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화)
비밀 안경
정 혜 진
방에서 나오다가 넘어졌다. 무릎이 많이 아프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다.
“눈이 없냐? 문턱에 걸리게!”
마녀 목소리가 날카롭다.
“얼른 방 닦고 애기 업어라.”
나는 떨어뜨린 걸레를 재빨리 집어 들었다. 욕실로 들어가 걸레를 빨았다.
“물기 안 흐르게 꽉 짜서 닦아!”
거실 바닥까지 청소를 끝냈다.
“애기 업고 밖에 나가지 마라. 감기 걸리면 가만 안 둬!”
마녀가 으름장을 놓으며 애기를 내 등에 동여 멨다. 지금부터는 짐짝을 등에 지고 울리지 말아야 한다.
마녀는 외출을 했다.
이럴 땐 엄마 생각이 더 많이 난다.
“엄마는 나빠! 엄마 미워! 나만 두고 왜 가?”
내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희수야, 엄마는 많이 아파서 하늘나라로 여행을 떠났어.”
아빠가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없다. 엄마가 없다는 것만 슬프다. 하늘나라까지 따라가고 싶다.
아빠도 밉다. 우리 엄마 자리에 새엄마를 금방 데려다 놓았다. 엄마가 떠난 지 두 달밖에 안되었을 때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엄마라고? 우리 엄마도 아닌데 왜 엄마야?”
내 투정은 무서운 댓가를 가져왔다. 새엄마는 아빠 있을 때만 엄마다. 아빠가 없으면 마녀다. 새엄마와 마녀는 똑같은 이름이다.
아빠는 모른다. 내가 마녀한테 얼마나 구박받고 있다는 것을 본적이 없으니까.
마녀는 살살이다. 아빠가 보는 데서는 친절하다.
“우리 딸, 우리 딸”
이렇게 말하면서 다정한척 한다.
아빠는 바보다. 내 머리를 조금만 만져보면 금방 알 수 있을 텐데 눈치가 꽝이다.
“아빠한테 말하면 죽어! 알았지?”
공포에 질린 나는 아예 입을 닫아버렸다. 마녀가 나한테 하는 짓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마녀는 머리를 제일 많이 때린다. 머리에서 피가 날 때도 여러 번이다. 손바닥과 주먹도 모자라서 파리채, 리모컨, 자, 회초리, 주걱, 후라이팬, 이런 것들은 모두 마녀의 손에 잡히면 폭력물로 변신한다. 마녀에겐 이유가 따로 없다.
등에 있는 짐짝을 내려놓고 싶은데 마녀가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서 꾹 참고 있다. 마녀가 나한테 한 것을 생각하면 때려주고 싶지만 아기는 잘못이 없다. 그래서 참는다.
마녀가 처음에는 저렇게 까지 폭력을 쓰지 않았다. 아기를 낳은 후부터 본격적으로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마녀의 속셈을 조금씩 드러낸 것이다.
친구들은 아직 학교에서 재미있게 지낼 텐데 나만 일찍 집에 온다. 짐짝 때문이다. 아니다 마녀의 폭력 탓이다.
“왜 ‘방과후학교’는 안 가니?”
선생님이 나한테 물었다.
“집에서 엄마랑 공부해요.”
마녀가 시킨 대로 핑계를 댔다. 나도 친구들처럼 피아노도 치고, 바이얼린도 배우고, 그리기도 하고 싶다. 그렇지만 그런 건 다 물거품이다. 마녀는 나를 못살게 부려먹는다. 겨우 초등학교 3학년인 나를 하인처럼 시킨다.
“너 같은 건 없어져도 돼.”
이렇게 심한 말까지 하면서 괴롭힐 때는 엄마를 따라가고 싶다.
얼마 전에는 전교생이 체험학습을 갔는데 그때도 나는 죽을 맛이었다. 학생 수가 적은 시골학교라 엄마들도 몇 명 같이 갔다. 여수에 간 것은 처음이다.
기차를 타고 간다는 말에 마음이 한층 들떠 있었다. 그러나 내 기대는 또 실망으로 변했다. 마녀 때문이다.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 마녀가 명령했다.
“애기 좀 업어라.”
