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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14:20~24(218) ‘그들과 다른 갈렙의 마음’ 2024. 10. 13
시카코 대화재라는 미국역사상 끔찍한 참사가 있었습니다. 시카코 대화재는 1871년에 미국 시카고에서 일어난 화재로써 19세기 최악의 피해를 끼친 재해 중 하나로 손꼽는 화재입니다. 이 화재는 시카고 구시자기 전부를 몽땅 전소시키고, 10만 명을 이재민으로 만들었으며, 300명의 생명을 앗아가고 나서야 사그라 들었습니다.
이 화재로 인하여 무디 목사님이 시카고에서 목회를 하던 교회도 불에 탔습니다. 목사님이 교회 화재 현장에 서 있을 때, 사람들이 목사님에게 말합니다. ‘왜 교회가 불에 탑니까? 다른 곳은 타도 교회는 타지 말아야 하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교회에 대하여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을 합니다.
그때 무디 목사님은‘우리 교회가 너무 낡아 있었는데 아마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세워주시려고 낡은 교회를 돈 안들이고 깨끗하게 치워주신 모양입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더 비웃으며 말합니다. ‘많은 교인들도 피해를 입었고, 교회의 재산도 다 타버렸는데 어떻게 다시 교회가 세워진단 말인가? 말도 되지 않는다’고 힐난합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없지만, 샘처럼 끊임없이 솟아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이 내게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몇 달 후에 무디 목사님은 영국에 부흥 집회를 갑니다. 부흥회 때 교회의 사정을 들은 영국 교인들이 마음에 감동을 받아 건축 헌금이 영국에서부터 모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의 집회로 헌금이 모아져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전을 짓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불신앙의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가끔 넥타이를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색깔도 같고 모양도 비슷한데 값이 몇 곱절 다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넥타이의 질이 다르기 때문이고, 어떤 회사에서 만들었는지 이름의 품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어려운 일에 부딪히니까, 괴로운 일에 부딪히니까 후퇴하는 모습을 가진다면 불신앙의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신앙을 가지고 환경을 공략하지 못한다면, 장애를 뛰어넘지 못한다면 그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신앙인의 불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신앙인이 가지고 있는 불신앙이라니요. 굉장히 이율배반적인 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이율배반적인 말이 현대 교인들에게 아주 많이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는 고백하지만,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행동의 모습에서는 부족한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이런 분들이 바로 신앙인으로 불신앙의 모습을 보이는 분들입니다.
24절에서 하나님은 “오직 내 종 갈렙은 그들과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 민족이라는 민족성이 같았고, 에굽을 탈출하고 난 뒤에 광야를 여행하면서 가나안으로 가고자 하는 목적이 같은 사람들이 지금 모여 있습니다. 이들의 숫자는 적게 잡아도 백여만명이라는 매우 많은 숫자입니다. 같은 말을 사용하고 같은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모든 것이 같아 보이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갈렙을 비교해 보니 갈렙에게서 다른 것이 있음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직 내 종 갈렙은 그들과 다르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조그마한 일에도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는 불평의 사람들이었고, 자신들을 이끌어 내어 인도하시는 하나님에게 반항하는 모습을 주저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갈렙은 이들과 생각이 달랐고, 행동이 달랐고,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믿음의 모습에서 달랐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 생활을 청산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 갈 때에 20세 이상의 불순종의 댓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형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20세 이상으로 유일하게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자격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갈렙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일반 이스라엘 백성들과 무엇이 다르다고 하나님이 판단하신 것일까요? 아울러 우리 또한 어떠한 모습이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할까요?
1. 마음이 달라야 합니다
24절,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성경은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라고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일반 백성들의 마음과 갈렙의 마음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마음이 다르다는 말은 생각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니 표현되는 행동이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부가 한 집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지만, 서로 마음이 다르다면 이들 부부가 살아가는 인생이 고달프고 힘든 모습이 자명합니다. 아무리 좋고 비싼 침대에서 안락하고 편안함을 누린다고 하더라도, 한 이불 덮고 생활하는 부부의 마음이 다른 것은 심각하게 이들 부부를 깨뜨릴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방 한칸 조촐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부부라고 하더라도, 이들 부부가 서로의 마음이 맞고 마음이 합하여 한 방향으로 일심단결하여 나아가는 모습이 보인다면, 이들 부부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맞다는 말은 생각이 같고 나아가고자 하는 목적이 같고, 희망하는 것이 함께 일치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생각과 여러분의 생각이 언제나 맞아 일치되기를 소망합니다.
