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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러 TV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유원지 요지경(일명 '딸깔이')은 경이의 '바깥 세상' 이었다. (1974년 대구 동촌유원지) ⓒ 강위원 (경일대 사진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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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상처가 어느 정도 가시고 유신과 긴급조치 속에서 보릿고개를 극복하고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피땀을 흘린 그 때였지만 오랜 가난의 굴레는 쉽게 벗겨지지 않았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들이키는 대포 한 잔.
지금은 플라스틱 상자에 PET병으로 나오지만 처음에는 한 말들이 나무 술통이었다가 플라스틱 흰색 통이 나와 면소 앞 술도가에서 버려진 짐 자전거의 바퀴를 빼내 엉성하게 만든 수레나 짐 자전거에 실려 각 마을로 대폿집으로 배달되어 나가곤 했다.
대폿집에서는 한 되들이 양은 주전자를 찌그려 뜨려 양을 속이기도 하였고 심지어는 물을 섞어 내 놓기도 하였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낭만 속의 대폿집이었다.
아부지 심부름으로 고갯길을 넘어 막걸리를 받아오다가 목마른 참에 한 모금씩 들이키다 취하기도 하였고 어른들이 먹다 남긴 막걸리에 설탕을 타서 단맛에 취해 대청마루에서 늘어지기도 하였다.
들판을 쏘다니며 싱아를 따먹다가 미군부대에서 지원해 주는 딱딱하게 굳은 가루분유를 한 덩어리라도 더 얻고자 하였으며 이후에는 빵으로 지원되어 그 빵이 나오는 날에는 그나마 아껴 가방에 넣어 두었다가 집으로 가져가 동생이랑 형이랑 나눠 먹기도 하였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국민통제수단으로 널리 이용해오던 통금해제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지나갈 즈음 새벽 골목길에는 땡그랑 땡그랑 두부 장수의 방울 소리가 “두부나 비지, 콩나물 사이소-” 라고 외치는 소리와 함께 울려 퍼졌다.
두부공장이라고는 허름한 판잣집 안에 맷돌과 함께 가마솥을 몇 개 걸어 놓은 것이 전부였다. 돌아가는 맷돌 틈에서 흘러나온 질퍽한 콩가루에 간수가 들어가면 엉기기 시작 하는데 이 과정에서 순두부도 태어난다.
자청파를 썰어 넣고 지렁으로 간을 하고 고춧가루를 풀어 섞은 뒤 넓적하게 썬 두부위에 얹어 먹는 것은 별미였다. 물론 막걸리 한 잔 걸치면 더욱 좋고...
더구나 곰팡이가 필 정도로 신 김치에 비계가 많이 붙은 돼지고기를 넣고 끓인 김치찌개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들의 대표적인 반찬이었다.
새벽 골목길에는 재첩국 장수도 있었고 한 겨울에는 우리들이 잠자리에 들쯤에 들려오는 소리 “차~압쌀-떠억, 메밀일~묵”
문제는 늘 돈이었다.
공부는 안하고 먹는 타령만 한다는 부모님의 얼굴을 보며 침만 한 번 꿀꺽 삼키고 이불 속에 얼굴을 묻는다. 돌이켜 보면 그 시절 부모님들의 심정인들 오죽 했을까...
당시 마을 마다 부녀자들의 계가 유행이었고 주부들이 몰려다니는 것 자체가 흉이었기에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되지 않는 외곽으로 몰려나가 매운탕 집에 이어 닭백숙집들이 외곽에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 하였다.
이문동 설렁탕집에서 부터 시작하여 50년대 무교동 추어탕집, 60년대 청진동 해장국집, 70년대 장춘동 족발집, 신림동 순대집, 무교동 낙지골목, 80년대 신당동 떡볶이집, 회기동 파전골목에 이어 프랜차이즈가 도입되고 90년대에 이르러서는 패밀리레스토랑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카바이트 불꽃이 춤추는 포장마차는 밀가루 포대를 이어 만들었으며 19공탄의 가스 냄새로 속이 메슥거렸지만 10원 이면 뜨뜻한 콩국 한 사발에 설탕과 소금을 넣고 누런 빛깔의 아부다께를 얹어 마시면 크리스마스이브라고 취하여 오버이트를 한 속이 풀렸고 그나마 어린 우리들에겐 영양식이었다.
설탕과 팥 앙금을 얼려 만든 아이스케끼시대에서 퍼모스트라고 찍힌 얼음주머니를 넣은 구멍가게 앞에 세워둔 통 냉장고의 하드 시대가 열린다.
키스바 50원, 초코바 60원, 크런치바 80원, 쭈쭈바와 아맛나....
야쿠르트, 새우깡, 삼양라면, 죠리퐁, 마요네즈, 맛동산에 이어 초코파이가 나왔고 커피믹스가 선보였으며 해태 봉봉과 롯데 쌕쌕이는 문병 갈 때 가장 각광을 받았었다.
