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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 革
상리면은 예천군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있고 가장 북쪽에 있는 면이다.
소백의 원줄기 부근에 있는 고장이기 때문에 400m 이하의 평지는 없다.
북서부는 표고(標高) 1000m이상의 산지요, 중앙부에는 851m의 가재봉(佳載峰)이 있고
동쪽에는 890m의 옥녀봉, 784m의 子求峰이 있으며 남쪽에는 865m의 매봉이 있는 등 대부분이
높은 산지로 구성되어 있다.
고분군과 어림성지(御臨城地)등의 유적에서 오랜 옛날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신라 무열왕 5년(658)에 하리면과 함께 적아현(赤牙縣)이라고 한것이 처음 기록에 나타나 있다.
그 때 이 고장은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을 이루던 곳이기도 하였다. 신라 경덕왕 때는 예천군 은정현이
되었고, 고려 현종 9년(1018)부터는 다시 안동 영지부사 관할의 은풍현이 되었다.
1450년 조선 文宗 胎室을 명봉사에 모시고 기주와 통합하여 풍기군을 삼았다가, 1895년 풍기군 서면
상리라 하여 그 관할에 고항, 도촌, 사동, 사성, 신기, 구두, 진사, 내현, 상백, 하백, 보곡, 상사, 하사,
석묘, 야항, 용두, 초항등의 마을을 두었다.
1914년 군면 폐합때 영주군 상리면이 되었다가 1923년에 오늘날과 같은 예천군 상리면이 되었다.
이때 현행의 10개 법정동리가 형성되었다.
면적은 67.34Km₂이지만 80%가 산지이다. 자연부락은 44개인데 거의 표고 400m를 넘는다.
면계는 동쪽으로 영주시 봉현면, 남으로는 하리면과 용문면, 서쪽으로는 문경시 동로면, 북쪽으로는
충북 단양군 대강면과 맞닿아 있다.
▷도촌리
뒤촌이라고도 하는데 13세기 중엽인 고려 원종때 역동선생 우탁(禹倬)이 이곳에서 經史와 역학등의
학문과 도를 닦던 곳이라고 도촌이라 하는데 뒷산은 388m의 서제봉이며 마을앞 길을 솔갱이라 한다
거기에는 큰 느티나무 5그루가 있으며 상리초등학교가 있다.
- 새터/신기
도촌 남서쪽의 상리면사무소가 있는 마을이다. 도촌보다 늦게 면소가 여기 세워지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 벌밭양지
도촌 북쪽의 산골짜기 양지 바른쪽에 보리가 잘된다고 하는곳에 농토를 따라 100여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며 양지바른곳에 보리가 잘되는 밭이 있는골 이란 뜻이며 10여가구가 사는 각성촌이다.
- 쌍학/사동
쌍학사가 있던 곳에 생긴 마을이라 해서 쌍학이라 한다. 세력이 당당하던 어떤 사람이 가재봉 밑의
청학골이 명당이라고 묘를 쓰려는데 壙中을 너무 깊게 해서 학 두마리가 날아가 버렸다고 하는 전설이
전한다.
-가재봉
산이 매우 수려하고 묘하게 생겼다 하여 옛날 역동선생 우탁이 산명을 가재봉이라 부른 후
오늘날까지도 가재봉으로 불리우고 있다.
- 오도재(悟 道 재)
역동선생 우탁이 이 고개를 넘다가 비로소 도(道)를 깨달았다 하여 오도재라 하였다고 한다.
▷사곡리
위치의 높낮이에 따라 아릇사실과 웃사실로 불리어지며 사곡의 중심이 되는 마을이다. 초목이 울창하고
앞 수변 백사에는 백구가 종종 내왕하여 경치가 매우좋다 하여 사곡이라 불리었다.
지형이 평사낙안형이라는 골짜기에 생긴 마을이며 앞산이 역동선생이 공부하던 곳이라는 백봉암이다.
- 높은다리/고교(高橋)
명봉과 저수재의 갈림길에 있고 깊은골짜기 위에 밤나무로 다리를 놓고 그위에 청솔을 깔고 흙을 덮어
우마가 지나다니게 해서 생긴 지명이다. 저수재를 넘어 단양을 거쳐 서울로가던 길목이다.
