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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런웨이》
제34회 ― 미송의 모델을 찾아라
다음 날 아침.
K예술대학교 의상디자인과 실습실.
창밖에는 차가운 늦가을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미송의 작업대 위에는 벌써 봄이 찾아와 있었다.
연한 분홍색.
따뜻한 베이지색.
여린 새싹을 닮은 연두색.
햇빛을 받으면 은은하게 빛나는 크림색 원단.
미송은 원단 견본들을 길게 펼쳐 놓고 하나씩 비교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졸업작품 스케치가 놓여 있었다.
「당신을 위한 봄」
사람의 몸을 억지로 조이거나 감추지 않고, 입는 사람의 모습을 편안하게 감싸 주는 옷.
누구든 그 옷을 입는 순간만큼은 자신이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 주는 것이 미송의 목표였다.
강인은 작업대 맞은편에 앉아 스케치를 살펴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미송이 물었다.
"왜 그렇게 봐?"
강인은 스케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어렵습니다."
미송의 표정이 굳었다.
"별로야?"
강인이 급히 고개를 들었다.
"아닙니다."
"그런데 왜 어렵다고 해?"
강인은 스케치의 허리선을 가리켰다.
"이 옷은 특정한 몸에만 맞으면 안 되잖습니까."
"응."
"입는 사람이 달라져도 선이 살아야 합니다."
미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려워?"
"네."
강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하지만 해 보고 싶습니다."
미송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정말?"
"네."
"내 졸업작품인데?"
강인이 그녀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귀 끝이 조금 붉어졌다.
"그래서 더요."
미송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바로 그때.
도윤의 목소리가 실습실에 울렸다.
"비켜 주세요!"
두 사람이 돌아봤다.
도윤이 커다란 자루 두 개를 양팔에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 뒤로 소희가 자투리 원단이 가득 담긴 상자를 안고 따라왔다.
도윤이 자루를 작업대 앞에 내려놓았다.
쿵!
먼지가 살짝 피어올랐다.
"다 가져왔습니다."
소희가 한숨을 쉬었다.
"누가 이렇게 아무렇게나 내려놓으래?"
"무겁잖아요."
"안에 원단 있어."
"원단은 안 깨집니다."
"주름지잖아."
도윤은 자루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진지하게 말했다.
"미안하다."
소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구한테 말하는 거야?"
"원단한테요."
강인이 고개를 저었다.
"원단이 대답하겠냐?"
도윤이 자루에 귀를 가까이 댔다.
"화난 것 같은데?"
소희가 그의 등을 때렸다.
"빨리 펼쳐."
"네."
도윤이 자루를 열자 크기와 색깔이 제각각인 천 조각들이 쏟아져 나왔다.
꽃무늬.
체크무늬.
굵은 면직물.
부드러운 모직.
작은 조각부터 넓은 천까지.
소희가 며칠 동안 모은 자투리 원단들이었다.
미송이 감탄했다.
"이걸 다 어디서 구했어?"
"학교 창고."
소희는 원단들을 색깔별로 정리하며 대답했다.
"동대문 원단 가게에서도 얻었고."
도윤이 끼어들었다.
"제가 가게마다 돌아다니면서 사정했습니다."
소희가 말했다.
"사정은 무슨."
"했잖아요."
도윤은 상인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학생, 이걸 어디에 쓰려고?"
이번에는 자신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졸업작품에 씁니다. 대한민국의 패션 발전을 위해 기부해 주십시오."
강인이 물었다.
"정말 그렇게 말했어?"
"응."
"그래서 줬어?"
"쫓겨났어."
미송이 웃음을 터뜨렸다.
소희도 결국 웃었다.
"그다음부터 내가 말했어."
도윤이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분위기는 제가 만들었잖아요."
"쫓겨날 분위기."
"분위기는 분위기죠."
그때 실습실 문이 열렸다.
현우와 세나가 들어왔다.
현우는 두꺼운 설계 도면과 잡지들을 들고 있었고, 세나는 투명한 소재와 얇은 철사, 작은 장식품이 든 상자를 안고 있었다.
