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세설명 청기면(靑杞面) 상청리(上靑洞)에 있는 이 서당은 영양에서 초등학교로 승격한 유일한 서당이다. 옛날 상청동은 교통이 불편하고 서당이 없어 글을 가르칠 스승 마저 없으므로, 자녀들이 글을 배우려면 먼 곳에 있는 서당에 가야만 글을 배울 수 있는 실정이었다. 그 때 마침 청고 안사락(靑皐 安思樂)선생이 과객으로 상청동에 와서 김녕 김씨(金寧金氏) 종택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청고 선생은 어려서 유하옹(柳 下翁), 남경수(南 景壽)선생에게 글을 배워서 사친효행 하였으며, 학행과 도의로 칭찬을 받게되어, 과객으로 온 청고 선생은 김녕 김씨 종택에서 혼인을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종택에서는 글 잘하는 사위를 위하여 이웃마을 주민들과 상의하여 서당을 짓기로 결정하고, 상청동에서 거리가 가까운 청기(靑杞), 저동(苧洞), 상청(上靑), 신당(新堂)등지에 살고있는 영양 남씨(英陽 南氏), 김녕 김씨(金寧 金氏), 경주 김씨(慶州 金氏), 함양 오씨(咸陽 吳氏), 온양 방씨(溫陽 方氏), 평산 신씨(平山 申氏), 한양 조씨(漢陽 趙氏), 여산 송씨(礪山 宋氏)등 8문중에서 부지와 토지를 사서 서당을 건축했으므로 8문중 서당이라고도 불러왔으며 그 때 학계(學契)를 구성하여 와가(瓦家) 16간과 서당 소유 논 540평이 있었다.
그 후, 한일합병 후 일제 시 등기법이 시행되어 김녕 김씨 문중에서 일부 사람들이 단독 소유라고 주장하였으므로, 나머지 7문중과 청고 선생의 증손인 안순재(安舜載)가 협력하여 법원에서 재판을 하게되었다. 비용은 안 순재가 증조부를 위하여 서당을 세우게 되었다고 소송비용을 단독 부담하였으며 승소한 후 서당의 필요성이 없어지고 학교건립이 우후죽순과 같이 일어날 때 1934년 4월 10일 상청간이학교 설립 당시에 서당의 토지와 건물을 초대 기성회장인 안순재가 학교에 기증하였다.
그 후 인구가 늘고 학제개편에 따라서 간이학교가 없어지고 1944년 3월 20일자로 상청공립초등학교가 되었다. 그 후 1946년 10월 22일 청남초등학교로 개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