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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의 문은 모두 몇 개일까?
수도 서울 도심부 경계를 따라 인왕‧백악‧낙산‧목멱 등 내사산의 높고 낮은 능선과 평지에 자연스럽게 이어진 성벽에는 우리 선조들의 땀과 지혜가 깃들어있다. 오늘 날도 한양도성은 600년 동안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내며 서울을 품고 있다.
서울의 성장과 변화를 온몸으로 겪어낸 한양도성은 총 18.627㎞로 서울시 5개구를 아우른다.
한양도성의 문은 모두 몇개일까?
한양도성의 성문은 세 종류다. 사람이 출입하는 주출입구인 8개의 문과 어느 시기에 몇 개나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암문, 물이 빠져나가는 수문이 그것이다.
태조 이성계는 1392년 한양으로 천도를 결정한 후 먼저 궁궐과 종묘사직을 완성했다. 이어서 태조 5년인 1396년, 전체 길이 18.6km의 한양도성을 쌓았다. 평균 높이 4.5~7.5m로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 2개의 수문, 5개의 치성과 2곳의 곡성, 봉수대 등을 만들었다. 암문(暗門)을 만들었다는 공식기록은 없다.
▷ 4대문(大門)과 4소문(小門)
도성은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문을 만들었다. 사람의 다섯 가지 덕목으로 꼽는 인,의,예,지,신을 방위에 맞추어 4대문인 숭례문(崇禮門/남대문),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 돈의문(敦義門/서대문), 숙정문(肅靖門/북대문)에 이름을 붙였다.
4소문은 현재 혜화문(惠化門)으로 불리는 동북의 홍화문(弘化門/동소문), 동남의 광희문(光熙門/남소문), 자하문으로도 불리는 서북의 창의문(彰義門/북소문), 서남의 소의문(昭義門)으로도 불렸던 소덕문(昭德門/서소문)이 있었다.
사소문 중 남소문에 해당하는 광희문은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1457년(세조 3년) 때 만든 남소문이 있어서 따로 시구문(屍口門)으로도 불렀다.
일제 강점기, 성벽 철거와 함께 돈의문은 250엔의 헐값에 경매로 넘어가는 등 도성의 문들도 수난을 겪었다. 광복과 6,25 전쟁 이후 숙정문과 혜화문, 광희문 등은 복원되어 우리 곁으로 돌아왔지만 돈의문과 소의문은 멸실되어 그 자리에 표지석만 남아있다.
▷한양도성의 물길 책임진 오간수문과 이간수문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에는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이 있었다. 이 일대는 한양에서 가장 지대가 낮아 내사산에서 내려온 물이 모두 이곳을 거쳐 도성 밖으로 흘러나갔다.
오간수문(五間水門)은 조선시대에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나가는 지점에 놓인 수문이다. 다섯 칸(오간)의 수문으로 이뤄졌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마찬가지로 이간수문(二間水門)은 남산에서 발원한 물이 도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두 칸짜리 수문이다.
한양도성의 수문은 성곽 시설물로서 성 밖으로 하천수를 통과시키는 치수(治水)의 역할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한 방어의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현존하는 한양도성의 8개 암문(暗門)은 통문(通門)
한양도성을 순성하다보면 성 안과 밖을 연결해주는 사람 키 높이의 암문(暗門)을 만나게 된다. 암문은 성곽의 후미진 곳이나 깊숙한 곳에 적이 알지 못하게 만든 비밀 출입구다. 암문은 원래 전쟁 시 은밀히 물자를 이동하거나 적이 성문을 봉쇄했을 때 비밀스럽게 오갈 수 있도록 만든 통로이다. 암문의 안쪽에 쌓은 옹벽이나 흙은 유사시에 무너뜨려서 암문을 폐쇄할 수 있게 만들었다.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은 암문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한양도성을 축성하면서 몇 개의 암문을 만들었는지 기록은 찾을 수 없다.