세나는 소희의 작업대 위에 쌓인 자투리 원단을 보고 물었다.
"이게 다 뭐야?"
소희가 대답했다.
"내 작품 원단."
세나는 천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걸 이어 붙이겠다고?"
"응."
"전부?"
"응."
세나가 원단 더미를 내려다봤다.
"시간 엄청 걸리겠네."
소희가 말했다.
"알아."
"봉제선이 조금만 어긋나도 지저분해 보일 거야."
"알아."
"색 조합 잘못하면 누더기처럼 보이고."
도윤이 끼어들었다.
"선배, 응원하러 오신 것 맞습니까?"
세나는 도윤을 무시하고 소희에게 말했다.
"내가 색 분류 도와줄게."
소희가 놀라 바라봤다.
"네가?"
"왜?"
"그냥 의외라서."
세나는 팔짱을 꼈다.
"내가 색 감각 없는 사람처럼 보여?"
현우가 말했다.
"그런 뜻이 아닌 것 같은데."
세나가 그를 노려봤다.
"최현우."
"왜?"
"네 작품이나 해."
현우는 웃으며 자신의 작업대로 향했다.
그 뒤로 장혜린이 실습실에 들어왔다.
혜린은 미송의 스케치 앞에 멈췄다.
"이게 네 졸업작품?"
"응."
혜린은 그림을 자세히 살폈다.
"옷은 예쁘네."
미송이 물었다.
"그런데?"
혜린이 스케치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나한테는 안 맞을 것 같아."
미송의 눈이 커졌다.
"왜?"
"네가 만들려는 건 완벽하게 걷는 모델을 위한 옷이 아니잖아."
실습실이 조용해졌다.
혜린은 미송을 바라봤다.
"누구든 입으면 자신이 아름답다고 느끼게 해 주고 싶다며."
"응."
"그러면 나를 세우면 안 돼."
미송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혜린은 패션모델이었다.
어떤 옷을 입어도 선을 살릴 줄 알았다.
무대 위에서 걷는 법도 알았고, 자신의 몸을 옷에 맞추는 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송이 만들고 싶은 옷은—
사람이 옷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옷이 사람에게 다가가는 옷이었다.
미송이 조용히 말했다.
"맞아."
강인이 미송을 바라봤다.
혜린이 웃었다.
"내가 못 입어서 서운한 건 아니야."
"정말?"
"조금은 서운해."
미송이 웃었다.
혜린도 따라 웃었다.
"대신 모델 걷는 법은 내가 가르쳐 줄게."
미송의 눈빛이 밝아졌다.
"고마워."
도윤이 손을 들었다.
"남자 모델도 가르쳐 주실 수 있습니까?"
혜린이 그를 바라봤다.
"넌 모델이잖아."
도윤이 턱을 들었다.
"그래도 배움에는 끝이 없습니다."
소희가 말했다.
"넌 입부터 쉬게 해야 해."
"그건 제 매력입니다."
"누가 그래?"
"제가요."
모두가 웃었다.
잠시 뒤.
김태석 교수와 이영숙 교수가 실습실로 들어왔다.
김태석은 학생들의 작업대를 차례로 살폈다.
현우의 도시적인 패턴.
세나의 투명한 구조물.
소희의 자투리 원단.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송의 스케치 앞에 섰다.
"모델은 정했나?"
미송이 대답했다.
"아직입니다."
"장혜린이 있잖아."
혜린이 먼저 말했다.
"제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김태석 교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유는?"
미송이 대답했다.
"제 옷은 전문 모델을 위해 만든 옷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습실이 조용해졌다.
김태석은 미송을 바라봤다.
"그러면 누구를 세울 생각이지?"
"평범한 사람을 찾고 싶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누군데?"
미송은 대답하지 못했다.
김태석 교수가 말을 이었다.
"학생이 아닌 사람?"
"모델이 아닌 사람?"
"키가 크지 않은 사람?"
"무대에 서 본 적 없는 사람?"
질문이 이어질수록 미송의 표정이 굳었다.
김태석은 스케치를 내려다봤다.
"사람은 누구나 다르다."
"그런데 자네가 누구를 평범하다고 정하지?"