- 배바위
舟巖이라고도 하며 光山 卓氏가 많이 사는 마을이다. 마을뒷산에 흡사 배처럼 생긴 큰 바위가 노적같이
생긴 더 큰바위를 향해 산을 거슬러 올라가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생긴 마을이름이다. 배바위 윗부분의
직경 60cm가량의 구덩이에는 어떤 가뭄에라도 물이 마르지 아니하고 고여 있다고 한다.
-어림성지(빈성)
고려 공민왕이 친히 이 산에 성을 쌓았다 하여 어림성이라고 한다.
산형이 병풍같이 생겼다 하여 병성이라 일렀고 속칭으로 빙성이라고도 한다.
▷명봉리
7개의 자연부락으로 되어있다.
- 내현 (안트리)
어림성에서 용문면으로 넘어가는 성채 및 수리박골 옆의 느지모깃골안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명봉리에서 으뜸이 되는 마을이다.
옛날에 士禍를 피해 어느 선비가 개척한 곳에 20여 가구의 큰 마을이 이루어졌다.
- 양지마을
양지마/양지촌 이라고도 하며 독죽(독짓골) 남동쪽 내현(안트리) 북쪽의 양지바른곳에 안트리 보다
늦게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며, 마을 앞에는 사기그릇을 굽던 점앞들 이란 골짜기가 있고 20가구의
각성촌이다.
- 진사
묵샘/묵새 라고도 하는데 약 300년전에 개척된 마을이다. 처음 마을을 개척한 박씨/권씨/김씨/ 가운데
박씨만 남아서 묵는다 하여 묵새로 부르다가 한자로 陳沙라 적게 되었다고 한다.
- 독죽
독짓골이라고도 하며 약 800년전에 승려들이 개척한 마을이다.
- 귀내미
龜洛(귀락)이라고 하며 성황당, 사낭당이 있는 독짓골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지형이 거북이가
소백산에서 내려와 魚川을 따라 낙동강으로 찾아가는 모습과 같다하여 귀내미 라 이름하였다.
- 동 구 (洞 口)
독짓골 북쪽에 있는 마을이며 신라때 두운대사가 창건했다는 명봉사의 동구다. 이 절에는 史讀文
연구의 귀중한 자료인 자적선사능운탑비(941)와 조선의 문종대왕 태실비가 있다.
- 추목정(秋木停)
치항정(稚項停)또는 추목정이란 정자가 있었는데, 그 정자의 이름을 치항정이라 한것은 뒷산이 꿩의
모습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가르재
사곡에서 명봉으로 가는 길목에 칼로 갈라놓은 듯한 가르재 고개가 있다. 이 가르재 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이 또한 가르재 마을인데, 이 고개는 이여송에 의하여 山亢(산항)을 잘린것으로 전해진다.
▷용두리
- 내동(內洞/안마)
용두리에서 가장 안쪽에 있다 하여 내동이라 하였으며, 1970년까지는 10여가구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교통이 불편하고 농사짓기가 곤란하여 현재는 전 가구가 타동리로 이주하여 잡초가 무성하다....
- 도효자 생가
-야목
야항이라고도 한다. 명심보감에까지 실린 만고의 효자로 후세의 귀감이되는 철종때의 효자 도시복이
지금의 용두동 313번지에 살면서 뒷산의 땔 나무를 해다가 예천장에 팔아서 부모를 봉양 했고,
뒷산의 호랑이를타고 강릉까지 가서 6월 염천에 홍시를 구해왔다고 한다. 도효자는 전설적인 인물이
아니라 실존인물이며 지금도 마을곳곳에 그의 자취가 남아 있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세가 "也"자 모양이라고 하여 야목이라고 한다, -
눈덮힌 용두리 전경
- 음 달
충북과 도계를 이루는 야목 서쪽의 음달마을이며 더욱이 마을뒷산이 높아서 해가 일찍 지는 마을이고
고개가 몹시 높고 길어서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는 저수령 앞 마을이다.
- 원용두
마을터가 분지형이며 마을 뒷산의 형상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고 옛날부터 이곳이 피난터라는
두메산골이다.
▷두성리
- 큰마/사성(沙星)/두성(斗星)/사별(師別)
음정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큰 사태가 나서 모래무더기가 북두칠성처럼 퍼져있다 하여 사성이라
했으며, 역동선생이 도학을 완성하자 가르치던 스승이 떠나게 되니 사제간에 이별한 곳이라 하여 사별
이라 했다고도 한다.
- 음 정
음쟁이라고도 하며 역동선생이 새별 동쪽 산밑에 운정(雲停)을 지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운정이 음정으로 변음되었다고도 하고, 정자에 그늘이 져서 그렇게 부른다고도 한다.