현존하는 한양도성의 8개 암문은 대부분 성곽마을 주민들의 편리를 위해 의해 복원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인왕산 무악동, 창의문과 백악마루 사이, 백악산 곡장아래, 성북동 북정마을, 낙산공원 정상, 낙산 이화동, 낙산 창신동, 장충동 구간 다산동에 8개의 암문이 위치하고 있다. 암문(暗門)보다는 사람이 편하게 왕래하는 ‘통문(通門)’으로 표현하는게 적절해 보인다.
낙산공원까지 5회에 이어 이번 회에서는 한양도성박물관에서 흥인지문과 오간수문 터,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 지나 광희문, 장충동골목까지 순성(巡城) 길을 이어간다.
- 흥인지문공원 초입 ‘각자성석’
1·4호선 동대문역 1번 출구로 나와 흥인지문공원으로 발길을 옮기다보며 길가 한양도성 성벽 아래 부분에 한자가 새겨진 성돌들이 눈에 띈다. 한양도성 축성의 역사가 담긴 ‘각자성석(刻字城石)’이다.
한양도성 성벽에 남아있는 각자성석은 천자문의 글자로 축성구간을 표시한 것(14C)과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을 새긴 것(15C), 축성 책임 관리와 석수의 이름을 새긴 것(18C 이후)으로 나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이처럼 다양한 시기와 유형의 각자성석 288개(2015년 기준)가 전해지고 있다.
한양도성은 1396년, 팔도에서 사대부와 천민을 제외한 양인 12만 명을 동원해 축성했다. 양인은 나라에 세금을 내야 하는 것은 물론 공물(지역 특산품)을 바치고, 국가에 노동력(요역‧徭役)을 제공할 의무가 있었다.
한양도성은 전국에서 올라온 백성들이 18.6km를 97개 구간으로 나누어 쌓았다. 1개 구간은 600척(180m)이다. 자신들이 쌓았던 성이 무너지거나 훼손되면 돌에 새겨진 담당자를 불러 보수하도록 했다. 오늘 날 ‘공사 실명제’였던 셈이다. 취재에 동행한 신희권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는 “농한기를 이용해 98일이라는 깜짝 놀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성을 쌓았지만 생각보다 튼튼했다”면서 “근면성실하면서도 지혜롭고 손재주 뛰어난 선조들이었기에 가능했던 대역사”라고 평가했다.(*)
* 자료 : <쿠키뉴스> 2021년 6월 13일자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DDP(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DDP(동대문 디자인 플라자)는
꿈꾸고(Dream), 만들고(Design), 누린다(Play)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서울특별시 동대문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이다.
2014년 3월 21일 개관한 이래 굵직한 전시와 패션쇼,
신제품 발표회, 포럼과 콘퍼런스를 개최해오고 있다.
알림터, 배움터, 살림터, DDP 디자인 뮤지엄,
디자인 장터와 어울림 광장,
동대문 역사 문화공원으로 나뉘어 있다.
알림터에서는 서울패션위크, MAMA(Mnet Asian Music Awards),
반클리프 아펠전, BMW 신차 발표회 등을 개최했고,
다목적 연회 공간인 국제회의장 시설을 갖추었다.
BTS 주제전과 서울도시건축 비엔날레 등이 열렸던 배움터,
누구나 디자이너가 되는 곳을 주제로 2019년 개장한 시민 라운지 ‘D-숲’과
DDP 관련 기념품을 소개하는 DDP 디자인 스토어를 아우르는 살림터까지,
규모에 걸맞은 내실로 관람객의 흥미를 북돋운다.
식당과 베이커리, 카페가 들어선 디자인 장터 역시
감성 충전을 기대하는 가족이나 연인을 만족시키고도 남을 산책 코스다.
SNS 상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야경 사진이 범람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설계하며
“이른 새벽부터 밤이 저물 때까지 쉴 새
없이 변화하는 동대문의 역동성에 주목해 곡선과 곡면,
사선과 사면으로 이뤄진 특유의 건축 언어로 자연물과 인공물이
이음매 없이 이어지는 공간을 만들어냈다"라고 밝혔는데,
해 질 녘 조명이 켜진 후 건축물에 오롯이
집중할게 될 때 곡선 부가 주는 역동성의 진가가 드러난다.
