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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성지
바르셀로나에서(2014.4.17.)
여행은 낯섦과 불편함이 동반했지만 날마다 다른 새로움이 기다림이 있다. 여행하기에도 알맞은 봄날이다. 모두가 깊은 잠에 빠진 새벽 3시 30분에 인천공항으로 출발하는 리무진 버스에 올랐다. 직장에서 함께 생활했던 동갑내기 6명이 오래전부터 꾸린 모임에서 여행을 계획하게 됐다. 여행지의 정보를 세밀하게 조사하여 알려준 친구 정금숙 덕분에 준비 과정은 여느 때보다 순조로웠다. 핀란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열한 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곳은 헬싱키 공항이었다.
그곳에서 세 시간 후에 다시 바르셀로나에 가기 위해 다시 비행기를 탔다. 긴 비행을 마치고 드디어 숙소에 도착하였다. 다음날의 관광을 위해 일찍 잠에서 깨었다. 스페인의 날씨는 유리알처럼 눈부셨다. 첫 번째 관광은 성가족 성당(La sagrada Familia) 이었다. 사그라다는 스페인어로 ‘성스러운’이라는 뜻이며, 파밀리아는 ‘가족’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가족 성당’이라고 한다.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건축이다. 세계적인 천재 건축가 스페인을 대표하는 가우디의 최후 걸작이라고 했다.
성당 앞에 서는 순간,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감동이 일었다. 하늘로 치솟는 탑들과 섬세함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조각상들이 그러했다. 이들은 1882년 3월 10일(성 요셉 성인 축일)에 공사를 시작했다는데 당시에는 네오 고딕양식으로 설계되었다가 1년 후 가우디가 설계를 맡으면서 무데하르 양식과 초현실주의적 양식으로 지어지고 있었다. 자연을 모티브로 설계했다는 성당 내부와 외부 모두 독창적인 면들이 두드러졌다.
그중에서도 우람하게 높이 솟은 4개의 탑은 바로셀로나를 대표한다고 했다. 탑에는 ‘쌍투스, 쌍투수, 쌍투스(sandus... .)’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 성찬의 전례에 하느님께 찬미하는 노래로 불리는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라는 뜻이다. 미사 전례의 한 부분이 건축물에 새겨진 사실에서 가톨릭 국가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거룩한 시간이었다.
성당 안에 제대가 있는 곳에서부터 조배를 한 후 가우디의 무덤이 있는 지하에서부터 차근차근 살펴보기 시작했다. 계단을 오를수록 웅장하고 섬세한 성가정 조각품들을 보고 감탄이 절로 나왔다. 성당의 서쪽 피사드 벽면에 십자가형으로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이 50개국 언어로 새겨져 있었다. 더욱 반가운 것은 한글로 새겨진 기도문이었다. 우린 그곳에서 한참 머물렀다.
성당 외부에 동쪽 부분에 탄생의 파사드(예수 탄생, 유년기, 청년기 묘사), 서쪽 부분의 수난의 파사드(예루살렘의 성에서부터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수난 묘사)가 있었다. 그런데 남쪽 부분은 그리스도의 영광이 묘사되어 있는데, 아직 미완성으로 개방되지 않았다. 가우디는 성당 건축의 미완성을 예상하였기 때문에 탄생의 파사드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다고 했다. 그의 걸작 안에서 불우했던 가우디의 어린 시절의 삶을 생각했다. 더불어 이 시간이 자연을 영감으로 한 성당 건축을 위한 바탕이 되지 않았나 싶었다. 2026년쯤에는 완공된다고 했다. 그때를 기약하면서 구엘 공원으로 이동했다.
요즈음 TV에서 방송한 『꽃보다 할배』라는 프로그램 덕분인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유명세가 있었다. 이곳은 가우디의 후원자인 ‘구엘 백작’의 요청으로 1900년부터 14년간 가우디가 공사를 진행하다가 구엘의 사후 공사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시민들을 위한 공원으로 개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문으로 들어서니 가우디 박물관과 마주할 수 있었다. 앙증맞은 건축물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조금 지나니 모자이크로 타일 조각을 장식한 뱀의 분수를 만날 수 있었다. 드넓은 광장을 빙 두른 물결모양의 벤치도 인상적이었다. 그곳에 앉아 잠시 휴식도 취하고 사진도 찍었다. 넓은 중앙 광장에서 내려다보니 시가와 성가족 성당이 한눈에 들어왔다. 덤으로 얻은 기쁨이었다. 한참 머물고 싶은 그런 곳이었다.
