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서 사회과학은 경험적이고
관찰적인 방법을 사용하게 되었고 많은 연구들이 성과물로 이어졌다.
더군다나 사회과학은 예측할 수 어려운 인간의 행동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기존의 예측과 분석이 개별적인 경제주체들의 행동이 서로
융합을 이루어 나중에 경제전체적으로는 어떠한 파급효과를 가져오게 될지에 대한 분석이 어렵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는 오히려 단순화를 위해서 실시한 가정을 새로이 바꿈으로 인해서 다른 접근을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보다 사회과학은 과학 혁명의 역사가 많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생활 속에서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쉽게 파악되는 것은 아니다.
3) 종교학에 끼친 영향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그 과정 속에서 가장 근본적인 인과관계에 속하는 원인을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미미하지만 많은 내재적인 요소에 의해서 이루어진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정상과학을 유지하고 다시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보이지 않는 힘의 존재 즉 절대자의 존재를 깨닫는 것도 한 측면으로 보면 과학이라고 할 수 없겠지만 비과학적인 과학이 될 수밖에 없다. 바로 인간의 한계가 제약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고 그로 인한 문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없이 완전한 해결은 보는 것은 아니고 새로운 한계에 직면하는 결과 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보면 인간의 한계라는 것이 진리의 극히 일부분에 해당하는 것을 다른 진리로 포장하는 고정에 지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극해 개인적인 생각이었지만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과 관련하여 최근에는 진화론과 창조론이 서로 다투는 경우를 볼 수 있었다.
쿤의 패러다임과 관련한 비판 중에 오용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은 패러다임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라는 것에 있다고 보인다. 과학을 포함하여 현실 속에서는 인과관계를 검정할 수 없는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조론과 진화론이 경합하는 것이라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색이 붉다고 하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표현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관적인 표현은 옷의 디자인에게 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의 사실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붉은 색이나 푸른색이라는 것은 확실히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의식이나 혹은 특정한 조건하에서 인식하여 획득한 주관 속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붉은 색과 푸른색은 구별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색을 하나의 열정을 상징할 때는 붉은 색이 타당하고 시원함을 의미하는 것은 푸른색이 더 타당하다는 공감을 하고 있다. 이러한 관념이 내재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경험과 같은 신념에 매우 좌우된다. 결국 사견으로는 진화론과 창조론을 바라보는 시각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양자간의 확실한 과학적인 증거가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에서 단지 종교적인 신념과 과학자적인 신념 사이에서 충돌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과학이란 것도 사실 연구하는 사람의 신념에 많이 좌우된다는 쿤의 패러다임에 입각해 볼 때 진정 과학이란 것도 또 다른 하나의 종교라는 생각이 들게 되고 그러한 시각에서 보면 과학이란 것이 모든 자연 현상과 초자연 현상까지 아우르는 설명을 제시해 줄 수 없기 때문에 결국에는 정답을 잘 모는 상황에서 서로 자신의 주장을 우기는 결과로까지 이러질 수 있는 것이다. 사견으로는 이러한 논쟁은 인간의 제한된 한계와 근시안적인 행동에 입각해 볼 때 해결이 불가능 하며 결국은 어느 쪽에 인간의 신념이 많이 관심을 가지게 되는가에 의존한다는 생각이 든다.
4. 패러다임 광풍의 등장
1) 인간의 사고에 미친 영향
쿤의 이러한 생각은 인간의 사고 즉 철학적인 측면에서 먼저 큰 파장을 불러왔다. 그의 이론이 발표되었을 때 당시에는 논리실증주의나 분석적 과학철학에 대한 문제점들의 해결이 시도되고 있었는데 그러한 움직임 속에서 종래의 정적인 측면과 비역사적인 고찰에서 시작하는 접근법에서 탈피하여 이론의 발견과 변천 그리고 수용에 대한 동태적이고 실증적인 경험적인 바탕을 중시 여기게 되었다.
2) 인간의 행동에 미친 영향
개인적인 생각으로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이유는 쿤이 말한 경우와 달리 사회과학에서는 연구의 대상이 인간이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자연과학과는 달리 인간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조직과 제도 법을 만들어 그 속에서 행동이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사회과학에서 연구하는 방법은 당연히 인간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 시간을 거슬러 옮겨가면서 과연 이러한 행동을 하게 되는 이유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인 배경에 초점을 두어 분석을 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행동이 갑자기 크게 변화하게 되는 경우에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인간의 행동의 변화를 야기하는 것은 사회가 변화하는 경우 가장 크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는 물론 경제적인 측면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이 있어 역사적으로는 산업혁명을 그 예로 들 수 있고 최근에는 컴퓨터를 기반으로 한 인터넷의 활성화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외생적인 충격이 가해지면 기존의 설명 방식으로는 인간의 행동을 설명할 수 없게 되고 당연히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분석의 대상이 자연과학과 같이 인간이 신에 비해서 너무 무지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사회과학과 같은 분야에서는 인간의 행동을 중심으로 한 사회라는 것이 매우 다변화되어 있고 그 예측이 불규칙하다는 기본적인 바탕에 기인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대한 추가적인 생각은 과연 패러다임의 변화 혹은 이동이 동태적인지 정태적인지의 문제에서 좀더 논의를 해보고자 한다.
