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 예친왕이 소현세자에 준 전리품 ‘굴씨’
죽어서도 북벌 발원한 ‘중화의 절개’ 되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돌아올 당시 명의 환관 5명과 궁녀 4명도 함께 조선으로 입국했다. 소현세자는 청에서 예친왕 도르곤과 깊은 교유를 맺었는데, 이들은 예친왕이 소현세자에게 준 선물로 일종의 전리품이었다. 소현세자가 죽은 직후 인조는 이들 9명을 모두 청으로 돌려보내라는 명을 내렸지만 단 한명도 돌아가지 않았다. 이미 명나라가 망했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돌아갈 조국도 고향도 없었기 때문이다. 명나라 황실사람 중에서도 가장 많이 회자되었던 인물은 굴씨라는 성의 여인이었다. 굴씨는 원래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의 황후를 모시던 궁녀였다.
용모가 빼어나고 품행이 발랐던 굴씨는 황후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이자성의 난이 발발해 자금성이 점령되자 숭정제와 주황후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굴씨도 이때 황후를 따라 자결하려 하였지만 그녀를 아꼈던 황후는 “너는 살아남으라”고 명했다. 이에 굴씨는 대궐에서 도망쳐 민간에 숨었으나, 청 군대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굴씨는 결국 청 군대의 최고사령관인 예친왕에게 보내졌다. 어느 날 예친왕이 둥근 모자에 짧은 상의를 입고 얼굴에는 면사를 드리우고 앉았는데, 이 모습을 본 굴씨는 “남자도 면사를 한단 말인가. 참으로 오랑캐로구나”라고 욕을 퍼부었다. 하지만 예친왕은 철없는 아녀자의 말이라 하여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예친왕은 명의 마지막 궁인들을 소현세자의 심양관에 배속시켰다. 청 황실에 소속된 예친왕이 명의 마지막 궁인들을 가까이에 두는 것은 여러모로 불편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소현세자를 따라 조선으로 들어온 굴씨는 인조비 장렬왕후의 궁인으로 배속됐다. 그녀가 조선에 들어오자마자 내전으로 들어간 이유는 그녀가 명 황실의 머리장식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에서는 왕실여인들의 머리장식인 가채 제작기술이 없어서 어마어마한 돈을 주고 명에서 가채를 수입해오고 있었다. 굴씨는 황후를 지근에서 모시던 궁인이었기 때문에 명 황실의 예법을 익히고 있었고, 황후의 의복과 장식물 등을 다루는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비파 켜는 솜씨가 천하제일이라 할 정도로 비파 연주에 능했고, 소리를 내어 짐승들을 마음대로 부리는 기술까지 갖고 있었다고 한다.
굴씨는 또한 조선에 상투를 트는 법, 즉 결발법(結髮法)의 표본을 제시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사람들마다 상투를 트는 법이 달랐는데, 효종은 굴씨를 불러 명의 결발법을 보이라 했다. ‘자수원 결발법’이라 불리던 굴씨의 상투 트는 법은 이후 조선 결발법의 표준이 되었다.
그녀가 전수해준 결발법이 ‘자수원 결발법’이라 불린 것은, 장렬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굴씨가 자수원에 들어가 비구니가 됐기 때문이다. 굴씨는 조선에서 사는 동안 항상 중국 쪽을 바라보고, 명의 마지막 황후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서 북쪽에 묻어 달라. 효종대왕이 북벌을 하러 가는 모습을 죽어서나마 볼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굴씨의 일화들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글에서 ‘중화의 절개’, ‘한족의 자존심’으로 표현됐다. 효종대 이후 조선의 지식인들은 ‘조선중화주의’를 표방했고, 중화의 자존심을 지닌 굴씨라는 여인의 일화를 떠올리며 시를 짓거나 문장을 써내려갔다. 굴씨는 죽는 그 순간까지 명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조선으로 데려온 소현세자와의 의리도 굳게 지켰다. 굴씨는 소현세자의 마지막 남은 아들 경안군과 경안군의 아들 임창군을 죽을 때까지 보살폈다고 한다. 현재 굴씨의 무덤은 고양 간촌마을에 위치한 밀풍군 묘소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이 산은 현재 소현세자 후손들의 종중산으로, 굴씨가 어떤 과정을 거쳐 소현세자 종중산에 묻혔는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소현세자의 손자 임창군이 그녀의 묘지명을 써준 것으로 보아, 굴씨가 죽을 때까지 소현세자의 후손들과 인연을 깊게 맺고 있었고, 그 은덕을 기리기 위해 그곳에 굴씨의 무덤을 두었으리라 짐작할 따름이다.
[불교신문2917호/2013년6월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