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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7:9~20(235) 유라굴로 광풍(狂風)을 피하기 2025. 8. 31
광풍(狂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문의 어원은‘미칠 광 바람 풍’입니다. 그래서 광풍은 ‘미친 듯이 사납게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을 의미합니다. 역사적으로도 보면 미친바람이라 말할 수 있는 광풍이 분 적이 많습니다. 그 중에 한 예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1703년 11월 26일과 27일 양일간에 영국 육지와 바다 전역에 대폭풍이라고 불리는 미친 광풍이 불면서 막대한 피해를 초래합니다. 런던 시내 교회 첨탑 및 사람이 주거하는 건물 수천 채가 무너졌고, 당시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해군 군함 13척도 순식간에 침몰해 버립니다. 이 광풍으로 작게는 8,000명에서 많게는 15,000명이 목숨을 잃어 버리는 재앙을 맞이합니다.
이 광풍이 지나간 후 영국 국교회는 이를 ‘국가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응징’으로 해석하며,‘예배와 금식의 날(fasting day)’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당시 영국을 다스렸던 앤 여왕 (Queen Anne)과 영국 정부는 이 사건이 ‘영국 국민의 가장 깊고 엄숙한 겸손을 요구하는, 울부짖는 죄에 대한 응답’이라 선언하며, 1704년 1월 19일을 ‘국가 금식일’로 공포합니다.
광풍으로부터 간신히 살아남았던 Edward Barlow라는 해군 선원은 이렇게 회고합니다.‘너무나 악한 세대에 대한 하나님의 확실한 분노의 경고 앞에서 우리는 모두 회개해야 합니다.’그냥 자연적 재난으로 치부해 버리지 않고, 신앙적 의미를 찾는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2003년 9월 추석을 앞둔 시기에 태풍 매미가 미친바람을 불어 큰 피해를 안겨다 주었습니다. 아직까지 깨어지지 않는 최대순간 풍속 60 m/s(시속 216km이상)이 불어서 사망이 131명이고, 재산 피해는 약 6조원이라는 어마어마한 피해를 남긴 기록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전세계적으로 이런 파괴적이고도 미친 광풍이 종종 불어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고, 수많은 재산 피해를 안겨다 주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미친 광풍이 불어 재끼는 자연재해는 앞으로도 종종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자연의 만들어 재끼는 미친바람 광풍을 바라보는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광풍을 비유적으로 설명하여 ‘갑자기 또는 무섭게 일어나는 기세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설명”합니다.
저는 광풍에 대한 비유적 접근에 초점을 맞추어 볼까 합니다. 이제는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는 단어이지만, 불과 몇 년 전 우리는 초유의 코로나 사태를 겪은 적이 있습니다. 코로나 19라는 바이러스가 지구촌 전체를 흔들면서 미친바람 광풍처럼 불어 닥친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 국가에서 바이러스 확산을 막는다고 교회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를 금지시켰습니다. 방역점검을 핑계로 공무원들과 단속원들이 교회를 방문해서 실사 점검을 하는 일도 흔하게 있었습니다. 그 암울하였다는 일제 강점기에도 주일 예배가 강제로 중단된 적이 없었는데, 민주정부라고 말하는 문재인정부에서는 공권력을 동원해서 예배를 강제하는 참상이 있었습니다.
이제와 되돌아보면, 코로나 바이러스가 미친 광풍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절대 권력을 가지고서 공권력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면서 종교의 자유, 집회의 자유, 결사의 자유를 억압하였던 문재인 정부가 정말로 미친 광풍이었습니다.
미국산 소고기를 먹으면 뇌에 구멍이 생긴다는 괴담을 전파하면서 국민을 선동했던 광우병 광풍도 있었고, 아직도 국민들을 여전히 선동질 하고 있는 세월호 광풍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자연적으로, 정치적으로, 인간이 만든 의도적 미친바람 광풍이 오늘날에도 불어 닥칠 수 있습니다. 이런 미친바람이 불어 올 때에 오늘 본문을 떠 올리면서, 지혜롭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도 때로는 원치 않는 광풍이 붑니다. 내 인생에 갑자기 등장해서 위기로 몰고 가는 광풍을 어떻게 슬기롭게 대처하고 넘어갈 수 있을까요?