미송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영숙 교수가 조용히 미송을 바라봤다.
미송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제가 잘못 말했습니다."
"그럼?"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미송은 자신의 스케치를 바라봤다.
"옷 때문에 한 번이라도 자신을 숨겨 본 사람을 찾고 싶습니다."
실습실이 조용해졌다.
"입고 싶은 옷이 있어도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
"남들의 시선 때문에 좋아하는 색을 고르지 못한 사람."
"자신은 무대에 설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 사람."
미송은 김태석 교수를 바라봤다.
"그런 사람에게 무대의 가운데를 내어 주고 싶습니다."
이영숙 교수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김태석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찾아 봐."
미송의 눈이 밝아졌다.
"네."
"다만."
김태석은 단호하게 덧붙였다.
"감동을 만들려고 사람을 이용하지 마."
미송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 사람이 정말 입고 싶은 옷을 만들어."
"자네가 입히고 싶은 옷 말고."
미송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김태석 교수는 소희의 작업대로 향했다.
자투리 천을 이어 붙인 작은 원단을 들어 올렸다.
"윤소희."
"네."
"가봉은 언제 하지?"
"오늘 하려고 합니다."
"모델은?"
소희가 도윤을 바라봤다.
도윤은 기다렸다는 듯 자세를 바로 했다.
"접니다."
김태석 교수는 도윤을 위아래로 살폈다.
"왜 자네지?"
도윤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비율이 좋습니다."
소희가 바로 말했다.
"자투리 천처럼 말이 많아서요."
실습실에서 웃음이 터졌다.
도윤의 얼굴이 굳었다.
"그게 무슨 이유입니까?"
소희는 웃으며 말했다.
"서로 다른 조각이 많이 모여 있다는 뜻이야."
"저를 누더기라고 하시는 겁니까?"
"아니."
"그럼요?"
"재미있는 사람."
도윤이 멈췄다.
"방금 칭찬하셨습니까?"
소희는 시선을 피했다.
"가봉이나 해."
도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네."
김태석 교수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가봉하고 내게 보여."
"네."
점심시간.
미송과 강인은 학교 게시판 앞에 서 있었다.
미송은 흰 종이 위에 글을 쓰고 있었다.
강인이 옆에서 읽었다.
졸업작품 모델을 찾습니다.
나이와 키, 체형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대 경험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한 번쯤 입고 싶은 옷을 포기한 경험이 있는 분.
자신을 위한 옷을 함께 만들고 싶은 분을 기다립니다.
강인이 마지막 문장을 바라봤다.
"함께 만든다."
미송이 물었다.
"이상해?"
"아닙니다."
강인은 잠시 생각했다.
"좋습니다."
미송은 종이를 게시판에 붙였다.
하지만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바라보더니 다시 떼어 냈다.
강인이 물었다.
"왜요?"
"너무 딱딱해."
"그렇습니까?"
"응."
미송은 마지막에 한 문장을 더 적었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을 알려 주세요.
그제야 웃으며 종이를 다시 붙였다.
강인이 물었다.
"왜 색을 묻습니까?"
미송은 대답했다.
"사람이 좋아하는 색에는 그 사람 이야기가 있잖아."
"선배는 무슨 색을 좋아합니까?"
"나?"
"네."
미송은 잠시 생각했다.
"분홍색."
강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미송이 놀라 바라봤다.
"어떻게?"
"실."
"무슨 실?"
"분홍색 실."
미송의 눈빛이 달라졌다.
강인이 검은 실을 사용하려던 날.
미송이 연한 분홍색 실을 건네며 말했다.
안 보이는 게 더 중요해.
미송이 웃었다.
"그걸 기억해?"
"네."
"왜?"
강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눈이 마주치자 귀가 붉어졌다.
"그냥 기억납니다."
미송은 장난스럽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정말 그냥?"
강인이 한 걸음 물러났다.
"네."
"거짓말."
"아닙니다."
"귀 빨개졌어."
강인은 귀를 가렸다.
그 순간.
복도 끝에서 도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인아!"
강인이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미송이 웃었다.
"살았네."