야경 사진을 찍기 좋은 지점은 어울림 광장 진입로로, 내부의 웅장함과
건축물의 신비로운 소재가 연출하는 분위기를 담을 수 있다.
알림터와 배움터를 나누는 살림터 문 앞은 내외부의 현란한 곡선과 조명이 정점을 이룬다
| ◈ 광희문 둘레길 걷기 ◇ 광희문(光熙門) : 중구 광희동 2가 105번지 - 조선초에 한양도성의 남소문 역할을 한 시구문 광희문은 소의문(昭義門), 혜화문(惠化門), 창의문(彰義門)과 함께 한양도성 4소문 중의 하나이다. 그 중 소의문과 혜화문은 일제 때 헐려 없어졌으나 최근에 혜화문은 서울시에서 복원하여 그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광희문(일명 屍口門, 水口門)은 4대문, 4소문 중에서 소의문(서소문)과 더불어 서울시민들이 새상을 떠나면 상여(喪輿)에 싣고 운구(運柩)할 수 있는 ‘저승 문’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금령(禁令) 때문에 서울시민들이 신당동·왕십리·금호동 방면에 묘지를 잡게 되면 광희문을 거쳐서 운구하였으므로 시신을 내보내는 문이라 하여 ‘시구문’으로 칭하였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서울에 가거든 시구문의 돌가루를 긁어 오라’는 말이 있었다고 전해 온다.. 이는 수백년 동안 수많은 죽음을 지켜 본 광희문이므로 ‘시구문 돌가루’가 주술적(呪術的)인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졌을 것이다. 광희문은 조선초 1396년(태조 5년)에 한양도성을 쌓을 때 남소문(南小門) 역할로 축조되었지만 속칭 시구문 또는 수구문(水口門)이라고 칭하지, 남소문이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조선 초에 도성에서 한강나루(한남동)를 통하여 남쪽으로 가려면 광희문을 통하면은 거리가 멀어 불편하므로 도성에서 곧 바로 나갈 수 있는 문을 새로 설치하자는 건의에 따라 현재 타워호텔이 세워진 부근인 버티고개에 남소문을 새로 건립하였다. 그러나 이 문은 설치된 지 12년 만인 1469년(예종 1)에 지경연사 임원준(知經筵事 任元濬) 등이 수레 등이 다닐 수 없으므로 실용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한편, 음양가(陰陽家)들이 서울의 남동쪽을 개방하면 화가 미친다고 주장하자 예종이 그 건의를 받아들여 남소문을 폐쇄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시대에 풍수사상이 얼마나 강하게 작용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한 예이다. 서울의 남동쪽을 개방하면 화가 미친다는 주장의 근거는 남소문을 건축한 직후에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가 세상을 떠났고, 또 하나는 남소문을 열어 놓으면 도성 안의 여자들의 음행(淫行)이 많아진다는 주장에 따라 이 문을 폐쇄하게된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 후에도 이 문을 개통하자는 의견이 명종과 숙종 때에 여러 차례 제기되어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결국 풍수사상에 의한 반대에 부딪혀 개통을 보지 못하고 말았으므로 조선말까지 남소문의 역할은 광희문이 담당하게 되었다. 남소문은 비록 폐쇄되기는 하였으나 조선말까지 존속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언제 훼손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일제 때에 이르러서는 남소문의 주초(柱礎)마저 없어졌다. 조선후기 병자호란으로 청나라 군대를 피해 남한산성으로 몽진(蒙塵)에 나선 인조 임금이 조선의 국왕으로는 처음으로 광희문을 빠져나갔다는 일화도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광희문 밖은 시신이 즐비했고, 조선말의 1886년(병인년)에는 도성 안에 콜레라가 크게 돌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광희문 밖은 내다버린 시체와 죽기 직전의 환자들로 아수라장이었다고 전한다. 