본 절에서 ‘갈렙의 마음’이라 표현된 단어는‘갈렙의 영혼(spirit, 히 루아흐)’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갈렙의 영이 일반 이스라엘 백성들과 달랐다고 말합니다. 갈렙은 속사람의 영이 달랐기에, 10명의 정탐꾼과 이스라엘백성들이 믿음 없는 선택할 때에도 담대하게 하나님 편에 설 수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나안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할 때에도 갈렙과 여호수아만은 긍정적으로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은 많이 배운 학식과 머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아 분별하고 섬기는 것은 순종하는 마음인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이 잘못되면 세상의 모든 것을 잃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까지도 잃어버립니다.
한세대 이전, 막고 사는 것이 고달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모두가 가난했던 그 시절에는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만을 열심히 찾았고 바랐습니다. 그래서 신유의 역사가 많이 일어났고, 교회가 부흥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먹고 사는 고달픔에서 벗어나게 되고 편안함과 안락함에 젖어들기 시작하면서 하나둘씩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바닥에서 예배를 드리던 교회당에 장의자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불편하게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되고 너무나 편안합니다. 의자에 앉으면서 예배 도중 다리를 꼬는 것은 다반사였습니다.
육신의 몸이 편해지자 기도는 약해졌고, 심령이 잘못되어져 갔으며, 교회의 자리가 비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던 우리의 영이 조금씩 달라지면서 신앙생활과 교회생활 또한 서서히 무너져 갔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우산장수와 짚신장수를 아들로 가진 어머니 이야기 아시지요. 이 어머니는 비가 오면 짚신장사 아들의 장사를 걱정하고, 또 반대로 날씨가 좋을 땐 우산장수 아들의 우산이 안 팔릴 것을 염려합니다. 그러니 이 어머니는 하루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어머니는 그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비가 오면 우산이 잘 팔리겠다고 생각하며 좋아하고, 날씨가 좋으면 짚신이 잘 팔리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비오는 날은 우산 팔려서 행복하고 맑은 날은 짚신 팔려서 행복하게 됩니다.
무슨 내용인가요?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니 걱정이 사라지고 행복해졌다는 말입니다.
괴테가 “행복한 마음으로 살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사실 환경과 여건이 행복과 불행을 나누는 기준이 되기도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지는 내 마음의 행복이 내 인생의 행복한 모습을 결정한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덕민교회 모든 성도님들 역시 갈렙처럼 세상 사람들이 가진 마음과 다르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는 마음을 가지시길 축원 드립니다.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는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이런 마음이 올바른 신앙의 행동으로 나타나는 성도가 되도록 노력 합시다.
2. 말이 달라져야 합니다.
20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 말씀이 나오는 계기가 있습니다. 20절 앞 절에 보면 모세가 백성들의 불순종하고 악한 죄를 하나님에게 기도하면서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19절,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 같이 사하시옵소서.”
모세는 하나님에게 주의 광대한 인자하심으로이 백성들의 모든 죄악을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간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내가 네 말대로(네 기도대로) 사하노라’고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모세를 돌을 들어 치려고 했던 완악한 백성들입니다.모세가 자신들을 에굽의 노예에서 구해 준 민족의 영웅인 것을 싸그리 잊어 버리고 모세에게 원망하며 삿대질 하면서 달려들었던 사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 아니라, 이 백성들의 사악한 모습 때문에 하나님께서 벌을 내려 싸그리 처벌해 달라고 말했어야 하는 모세였습니다. 저 같았으면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백성을 원망하지도 않았고, 백성을 비난하지도 않은체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에게 간청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런 모세의 사랑의 말과 행동이 모세가 위대한 지도자인 것을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요즈음 아이들의 언어를 보면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험한 말과 욕을 예사롭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름답고 선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사랑을 전하는 따뜻한 말이 많이 있는데도, 살벌하기 그지 없는 말을 정제되지 않은 체 마구잡이로 내뱉는 것을 봅이다.
우리 예수 믿는 성도들은 입에 담기 추한 말, 상스러운 말, 떠올리기도 민망한 그런 성적인 말들은 아예 입에 올리지 말아야 합니다. 모세처럼 비난과 저주의 말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의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말이 달라질 때, 나의 변화된 말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온유하고 인자한 모습을 깨닫게 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픈 환자를 치료하는 곳의 입구에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개에 물려 다친 사람은 반나절 만에 치료를 마치고 돌아갔습니다. 독사에 물려 크게 다친 사람도 일주일 만에 치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말(言)에 다친 사람은 아직도 입원 중입니다.’
