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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헝그리 메리
탁탁탁... 리드미컬하게 그러나 절도있게 도마위를 가르는 날렵한 식칼의 움직임...
주부경력 34년에 빛나는 모친의 노련한 검술에 수줍게 그 뽀얀 속살을 드러내는 탐스러운 무뿌리...
모친의 눈을 피해 주방 입구에서 벽에 쫙 달라붙어 눈만 쏙 내밀고 주방을 훔쳐보던 나의 가슴속에 간절한 소망이 피어올랐다.
저 무 한쪼가리만 먹어봤으면... 간절한 소망이 이성을 마비시켰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리가 저절로 주방으로 걸어들어가더니 팔이 저절로 도마위로 뻗어 무쪼가리를 집으려는 순간...
팍...식칼이 도마위로 내리꼿혔다. 아...무우 한쪼가리 먹을라다가 손모가지 날라갈뻔했구나...
'주방에 얼씬도 하지 마라 캤을긴데!'
'무...물 쫌 물라꼬...'
'물도 쳐묵지 마라'
'굶기 직일끼가?'
'와 다른 방법으로 직이주까?'
식칼이 번쩍 푸른 섬광을 뿜었다.
'구...굶어 죽으께'
나는 몇가닥 되지도 않는 눈썹을 휘날리며 후다닥 내방으로 피신했다.
모친이여...비록 그리 귀하지는 않으나 하나밖에 없는 딸을 굶겨서 절딴내겠다는 결딴을 내린건가요...
선도맨과의 결별이후로 나에게는 주방금족령이 내려졌다.
집에서는 모친의 번뜩이는 식칼의 칼날에, 슈퍼에서는 존나1의 번뜩이는 감시의 눈길에 밥띠꺼리 한알 못 얻어먹은지 어언 일주일...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식용으로 보였다.
급기야 어제는 전봇대에 기대어 볼일에 열중하던 거리의 비행견의 마빡에 베란다 장독대에서 훔친 된장을 바르다가 손꾸락을 물리는 비극적인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굶어죽기전에 광견병으로 먼저 갈지 모르겠구나... 이 모든 것이 젊은날 철없던 시절에 저질렀었던 만행의 업보이리라...
때는 똥도 없어서 못먹을만큼 왕성한 식욕에 불타던 여중생 시절...
평소 화려한 도시락반찬으로 학급의 위화감을 조성했던 빨간지붕 2층집의 외동딸 윤혜란양(이하 윤양)이 봄소풍때 싸왔던 쇠고기김밥이 화근이었다.
쇠고기를 그렇게 가까이에서 본적은 난생 처음이었다.
쇠고기가 너무 눈부셔 잠시 눈이 멀었던 나는 선생님이 부르신다고 윤양의 주의를 교란시킨후 윤양이 사실확인을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노려
몰래 윤양의 쇠고기김밥에 접근하여 쇠고기만을 홀랑 빼먹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드디어 모두가 기다리던 점심시간...
학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랑스럽게 도시락의 뚜껑을 열었던 윤양은 참혹하게 파헤쳐진 김밥을 부여잡고 몸부림치며 오열했다.
내 비록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기는 했으나 그것은 피어보지도 못하고 빈혈로 쓰러져 죽을수는 없다는 절박함에 불가피하게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생계형 범죄였거늘...
말년에 이리도 모진 죄값을 치르게 될줄이야... 나는 흘러내리는 참회의 눈물을 손으로 닦았다.
그런데...손꾸락에 전해지는 눈두덩이의 이 낮선 입체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아파트 주차장에서 습득한 이래 거울로 유용하게 쓰고 있는 티코 빽미러로 후다닥 얼굴을 비쳐보았다.
눈까리가 구만리는 들어가 있었다.
눈까리가 이 정도라면... 빈약한 흉부의 소유자들은 알 것이다.
굶으면 흉부의 살부터 쫙쫙 빠진다는 것을...
나는 숨겨진 에로배우로서의 가능성을 선보이며 떨리는 손으로 흉부를 더듬었다.
꾸엑...가슴이 있어야할 자리에 왠 쌍구덩이가... 마징가 제트 애인 비너스가 가슴 미사일 발사한 직후의 자태와 매우 흡사하구나...