그곳에서 조금 올라가니 시장으로 쓰이는 공간이 나왔다. 86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 그리스 신전 내부를 연상케 했다. 시가지에서 본 카사바트요와 카사밀라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작품인 것이 아닌가 하는 끊임없는 물음으로 이어졌다. 카사바트요는 바다를 주제로 한 건축물로 카사밀라 주택과 마주하고 있었다. 이 카사밀라 옥상을 모티브로 영화 스타워즈가 제작되었다고 하니 가우디의 창의성을 어느 누구도 가늠할 수 없었다.
다시 지중해 바다로 연결된 람블란스 거리로 향했다. 람블란스 거리는 아랍어로 ‘돌들의 강’이라는 뜻이다. 이곳은 유럽에서 가장 사랑받는 번화가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각 구역으로 이동할 때마다 람블란스 거리의 역사를 대변해 주는 유서 깊은 명소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관광객을 위한 보케리아 시장 또한 유명하다. 우리를 비롯한 수많은 관광객이 재래시장의 정감과 여러 가지로 조각낸 컵 과일이 무척 달고 시원해서 더위를 식혀주었다. 시장을 둘러보면서 간식 사 먹는 재미에 빠졌다. 때마침 ‘산조르디의 날’로 축제도 한창이었다. 마을에 용이 나타나 처녀들을 잡아가는데 성조르디가 나타나 용을 물리쳤는데, 이때 칼에 찔린 용이 흘린 피가 꽃으로 변했다고 한다.
점심때가 되어 항구에서 ‘빠이야’란 음식을 먹었다. 갖가지 야채, 고기, 쌀을 넣고 볶다가 마지막에 국물을 넣은 후 고슬고슬하고 매콤하게 먹는 음식이다. 실제로 먹어보니 다소 특이한 감은 있었다. 하지만 이 나라의 전통 요리를 맛보는 일 역시 여행에 중요한 대목으로 생각하니, 낯선 맛이 어쩐지 편해졌다. 식사 후에는 출렁이는 검푸른 바다의 수평선과 부드러운 백사장 사이를 거닐었다. 이곳의 바다 냄새는 뭔가 모르게 우리나라와는 조금 달랐다.
유난히도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다시 몬주의 언덕으로 이동했다. 우리나라의 황영조 선수가 1990년 이곳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우승한 것을 기념한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몬세라트(2014.4.18.)
잠시 머물러 단체 사진을 찍은 후 일정표의 계획에 의해 ‘몬세라트’로 이동했다. ‘몬세라트’는 ‘톱니처럼 갈라져서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라는 뜻을 지닌다. 이 산은 해발 1,235m로 해저의 융기로 만들어졌는데, 약 6만 개의 봉우리들이 톱니처럼 갈라져 ‘톱니 산’으로도 불린다. 산 중턱 기암절벽에 세워진 몬세라트 수도원에 도착하니 자연의 섭리에 따른 삶에 대한 동경과 그 외의 오묘한 기분이 몸을 파고들었다.
신들의 움직임이 느껴질 만큼 조용하고 엄격함이 여실히 전해졌다. 그곳 수도원의 유래는 이러하다. 880년 한 무리의 목동들이 몬세라트산 위에서 빛이 내려오는 것을 목격했다. 천사들의 방문은 한 달 동안 계속되었으며, 산속 동굴로 이어졌다. 마을 사제들은 이곳을 둘러보다가 동정녀 마리아의 이미지를 발견했다. 11세기에 올리바 수도원장이 이곳에 작은 수도원을 세웠고, 오늘날에도 많은 베네딕도회 수사가 바위투성이 산을 찾는 순례자들을 환영한다고 했다.
그곳은 박물관 건물은 ‘네 마리 고양이’라는 별칭으로 알려졌고 레스토랑 라 카사 마르티를 포함하여 바르셀로나의 수많은 랜드 마크를 설계한 조셉 푸치 카다파르크의 작품이란다. 웅장하면 포근하게 세워진 대성당 안에는 몬세라트 안의 이층에 모셔진 검은 성모 마리아 상이었다. 대성당 입구 오른편 계단을 따라 5개의 예배당, 천사의 문, 성자들의 계단, 그리고 또 다른 3개의 방을 지나서야 비로소 검은 마리아상을 만날 수 있었다.