오늘 그런 문제에 대해 함께 묵상해 보고 해결책을 찾았으면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저나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가 ‘인생에 예고 없이 찾아오는 미친 광풍을 믿음으로 극복하는 지혜’를 본문을 통해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4절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죄수가 되어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중에 생긴 사건입니다.
지중해에 갑자기 불어 닥쳐서 많은 피해를 주는 허리케인 격인 유라굴로라는 미친 바람이 배에 불어 닥칩니다. 그 배에는 죄수를 포함하여 모두 276명이 타고 있습니다. 죄수라고 하지만 모두들 소중한 목숨입니다. 이 때, 바울이 일어나 이 모든 사람들을 인도합니다. 그리고 단 한 사람도 죽거나 다치는 것이 없이 모두 생명을 건지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왜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는 위기가 찾아오는가 하는 겁니다.
1. 전문가들의 잘못된 판단 때문을 맹신 할 때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11절.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호송 책임자인 백부장이 바울의 말을 듣지 않고, 대신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다고 말합니다. 호송에 대한 총괄책임을 지고 있는 백부장의 입장에서 바다와 배에 대해 전문가인 선장이나 선주의 말을 더 신뢰하고 믿는 것은 당연한 판단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떠나지 말자고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바울의 의견은 묵살되고,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고 떠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배에 대해서 전문가라고 인정을 받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따르다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전문가라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완벽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전문가의 조언이라고 해서 모두 완벽하고, 모두 다 성공으로 이끄는 완벽한 조언이 되지 않을 경우도 많다는 점입니다.
잘못된 전문가의 조언 때문에 망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주식투자 전문가 말 듣고 주식 투자에 올인 했다가, 모든 재산 다 날려 먹고 알거지가 된 사람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 저기 전문가들이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그 전문가들의 말을 100% 다 신뢰하고 믿으면서 따라가다가는 더 큰 낭패를 당할 수 있습니다.
제가 참 이상하게 본 게 뭐냐 하면, 전문가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 <전문성>이 자기에게는 안 통하는 경우를 많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머리카락 전문가라 그러면 자기는 머리숱이 많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대머리인 거예요. 김 목사가 머리숱이 적다보니 제가 머리숱이야기만 나오면, 눈이 빤짝거리며 텔레비전을 봅니다. 그런데 머리숱에 대해서 전문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제 머리보다 더 머리숱이 적습니다. 그러면 전문가로서 신뢰성이 없습니다. 눈이 나쁜 사람들에게 ‘불편한 안경을 벗게 해서 새로운 세상을 보여 준다’말하면서 수술 받으라고 권하는 안과의사가 정작 자신은 안경을 쓰고 있습니다. 이러면 신뢰가 안 가죠.
이런 사람들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전혀 믿음이 가지 않고, 속으로 ‘오지랍 넓은 당신이나 잘 하세요’라는 비아냥거림이 저절로 나오고 싶지 않겠어요?
여기서 깨달아야 되는 진리는 ‘흔히들 말하는 전문가 얘기가 다 맞는 건 아니다’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그런 잘못된 전문가의 말을 무작정 믿고 따라가는 자들이 정말로 많습니다. 전문가 얘기 듣고 갔다가 망한 사람들이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이 아무리 전문가라 주장해도, 절대 실수하지 않는 완벽한 전문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많이 알 뿐이지, 그 조금 더 안다는 것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전지전능한 모습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떤 문제를 시작할 때나, 또는 어떤 일을 하다가 중간에 난관에 봉착하게 되면, 전지전능하시고 만사형통으로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기도로 문제를 맡기고 해결함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대충 해보고 안 되면 슬그머니 꽁지를 내리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도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최고의 전문가인 하나님에게 아뢰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후회하지 않습니다.
2. 둘째로, 다수의 길을 따라갈 때 광풍이 붑니다.