또한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해산이 강행되자 이에 항거하던 120여 명의 군인들이 희생되었다. 전사한 이들 시신을 광희문 밖에 쌓아 놓자 가족들이 몰려와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조선 말 1899년(광무 3)에 전차가 개통되고 도로 개설로 한양도성이 철거되기 시작하면서 광희문과 동대문까지의 성곽이 모두 헐려 옛 모습을 잃게 된 데다가, 일제 때인 1915년 경 광희문 문루(門樓)가 무너져 내려 홍예(紅霓)만 초라하게 남아 있었다. 이로부터 60여년이 지나 서울시에서 1974년 12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광희문의 홍예를 남쪽으로 약 15m 이전하여 복원하는 한편, 문루(門樓)를 올림으로써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 광희문 성지(聖地) 순교 현양관(殉敎顯揚館) : 중구 퇴계로 350(신당동 228-16) - 순교한 성인과 복자(福者)의 신앙행적을 추모하는 천주교 성지 유적지 광희문 성지(聖地) 순교 현양관(殉敎顯揚館)은 1784년 한국천주교회 창설 후 순교한 성인과 복자(福者)의 신앙행적을 추모하고자 이들의 시신이 버려졌던 광희문 근처에 조성된 천주교 성지 유적지이다. 이 현양관은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 당시 포도청(捕盜廳)이나 의금부(義禁府)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거나 옥사한 신자들의 시신이 버려진 곳을 기념하기 위한 장소이다. 광희문은 도성 안의 시신이 나가던 문이어서 이 문을 통해 많은 천주교 순교자의 주검이 나가고 묻혔기 때문에 천주교의 역사적 순교지가 되었다. 천주교는 조선에 도입될 때부터 100여 년에 걸쳐 10여 회의 크고 작은 박해가 끊이지 않았다. 그 가운데 1839년(헌종 5)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최경환(崔京煥), 1846년(헌종 12) 병오박해 (丙午迫害) 때 포도청에서 교수형을 당한 우술임(禹述任), 김임이((金任伊), 이간난((李干蘭), 정철염(鄭鐵艶) 등과 1867년(고종 4) 포도청에서 순교한 복자(福者) 송베네딕토, 복자 송베드로, 복녀 이안나의 시신들이 광희문 밖 성벽 밑에 묻혔다. 또한 1866년(고종 3), 1868년(고종 5) 등의 천주교 박해 때에도 도성 안에서 순교한 적지 않은 천주교 신자들의 시신들이 이곳에 버려졌다. 가족들이 시신을 찾아가지 않은 순교자들은 이 근처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천주교회는 지금 광희문 성지의 여러 순교자 성인들이나 무명 순교자들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와 ‘광희문성지 순교현양관(殉敎顯揚館)’을 건립하였다. 이곳에서는 목요일~일요일까지 오후 3시에 순교자들의 행적을 되새기는 미사를 드리고 있다. ◇ 시구문 시장 터 : 용산구 후암로 4길 70 (영락보린원 자리) - 광희문 밖으로 나섰을 때 가장 먼저 만나는 지역에 형성된 노상 시장 광희문을 나서면 동쪽으로 비스듬한 경사길이 보이는데, 그곳은 1960년대까지 번성하던 시구문 시장이 있던 곳이다. 당시의 시구문 시장의 가게라곤 현재 떡집 하나만 남았다. 제대로 된 시장이라기보다 길을 따라 좌판이 줄을 이은 일종의 난장(亂場)이었다. 시장이 있던 이 경사로가 신당동이 시작되는 곳인데, 원래 한양도성을 나온 시신을 여기저기 묻던 묘지가 이곳에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도시로 몰려온 사람들은 결국 죽은 자들의 땅을 차지했다 1966년에 임명된 군인 출신의 김현옥 서울시장은 이런 난잡함을 봐줄 수 없다고 하여 군사작전에 버금가는 철거를 통해 시구문 시장과 인근의 사창가들을 정리하였다. 신당동에서 25년 이상 살고 있는 주민은 회상하기를 “예전에는 술집이 그렇게 많았다. 또 여자들 옷을 파는 가게도 많았는데, 이제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고 전했다. 그 대신 골목골목 봉제공장들이 늘고, 중국인과 베트남인 노동자들이 늘어났다고 한다. 개미, 장미, 해당화, 잊지마, 미인, 물망초 등 애잔한 간판들이 줄지어 있던 술집 골목엔 겨우 한 둘만이 남아 향수를 그리워하는 늙은 취객을 기다릴 뿐이다. 