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통합적 관점
관념적 관점과 실재적 관점 사이에는 미적 지각의 차이만큼 다양한 세계의 작품이 보인다. 몇 가지로 추출해본 유형 가운데 피상적·추상적·기계적·장식적 지각의 작품은 인식 부족의 소산이고, 또 그만큼 덜 형상화된 작품의 형태를 보여준다. 그러나 사실적·감각적·풍자적 · 해석적 유형은 각각 그 나름의 아름다운 미적 인식을 보여준다. 그런 만큼 후자의 유형에 속한다면, 그 유형이 어떤 것이건 그 유형으로부터 발생하는 우열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유형은 사고의 깊이와 넓이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 태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관념적 관점과 실제적 관점 사이에 통합적 관점이 있다.
南쪽에선
果樹園의 林檎이 익는 냄새,
西쪽에선 노을이 타는 내음······
산 위에 마른 풀의 향기,
들가엔 장미들이 시드는 향기······
당신에겐 떠나는 향기,
내게는 눈물과 같은 술의 향기
모든 肉體는 가고 말아도,
풍성한 향기의 이름으로 남는
傷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여,
높고 깊은 하늘과 같은 것들이여······ -김현승, 「가을의 香氣」¹⁶
이 작품의 1·2연은 실재적 관점의 사실적 묘사이고 3.4연은 1·2연에 근거한 관념적 관점의 해석이다. 이것을 간단하게 분석적 구조로 바꾸어보자.
위에서 볼 수 있는 바처럼 1. 2연은 1차 해석과 2차 해석의 구체적 정황이 되고 있다. 그 두 번의 해석은 아름답다. 당신(가을 또는 시간, 또는 가을의 입장에서 향기를 보는 존재)에게는 떠나면서 남기는 내음이지만, 나에게는 "눈물과 같은 술의 향기"이다. 그냥 술의 향기가 아닌 눈물과 같은 술의 향기! 이 표현 속에는 고통과 환희가 버무려진, 상(傷)하면서까지 아름다운 향기를 만드는 그 가을을 아는 사람의 영혼이 내장되어 있다. 그런 향기란 시인에게는 언제나 “높고 깊은 하늘과 같은 존재로 느껴진다. 이와 같이 이 작품은 실재적 (1·2연) 현상을 수용함으로써 관념적인 해석(3.4연)을 더욱 효과적이게 하고 있다.
이 통합적 관점은, 다른 면에서 고찰해보면, 관점 상호 간의 어울림, 지각상호 간의 넘나듦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낡은 小學校 건물이
외톨로 서 있었다.
텅빈運動場엔
壯丁들만한 풀죽은
햇살들이
희끗희끗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
서 있을 뿐
징집 당해 간
보이지 않는
時代.
녹슨 철봉대 밑에
소경이 된 앉은방이 꽃이
제 속을 끓여
설움을 녹이고 있었다.
저 앞의 먼 바다에서
말 없는 하루가
아람드리로
넘어가고 있었다. -노향림, 「1950년」¹⁷
이 시는 감각적 지각을 축으로 하여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징집 당해 간/보이지 않는/시대"라는 관념의 의인화 “아람드리로/넘어가는 하루라는 관념의 의물화, “제 속을 끓여/설움을 녹이는 꽃이라는 사물의 의인화 속에 포함되어 있는 해석만큼, 그만큼의 관념적 관점이 녹아 있다.
전라도나 경상도
여기저기 이곳저곳
산굽이 돌고 논밭두렁 돌아
헤어지고 만나며 아하,
그 그리운 얼굴들이
그리움에 목말라
애타는 손짓으로 불러
저렇게 다 만나고 모여들어
굽이쳐 흘러
이렇게 시퍼런 그리움으로
어라 둥둥 만나
얼싸절싸 어우러지며
가슴 벅찬 출렁임으로 차오르나니
어화 어화 숨차
어화 숨막히는 저 물결
어화 어기여차
저 시퍼런 하동 포구 -김용택, 「하동포구」¹⁸
이 시의 '하동포구 물결'은 그리움에 시달리며 여기저기 떠돌다 만나는 사람들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작품에서의 물결은 실재적 존재인 동시에 상징화된 사물이다. 이때의 시점은 실재(물결)와 관념(사람들)이 상징이라는 수법을 통해 완전히 겹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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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김현승시전집』, 관동출판사, 1974, pp. 142~43.
17 노향림, 연습기를 띄우고, 연희, 1980, pp. 116~17.
18 김용택, 『섬진강』, 창작과 비평사, 1985, p. 27.
『현대시작법』 오규원
2024. 11. 1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