12절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12절 중간에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라는 부분을 눈 여겨 봐야 합니다. 배에 모인 사람들이 의견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곳에서 머물면서 겨울을 보내자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이 항구가 좁기 때문에 뵈닉스라는 항구로 가서 겨울을 보내자고 말합니다.
결국 어떤 사람의 목소리가 승리하느냐 하면,‘뵈닉스로 가자’고 주장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많게 됩니다. 다수결(多數決)이라는 말은 ‘회의에서 많은 사람의 의견에 따라 안건의 가부를 결정하는 일’입니다.‘더 많은 사람의 목소리가 힘을 얻는 것’이것이 바로 이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원리가 되는 다수결의 원칙입니다.
그러다 보니 선거에서 한 표라도 더 많이 받은 후보가 당선되고, 회의 때 찬반양론이 격렬하게 대립되어도, 투표해서 더 많이 표를 얻은 쪽의 주장이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수결의에 따른 방향 결정은 이따금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다수결이라는,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고 가자고 했고 결정 했으니, 그 길로 가면 다 옳고 좋은 것이라 생각하면 큰 시행착오를 겪게 됩니다. 다수결이 항상 절대적 선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한 결정을 별다른 비판 없이 그대로 따라 할까요? 이것을 “다수결의 동조현상”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결정한 것이라면, 그냥 믿고 따라한다는 말입니다. 참 이상한 것이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다수를 따라 가는 동조 현상이 다 있습니다.
이렇게 몰려가다가는 얼마 못되어 망하는 것이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다수결이라 올바른 길이라 안이하게 믿고 따라갑니다. 다수결이라고 해서 절대 완벽하고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화면을 보십시다. 하늘에서 무언가 폭발하는 장면인데, 바로 우주로 쏘아 올린 우주선이 공중에서 폭발한 사진입니다. 1986년 최악의 우주선 폭발사고였던 챌린저호 폭발을 찍은 아주 유명한 사진입니다. 챌린저호 폭발은 다수결 동조현상이 어떻게 집단사고 와 연결되어, 무지성적이고 비극적 결정을 초래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자주 인용됩니다.
1986.1.27.일 챌린저호 발사 전날, 우주왕복선 챌린저호의 부스터 로켓(O-ring)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당시 기온이 매우 낮았고, 고무 재질의 O-링이 제대로 밀착되지 않을 위험이 있다는 경고가 있었습니다. 당시 기계제작의 임무를 담당하였던 모튼 티오콜(Morton Thiokol)사의 대부분 엔지니어들은 ‘발사를 연기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이 의견은 묵살되고 맙니다. NASA와 상부 경영진은 이미 여러 차례 발사가 연기된 상황에서 정치적·대중적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회의 중 NASA 측은 ‘기술적 문제가 발사 불가를 입증하지 못한다’는 식의 논리를 제시하며, 사실상 ‘발사를 강행해야 한다’는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이때 티오콜사의 엔지니어들은 극구발사반대를 주장하였지만, 상부 관리자들은 논의 끝에 다수 의견(발사 승인)에 동조하는 쪽으로 결론을 돌렸습니다.
여기서 다수결 동조현상의 부정적 모습이 개입합니다. 전문 엔지니어 개개인의 판단은 ‘발사하면 극도로 위험하다’였지만, 힘이 있는 다수(특히 NASA와 회사 경영진)의 의견은‘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이다’라는 쪽으로 집단적 합의가 형성됩니다. 그리고 소수의 목소리를 무시한 다수의 목소리가 힘을 얻어 발사를 강행합니다. 그 결과 챌린저 호는 발사된지 75초 만에 공중에서 폭발해 버립니다. 이로 인해 탑승자 7명 전원이 한순간에 사망해버립니다.
사고 이후 로저스 조사위원회는 의사결정 과정에서 잘못된 다수결이 사고의 구조적 원인이라고 지적합니다. 챌린저호 사건은 ‘조직이 다수결로 빠르게 결론을 내리더라도, 반드시 소수의 반대 의견을 존중하고 검토해야 한다’는 아주 중요한 역사적 교훈을 남긴 실례입니다.
