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14.
보리숭어
블라인드를 걷는다. 파란 하늘이 창밖에 가득하다. 화창한 하루가 예상된다. 이런 날이면 멀리까지 시야가 확보된다. 올망졸망한 다도해를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주작산이나 달마산, 두륜산을 오르면 좋을 듯하다. 아니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월출산 용암사지 마애여래좌상을 사진에 담으면 어떨까. 마음에 정한 일정이 있으나 아내의 동의가 없으면 실행할 수 없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서너 개의 답사지를 계획하여 던져 놓는다. 아내가 고르면 답사 여행이 이루어진다. 가끔은 과하게 고집 피울 때도 있지만 합의가 원칙이다.
아내가 이상하다. 요 며칠 동안 빈번하게 늦잠을 잔다. 겨우 일어나서는 몸에 기운이 없다는 말을 앞세운다. 어제 저녁밥으로 먹은 비싼 염소탕은 효험이 전혀 없나 보다. 기대는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다. 더불어 월출산이나 주작산 등산은 재고 목록으로 남게 되었다.
“울돌목 숭어가 제철이라네” 아내가 던진 한마디는 오늘의 일정을 결정하는 실마리가 된다. 내가 잠자는 이른 저녁 시간에 아내는 EBS TV 프로그램 <한국기행>을 시청한 모양이다. 어제는 ‘곳간 열리는 날’이라는 소제목으로 해남 울돌목 숭어 이야기였다고 한다. 숭어가 산란을 위해 남해에서 서해로 이동하는 길목이 울돌목이며 보리 이삭이 고개를 들 무렵 잡히는 숭어를 보리숭어라고 부른다. 울돌목의 거센 물결을 거슬러 오르는 5월의 보리숭어는 살이 단단하고 기름져 특유의 단맛과 고소함이 있다고 방송되었다고 한다. 정리하면 제철인 보리숭어가 먹고 싶다는 이야기다.
식당 안에 빈자리는 없다. 대기표도 없는 줄이 만들어져 있다. 내 앞사람만 알면 대기 순번이 정해진다. 대기 번호 3번이다. 한참 동안 기다려 6인석이 비길래 우리 다음 순번 2팀을 아울러 들어갔다. 잔머리를 팽하니 굴려 편법으로 일행을 만들었다. 식탁 앞에 앉았으나 음식이 나오기까지 또 한참을 기다린다. 숭어회덮밥 여섯 그릇이 나오기까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우리의 공통점은 어제 방송된 <한국기행> 시청자들이다. 방송의 힘은 정말 대단하다. 여기저기 앉은 식객 대부분이 모두 그렇다. 충청도 서천에서 해남까지 보리숭어를 먹으러 왔다는 이도 <한국기행> 때문이라고 한다. 무턱대고 오기는 왔는데 식사 후 여행지를 추천해 달라며 말을 잇는다. 밥 한 끼 먹자고 무작정 떠나온 늙은 부부의 여행인지라 작은 것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다.
숭어회는 먹을만하다. 굵게 썰어 씹는 맛이 좋다. 육질이 탱탱하면서 비린내 없이 깔끔하다. 귀로 듣고 눈에 끌렸던 제철 음식을 먹었으니, 원기를 회복할까. 한 그릇을 오롯이 비운 아내의 눈치를 살핀다. 염소탕에서 얻지 못한 기운을 보리숭어에 기대해 본다. 그냥 숭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이 판옥선 13척으로 외적의 세키부네 133척과 맞서 대승을 거둔 명량대첩지의 숭어다. 승리의 숭어이며 애국 애민의 숭어다. 구국의 혼으로 여물었을 울돌목의 숭어다.
울돌목 스카이워크에 섰다. 울돌목 회오리는 그날의 원한을 삼켜버리기라도 할 듯이 격하다. 물의 흐름은 빠르고 세차다. 숭어잡이 어부는 그 흐름 속에서 숭어를 잡는다. 뜰채를 힘차게 한 바퀴 돌리면 팔뚝 크기의 숭어가 두어 마리씩 잡힌다. 힘찬 몸부림으로 솟구치는 숭어에게서 힘이 느껴진다. 아내도 기운을 찾을 듯하다.
첫댓글 재밋다 오라버니 글은 항상의미가 있다
울돌목은 충무공 이순신의 바다니까. 힘이지... 불굴의 의지로 일으켜 세우는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