한번 피어보지도 못하고 여자로서의 생명이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나는 밥 퍼담으면 두그릇은 족히 들어갈 쌍구덩이에 부르르 움켜쥔 두 주먹을 담그고 절규했다.
'밥으로 메꿔 도!'
순간 방문이 벌컥 열리며 밥주걱을 움켜쥔 모친이 들이닥쳤다.
'이기 시집도 몬가보고 노망났나?'
한여인의 육체를 이토록 잔인하게 초토화 시킨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이 가여운 여인의 영혼까지 황폐화 시키려 드는 것인가...
'노망날때까지 살리두기는 할기가?'
'이기 내를 시험에 들게하네'
모친이 위협적으로 밥주걱을 다잡았다.
모친의 손목스냅이라면 저 밥주걱도 능히 싸대기를 찢어발길 가공할 무기로 거듭날 터... 못다 이룬 반항의 꿈은 모친이 비무장 상태일때를 기약하자...
나는 파바박 바닥에 쓰러져 죽은척했다. 모친이 곰 앞발같은 발로 내 옆구리를 툭 찼다.
'굶어 죽언나?'
모친의 입장에서는 사심없이 툭 찬 것이었겠지만 당하는 나로서는 옆구리에 빵꾸가 날것같은 데미지였다.
대한체육협회는 모친을 발탁하지 않고 무엇하는가... 제발 모친을 태능선수촌에 입소시켜 연중 무휴가로 뺑이 돌려달라...
갈비뼈가 똑 뿌러질 것 같은 고통에 옆구리를 부여잡고 훅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유유히 실내를 떠돌다 열려진 방문으로 몰아닥쳐 생존을 위해 남달이 발달한 나의 후각에 포착된 이 냄새는...
북어국이었다.
어젯밤 동창회에서 한잔 꺽고 밤늦게 귀가하신 부친을 위한 특별 해장식인가...
'북어국 끼리째?'
'콧구녕은 명 기네'
나는 벌떡 일어나 모친을 밀어젖히고 주방으로 날랐다.
식탁위에는 따신 흰쌀밥과 북어국이 두 세트 소담스럽게 놓여 있었고 이미 식탁 한쪽에 자리를 잡은 부친이 떨리는 콧구멍으로 북어국의 황홀한 냄새를 만끽하고 있었다.
북어와 무가 오소독스한 조화를 이루며 그 풍미를 더하는 북어국에는 놀랍게도 우리집에서 절대 희귀한 닭알까지 풀어져 있었다.
부친의 앞에 놓인 국사발을 들고 한아가리에 원샷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자식된 도리로 차마 그럴수는 없는 법...
끓어 오르는 효심으로 부친의 국사발을 포기하고 생모인지 의심스러운 모친의 국사발을 파바박 팔을 뻗는 순간...
'택두 엄따!'
어느새 뒤쫒아온 모친이 내 팔을 당수로 내리치고 차가운 비소를 날리며 식탁에 앉았다.
모친이 포진한 이상 식탁위의 북어국은 이미 사정권에서 멀어진 터...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나는 가스렌지위에 국자가 꼽힌채 놓여있는 냄비를 덮쳐 파바박 뚜껑을 깠다. 그러나 냄비속은 북어가 스쳐지나간 아스라한 추억만을 남긴채 텅비어 있었다.
'두그릇만 끼린나?'
'마이 끼리따'
'다 우엔는데?'
'끼리다가 간보니라고 다 퍼뭇다'
혀에 골무 끼워놨나요...무슨 간을 한냄비를 다 퍼먹도록 보나요...
부친이 황홀한 눈빛으로 황금빛 은은한 북어살을 입에 넣고 샤르르 굴리셨다.
나는 순간 인간이 저지를수 있는 행동중 가장 치사하고 졸렬한 작태를 보이고야 말았다. 그것은 남 먹는데 옆에 달라붙어서 구경하는 것이었다.
'아부지 맛있어예?'
부친이 우직하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감명깊다'
'어제 안주 뭐 드신는데예?
'족발 무따'
'고기 너무 마이 드시는거 아이라예?'