일제 때 신당동 남쪽에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택지정리와 문화주택 건설이 진행되는 동안, 북쪽에서는 토막민들의 삶과 더불어 이곳을 오가는 영세 상인들의 삶이 누적되고 있었다. 이 당시 영세 상인들의 상업 활동은 퇴계로변 노상에서 시작되었다. 이곳은 송파·왕십리·뚝섬 등 서울의 동남쪽에서 도성의 성문에 들어서기 전에 가장 마지막에 당도하는 지역이었고, 반대로 도성 안에서 청계천 혹은 을지로를 따라 도성 밖으로 나섰을 때 가장 먼저 만나는 지역이기도 했다. 이곳은 공동묘지가 지척인데다가 토막촌 옆의 습한 저지대는 생산성이 없었지만, 대신 도심과 외곽이 만나는 결절 지역이었기에 상업 활동의 잠재력을 늘 갖고 있었다. ◇ 아리랑 고개 : 중구 다산로 33길(광희동 2가) - 광희문 밖의 신당동쪽에 위치한 고개이름 성북구 돈암동에서 정릉동으로 가려면 ‘아리랑고개’를 넘어야 하지만, 광희문 밖 천주교 순교 현양관 뒤편의 신당동으로 가는 고갯길로 오르면 바로 ‘아리랑 고개’이다. 조선시대에 이 고개를 상여에 실린 시신이 ‘한번 넘어가면 다시 돌아올 수가 없다’고 하여 ‘아리랑 고개’라고 불렀다. 현재 이 고개에는 「조선시대에 광희문을 나온 시신을 실은 상여가 이 일대 꼬불꼬불한 언덕을 넘어 신당동 화장터나 왕십리, 금호동 공동묘지로 갔다.」라는 내용의 안내 문구가 언덕 마루 한 편인 게시판에 부착되어 있다. 이 고개에 올라보면 지난날에 눈 앞으로 꽃상여가 지나는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 광희문교회 : 중구 신당동 304-253 - 미국 남감리교(南監理敎) 선교부에서 서울에 가장 먼저 세운 교회당. 1895년(고종 32)에 입국한 미국의 남감리교회 선교사 리드(Reid, C.F.)는 조선 선교처 관리자로 임명되어 1897년 6월 21일 일요일에 남송현(南松峴, 현 소공동) 사택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보았는데, 이 때 윤치호(尹致昊, 1865~1945)가 설교를 했는데 이것이 광희문교회의 창립이다. 교세가 점차 늘어나자 1904년 10월에 띄골(현 오장동)로 이전하여 교회명을 일명 ‘수구문교회’라고 불렀다. 이어 1916년 광희동에 대지 1,320㎡를 구입해서 2층 양옥의 교회를 건축하고, 1924년 이후부터 ‘광희문교회’로 불렀다. 교회건물이 준공되자 청소년교육을 통해 선교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광희문여학교를 설립하였는데, 그 뒤에 배명중고등학교(培明中高等學校)로 발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44년 일제에 비행기 기금 헌납으로 광희문교회가 매각 처분되어 예배당을 잃었으나 해방과 더불어 교회부흥운동 및 교회찾기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1954년에 적산가옥(敵産家屋)을 매각하여 현부지에 1,963㎡를 구입하고, 1956년 신당동에 660㎡ 규모의 교회건물을 신축하여 1995년까지 사용하다가 1996년에 지금의 교회를 다시 신축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경기도 광주·충북 음성·경북 성주 등지에 교회 개척을 지원하고, 해외선교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 대장간 거리 : 중구 다산로 39길 일대 - 한때 160여 개에 이르는 대장간이 고갯길에서 성업한 데에서 유래된 명칭 대장간 거리는 중구 다산로 39길 일대를 일컫는 말로, 한때 160여 개에 이르는 대장간이 고갯길 좌우 언저리에 늘어서서 성업한 데에서 그 명칭이 유래한다. 일명 풀무재, 풀무질고개, 대장고개 등으로도 불렸던 곳이다. 지금은 이곳에 대장간 3곳 남아 있다. 지금의 ‘동대문 디자인플라자(DDP)’자리는 옛 훈련도감(訓鍊都監) 소속의 군영지였다가 개항기에는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이 훈련장으로 사용하였다. 당시 군사들이 사용할 무기를 대장장이들이 만들었으므로, 대장간 거리가 형성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1907년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이곳의 무기 제작 주문은 줄어들게 되었다. 