- 왕갓(왕곡)
음정 북서쪽에 있는 곳이며 역동선생이 그의 스승인 법선사를 찾아 이곳으로 왕래하였다고
왕갓이라고 하며 마을 동쪽에는 수석이 아름답고 높이3m나 되는 두성폭포가 있지만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아니한 명승지다..
- 구두실
구두곡/구도 라고 하는데 역동선생이 오랫동안 도를 구하다가 드디어 대성했다는 데서 유래된 마을이
라 한다. 동구에 있는 지채만큼 큰 바위에 언제 누가 새겼는지는 모르나 구도(九道)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다.
- 흙목(土項)
중국의 명풍수 박성 이라는 사람이 산천에 제사 지낼때 향을 피운 곳이라고 하여 土香이라고 적기도
한다. 토향이 토항/흙목으로 와전되었다고 한다.
▷백석리
흰돌로 더 잘 알려진 백석은 4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다. 금강산의 아름다움에 버금간다고 하여
소금강이라고도 불린다. 뒷산에 흰돌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하여 윗 마을을 상백, 아랫 마을을
하백이라 부르고 있다.
- 새 터/신기(新基)
텃골뒤에 생긴 마을이다.
1974년 고항 초등학교가 솔밭모랭이에 세워지면서 학구 분리의 편의상 백석동이 되었으며,
산골이면서도 규모가 짜인 마을이다.
- 제 촌
자작쟁이라고 하며, 아랫흔들 북쪽에 있는 마을이며 깊은산속에 자작나무가 우거져서 정자처럼
생겼었다고 하고 자작나무로 지은 정자가 있었다고도 하는 곳이며, 옛부터 피난할 곳을 찾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 텃 골
아랫흔들 동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의 터가 좋아서 마을이 생기기전에 벌써 집을 지을터가
마련되어 있었다고 한다.
▷초항리
새목/봉항이라고도 한다. 백봉산에서 봉황 한쌍이 목을 길게 늘이고 쉴터를 찾아가 이마을 앞산에 날아
와서 앉았다고 하여 봉정(鳳頂)의 뜻인 새목이라고 한다. 외부 세계와의 인연을 끊고 마을 어귀에 풀이
우거져 있어서 초항또는 새목이라고도 한다.
두 마을로 이루어졌는데 골안 깊숙한 곳에 있는 마을이 내초항(안새목)이고, 골 밖에 있는마을이
외초항(바깥새목)으로 商山 金氏가 개척했다고 한다. 두 마을 복판에 있는 태재산은 높이가 852m로
예천군에서 표고가 가장 높은 마을이다.
-초항리 느티나무숲
▷고항리
고항은 10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다.
- 큰마
고리목이라고 하는데 뒷산이 고리목재이기 때문에 붙여진 마을이름이라고 한다. 조선초부터
6.25때까지 이 마을에서는 무쇠솥을 생산하였다고 한다. 이를 '고리목 담범솥' 또는 '담솥'이라 하여
유명하였다.
- 용소/용순마
아득한 옛날 이 마을앞에 용이 살던 沼가 있었는데, 천지 개벽이 되어 마을 바른쪽 백호등(白虎嶝)이
무너져 그곳이 들판이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용소(龍沼)란 마을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 송전(솔밭모랭이)
큰마 북쪽에 자리잡은 이 마을은 밖에서 보면 마을은 안보이고 솔밭만 보여서 솔밭모랭이
또는 松田이란 이름이 붙었다 하며 또 옛날에는 피란처로 알맞았다고 한다.
- 모시골
저동/시동 마을터가 모시 광우리 같다고 모시골이라 한다. 풍기군수 두운룡이 임진왜란때
어머니를 모시고 피란했다는 곳이 마을 복쪽에 있으며, 웃모시골 아랫모시골로 나뉜다.
- 괴동(槐洞)/고약골
옛날에 큰 고약나무가 있어서 생긴 이름이라고도 하고, 풍수설의 괴화낙지(槐花落地)라는 명당자리가
있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송전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 어동(漁洞)/어미골
산세가 붕어모양이고 이 마을은 붕어 꼬리부분이라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송전의 동쪽 마을이다.
- 문곡/문드레미
고약골에서 북동쪽으로 뻗친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뒷산이 文筆峰인데 문곡이란 이름도
여기서 나온것이라 한다. 충북, 영주시, 예천군의 경계지점의 마을이다.