자장면과 고기는 졸업식 같은 특별한 날에만 먹는 음식인줄 알았고 등겨 속에 묻힌 빨간 홍옥은 한 상자에 2,000원 이었지만 바가지도 씌우고 1,200원 까지 에누리도 되었고 말만 잘하면 공짜로도 얻어먹을 수 있는 인정 많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가공식품들 역시도 우리들에겐 사치였었고 우리들은 봄이면 엄마가 뜯어온 쑥을 쪄서 밀가루에 버무려 먹었던 맛과 산나물은 지금까지도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가을이면 메뚜기를 잡으러 온 들판을 뛰어 다녔고 반도도 없이 맨손으로 고기를 잡는 아이들의 재주가 부러웠으며 칡을 캔답시고 들로 산으로 쫓아다녔다.
진달래 잎을 씹었고 짠디를 캐 먹었으며 떡에는 맨드라미 꽃잎이 놓여졌다.
집집마다 닭은 키웠으나 뺀또에 계란 반찬을 싸온 아이들은 한두 명에 불과 하였고 동네 잔칫날에야 그나마 고기 한 점이라도 맛볼 수 있었다.
겨울 긴긴밤에는 호롱불 밑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이웃마을에 건너가 닭서리를 하였고 친구들과 수다와 함께 먹는 동치미 국물 맛과 마당에 묻어 두었던 무를 꺼내서 깍아 먹던 단맛은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고구마, 감자가 간식이었고 된장에 버무려 먹던 시래기 맛과 텃밭에서 따온 고추와 상추, 보리밥을 찬물에 말아 함께 먹던 맛은 지금 생각하면 별미였다.
할매가 꼭꼭 숨겨 두었다가 꺼내주시던 곶감과 겨울에 꽁꽁 언 홍시를 파먹을 때는 맛보다도 할매의 정이 더 그리워진다.
즐거웠던 추억은 오래 남고 괴로웠던 추억은 더 오래 남는다고 했다.
추억은 그렇게 힘든 것일수록 더욱 아름답고 상쾌하다.
꿀꿀이죽, 막대에 꽂힌 눈깔사탕, 국자에 소다를 넣고 물고기랑 별 무늬를 맞춰 뜯어 먹던 뽑기... 그 시절의 맛이 그리워지는 것은 그 때의 추억이 깊이 각인되었기 때문이리라.
북한이 아이들의 밥을 먹는 사진들이 한 번씩 공개될 때마다 그 때 그 시절이 떠오른다.
김정일은 이제 한계점에 다다랐다. 먹거리도 먹거리려니와 전력공급문제는 이제 체제 유지문제로 까지 확대되고 있다.
전력공급을 위해 핵발전소를 건설하려고 하니 핵무기를 만든다면서 미국이 쌍심지를 켜고 북한을 폭격하고자 한다. 당시 영샘이는 이 전쟁을 막으려 미국에 한 마디 대꾸도 못하고 3조원을 지원하리라 약속한다. 그런 인간들이 3조원의 1/3밖에 사용하지 않고도 전쟁을 방지한 햇볕정책을 물고 늘어지고 전쟁을 하자고 설레발이를 치니 그들의 양심은 정녕 딴나라에 두고 온 모양이다.
이것을 기회로 중국이 북한에 전력공급을 해주겠노라고 물밑작업을 시작한다. 북한을 통째로 먹고자 하는 밑밥이다. 당시 참여정부에서도 북에 전력공급을 하겠다는 발표를 한다. 북에 대한 영향력을 누가 지배하는 가에 대한 치열한 공방전이다. 이러한 순간에도 수구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유지만을 위해 북을 이용하기에만 바쁘고 박정희가 써먹던 호시탐탐을 아직까지 부르짖고 있다.
위기를 넘긴 김정일은 개방정책을 우선시하게 되면서 신의주 특구를 진행하나 중국이 양빈을 잡아가면서 훼방을 놓으니 실패하게 된다. 추후에 중국은 신의주특구를 자기들에게 넘기라고 줄기차게 요구를 해오고 있다.
한국 역시 개성공단을 성사시킨다. 개성을 개방한다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면을 넘어 북한 강경군부가 개성 이북 쪽으로의 후퇴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3,8선이 개성이북으로 그어졌다는 말이다. 서울 턱밑에 있던 북한군을 후퇴시키는 작업이니 김정일의 용단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햇볕정책의 성과이다.
그런 김정일이 군부에 밀려 핵실험을 했다는 것은 후계자 싸움이 시작되었다는 징조이다.
가짜 비자사건으로 김정남이 외국으로 떠돌고 있는 것을 기회로 강경 군부에서 집단지도체제를 들고 나오는 것이다. 핵실험은 외부문제이기에 앞서 김정일에게는 내부 문제일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이다.
미중일러가 모두 김정일 이후를 두고 포석을 놓고 있는데 수구들만 눈앞의 표에 어두워 전쟁운운하고 있으니 그냥 안타까울 뿐이다. 간도를 통째로 모택동이에게 넘긴 전철을 또다시 밟아서는 안 될 일이다. 지금은 보다 큰 그림을 그릴 때이다.
통일이 된다면 먼저 냉면을 한 그릇 먹어야겠다. 심양에서 먹어본 북한산 털게 맛도 다시 한번 맛보고 싶다.
ⓒ 손오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