이후 이곳 대장간의 무기 수요를 대체한 것은 농기구나 작두[斫刀] 같은 신물(神物)의 제작이었다. 농기구는 농민들이 농사에 필요했고, 작두 등은 시구문(屍口門) 밖 일대에 몰려 있던 신당, 즉 무당들이 필요로 했던 신물이었다. 약 20년 전만 하더라도 이 부근에 10여개 이상의 대장간이 있어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했었지만 작업이 너무 고되어 대장간 일을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대장간은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 명인골목(개미골목 / 신당골) : 중구 다산로 39길 - 장인(匠人)과 명인(名人)들이 모여 활동하던 터전에서 유래된 골목 이름 명인골목은 매우 좁고 허름하나 정겹고 아기자기한 맛이 넘치는 골목이다. 이 골목은 부근의 대장간이 있는 것처럼 예로부터 장인(匠人)과 명인(名人)들이 모여 활동하던 터전이어서 명인(名人)골목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이 골목을 개미골목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마을에 사는 주민들이 마치 개미처럼 부지런하게 열심히 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약 200m 길이의 골목을 지나는 동안 곳곳에서 눈길과 관심을 끄는 볼거리들을 마주할 수 있다. ◇ 동활인서(東活人署) 터 : 중구 신당동 236번지, 304번지(남녀오거리 마트) - 조선시대에 빈민환자, 주로 전염병 환자를 치료한 공공의료기관 성북구 돈암장 자리에는 오늘날의 보건소와 같은 조선시대에 질병에 걸린 빈민환자, 주로 전염병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설치한 의료기관인 동활인서(東活人署)가 있었다. 또한 마포구 아현동에는 서활인서가 있었다. 동활인서는 18세기에 그린 「도성대지도」에 보면 조선 초에 동소문 밖에 위치한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조선 말 순조 때 저술한 한경지략(1830년)에는 동활인서는 쇠퇴해서 폐지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정호의 「수선전도(首善全圖)」(1830년)에는 동활인서가 현재 중구 신당동에 위치한 것으로 표시되어 있으므로 조선 후기 정조 때 동소문 밖에서 중구 신당동 236번지, 304번지 일대로 이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활인서는 고려 때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의 후신으로 조선 초 태조 때는 대비원(大悲院)이라고 하다가 태종 때 활인원(活人院)으로 고치고, 1466년(세조 12)에 활인서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 후 활인서는 임진왜란 때 폐지되었다가 1662년(광해군 4)에 다시 설치되었고, 1882년(고종 19)에 폐지되었다. 하지만 활인서의 사업은 혜민서와 통합되어 이어졌고, 다시 제중원, 대한적십자병원에 계승되었다. 활인서(活人署)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의원 외에 무당을 배치시켰다. 당시에 무당은 전염병을 일으키는 역귀(疫鬼)를 퇴치한다고 믿었으므로 이들에게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여 주었으며, 활인서는 기근이 심할 때 역(驛)·원(院) 등과 함께 구호사업도 병행하는 사회복지기관이자 공공의료기관의 역할을 하였다. 1646년(인조 24)에는 전염병이 만연하여 활인서에 수용된 환자가 699명에 이르렀다는 기록도 있으므로 시설이 부족할 때는 활인서 주변에 막사를 만들어 치료한 것이 확실하다. 이 곳에는 땀을 내고 찜질하고 목욕하는 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므로 당시로서는 상당한 의료시설을 갖춘 공공의료기관으로 추측된다. 활인서는 환자의 집이 가난하여 치료비를 내지 못하면 국고(國庫)에서 미곡을 활인서에 공급해 주었다. 