- 모래재
고약골 북쪽마을이다. 모래재는 경북 예천군 상리면 고항리와 충북 단양군 대강면의 도계가 되는
고개로서 모래재 마을의 북서쪽에 있다. 현재는 이부근으로 국도가 확장 포장되고 있다.
▷석묘리
- 돌무덤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이 마을은 풍기군에 속해 있었는데, 권씨 성을 가진이가 원이 된다면
이 고을이 망한다는 전설이 있었다. 고려말에 마침 권씨 성을 가진 사람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자
이 골 사람들이 이 마을을 저울로 달아서 풍기와 풍천으로 반씩 갈라놓고 마을의 화를 막은뒤에
그 저울추를 돌로 묻어 영원한 마을의 태평을 빌었다는 돌무덤(石墓)이 지금도 남아있고 매우 신성시
되고 있다.
-거사골
거사곡이라고도 하며 돌무덤 북서쪽의 큰 골밑에 있는 마을이며 옛날에 분주한 세상을 등지고 조용히
지내고 싶은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라 한다.
-춘 생
1350년 홍건적의 침입을 받아 그해 겨울 고려 공민왕이 새목에서 피란하고 이곳에 이르러 봄이 온것을
알았으므로 마을뒷산을 부춘산(富春山)이라 하였고 이를 기념하여 마을에서는 제단을 만들어 두고
해마다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신라 경순왕이 경주에서 송도로 가는길에 이곳에서
봄을 맞았다고도 한다.
▷보곡리
가재봉 중턱에 위치한 마을로 상보곡/하보곡으로 나뉜다. 옛날에 보국사 란 절이 있던 곳이라서 붙여진
마을이름이다.
- 무장
조우골이라고도 한다. 보곡과 산등성이를 사이에 두고 이뤄진 마을이다. 한지를 만들던 지소가 있었던
마을이기 때문에 종이 만드는 마을이라 하여 조우(종이)골, 조우터골이라고 불렀다.
한때 폐동이 될 위기에 있었기에 무장이라 개명하고부터는 마을이 번창하게 되었다고 한다.
▷은산구곡과 팔목
중국 복건성에 있는 무이산(武夷山)의 대표적인 절경지를 무이구곡이라 이름한다. 이곳에서 주자가
도를 강설하고[講道], 학업을 닦는 일[藏修]를 행했던 공간이다. 주자는 구곡가에서 “이곳에 와서
또다시 별천지를 찾으려 하지만 이곳이 바로 이상세계라네”
山無水下秀 (산무수하수) 산은 물이 없으면 수려하지 않고
水無山不淸 (수무산불청) 물은 산이 없으면 맑지 못하다
曲曲山回轉 (곡곡산회전) 골짜기 골짜기마다 산이 돌아가고
峰峰水抱流 (봉봉수포류) 봉우리 봉우리마다 물이 감아 돈다
주역을 연구하며 이상적인 은둔처를 찾았던 역동 우탁은 상리면 도촌리에 10여년을 은거하며
은계천 20리 구비마다에 '은산구곡'이라 이름하고 누군가 아홉구비 마다를 암벽에다,
혹은 큰 돌에다 일곡-구곡까지 새겼다.
은산구곡(殷山九曲)을 보면 ,제1곡은 부푸실, 제2곡은 밤실(栗谷), 제3곡은 쇠실(하곡),
제4곡은 읍실(邑室), 제5곡은 오래실, 제6곡은 소내실, 제7곡은 구도실(求道室),
제8곡은 사곡(沙谷), 제9곡은 보곡(甫谷)이다.
그러나 이제 그 물이 돌아나가며 자아내는 구곡경승지 암벽 바위 글씨도 4개 만이 남고 다 훼손되어
자취 찾을 수 없음이다.
또 상리면은 ‘목[項]’자가 들어가는 지명이 여덟 곳이 있다. 이른바 팔목이라 한다.
명목(命項), 살목(矢項), 가목(佳項), 새목(草項), 고목(古項, 骨里), 야목(也項), 토항(土項),
노루목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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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랜만이네 덕분에 고향의 유래를 배우는 구나 고맙다 여름은 잘 보냇는지 여러모로 고생이 많네 고마워
호오 이제야 지명에 대한 의문이 조금은 알것 같다,,, 진작에 와 보았어야 하는데,, 풍수에서 也자 형국에는 대단한 명당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빨리 찾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