나는 친구들 눈치를 살피면서 짐짝을 등에 멨다. 부끄럽고 창피했다.
같이 온 엄마들이 수근 거렸다.
“세상에 저러고 싶을까? 저러니까 계모라고 그러지.”
짐짝이 칭얼댔다. 울기까지 했다. 업고 있는 것이 정말 싫었다. 다른 친구들처럼 펄펄 뛰어다니고 싶었다.
“애기도 못 보냐? 철길에 확 밀어버린다. 들어가서 콱 죽어버려라.”
마녀가 나한테 엄포를 놨다. 그 소리가 귀에서 앵앵거렸다. 가슴이 쿵쿵거리고 몸이 오그라들었다. 체험학습이고 뭐고 완전 망쳤다.
이 말을 아빠가 들었어야 하는데 그런 상상은 꿈도 못 꾼다. 아빠에게 말했다가는 폭력이 대박을 칠게 뻔하다.
아빠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답답하다. 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조차 모른다. 오늘도 그랬다. 늦게 퇴근한 아빠는 밥 먹고, TV 보고, 거실에서 이야기한다. 마녀 말만 100% 믿는다. 나한테는 관심도 없다. 나는 마녀 눈치 보는 것이 싫어서 일찍 자버렸다.
공부시간에 선생님이 다가왔다. 눈을 비비고 있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희수야, 왜 가만히 앉아 있어? 얼른 써야지.”
“잘 안 보여서요.”
“글씨가 잘 안 보여? 언제부터 그랬는데?”
선생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걱정을 했다.
쉬는 시간에 나를 보건실로 데려갔다. 보건선생님은 이리저리 살피더니 시력검사를 했다.
“0.5 밖에 안 나오네. 눈이 이렇게 나빴어?”
보건 선생님이 깜짝 놀란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언제부터 그랬냐고 물었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알고 계시니?”
나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보건선생님은 아빠한테 전화를 걸었다. 아빠가 단숨에 달려왔다.
“희수아빠는 모르고 계셨어요? 눈이 아주 나쁘네요. 안경부터 맞춰야 할 것 같아요.”
보건선생님 말씀에 깜짝 놀란 아빠는 나를 데리고 나갔다.
“눈이 어떻게 나쁜지 원인부터 알아봐야겠다.”
아빠는 급하게 운전을 했다.
조금 있다가 도착한 곳은 읍내에 있는 안과병원이었다.
“정밀검사를 할 거니까 가만히 있어. 움직이지 말고.”
의사선생님이 기계 앞에 턱을 대라고 하면서 내 머리를 잡았을 때였다.
“아야~ 아얏! 아파요!”
나도 모르게 아프다는 소리가 나왔다. 눈물도 쏟아졌다.
“머릿속이 왜 이래? 어디서 다쳤니?”
의사선생님보다 더 놀란 건 아빠였다. 달려와서 내 머릿속을 살폈다.
“심한 자극으로 시신경이 손상을 입은 것 같습니다.”
상처 때문에 눈이 안 보이게 되었다는 말에 아빠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직 어린아이라 일시적일 수 있습니다. 치료해 봅시다.”
의사선생님은 친절했다. 그래도 주사 맞는 것은 무서웠다.
“오늘 치료는 끝났습니다. 바로 가셔서 안경부터 맞추세요.”
아빠는 병원을 나와서 안경점으로 갔다.
“특별히 좋은 안경 좀 맞추려고요. 너는 여기 좀 있어.”
나는 아빠가 시킨 대로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먼저 상담부터 합시다.”
아빠는 안경점 선생님과 한참동안 이야기를 했다. 기다리기가 지루했다.
한참 시간이 지난 다음에 안경점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이름이 희수라고 그랬지? 이리 들어와 봐라. 안과병원에서 검사를 했지만 안경을 맞추려면 정확한 검사가 필요하단다. 아파도 좀 참아라.”
선생님은 내 머릿속이 아픈 줄 다 아는 것 같았다. 조심조심 살살 검사를 했다. 그리고 아주 여러 번 사진도 찍었다.
“수고 많았습니다. 잘해 놓을 테니까 3일 후에 찾아가세요.”