'물고기랑 육고기는 다른기다'
부친은 이틀 연짱으로 수륙양용으루다가 마음껏 섭취하시면서 하나밖에 없는 딸은 피어보지도 못하고 누렇게 떠죽어도 상관없다는 것인가요...
나는 간을 본다는 미명하에 북어국 한냄비를 다 퍼먹고 얼굴에 윤기가 졸졸 흐르는 모친에게 분연히 외쳤다.
'밥 쫌 도!'
'시집도 몬가는기 밥은 쳐물라꼬?'
'밥은 미기가면서 갈구라'
'밥 쳐묵고 싶으마 홀아비라도 한놈 데꾸온나'
내 비록 상품성이 떨어지기는 하나 엄연히 수줍은 처녀의 몸인 것을 어찌 홀아비에게 덤핑을 치려 하는건가요...
'홀아비는 과부의 몫으로 남기두라'
'그라마 과부를 위해가 굶으라'
'내가 무봐야 얼마나 묵는다꼬?'
모친이 벌떡 일어나 식기건조대에서 스뎅 냉면사발을 집어 바닥에 쎄리 패대기쳤다.
나는 처절하게 내팽개쳐진 스뎅 사발을 주워 가슴에 고이 보듬었다.
'와 남의 밥그릇을 집어 떤지노?'
'니 밥한끼에 논 한마지기다'
'소...소량이네'
순간 내 밥그릇을 유심히 바라보던 부친이 모친에게 의혹어린 시선을 던졌다.
'메리 내아 맞나?'
'뭐시라?'
'아랫마을 최부자댁 머슴이었던 삼룡이 아 아이가?'
부친이여...아직도 모친의 과거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가요...
모친이 벌떡 일어나 식탁을 둘러 엎었다. 이름모를 야생초들이 나부끼고 피같은 북어국이 파도쳤다.
'말 다핸나?'
부친이 모친의 위협적인 눈길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분연히 일어섰다.
'덜했다'
부친의 빛나는 정수리에 고고하게 얹혀있는 무 쪼가리가 비장미를 더해주었다.
부친이여...드디어 모친의 압제에 짓눌렸던 슬픈 역사를 청산하고 인간답게 살아보리라는 큰 뜻을 품으셨군요...
나는 험난하고 고독한 투쟁의 길을 택하신 부친의 외로운 정수리에 미약한 힘이나마 보탬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바닥에서 무 쪼가리를 집어 대구리에 얹고 부친의 옆에 바짝 붙어섰다.
'이제 아부지는 혼자가 아니라예'
나와 부친을 동시다발로 꼴아보는 모친의 눈동자가 초점 애매한 에로틱한 킬러본능으로 번뜩였다.
'더 해봐라'
부친이 비장한 눈빛으로 당당하게 선언하셨다.
'출근하께!'
부친이여...더 하실 말씀이 그말이었나요...
부친은 고깃발이 받는지 기록적인 스피드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셨다. 혈육에게 이토록 처절하게 배반당할 줄이야...
세상은 이렇게 냉혹한 곳이었던가... 나는 생존을 위해 일생일대의 구라를 남기고 퇴각을 서둘렀다.
'소...속이 안좋아가 밥맛이 없네'
나는 어렵게 확보한 비상식량을 모친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최대한 태연한 모습으로 내방으로 향했다.
'고 딱 서라!'
헉...발각된 것인가... 나는 모친의 마수가 뻗치기 전에 번개같은 동작으로 머리위에 저장했던 비상식량을 입에 쑤셔 넣었다.
이제 목구멍으로 넘기기만 하면 온전히 나의 피와 살이 되리라...
순간 소도 때려잡은 모친의 손아귀가 내 아가리를 벌렸다.
'뱉으라'
모친의 손에 의해 주디가 벌어져 언어를 통한 의사전달이 불가능했던 나는 모친에게 제발 나에게서 이것만은 빼앗아가지 말아달라는 간절한 애원을 수화로 전달했다.
'뭐가 좋다꼬 춤까지 추고 지랄이고?'
모친이 내 뒷통수를 쎄리 갈기자 피같은 무 쪼가리가 덧없이 툭 튀어나왔다.
