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향 시조집, 『구름 解法』, 동학사, 1995.
李一香
1930년 경북 대구 출생, 효성여대 국문과에서 수학, 1983년 시조문학 추천완료
2024년 11월 2일 별세(향년 94세)
구름 해법(解法)
열리는
한 바다인데
풀리지는 않는 바다
빨아도 얼룩만 지는
비릿한 내 육신이여
오늘은
흰 구름 한 자락
하늘 위에 내다 건다
<이근배 해설>
자유시와는 달리 시조는 초‧중‧종자으이 3장 구도로 짜여져 있으면서 각 장마다 기능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구름해법」은 그러한 시조의 구조적 특성을 빼어나게 살리고 있다.
“열리는/한 바다인데/ 풀리지는 않는 바다”의 반어적 대비로 초장을 드려 놓고 “빨아도 얼룩만 지는/ 비릿한 내 육신이여”로 끌어당기면서 비약의 긴장감을 돋우고 있다. 다시 종장에서 “오늘은/ 흰 구름 한 자락/ 하늘 위에 내다 건다”로 반전과 함께 이미지를 상승시키면서 의미의 깊이를 드러낸다.
지극히 제약된 단수 속에 무한히 넓은 공간을 만들면서 시인의 내면적 아픔을 하늘 위의 구름으로 표백시키는 기법은 자유시로서의 해내기 어려운 기술이다. 또한 거기에 값하는 이일향 시인의 대담한 자연과의 교감, 그 사랑의 열기는 자못 뜨겁다.
가을 단상(斷想)
들풀들
물들어 눕는데
넝쿨들
팽팽히 매어라
시고 떫던 열매
슬픔도
단물 실리고
밟히면
소리로 우는가
은혜로운
이 가을 빛
<이근배 해설>
시조의 원형은 평시조 단수이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45자 안팎의 짧은 글자 속에, 그것도 초‧중‧종장의 틀을 살리며 한 편의 시로 완성시킨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발표되는 시조들이 단수보다는 연작이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가을 단상」도 단수로 완벽하리만큼 짜여진 시조의 원형과 진수를 보이는 빼어난 작품이다. 이 시에서도 이일향 시인은 “가을”과 화자인 자기를 은유로 대입시키는 솜씨를 능숙하게 보이고 있다. “들풀들/ 물들어 눕는”이 스스로 가을을 자처하는 화자의 연륜이라면 “넝쿨들/ 팽팽히 매어”는 자녀들이거나 남은 생애에 대한 강한 의지일 수 있다.
“시고 떫던 열매”가 젊은 날이나 삶의 미숙성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슬픔도/ 단물 실리고”는 지나온 날의 슬픔과 기쁨, 그 발자취 또는 세상을 넓게 내다보는 지혜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시를 광채나게 하는 것은 종장이다. “밟히면/ 소리로 우는가/ 은혜로운/ 이 가을 빛”은 시조의 종장을 어떻게 매듭지어야 하는가에 대한 본보기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로 잘 여물어 있고, 초장, 종장을 함께 살리는 반전의 묘법을 구사하고 있다.
사랑
한 줌에 질 수도 없고
가질 수는 더욱 없고
물같이
손 담궜다가
풀잎
뜯어 띄우는 것
사랑은
그렇게 왔다가
두 손 모아
보내는 것
이과수 폭포 앞에서
브라질 남부 고원
새 나라 가름한 이과수 폭포
온통 물줄기로만
두드리는 하늘과 땅
그 말곤
할 말이 없어라
나마저도 잊었어라
자연은 밀림을 두르고
밀림은 강 흘리고
끝내는 굉음 하나로
무너지는 천지 앞에
신어(神魚)는
어디에 사는고
나는 한갓
피라미떼
악마의 목구멍으로
쏟아 붓는 천 길 수연(水煙)
무지개 서고 지는 자리
공룡마저 자리 뜨고
타오른
눈엽(嫩葉)만 푸르러
넋을 잃고
흔들어라
□ 악마의 목구멍 : 275폴 중 가장 낙차가 아름다운 용추(龍湫)
<작품 해설>
사랑에 대한 천착
-이일향의 시세계
이근배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시를 함께 쓴다는 것만으로도 큰 촉복이 아닐 수 없다. 그 위에 시조라는 외길을 함께 걷고 있으면서 시집의 말미에 지면을 허락받는 일은 더할 수 없이 행복한 일이다.
시인은 자연이나 그 밖의 사물들을 끌어다가 자신과 몸바꾸기를 한다. 그때 자연이나 사물은 메타포에 의해 상징이 되고 그 상징은 자기화 속에 새로운 창조물이 되어야 한다. 이 시집에 실린 작품들은 대체로 나무, 꽃, 돌, 산, 강물, 풀, 바람, 하늘 등 자연에 대한 소재와 어휘들로 짜여져 있다. 그러면서 동원된 자연들은 하나같이 시인 자신의 내면 풍경의 색채가 되고 선이 되어 전혀 새로운 그림으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