하루에 주는 쌀은 1되(升)이며, 매년 환자의 수를 기록하여 감사에 보고해서 회계를 밝히게 하였다. ◇ 옛 무당천(巫堂川) : 중구 다산로 33길 10-18 (신당동) * 떡볶이촌 - 남산에서부터 내려오는 하천으로 대부분 복개됨 신당동 떡볶이 골목이 지금처럼 골목을 이루게 된 건 1970년대 후반부터다. 1970년대를 지나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신당동 떡볶이 골목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1980년대에 새롭게 등장한 건 떡볶이집마다 있었던 'DJ박스'다. 사연과 함께 음악을 틀어주던 이른바 '멋쟁이 DJ오빠'가 신당동 떡볶이 골목의 상징이었다. 사실 떡볶이 골목의 역사는 70년대를 훨씬 더 지나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떡볶이 골목에 ‘마복림 할머니집’이 있는데, 이 할머니 말에 따르면 1953년부터 떡볶이를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일 떡볶이 골목 인근에 동화극장이 있었는데 그 앞에서 떡볶이와 옥수수, 감자 등을 팔았다. 처음에는 그냥 고추장만 넣어 떡볶이를 만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신당동 떡볶이는 수십년 세월이 흐르면서 심심풀이 간식이 아닌 한 끼 식사로 충분한 하나의 요리로 자리잡게 되었다. 신당동 떡볶이촌에 이르면 복개천이 나온다. 이 개천은 남산에서부터 내려오는 하천으로 ‘무당천’이라고 불렀는데 현재 복개되어 도로가 되었다. 신당동 이름은 조선시대에 무당들의 신당(神堂)이 많았기 때문에 불려졌다. 지난날의 무당은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존재였다. 그래서 유족들은 먼길을 떠나는 망인에게 기도, 또는 노잣돈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을 지녔고, 망인이 한을 품었다면 이를 풀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무당을 찾았다. 그래서인지 이곳에는 아직 신점(神占)을 보는 깃발 달린 집과 점을 치는 집들의 간판을 쉽게 볼 수 있다.(*) |
봉준호 감독의 영화<플란다스의 개>촬영지
봉준호 감독 '싸전거리'의 창고에서 촬영한 영화<플란다스의 개> (2000년 개봉).
봉준호 감독이 신당동 '싸전거리'의 창고에서
촬영한 영화는 그의 데뷔작인 <플란다스의 개> (2000년 개봉)입니다.
이곳은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청년 시절 점원으로
성공의 발판을 마련했던 쌀가게 '복흥상회(훗날 경일상회)'가 있던
역사적인 거리이기도 합니다.
1. 촬영지 정보 및 현재 모습
촬영 장소: 서울 중구 신당동 '심세정' (구 동광상회 양곡창고)
정확한 위치: 서울 중구 퇴계로81길 22 (신당역 1번 출구 인근 싸전거리 내)
현재 용도: 현재는 **베이커리 카페 '심세정'**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특징: 1959년에 지어진 약 9m 높이의 거대한 미곡 창고였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이 창고의 높고 서늘하며
기괴한 분위기를 활용해 영화 속 중요한 사건이 벌어지는
지하실 및 창고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지금도 카페 내부에는 과거 창고의 목조 골조와
높은 천장 구조가 그대로 남아 있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2. 영화 제목 및 스토리
제목: <플란다스의 개> (Barking Dogs Never Bite, 2000)
봉준호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아파트 단지 내에서 벌어지는 강아지 실종 사건을 다룬 블랙 코미디입니다.
주요 스토리:
발단: 대학 강사 자리를 얻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던 주인공 '윤주'(이성재 분)는
이웃집 개 짖는 소리에 폭발하여 몰래 개를 납치해 아파트 지하실 창고에 가둡니다.