아...체계적인 수화교육을 받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는구나...
'이기 누굴 속일라꼬'
'생존본능이었다'
'본능만 살아 숨쉬는 가스나'
모친은 최후의 식량까지 잔인하게 빼앗고는 말썽 피운 죄수 독방에 집어떤지듯이 나를 내방에 집어떤졌다.
중앙에 드넓게 포진한 나이롱 이불위를 놔두고 구지 구석 맨바닥을 겨냥해 던질 필요까지 있었나요...
인체공학을 고려하지 않은 모친의 무자비한 폭투로 팔다리가 꾸개진 채 몸뚱아리에 깔려 피가 안통했으나 이젠 팔다리를 펼 힘조차 없었다.
뒷산에 소나무 껍데기 벗겨먹으러 올라갈래도 다리가 후들거려 실족사하여 지나가는 등산객에 의해 변사체로 발견될까 두렵구나...
모친의 마음을 돌릴 특단의 조취를 강구해야만 한다... 나는 마지막 체력을 그러모아 대구리를 싸잡고 방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코너까지 알뜰하게 굴러줬다가 터닝하려는 순간 벽에 걸린 달력이 얼핏 시야에 포착되었다.
오늘 날짜에 그려진 저 빨간 동그라미는 무엇인가... 오옷...오늘이 바로 대망의 첫 월급날이었던 것이다.
무뚝뚝한 부친에게 시집온 죄로 일생에 썪은장미 한송이 선물 받아보지 못했던 모친이기에 하나밖에 없는 달이 첫월급으로 선물을 사서 엥긴다면
감격에 치를 떨며 12첩반상으루다가 내방까지 룸써비스로 날라주리라...
나는 용솟음 치는 새로운 희망으로 바닥을 박차고 화제슈퍼로 날랐다.
그리고 요즘 잘 나가지도 않고 오만상 꾸개진 얼굴로 주판알만 튕기고 있는 늙은제비에게 당당하게 요청했다.
'사장님 월급주이소'
늙은제비의 손꾸락이 움찔하더니 주판알 한 개가 띠용 허공으로 튀었다.
'도...돈이 엄따'
고용인은 현재스코어 극심한 기아로 인해 오늘다이 내일다이 카운트다운에 돌입한 판에 고용인이 몸담고 있는 유통업체의 최고경영자로서 이 무슨 무책임한 발언이란 말인가...
'그래가 안주겠단 말이라예?'
'아...안주는기 아이고 몬주는기다'
'노동청에 고발할기라예!'
늙은제비가 벌떡 일어나 돌아서는 나의 팔목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그...그것만은 안된다'
'와예?'
'노...노동청장 사모랑 부르스 한판 댕기써따'
그런데 등뒤에 뭔가 걸리적거리는 이 느낌은 무엇이란 말인가...
'내 등더리에 와 손 얹으는데예?'
'스...습관적으루다가 땐스 자세가...'
'월급도 안주고 인자 성희롱까지 하는기라예?'
'무...물건으로 주마 안되나?'
아...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악덕고용주를 용서하지 않을래도 결정적으로 세라복이 없는 관계로 이쯤에서 타협하지 않을수 없구나...
늙은제비는 내월급에서 선도맨 자택방문시 가불했던 초코파이 한통의 금액을 제하고 나머지를 물건으로 주었다.
좀이 쓸어 여기저기 빵꾸난 이태리타월에서부터 과도한 숙성으로 메주가 된 두부를 거쳐 고리가 다 터져 설사똥처럼 주루룩 흘러내린 줄줄이 비엔나까지...
물건은 돈이 넘쳐나 돈으로 똥을 닦는대도 구매하고 싶지않은 처참한 형상이었다.
그나마 먼지 좀 뒤집어쓰고 상자 좀 찌그러진 초코파이가 베스트 퀄리티였다.
허나 여기서 좌절할 수는 없다... 어떻게 해서든 이 물건들을 돈으로 만들어야 한다...
나는 화제슈퍼 정문 앞 노른자위 땅에 신문지를 깔고 전을 폈다.
초코파이를 상자째 한아가리에 쳐넣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초코파이만이 소비자들의 구매충동을 유발시킬수 있는 유일한 포인트였다.