도윤이 달려왔다.
"가봉 시작합니다."
강인이 물었다.
"왜 나를 불러?"
"두려워서."
"뭐가?"
도윤이 소희가 있는 실습실 쪽을 가리켰다.
"소희 선배가 줄자를 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강인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잘 다녀와."
"친구잖아."
"응."
"같이 가 줘."
"싫어."
미송이 말했다.
"가 보자."
도윤의 얼굴이 밝아졌다.
"역시 미송 선배."
강인은 결국 두 사람을 따라 실습실로 향했다.
실습실 한쪽.
도윤이 얇은 가봉복을 입고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소희는 무릎을 굽혀 바지 밑단을 확인하고 있었다.
옷은 여러 자투리 천을 임시로 이어 만든 상태였다.
색도 무늬도 제각각이었다.
아직 완성된 옷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도윤이 거울 속 자신을 바라봤다.
"이거……."
소희가 물었다.
"왜?"
"생각보다 멋있는데요?"
"가봉복이야."
"그래도요."
도윤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서로 다른 천 조각이 움직임에 따라 새로운 무늬를 만들었다.
소희가 핀을 꽂으며 말했다.
"움직이지 마."
"아픕니다."
"안 찔렀어."
"무섭습니다."
"모델이라며."
"모델도 사람입니다."
강인이 말했다.
"그 말 유행이냐?"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말은 나눠 써야지."
소희는 도윤의 재킷 앞부분을 살폈다.
"왼쪽이 조금 떠."
강인이 가까이 다가왔다.
패턴을 바라본 뒤 말했다.
"어깨 각도가 다릅니다."
소희가 물었다.
"도윤이 어깨가?"
"네. 오른쪽이 조금 내려가 있습니다."
도윤이 놀라 거울을 바라봤다.
"내 몸이 비대칭이야?"
강인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람은 대부분 그래."
도윤은 잠시 자기 어깨를 번갈아 바라봤다.
"나는 완벽한 줄 알았는데."
소희가 말했다.
"그런 생각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거울."
소희가 웃음을 참았다.
강인은 패턴의 어깨선을 조금 수정했다.
그러다 손을 멈췄다.
그리고 소희를 바라봤다.
"제가 할까요?"
소희는 잠시 고민했다.
김태석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대신 만들어 주지는 마.
소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강인은 바로 손을 뗐다.
"네."
소희가 초크를 들었다.
직접 선을 긋고.
다시 지웠다.
도윤의 어깨에 맞춰 새로운 곡선을 만들었다.
강인은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잠시 후.
소희가 물었다.
"이렇게?"
강인이 패턴을 살폈다.
"좋습니다."
소희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도윤이 거울을 보며 말했다.
"역시 윤소희."
소희가 그를 바라봤다.
"갑자기 왜?"
"멋있어서요."
"뭐가?"
"지금 선 그을 때."
도윤은 거울 속 소희를 바라봤다.
"평소에는 저를 때릴 때만 눈빛이 무서운데."
"박도윤."
"오늘은 디자이너 같았습니다."
소희의 손이 멈췄다.
강인과 미송이 조용히 두 사람을 바라봤다.
소희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나 원래 디자이너야."
"알아요."
도윤은 웃었다.
"오늘은 더 그랬다고요."
소희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핀을 꽂았다.
"악!"
도윤이 소리쳤다.
소희가 당황했다.
"찔렸어?"
"아니요."
"그런데 왜 소리 질러?"
도윤이 웃었다.
"부끄러워하시는 게 재미있어서."
소희의 표정이 굳었다.
"움직이지 마."
"왜요?"
"이번에는 진짜 찌를 수도 있으니까."
도윤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미송이 강인에게 작게 속삭였다.
"둘이 잘 어울리지?"
강인은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렇습니까?"
"너는 정말 모르는구나."
"뭘요?"
미송은 고개를 저었다.
"됐어."
강인이 진지하게 물었다.
"왜 말하다가 맙니까?"
"네가 직접 알아봐."
"어렵습니다."
"연애도 알아냈잖아."
강인의 귀가 붉어졌다.
"아직 잘 모릅니다."