선생님 말씀을 들은 후 안경점에서 나왔다.
차에 오르자 아빠가 나를 꼭 껴안았다.
“왜 그동안 말 안했어? 아빠한테는 말 해야지.”
“말하면 가만 안둔다고 그랬어요. 엄마가 무서워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오랜만에 아빠와 이야기를 하니까 서러웠다. 슬픈 마음이 고개를 들면서 숨어있던 말들이 마구 튀어나왔다.
“걱정하지 마. 아빠가 알았으니까 이젠 괜찮아, 괜찮아.”
아빠 손이 내 등을 또닥또닥 다독거렸다.
그날 밤 아빠는 마녀와 된통 싸웠다. 나를 먼저 자라고 해놓고 큰소리가 났다. 아빠 소리는 들리지 않았는데 마녀가 한 말소리는 천정까지 들썩거렸다. 나 때문에 싸운 것이 분명하다. 불안했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3일이 지나서 아빠가 학교로 왔다. 첫 시간에 일찍 오신 것이다.
“희수 데리고 안경 좀 찾으러 갔다 올게요.”
아빠는 선생님한테 미안하다고 말했다.
안경점 선생님은 아빠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주 특별하게 잘 만들었습니다. 어디 한 번 써 보자, 꼭 맞을 거야.”
안경점 선생님은 내 눈에 맞게 높이와 길이를 조절해 주었다. 귀에서 떨어지지 않게 보조바킹도 끼웠다.
글씨가 잘 보였다. 답답했던 기분이 좋아졌다.
“안경은 자주 벗는 게 아니다. 계속 끼고 있어야 눈이 빨리 좋아지는 거야. 잠 잘 때만 벗어야 돼. 알았지?”
안경점 선생님은 안경을 벗지 말라고, 벗으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당부했다. 약속 표시로 손가락까지 걸었다.
“앞으로는 안경이 너를 도와 줄 거야. 아주 특별한 안경이거든.”
돌아오는 길에 아빠가 말했다. 나는 아빠 말에 픽 웃었다. 말도 안 된 소리라고 생각했다.
“너 먼저 교실로 가거라. 아빠는 보건선생님 좀 만나고 갈게.”
교실 문을 살짝 열었다. 친구들이 모두 안경 낀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잘 갔다 왔니?”
역시 선생님이 최고다. 어색하지 않게 반겨준다.
수업이 끝날 때 보건선생님이 들어오셨다.
“희수야, 엄마 좀 만나야하니까 나랑 같이 집에 가자.”
마녀한테 어떻게 말할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희수 어머니, 공부시간에 갑자기 글씨가 잘 안 보인다고 그래서 안경 하나 맞춰줬어요.”
마녀는 보건선생님한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그러나 보건선생님이 가고나자 행동이 확 달라졌다.
“안경은 무슨 안경? 왜 엄마한테 말 안했냐?”
순식간에 마녀 손이 날아와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야아야~!”
나도 모르게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바로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 나 지금 옷 갈아입으러 가니까 준비 좀 해 놔.”
날카롭게 쏘아보던 마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직 화낼 일이 더 남아있는데 방해를 해서다.
“이 시간에 하필이면 전화야! 너는 들어가서 숙제나 하고 있어.”
아빠가 고마웠다. 전화한 건 처음이다. 마녀한테 안경을 빼앗길 뻔했는데 아슬아슬하다.
‘후~ 유~ !’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오늘 저녁에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밥 먹고 올 거야.”
아빠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엄마한테 말했다.
“희수는 아직 안 왔어?”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어! 너 안경 맞췄냐? 엄마가 해 줬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녀가 학교에서 보건선생님이 해 줬다고 대꾸했다. 아빠는 아무 것도 모른 척 보건선생님한테 고맙다고 그랬다.
안경을 낀 다음 날부터 신기한 일이 계속 일어났다. 마녀의 폭력이 시작될 때마다 핸드폰이 울렸다. 어쩔 때는 아빠가 급히 집으로 오는 일도 생겼다.
그리고 아빠가 자주 마녀를 몰아세웠다. 싸우는 횟수가 많아진 것이다.
“네가 아빠한테 일러바쳤지? 안 그러면 아빠가 어떻게 알아?”
