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초고] 민치(民治) 병행의 시대를 열자 ㅡ백낙청의 '변혁적 중도'와 이병권의 '전투적 민주주의'를 이뤄내는
이원영(국토미래연구소장)
+ AI Claude Sonnet 4.6
2026-06-28
백낙청은 말했다.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고. 이병권은 말했다. 전투적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두 사람의 말은 옳다. 그러나 무언가 빠져 있다.
백낙청의 '변혁적 중도'는 방향의 언어다. 이병권의 '전투적 민주주의'는 저항의 언어다. 둘 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날카롭게 짚었다. 그러나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이르면 두 사람 모두 말을 아꼈다. 다음 글로 미루거나, 선거제도 개혁이라는 처방을 슬쩍 내놓고 멈추었다.
그 공백이 문제다. 한국 민주주의가 반복해서 같은 자리를 맴도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왜 개혁은 반복해서 실패하는가
김대중 정부도, 노무현 정부도, 문재인 정부도 같은 길을 걸었다. 시민들이 광장에서 만들어준 기회를 받아 집권했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구조개혁을 완결하지 못했다. 이병권은 이것을 "개혁의지의 부족"과 "안이한 현실인식" 탓으로 보았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표면적 진단이다.
더 깊은 이유가 있다. 대리인은 위임받는 순간부터 구조를 바꿀 유인을 잃는다. 시민은 좋은 삶을 원하지만, 대리인은 권력의 유지를 원한다. 처음에는 같은 방향을 향하던 두 욕망이 시간이 지나면서 벌어진다. 대리인은 다음 선거를 계산하고, 당의 이익을 따지고, 구조를 바꾸는 것이 자신의 권력 기반을 허무는 일임을 본능적으로 안다.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기는 구조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20년 동안 고기는 수없이 바뀌었는데 불판은 그대로였다. 셀프 입법 특권은 여전하고, 공천 파동은 4년마다 반드시 되풀이된다. 이것은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구조의 문제다. 포퍼가 말했듯이 "사람을 믿지 말고 구조를 설계하라." 좋은 대리인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나쁜 대리인이 나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구조를 만드는 것—그것이 핵심이다.
전투적 민주주의의 진짜 주체는 누구인가
이병권이 끌어온 뢰벤슈타인의 '전투적 민주주의'는 국가가 극단주의로부터 민주주의를 방어하는 원리다. 그런데 지금 국가 자체가 포획될 때 누가 싸우는가. 윤석열 내란이 보여주었듯, 국가 권력 자체가 민주주의의 적이 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무엇에 기댈 것인가.
답은 이미 한국 민중이 보여주었다. 2024년 12월 3일 새벽, 국회로 달려간 시민들이었다. 남태령 고개에서 28시간을 버틴 농민과 응원봉을 든 젊은이들이었다. 폭설 속 한남동을 떠나지 않은 키세스 천사단이었다. 전투적 민주주의의 진짜 주체는 국가가 아니라 강렬한 주인의식을 가진 시민이다.
그러나 그 주인의식만으로는 부족하다. 아테네 병사들이 중무장을 하고 40킬로미터를 달린 것이 민치의 원동력이었다면, 그 원동력은 아고라의 민회라는 설계로 꿰어졌을 때 비로소 문명이 되었다. 강렬한 주인의식을 설계로 꿰어야 민치가 된다.
민치 병행의 시대를 여는 세 개의 열쇠
그렇다면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세 개의 열쇠가 있다.
첫 번째 열쇠는 추첨숙의형 시민의회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갈파했듯 선거는 귀족주의의 원칙이고 추첨은 민주주의의 원칙이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는 무작위 추첨으로 뽑힌 160명의 시민에게 선거제 개혁을 맡겼다. 11개월의 숙의 끝에 찬성률 91%의 결론이 나왔다. 아일랜드는 수십 년간 정치인들이 건드리지 못한 낙태권과 동성결혼 문제를 시민의회에 넘겼고, 9개월 만에 결론을 냈다. 정치인이 대신 결정한 것이 아니라 시민이 스스로 결정했기 때문에 사회가 받아들였다. 한국도 150명을 추첨으로 뽑아 6개월간 숙의하는 파일럿 시민의회가 지금 준비되고 있다. 이것이 불판을 교체하는 첫 번째 실험이다.
두 번째 열쇠는 공유부의 제도화다. 이병권이 지적한 극우 부활의 경제적 토양—청년세대의 좌절, 고립감과 경쟁 피로—은 공유부의 약탈에서 온다. 토지 불로소득이 소수에게 집중되고, 빅테크가 80억 인류의 데이터를 아무런 대가 없이 수탈하는 구조가 극우 포퓰리즘의 온상이다. 토지배당과 데이터 배당, 지대본위화폐—공유부를 시민 모두에게 돌려주는 구조 설계가 극우의 토양을 근본에서 말리는 길이다. 로마가 공유지를 귀족이 독점하면서 내부에서 무너졌듯, 공유부를 지키지 못한 민주주의는 결국 스스로 무너진다.
세 번째 열쇠는 IT가 열어준 직접 민치의 가능성이다. 18세기에 대의민주주의가 발명된 것은 수백만 명이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숙의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불가능이 지금은 가능해졌다. 대만의 오드리 탕이 보여준 디지털 민주주의, AI가 수백만 명의 의견을 분석하여 쟁점을 정리하는 기술—직접 민치가 기술적으로 현실이 되어 있다. 오히려 AI의 도움으로 숙의의 질을 높이고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시대가 왔다. 대의제가 불가피했던 기술적 이유가 21세기에는 사라지고 있다.
변혁적 중도도, 전투적 민주주의도 설계가 없으면 구호에 그친다
백낙청의 변혁적 중도와 이병권의 전투적 민주주의는 중요한 문제 제기다. 그러나 두 개념 모두 "무엇을 향해 가야 하는가"의 언어이지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의 언어가 아니다. 방향론은 있지만 설계론이 없다. 저항의 언어는 있지만 건설의 언어가 없다.
민주주의 역사에서 위대한 전환은 항상 설계가 뒤따랐다. 아테네의 마라톤 정신이 아고라의 민회 설계로 이어졌다. 미국 독립운동의 저항 정신이 필라델피아 헌법 설계로 이어졌다. 한국의 두 번의 무혈 광장혁명이 이제 민치 설계로 이어져야 한다.
"개혁은 느리면 실패한다"는 천주교정의평화연대의 경고는 옳다. 그러나 빠른 개혁도 설계 없이는 실패한다. 설계 없는 저항은 반동을 부른다. 설계 없는 변혁은 또 다른 대리인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것으로 끝난다.
민치 병행의 시대를 열자
지금 한국은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다. 두 번의 무혈 광장혁명을 이룬 민중의 강렬한 주인의식이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IT 기술력이 있다. 파일럿 시민의회 실험이 시작되고 있다. 구슬은 이미 서 말이다.
이제 실을 꿸 차례다. 그 실의 이름이 민치(民治)다.
백낙청이 "물음을 멈추지 말자"고 했다면, 이병권이 "전투를 멈추지 말자"고 했다면, 우리는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설계를 시작하자.
'민치'를 병행해야 '민주'를 이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