검은 성모상 손의 둥근 공에 손을 대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었다. 검은 마리아상을 향해 길게 늘어선 관광객들의 줄은 끝이 안 보일 정도였다. 겨우 차례가 되어서 성모상 앞에 서니 참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에 길게 머무를 수는 없었다. 둥근 공에 손을 대고 전구 하여 주시기를 빌며 그곳을 겨우 빠져나왔다. 내내 성모님의 모습을 생각하며 산타코바 전망대로 발길을 옮겼다.
몬세라트 수도원에서 소년소녀 합창단의 노래를 들으며 내려오는데 그동안 피로가 한꺼번에 풀리는 듯했다. 몬세라트 수도원은 1223년에 소년 합창단으로 설립된 합창단이란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소년 합창단으로 각종 합창 대회를 휩쓸고 실력까지 검증되었다. 그곳을 떠나온 후에도 여운이 오래갔다. 이곳 역시 가우디의 건축 기법에서 영감을 얻은 곳이라고 하니, 가는 곳마다 그의 이름이 빠지지 않았다.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몬세라트를 감상하며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왔다. 발렌시아 론다에서 그날의 하루를 정리하면서 다음 관광을 위하여 잠을 청해야만 했다.
새벽 5시에 알람에 맞춰 새로운 일정을 시작했다. 그라나다로 가기 위해 다시 차에 몸을 실었다. 8시간을 꼼짝없이 차 안에 있어야 했는데 스페인 영화 ‘고야의 유령’을 관람하다 보니 시간도 알차게 흘렀다. 중간에 어느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었다. 햇살이 너무 따가워서 선글라스가 필수였다. 주변의 오렌지 나무와 체리 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초록빛이 평원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눈의 피로를 풀었다.
드디어 스페인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알함브라 궁전에 도착했다. 이곳은 그라나다의 상징이자 가장 귀중한 자산이라고 했다. 알함브라는 아랍어로 ‘붉은 성‘이라는 뜻이란다. 13세기 스페인의 마지막 이슬람 왕조인 나스르 왕조의 무하마드 1세가 성안에 왕궁을 축성하고 그 뒤 역대 왕들이 증개축을 반복해서 14세기 유스프 1세 때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 그라나다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아 7개의 궁전과 모스트, 주택 시장 등이 들어선 대도시로 발전했다. 그라나다 왕조인 마지막 왕인 보압딜 12세는 이사벨라 여왕에게 조공을 바치지 못한 대신 성을 넘기고 쫓겨 가면서 안달루시아 지방에 있는 시에라네바 산맥을 넘게 된다. 이때 그는 산을 넘으면서 “스페인을 잃은 것은 아깝지 않으나 알함브라 궁전을 다시 볼 수 없음이 원통하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궁전에 얽힌 이야기는 클래식 기타 선율을 타고 세상에 알려지면서 주목받게 되었다. 현재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궁전 내부 복구와 세심한 관리를 하고 있다고 했다. 헤네랄리페는 아랍어로 ‘건축가의 정원’이라는 뜻이다. 14세기에 왕가의 여름 별궁, 왕들이 더위를 피해 휴식했다고 한다. 초록의 정원수 터널들과 웅장한 조각들은 오랜 역사를 대변하는 듯했다. 프란시스 타레가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기타 연주로 들으며 그곳을 떠나왔다.
그라나다 호텔에서 짐을 풀고 간단한 저녁 식사를 했다. 8시에 시작하는 플라멩고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모처럼 여유롭게 멋도 부렸다. 플라멩고는 집시들의 예술로 푸대접받던 1913년 카르메 아마야라는 무용수를 통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오늘날 스페인을 대표하는 플라멩고 춤은 집시들끼리 즐기던 것에서 타블라오에서 술을 마시며 감상하는 춤이 됐고, 오늘날에는 발레, 오페라와 접목해 대형 극장에서 공연하는 예술로 발전했다. 카리스마와 절제된 멋이 느껴지는 플라멩고의 강인함 춤을 보는 사람들을 충분히 매료시켰다. 춤과 노래가 함께 어우러진 밤은 그곳에 모인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시간을 선사했다.