지금 대한민국도 보면 다수결동조현상에 극심하게 빠져 있는 상황입니다. 22대 국회위원 정당별 분포도를 보면, 집권여당의 민주당이 175석을 가지고 있고, 게다가 대통령까지 보유한 초거대 여당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들이 절대 선으로 생각하고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합니다.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야당이 아무리 반대해도 밀어 부치면서 정권을 장악합니다.
더 무서운 것은 많은 국민들조차, 절대 다수석을 가진 민주당이 올바르다고 맹목적으로 믿고 따라가는 다수결동조현상에 몸을 담고 있습니다. 정당하고 올바른 비판을 하지 않습니다. 이러다가 민주당이 안하무인식으로 밀어부치고 있는 대한민국이 공중에서 폭발해 버린 챌린저호의 뒤를 따라가지 않는다고 누가 정담할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도, 다수결 동조현상에 따라 뵈닉스로 가자는 의견이 힘을 얻게 됩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분별하였던 바울은 ‘뵈닉스로 가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 아니라’고 누누이 강조하였지만,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와 다수의 말을 따라 뵈닉스로 가려고 배를 띄우게 됩니다. 결국 뵈닉스 행 다수결의 결정이 유라굴로 광풍속으로 이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남들이 다 한다고 해서 따라가는 일은 참으로 조심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 가운데도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남들이 다 투자한다니까 투자하고, 남들이 펀드 한다니까 펀드하고, 남들이 땅 산다니까 나도 땅 사고, 그러다가 결국 어떻게 됩니까?
광풍에 휩쓸려서 모든 것 다 날려 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에게 기도하지 아니하고, 남들 하는 대로 그냥 따라 가보세요. 다수결로 따라 가보세요. 결국은 광풍에 휩 쌓여 다 날려 버리게 됩니다. 소수라도 말씀에 의지해서 진리 편에 서야 되는데, 아무 생각 없이 다수결로 따라가면,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 중 만에 하나 내가 지금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사경을 헤매고 있는 상황이라면, 침착하게 믿음 안에 닻을 내려야 합니다. 내 생각은 접어 두고, 내 주변에서 나를 흔드는 다수의 목소리는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 안에 흔들리지 않도록 닻을 내려야 합니다.
13절을 보세요.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바울의 의견을 묵살하고, 다수가 목소리를 내어 출발 시킨 배가 순풍이 불어서 앞으로 잘 나가니 그들이 뜻을 이룬 줄로 알고 좋아합니다. 순풍이 불어 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니 환경마저 잘 따라준다고 자화자찬했을 것입니다.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고 배를 출발시킨 자신의 판단이 아주 탁월한 판단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배가 항해하는 환경이 너무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환경이란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조금 전까지 불던 순풍은 순식간에 광풍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순풍이지만, 그 순풍이 미친바람 광풍으로 순식간에 변하면서 내 모든 상황을 한순간에 최악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15절 보세요.“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대로 두고 쫒겨 가다가”광풍을 만나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떠밀려 다녔다는 말입니다. 방향을 잃어버리고 바람 부는 대로 배가 표류합니다. 끝없이 표류하게 됩니다. 그냥 바람에 밀려 여기저기 쫓겨 가다가는 결국은 배는 파선하게 됩니다. 그러니 바람에서 요동하지 않도록 닻을 내려야 합니다.
20절,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배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희망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살기 위해 생명 같은 배의 화물도 다 버려 버리지만, 구원의 여망은 없습니다. 절망과 초기와 낙심만 휘몰아 치고 있습니다. 인간이 가진 노력의 한계에 부딛친 것입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의 백성은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죽을 상황이라도 희망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광풍 한가운데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에게 내 영혼의 닻을 내려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방향 전환을 해야 합니다. 떠나갔던 말씀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면 살 수 있습니다.
내가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되면, 광풍이 나를 흔들고 있다고 생각되면, 하나님에게 영혼의 닻을 더 굳건하게 내리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흔들릴 때 바울만은 하나님을 신뢰했고, 결국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들에게 생명의 희망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만이 내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분임을 믿고, 더 하나님을 굳건하게 의지하는 저와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