전개: 아파트 관리사무소 경리인 '현남'(배두나 분)은
실종된 강아지를 찾으려 분투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아파트 지하실에 사는 부랑자 '최 씨'와 얽히게 됩니다.
결말: 일상적인 공간인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소시민들의 비루함과 이기심,
그리고 그 속의 웃픈 상황들을 봉준호 특유의 미장센과 유머로 풀어냈습니다.
참고: 영화 속에서 '최 씨'가 개를 잡아먹으려 하거나
사건이 벌어지는 어둡고 폐쇄적인 창고 장면들이
바로 이 신당동 양곡창고(현 심세정)에서 촬영되었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초기작인 만큼,
세계적인 거장이 된 그의 초창기 감성을
카페의 빈티지한 구조 속에서 느껴보실 수 있을 겁니다.
신당동 싸전거리는
현대사의 거물(정주영 회장)의 발자취와
세계적인 거장(봉준호 감독)의 예술적 뿌리가 공존하는 흥미로운 공간입니다.
영화 속 장면과 싸전거리의 숨은 명소들
1. <플란다스의 개>
속 결정적 촬영 장면신당동 양곡창고(현 카페 심세정)는
영화 내내 서늘하고 기괴한 분위기를 풍기는 '지하실/창고' 공간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보일러 김 씨의 '보신탕' 괴담 장면: 아파트 관리실 직원인 '보일러 김 씨'(김뢰하 분)가
지하실에서 개를 잡아먹으며 으스스한 괴담을
늘어놓는 장면들이 이곳의 층고 높고 어두운 이미지를 빌려 촬영되었습니다.
추격전의 끝: 현남(배두나 분)이 범인을 쫓거나, 아파트의 일상적 모습 뒤에 숨겨진
'어두운 욕망'이 드러나는 폐쇄적인 공간들의 대역을 수행했습니다.
미장센의 활용:
봉준호 감독은 이 창고 특유의 낡은 목조 트러스 구조와 높은 천장에서 오는 압도감을 통해,
소시민들의 비루한 삶과 대비되는 공포감을 극대화했습니다.
2. 신당동 싸전거리의 다른 명소'싸전'은 쌀을 파는 가게라는 뜻입니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까지 서울 최대의 양곡 시장이었던 이곳은
지금 '힙당동'이라 불리며 뉴트로 성지로 변모했습니다.
명소설명특징경일상회 터
정주영 회장이 점원으로 시작해 인수한 '복흥상회'의 후신입니다.
정주영 회장의 창업 정신이 깃든 현대그룹의 실질적 발원지입니다.
주신당
싸전거리 인근 신당동의 유래(신을 모시는 동네)를 살린 바(Bar)입니다.
불상과 부적 등으로 꾸며진 독특한 인테리어로 MZ세대에게 인기입니다.
중앙시장 주방거리싸전거리와 연결된 대규모 주방 용품 시장입니다.
과거 양곡 시장의 규모를 짐작게 하며, 현재는 이색 맛집들이 숨어 있습니다.
보니에카페
심세정 바로 옆에 위치한 오래된 쌀 창고를 개조한 공간들입니다.
심세정과 함께 싸전거리 특유의 '창고형 건축' 미학을 보여줍니다.
감독 봉준호, 그 충격적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
https://www.youtube.com/watch?v=HvAsKNVjjN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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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
4월에 마지막날,붙잡고싶은 봄. 신상덕 명인 해설사님을 붙잡고싶은 날이였습니다.
2시간을 같이 한시간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하나도 빠뜨르지 않고 메모를 할려고 했습니다.
역사의 유적지에 설명은 명장이 아닌,유네스코 세계유산입니다.등제를 응원하겠습니다
오늘 감동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정말 대단합니다!
어쩜 그렇게 쉽게 설명해 주시는지, 내용이 귀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대한민국 서울의 중심인 중구, 아니 서울이 곧 세계의 중심입니다.
다시 한번 선생님의 해설이 최고이며, 더 많은 분들과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문화관광 해설 명인 되셨네요? 축하드립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