다음 날은 아침 일찍 미하스로 향했다.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하얀 마을에는 소담하고 작은 골목들이 아기자기하게 펼쳐져 있었다. 미로 속 같은 골목을 지나다가도 순간 일행을 놓치기도 하여 머리가 뾰족뾰족 섰다. 늦은 밤 카페에서 느긋한 와인을 마시며 미하스의 깊어져 가는 밤을 보았다.
아침에는 마을의 경치를 보며 걷는 시간을 가졌다. 상쾌함이 온몸을 감싸고 돌았다. 새로운 여행의 날을 다짐할 수 있었다. 우리는 다시 투우의 발상지인 론다로 이동했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 말라가주에 위치한 론다는 가파른 협곡에 있는데 오래전 개봉했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의 배경지이기도 했다. 거센 바람 때문에 누에보 다리 위에서 모자를 날리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그곳에는 예전에 투우 경기장도 있었는데 현재는 동물 보호를 목적으로 문을 닫았다고 한다.
우리는 세비아로 발길을 옮겼다. 세비아 전성기를 만날 수 있는 구시가이다. 코르도바 메스키타 사원은 로마 다리 건너가기 전 쪽에 있다. 메스키타는 스페인어로 모스크라는 뜻인데 코르도바에 있는 가톨릭 성당을 가리킨다. 세비아의 상징인 히랄다 탑은 12세기 말 이슬람교도 아르모아드 족이 만들었다고 한다. 원래는 이슬람 사원의 첨탑이었으나 헐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다가 26세기에 기독교인들이 플라테스코 양식의 종루를 설치하고 28개의 종과 신앙을 상징하는 여성상을 세워 풍향계 역할을 하게 했다고 한다. 여행객들의 인파에 밀려 시간상 높은 탑에 올라가지 못하고 오렌지 나무 정원에서만 감상하니 아쉬움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메스키타 성당에 들어서면 동쪽 편에 위치한 제대 중앙에 금속세공품으로 화려하고 성스럽게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성당 중앙 네이브를 중심으로 5개의 본당과 25개의 예배당으로 있어서 곳곳을 살펴보기에 많은 시간이 걸린다. 가이드와 일행을 놓치는 날에는 문제가 심각해지기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했다. 성당 안에 웅장하고 거룩한 곳곳의 성물과 성인들을 둘러보았지만 그 중에서 눈에 띠는 것은 콜럼버스 무덤이 있는 곳이었다.
콜럼버스는 이탈리아 출신지만 에스파냐(스페인) 여왕 이사벨의 총애와 후원으로 인도를 찾아 항해하며 쿠바, 아이티, 트리니다드 등 발견했다. 에스파냐 옛 왕국(레온, 카스타, 나바라, 아라곤)왕이 조각상인 콜럼버스 관을 메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 깊었다. 정원에는 오렌지 나무 60그루가 질서정연하게 늘어져 있어 오렌지 정원이라고도 했다.
대성당을 2~3시간 정도 관람하고 ‘황금의 탑’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1220년 이슬람교도가 건설한 탑으로 당시에는 탑 위가 황금색의 타일로 덮여 있었기 때문에 ‘황금의 탑’이라고 불렸다. 이곳에서 마젤란이 세계 일주 항해를 떠난 인연으로 현재에는 해양 박물관이 되었다고 한다. 황금의 12작 모형인 탑은 처음에는 과달키비르강을 통과하는 배를 검문하기 위해 세워졌는데 강 건너편에 있던 8각형의 은색 탑과의 사이에 쇠줄을 매어 놓고 통행하는 배를 검문했다고 했다.