마녀가 나를 다그치고 있을 때 또 핸드폰이 울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마녀는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래도 이제는 방법이 없다. 폭력을 쓰면 꼼짝없이 아빠한테 들킨다.
‘참 이상하단 말이야. 정말로 이상해. 에이, 미치겠네!’
마녀는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의심이 점점 커졌다. 정신이 돌아버릴 것 같다고 그랬다.
이상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아빠한테 망원경이 있을까? 어떻게 알고 마녀를 꼼짝 못하게 하지?’
아무리 궁리를 해도 아빠를 잘 모르겠다.
그날 밤 아빠는 또 마녀의 공격을 받았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지 속이나 압시다. 말 좀 해 봐요. 갑자기 당신 행동이 왜 달라졌는지 궁금해 죽겠단 말이오. 변해도 어지간히 변해야지.”
아빠는 딸한테 잘하면 되지 뭐가 답답하냐고 큰소리를 쳤다. 전에는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는데 버럭버럭 화를 낸다. 아빠가 진짜 많이 달라졌다.
나는 아빠 마음을 이제야 알았다. 아빠한테 바보라고 했던 거 취소다. 정말 잘못했다.
마녀의 폭력이 점점 줄어졌다. 집안일하는 것은 견딜 수 있다. 짐짝을 등에 멘 것도 참으면 된다. 머리를 얻어맞지 않으니까 살 것 같다.
그런데 또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 아빠가 나타난 것이다. 틀림없이 그릇소리 때문이다. 세재 때문에 손이 미끄러워 그릇을 깼는데 ‘쨍그랑’ 소리가 크게 났다.
“벌써 학교 갔다 왔어? 집안일을 네가 다 하냐? 엄마는?”
나는 아무 대답도 못했다. 마녀가 알면 큰일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또 나한테 화풀이를 할 게 뻔하다.
마녀는 아빠 퇴근시간이 다 되었을 때 집으로 왔다. 아빠가 마당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놀란 눈치다.
“그래. 딸한테 일 시켜놓고 잘하고 다닌다. 이게 엄마가 할 짓이야?”
아빠 목소리가 커졌다. 대뜸 화를 냈다.
“그래, 차라리 잘 됐다. 확실하게 하자. 장화홍련이나 신데렐라에만 있는 일인 줄 알았더니 바로 우리 집이네. 그러니까 계모란 말을 듣지. 이 미련한 사람아! 어떡할 거야. 앞으로도 날 속이고 딸 구박할거면 여기서 그만 두자. 대답해봐!”
마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풀이 팍 죽었다. 잘못이 들통 나서 빠져나갈 길이 없다. 아빠의 호령이 너무 세다.
“못된 버릇이 하루아침에 고쳐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마녀는 아빠 기운에 꼼짝없이 눌렸다. 앞으로 나한테 잘하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이렇게 좋은 일이 생길 줄은 상상도 못했다.
‘나부터 못된 걸 지워야해. 이제부터 마녀라고 하지 않을 거야. 새엄마도 엄마니까’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고 있을 때다.
아빠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벗어놓은 내 안경을 집어 들었다.
“안경 덕분이야. 여기 이 비밀센서가 소리를 감지해 주거든. 그러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 엄마도 이제 꼼짝없이 너한테 잘 할 거야. 그 대신 비밀은 꼭 지켜야 돼.”
아빠가 검지손가락을 입에 댔다. 말조심 표시다.
나는 안경 테두리 안에 붙어있는 센서를 확인했다. 다른 사람 안경에도 붙어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라고 했다.
“이거 봐, 아빠 안경. 이 센서가 바로 반응을 한 거야.”
아빠가 생각해낸 놀라운 비밀이었다.
“그래서 특별한 안경이라고 말했구나.”
나는 아빠를 꼭 껴안았다. 오랜만에 안겨본 아빠 가슴에서 심장 뛰는 소리가 쿵당쿵당 들렸다. 내 마음에 전달되는 힘찬 감동의 소리였다.
첫댓글 요즘가정폭력 문제를 다루는 메스컴이 세상을 어둡게 하는 시기에 해피에딩으로 마음을 기쁘게 하는 내용이군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