3) 관점의 차이에 따른 의미
패러다임은 어느 입장에서 바라보는가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하면 서구인들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였다는 그들의 세계관을 신뢰하였겠지만 아메리칸 인디언의 입장에서는 침략자에 불과할 뿐이다. 이와 같이 어느 관점에서 바라보는가 다시 말해서 어느 패러다임의 위치에서 바라보는가의 문제에 따라서 하나의 현상과 진리에 대해서 다른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패러다임이란 것은 어떤 정해진 틀이라기 보나는 코끼리를 장님이 만지듯이 어떤 형태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어떤 일부만 보고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서 패러다임이 말하는 현상 아니 정확하게는 사실은 정해져 있고 변화가 없는 것이라고 할 때 오로지 변화하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의 어느 부위를 만지는가와 관련한 것과 같이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동일한 것을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는 위에서 잠깐 언급할 인간의 태생적인 한계와 더불어 참 진리에 대한 접근에서 논의를 하겠지만 신이 장초한 진리는 분명 존재하고 영원불변의 것이 존재할지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급기야는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본다.
5. 패러다임의 동태적인 변화
1) 정태적 분석과 동태적 분석
패러다임이 전환된다는 사실에는 모두가 동의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의 과정은 정태적인 것인가 아니면 동태적인 것일까? 이와 관련한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만일 이러한 패러다임의 동태적인지 정태적인지의 여부에 따라서 패러다임의 존재의의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생각한다. 원래 패러다임이 동태적인 발전과정을 거치게 됨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것을 발견하고 따라가지 못하는 한계 속에서 정태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에는 현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오히려 패러다임을 논하면서 그 잣대로 많은 것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될 수 있다. 너무 추상적으로 말을 한 것 같은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러한 패러다임이 동태적이면 어느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사상이나 변화의 흐름을 빨리 습득을 하게 될 것이고 정태적이라고 하면 그 변화의 정도가 점차 사회에 확산되고 나중에 더 이상 그 변화의 흐름이 대세화가 된 경우에 그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구분은 패러다임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존재의 문제를 가져다주지 않지만 개인적인 생각에는 사회마다 국가마다 조직마다 혹은 학문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을 수용하는 시간적인 갭이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경우에는 패러다임을 접근하는데 있어서 정태적인 경우라기보다는 동태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보다 신축적이고 변화가능성이 많게 되고 결국에는 모든 면에서 발전의 속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생각한다.
2) 패러다임의 최종점 (패러다임의 전환기를 예측이 가능한가?)
패러다임의 최종적인 수렴점을 알 수 있을까? 앞서 패러다임이 동태적인지 정태적인지에 대해서 간단하게 언급을 했는데 만일 비교정태적인 경우라도 그 본질은 동태적임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로 인해서 정태적인 경우로 본다면 결국 우리의 관심사는 동태적인 시각에 초점을 두게 된다. 동태적이라는 말은 시간에 따라서 변화를 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변화를 우리가 발견할 수 있다면 어떤 패러다임의 변화해 가는 과정을 추정해 낼 수 있고 그러한 변화의 과정을 추정해 봄으로써 새로운 패러다임이 언제 등장하게 되는가를 예측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게 된다면 기존에는 알 수 없었던 아니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기를 전혀 알 수 없다고 생각을 했던 시각을 뒤집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정확히 말하면 이전에 학자들이 패러다임의 전화시기를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데 대해서 어떠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고 지금은 어떻게 생각을 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작업은 과거 100년 전에 달나라에 토끼가 사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선입관에 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만일 인류가 달나라에 발자국을 찍은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 시기를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은 결국 많은 분야에서 혁신적인 학문적 발전을 이룰 수 있고 결국은 사회 경제적인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 시기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견해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는 그 자체가 아마도 현재 지배권을 가지고 있는 현재의 정상과학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경우에 언제 이러한 패러다임이 바뀔지 예상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겠다. 결론적으로 이 절에서 하고 싶은 것은 과연 패러다임의 전환기를 미리 예상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고 만일 그렇다면 그에 대한 면밀한 고찰은 많은 측면에서 함의를 가져다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6. 패러다임 논쟁이 가져다 준 교훈
쿤의 패러다임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것은 간다하게 언급하면 인간의