다시 바삐 코르도바로 이동하였다. 이슬람 화교 사원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 규모의 메스키타로 줄을 지어 들어갔다. 메스키타는 기독교와 이슬람 세력이 번갈아 가며 점령한 탓에 두 문화가 공존하는 독특한 모습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후기 우마이야 왕조를 세운 아브드 알라흐만 1세가 바그다드의 이슬람 사원에 뒤지지 않는 규모의 사원을 건설할 목적으로 785년에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 뒤 코르도바의 발전과 함께 848년, 961년, 987년에 확장하여 2만 5천여 명의 신자를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완성하였다고 한다. 사원의 넓이는 남쪽 180m, 동서 130m의 거대한 규모인데, 페르난도 대왕이 코르도바를 점령했을 때 메스키타의 일부를 허물었다. 카를로스 5세 때에는 이곳에 르네상스의 예배당을 무리하게 사원 중앙에 지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도가 한 곳에 동거하는 사원이 되었다고 한다. 사원 내부에 줄무늬 석영, 벽옥, 대리석, 화강암 등으로 만들어진 850개에 이르는 둥근 기둥이 아치를 이루는데 천장에 정교한 모자이크는 비쟌틴 제국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현재는 사원 중심에 기독교 대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다음 코스는 콘수에그라로 이곳은 평원의 전원이 펼쳐져 있었다. 『돈키호테』 작가 세르반테스의 유년기의 장소라고 했다. 적막한 시골 마을의 한 청년의 이미지를 ‘라만차’라고 했다.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에 등장하는 풍차 마을이라고 하니 다시 그의 소설을 유심히 읽어 볼 생각이다. 라만차 평원을 지키고 있는, 원기둥꼴의 하얀 풍차 아래로 붉은색 지붕이 이색적이었다. 세차게 불었던 그 바람과 풍차는 여전히 인상적이다.
다시 마드리드로 옮겨 숙소로 향했다. 마지막 날은 천년의 고도 똘레도 대성당으로 이동했다. 똘레도 대성당은 프랑스 고딕 양식의 대성당으로 페르난도 3세가 1227년 건설을 시작하여 266년이 지난 1493년에 완공되었다. 성당 우측 보물 실(Sala del Tesoro)에 있는 성체현시대(custodia)는 전체가 금과 은으로 만들어졌고 5,000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졌고 무게는 180kg이나 된다고 했다.
이 밖에 프랑스 왕생 루이가 기증한 (황금 성경)도 보관되어 있다고 했다. 본당 중앙에 있는 성가대실의 의자 하나하나에 새겨진 정교한 목각 형태의 아름다움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을 자아내기도 한다. 또한 대사원의 성기실(聖器室)은 미술관으로 되어 있어 엘 그레코와 고야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스페인의 화가인 ‘프란시스 고야’의 대표 작품인 ‘1808년 5월 3일’이 걸려 있었다. 그림 속에서 느껴지는 아픔이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마드리드에서(2014.4.19.)
다시 왕가의 도시 마드리드로 이동하였다. 스페인 왕궁은 마드리드의 최대 관광 포인트로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내부의 옥좌 방 ‘황금의 방’ 등 스페인 왕실의 화려했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어 황홀했다. 마요르 광장은 스페인의 전통적인 모습을 갖춘 광장으로 다양한 정치 · 문화 행사가 열리는 장소라고 했다. 직사각형 모양으로 4층 건물들이 광장을 에워싸여 있으며 다양한 레스토랑과 카페는 물론이고, 신선한 과일도 구매할 수 있는 산 미구엘 시장도 자리한다. 과일과 시원한 주스를 쉽게 맛볼 수 있어서 더없이 좋았다. 볼거리 또한 무궁무진했다.
마지막은 여행 중에 한방에서 지내는 시인 친구 박비아와 ‘프라도 미술관’으로 와서 인증사진을 찍었다. 이곳은 에스파냐 왕가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1819년 페르난도 7세 때 건립되어 왕립 프라도 미술관이 되었고 1868년 혁명 후에 국유화되어 프라도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건물은 카롤로스 3세때 비라누에바의 설계로 세워졌으며, 처음에는 자연과학 박물관을 만들 예정이었으나 뒤 미술관으로 자리를 굳혔다고 했다.
중세부터 18세기에 이르는 에스파냐 및 유럽 여러 나라의 회화 작품이 집중적으로 수집되었다고 하는데 그중에서도 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 등 3대 거장의 작품들이 제일 오래도록 눈에 남았다. 프라도 미술관을 나올 때 친구와 함께 글감을 구상하며 경쾌하게 나왔다, 스페인 여행을 함께한 말띠 친구 여섯 명과 다시 패키지여행 스페인을 기억해 본다.
첫댓글 성지순례를 다니면서 자세한 기록으로 수필을 쓰느라 수고 많았어요.
마음 다스리기 공부도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잘 읽었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