미송이 웃었다.
"그건 맞아."
그날 오후.
미송은 게시판 앞을 다시 찾았다.
아직 지원자의 이름은 하나도 적혀 있지 않았다.
종이만 조용히 붙어 있었다.
미송이 한숨을 쉬었다.
"아무도 안 오면 어떡하지?"
강인이 옆에 섰다.
"기다리면 됩니다."
"졸업작품은 기다려 주지 않아."
강인은 종이를 바라봤다.
"그럼 직접 찾으면 됩니다."
"어떻게?"
강인은 잠시 생각했다.
"사람들이 옷을 가장 많이 포기하는 곳에 가 보면 어떻습니까?"
미송이 그를 바라봤다.
"그게 어디야?"
강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때 학교 청소를 하던 중년 여성이 복도를 지나갔다.
손에는 빗자루와 작은 양동이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게시판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미송이 붙인 글을 읽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웃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다시 걸어갔다.
미송은 그 모습을 바라봤다.
"저분."
강인이 물었다.
"왜요?"
"마지막 문장을 보고 웃었어."
미송은 종이의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색을 알려 주세요.
청소를 하던 여성의 낡은 작업복 주머니에는 작은 손수건이 꽂혀 있었다.
선명한 하늘색 손수건.
미송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그녀를 따라갔다.
"선생님!"
여성이 걸음을 멈췄다.
"저 말인가요?"
미송은 숨을 고르고 고개를 숙였다.
"잠깐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여성은 게시판과 미송을 번갈아 바라봤다.
"모델 이야기라면 저는 아니에요."
"왜요?"
"나는 그런 데 서 본 적도 없고."
여성은 자신의 작업복을 내려다봤다.
"나 같은 사람이 입을 옷은 아니잖아요."
미송의 표정이 달라졌다.
바로 그 말이었다.
자신이 찾던 사람.
미송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떤 색을 가장 좋아하세요?"
여성은 뜻밖의 질문에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주머니의 손수건을 내려다봤다.
"하늘색이요."
"왜요?"
여성은 창밖을 바라봤다.
"젊었을 때 바다를 보러 가는 게 꿈이었어요."
"그런데 한 번도 못 갔죠."
그녀는 조금 쑥스러운 듯 웃었다.
"그래서 하늘색을 좋아해요. 바다랑 닮은 것 같아서."
미송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늘색 옷을 입어 보신 적은요?"
여성은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는 너무 밝잖아요."
"누가 그랬어요?"
"그냥 알죠."
미송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제가 만들어 드리면 입어 보시겠어요?"
여성의 눈이 커졌다.
"나한테요?"
"네."
"학생 졸업작품을?"
"네."
여성은 당황한 듯 웃었다.
"나는 모델처럼 걷지도 못해요."
그때 강인이 말했다.
"걸으실 수 있으면 됩니다."
여성이 강인을 바라봤다.
강인은 진지했다.
"어떻게 걷든 그게 선생님 걸음입니다."
미송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선생님을 모델처럼 보이게 만들고 싶은 게 아니에요."
"선생님이 가장 선생님답게 보이는 옷을 만들고 싶어요."
여성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낡은 작업복 주머니에서 하늘색 손수건이 살짝 흔들렸다.
"내 이름은 오순자예요."
미송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저는 하미송입니다."
강인도 허리를 숙였다.
"송강인입니다."
순자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정말 내가 해도 돼요?"
미송이 손을 내밀었다.
"같이 만들어 주세요."
순자는 그 손을 한참 바라봤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러면."
작게 웃었다.
"한 번 해 볼게요."
미송의 눈빛이 밝아졌다.
강인도 아주 조금 웃었다.
그날.
미송의 졸업작품에는 처음으로 한 사람의 이름이 적혔다.
모델 ― 오순자
키도.
나이도.
체형도 먼저 묻지 않았다.
미송이 가장 먼저 적은 것은—
좋아하는 색 ― 하늘색
이었다.
실습실 창밖으로 늦가을의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봄은 아직 멀리 있었지만.
누군가를 위한 봄은 이미—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 제34회 끝 ―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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