나는 사사로운 배고픔을 참고 타고난 마케팅 감각으로 초코파이를 매장의 제일 앞에 진열했다.
매장 한쪽옆에 따로 벼룩시장 두장을 깔아 소핑에 지친 고객들이 잠시 쉬어갈수 있는 휴식공간까지 마련하고 완벽한 개점준비를 마친 순간...
'창업 했나?'
대구빡이 욕실쓰레빠를 질질 끌고 나타나 매장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월급대신 물건 받아가 파는기다'
대구빡이 꾸지리한 눈길로 매장을 한바퀴 훑었다.
'동네에 쓰레기장 들어오마 값 떨어진다'
'인간 쓰레기 하나땜에 벌씨로 똥값 됐을기다'
'자신을 너무 비하하지 마라'
누구를 지칭하는건지 정말 모르는거냐...알고도 모른척 하는거냐...
'마수했나?'
'몬했다'
'내가 해주까?'
대구빡아...뭔 조화냐...
현대 의학으로는 고칠수 없는 퇴행성 치질에라도 걸려 길어야 육개월 선고를 받고 남은 인생 사회와 이웃에 봉사하며 살기로 결심한거냐...
나는 전문가적 안목으로 놈의 욕실쓰레빠와 완벽한 코디를 이루는 좀 쓸은 이태리 타월을 놈에게 권해주었다.
'와 이래 빵꾸났노?'
'리바이스 구제 이태리 타월이다'
'묵을거 아이마 안산다'
대구빡이 나의 조언을 무시하고 초코파이를 집었다.
'무...물건 볼줄 아네'
대구빡이 파바박 상자를 뜯더니 말릴틈도 없이 비닐포장도 안벗기고 초코파이를 아가리에 쳐넣기 시작했다.
'와 돈도 안내고 쳐먹고 지랄이고?'
'니는 중국집 가가 돈 먼저 내고 짜장면 묵나?'
틀린말은 아니다만 중화이론이 유통업계에도 적용될수 있는가 라는 문제는 좀더 학술적인 검토가 이루어져야 하겠구나...
'니 돈은 있나?'
'니 내 몬믿나?'
대구빡아...과연 그 대사가 네놈과 나 사이에 어울리는 대사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대구빡이 마지막 초코파이의 알맹이를 쪽 빨아먹고 비닐포장을 포도씨 뱉어내듯이 뱉어내었다.
'돈 내놔라'
대구빡이 추리닝 주머니를 뒤져 190원을 내 손바닥위에 놓았다.
'이기 장난치나?'
'진지한 상거래다'
'쳐먹은거 다 게아내라'
'한번 드간거는 절때로 안게아낸다'
네놈이 바로 공포의 편도아가리 도신 아지매의 수제자냐...
'근데 와 부자 몬됐노?'
'들어오는기 워낙 엄따'
어련하겠냐...
마음같아서는 열심히 살아보려는 한 처녀노점상의 가슴에 피멍이 들게한 네놈의 짧디 짧은 모가지를 비틀어주고 싶다만 극심한 허기에 지쳐 손꾸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구나..
'꺼지라!'
'손님한테 이래 불친절해도 되나?'
'190내고 친절을 바라나?'
'너무 적었나?'
정말 의문이라는 듯한 그 진지한 표정은 뭐냐...
대구빡이 부스럭 거리며 주머니를 뒤지더니 동그랗게 말아쥔 주먹을 내밀었다.
'뭐꼬?'
'팁이다'
대구빡은 내 손바닥위에 반으로 곱게 접은 500원짜리 즉석복권을 남겨놓고 유유히 사라졌다.
대구빡아...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은 남아있는 놈이었구나... 이 복권 한 장이 내인생을 9회말 역전 홈런으로 이끌어 줄지도 모르는 터...
비록 육체적으로는 푹 꺼졌지만 정신적으로는 부풀어 오른 가슴을 안고 숨가쁘게 복권을 펼치는 순간...
'십탱구리!'
이미 종이에 빵꾸가 나도록 쎄리 긁은 꽝복권이었다.