참 무서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제 마음과 기억에 가장 남아 있는 모든 것들이 말에 얽혀 있는 것들입니다.
저에게 좋은 말 격려의 말을 해 준 분을 기억하고, 저에게 모질고 험한 말을 하여 상처를 주었던 그 상황 역시 잊어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이 저를 부르시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말로 인해 좋았던 느낌과 나빴던 느낌은 계속 가져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 모두는 먼저 입술에 재갈을 물리고,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고 달라지는 말을 사용하는 성도가 되길 축원 드립니다. 여러분 입술의 선한 열매를 하나님에게 항상 드리시길 소망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5살 때부터 가르치는 조기교육 ‘토라’에서 가장 먼저 가르치는 ‘말에 대한 7계명’을 소개할까 합니다. 1)항상 연장자에게 발언권을 먼저 준다. 2)다른 사람 이야기 도중에는 절대 끼어들지 않는다. 3)말하기 전에 충분히 생각한다. 4)대답은 당황하지 말고 천천히 여유 있게 한다. 5)질문과 대답은 간결하게 한다. 6)처음 할 이야기와 나중에 할 이야기를 구별한다. 7)잘 알지 못하고 말했거나 잘못 말한 것은 솔직하게 인정한다.
사람은 만류의 영장으로 말로서 자신의 모든 감정을 다 표현할 수 있는 특권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진화하는 언어(크리스티 얀센 저)’책을 보면, 동물들 중에 가장 머리가 좋은 침팬지는 인간과 DNA 98%가 닳을 정도로 인간과 비슷한 행동양식 모습을 보입니다.
인간과 가장 많이 닮은 침팬지이지만 구사하는 언어패턴은 아주 적습니다. 몇 가지 말과 행동으로 의사표현에 머무는 것이 침팬지입니다.
반면에 사람들의 언어는 나라마다 다릅니다. 같은 나라 안에서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말의 내용과 의미가 다릅니다.
기독교 언어학자들은 ‘바벨탑 이후로 나뉘어진 인간의 수백가지 언어를 두고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풍성하고 다양하게 만드신 하나님의 놀라운 작품’이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이지요. 이렇게 아름다운 언어가 사람을 죽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의 말에 은혜가 차고 넘쳤으면 합니다.
낯선 사람과 몇 마디 말을 나누는 상황을 가정해 봅시다. 낯선 사람과 말 몇 마디만 나누어 보고,‘아하. 바로 이 사람은 예수 믿는 신실한 사람이구나’라고 상대방이 느낄 수 있도록 진실하고 온유한 말을 모든 성도들은 해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는 출발점인 것을 절대 잊지 말도록 합시다.
24절,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하나님은 갈렙이 ‘나를 온전히 따랐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의 ‘온전히(말레)’는 ‘만족시키다, 고갈을 해소시키다’란 의미입니다. 갈렙은 온전히 하나님에게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렸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갈렙과 같이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따라가는 성도가 되었으면 합니다. 갈렙은 세상 사람들과 마음이 달랐고, 언어가 달랐고, 그리고 순종함으로 온전히 따라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런 모습이 모든 신앙인이 본 받아야 하는 모습입니다.
세계의 여러 선교기관 가운데 ‘위클리프 성경번역회’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이 선교단체에 활동하는 분들을 두고 ‘선경번역 선교사’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성경번역 선교사가 남미 오지에 있는 부족국가에 들어가서, 말은 있지만 글이 없는 사람들에게 언어를 가르쳐 주고 그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경번역 선교사가 마을 사람들을 위하여 성경을 번역을 하다가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 마을 언어 가운데 ‘순종’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번역하고 설명할 것인가 고민을 합니다.
하루는 그 마을에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장면이 눈에 띄었습니다. 아버지는 이웃 마을로 심부름을 가는 아들에게 재차 강조하는 말이‘꼭 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밀림을 헤쳐 나가는 힘들 길을 떠나는 아들에게 ‘네 모든 마음으로 그 일을 꼭 해야 된다’고 재차 강조합니다.
여기서 선교사는 순종이라는 말의 의미를 부족들에게 설명합니다. ‘순종’이란 말은 ‘마음을 나누지 않고 온 마음으로 따라가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에게 말과 행동으로 순종하는 모습도 동일합니다. 세상의 더러운 말로 내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아니하고 온전한 입술의 열매로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 기독교인의 달라진 언어생활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추악하고 악한 생각과 다르게 기독교인의 생각과 행동은 갈렙처럼 선한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악하고 험한 세상입니다. 이 험한 세상에 갈렙처럼 세상과 다르게 구별된 모습으로 인정 받고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