발전과정에 대해서부터 인식의 전환의 필요성과 역지사지의 사상에
대한 교훈을 준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과학기술을 비롯한 사회적 정치적인 측면의 변혁은 점진적인 과정을 거치다가 어느 한계에 부딪히게 되면 결국에는 한 단계 점프를 하게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것은
경제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서 어느 한 국가의 경제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점진적인 성장을 이루게 되지만 점차 맬더스가 말한 한계생산
체감의 법칙이 작용하여 급기야는 성장이 멈추고 오히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인구의 폭발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어 세상은 멸망의
길로 들어선다는 비관적인 경제 성장론을 제기한 것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예상이 빗나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기술 개발이라는 공급 측면의 충격이 작용하여 결국에는 인구 증가율을 상회하는 성장을
거둘 수 있게 되었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어느 한 패러다임이 일정기간의 경제성장의 한 패턴이라고 보면 패러다임의 전환은
기존의 생산 시스템에서 전환이 되어 결국에는 새로운 생산함수의 형태를 지니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패러다임과 관련해서는 경제학 뿐과 아니라 정치학 사회학과 같은 사회 과학 뿐만 아니라 철학과 같은 인식론의 측면에서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는 인간이 행동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으며 기존의 인류의 발전과정에서 가속도를 붙이는 새로운 계기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7. 패러다임의 한계
패러다임의 가장 큰 한계로 지적되는 것은 만약에 경쟁적인 두 패러다임이 있는 경우 기준도 물론 서로 다르게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두 패러다임에 대한 평가가 정확하게 될 수 없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쿤은 게슈탈트 전환(gestalt switch) 혹은 종교의 개종(conversion)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쿤은 과학혁명을 정치 혁명에 비유하면서 정치혁명의 목적은 기존의 제도를 파괴하는 방법을 통해서 정치적 제도를 개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에 의존하는 것이 불가능한 생활양식 사이의 선택은 과학자가 이론 체계의 간결성과 사회적인 욕구인 필요성, 문제의 해결 능력 등의 구성요소에 어떠한 방법적인 수단을 선택할지에 대한 우선순위에서 가중치를 부여할 것인가에 대한 것은 전적으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이유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또한 패러다임의 개념적인 의미가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애매하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언어학자인 매스터먼에 의하면 패러다임의 의미가 자그마치 스물두 가지로 사용되었을 만큼 모호하다는 비판이 있다. 그로인해 쿤은 후에 이를 보완하고 다듬었지만 그 개념적인 정의의 불명확성에도 불구하고 이미 사회적으로 매우 친숙하게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 결과로 사후에 보다 협의의 개념적인 정의를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8. 최종적인 패러다임은?
쿤의 새로운 과학관은 많은 지지자들을 확보했지만 한편으로는 비판도 만만치 않게 많이 받았다. 일부에서는 과학을 완전히 과학자 집단의 사회학으로 환원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서 중용을 지키면서 두 과학관 사이의 절충을 시도하는 경향이 가장 우세하게 되었다. 바로 과학을 연구 프로그램의 과정으로 보는 라카토스의 이론이나 과학을 문제해결의 작업으로 이해하려는 로던의 이론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절충적인 입장들이 제시되어 두 가지의 과학관은 오히려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일부를 수용하면서 변천해 간다고 하는 생각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과학 철학계서는 두 입장에 대해서 상반적인 시각이 우세하다.
쿤의 패러다임은 어떤 하나의 절대 불변의 진리는 없다는 것이라고
한마디로 집약할 수 있다. 신이 창조한 우주는 신의 뜻에 상응하는 만큼 절대적인 법칙에 의해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신봉한 사람이 바로 뉴튼이다. 그의 절대역학의 이면에는 상반된 의미로 신의 모든 절대적인 법칙을 인간의 능력이 점차 발전함에 따라서 수학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풀 수 있다는 자신감과 교만함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혹은 전면적인 수정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현재의 패러다임은 이들 새로운 이론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이론은 최근에 등장한 카오스 이론과 복잡계 이론에
대한 강한 도전을 받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진리 탐구의 노력은 과거의 신에 대한 바벨탑 쌓기와 같은 눈물겨운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바벨탑의 붕괴로 인간은 그 한계를 절감한 것과 마찬가지로 아마도 진리에 대한 탐구는 어쩌면 인간의 원천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도전과 응전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진리에 이르는 길은 매우 멀고 험하기 때문에 인간을 불쌍하게 생각한 신은 근본적으로 태생적인 한계를 직시하지 못하는 인간에 대해서 가장 쉬운 길을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인간의 도전의 노력은 그 자체로 매우 의미 깊은 일이고 그로 인해 세상은 많은 발전을 했다. 하지만 진정한 진리는 바로 옆에 있는 것이고 지금까지의 인간의 눈물겨운 노력은 바로 신의 진리에서 떨어져 주위를 계속 맴도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참 진리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에 순응하는 것이라는 가장 혁명적이지 않은 것 같지만 혁명적인 주장을 해본다.
첫댓글 읽으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