아...첫개시부터 신발 밑창에 쫙쫙 달라붙는 찰진 똥을 제대로 밟았으니 오늘 장사가 심히 걱정되는구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날이 다 저물도록 매장에는 눈먼새 한 마리도 스쳐지나가지 않았다.
나는 정녕 장사에는 소질이 없는 학자체질이란 말인가...
하늘이 어둠으로 물들어 갈수록 극심한 위기감이 내 굶주린 몸을 엄습했다.
오늘내로 돈을 마련하여 모친의 선물을 사지 못한다면 내일아침 해가 밝기도 전에 아사(한문 스펠링 모른다)할지도 모른다...
손해를 보더라도 매장을 폐업하고 재고정리를 통해 우선 급한 돈을 마련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슈퍼로 들어가 늙은제비에게 사태가 이지경이 된 데에는 현금을 유통해주지 못한 늙은제비에게도 일정부분 책임이 있음을 역설하고 재고처분에 적극 협조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물건 도로 사주이소. 싸게 드리께예'
'다부로 사줄돈 있으마 말라 물건으로 줬겠노?'
'다 털마 얼마 있는데예?
금고와 지갑을 박박 긁어 모은 늙은제비의 전재산은 9800원이었다.
'그...그거라도 주이소'
아...한달동안의 노동의 댓가가 결국 9800원 쁘라스 190원이란 말이더냐...
나는 피눈물을 닦으며 야외매장을 늙은제비에게 인계하였다.
이제 이미 지나간 거래에 연연하고 있을수만은 없다... 앞날의 12첩반상을 향해 전진해야 할때다...
나는 10원 모자라는 만원을 소중히 품고 서둘러 시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전재산을 털어 첫월급의 상징 빨간내복을 구입하여 까만 비닐봉다리로 정성스럽게 포장했다.
감동의 효과를 극대화 하기위해 선물을 등뒤에 숨기고 집에 도착했을 때 모친은 홀로 거실에서 부친의 빨래를 갠다는 명목하에 부친의 셔츠를 쥐어뜯고 있었다.
'아부지는?'
'안들어왔다'
부친이여...오전의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간 후 숙청의 칼을 가는 모친을 피해 머나먼 도피의 길을 떠나신 건가요...
돈이 모자라 부친의 내복까지 살수 없었던지라 나는 차라리 부친의 부재가 다행스러웠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띄고 등뒤에 감추었던 까만 비닐봉다리를 내놓았다.
'뭐꼬?'
'약소하지만 내 성의다'
북풍한설 몰아치던 모친의 얼굴에 뚜렷한 봄기운이 감지되었다.
파바박 비닐봉다리를 풀은 모친이 일생에 처음보는 나긋나긋한 손길로 빨간내복을 살포시 쓸었다.
'색깔은 곱네'
'함 입어봐라'
모친이 설레는 표정으로 빨간내복을 입어보기 시작했다.
아....나는 왜 스스로 무덤을 판 것인가...
구입당시 가장 큰 사이즈를 주문하는 나에게 이 사이즈라면 왠만한 사람은 다 들어갈 거라고 보증했던 판매인의 말을 철썩같이 믿었건만...
모친이여...정녕 왠만하지 않구려...
'째...째매 타이트 하네'
시시각각 조여오는 빨간내복으로 호흡조차 멎어버린 모친이 핏발선 눈을 희번뜩 거리며 입을 뻐끔거렸다.
'수...숨이...숨이...'
'안된다! 지금 숨쉬마 안된다!'
그러나 모친은 제주도 해녀가 아닌 바... 모친은 수염고래가 새우 들이키듯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훅 들이마셨다.
투둑...투둑...찌지직...
김기자, 오기자...특종이다...
대구시 송현동 모아파트단지에 빨간헐크 출몰했다...
모친이 갈갈이 찢겨진 빨간내복을 휘날리며 표호했다.
'와 굶어죽을때까지 몬기다리겠드나?'
아..또다시 말려줄 사람 하나없는 폐쇄된 집안에서 처참하게 살해될 단독챤스를 맞이하는구나...
부친이여...잠시나마 부친의 부재를 기뻐했던 이 불효자식을 부디 용서하소서...
아부지...어디 계신가요...아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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