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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 3호선 구파발역에서 내려 360번 버스를 타고, 일영·장흥을 잇는 371번
지방도를 따라가다가 창릉천을 건너면, 고양시 관할 행정지역이다. 버스를 탄
채 고양시 지역에 들어서면, 새로운 아파트 단지로 이미 입주한 곳도 있고, 지
금 한창 짓고 있는 곳도 있어 역시 신흥 아파트 대단지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계속 가면 새로운 아파트촌을 지날 때의 정류소 명칭은 oo아파트 몇 동
앞, 또는 oo아파트 몇 단지 앞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러다가 아파촌을 지
나서부터 큰 업소이름이나 구지명이 버스정류장이름으로 쓰이는데, 참절, 경
남식당, 효자동-산막골을 지나서 오금동고개가 고양시 지역 버스정류소 이름
이다.
버스정류소 이름에서 웃기는 현실이 발견되었다. 도로표지판에는 전통적 이름인
삼막골이지만, 버스정류소 이름은 삼막골이 산막골로 변하여졌다. 고개이름도 매
내미 고개에서 오금동 고개로 변했다. 원래 이 고개의 이름은 매내미고개인데, 매
너미 또는 매나미고개라고 말하기도 한다. 행정지명으로는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
와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의 경계를 이루는데, 한북정맥이 가로지른다. 물론 지금
은 아스팔트 포장도로의 넓은 길을 뚫느라, 원래 고개의 산 허리를 잘라내어 높은
고개가 있던 흔적만 있는 정도이고, 구길은 산허리로 올라가다 길이 끊겨버렸다.
이 ‘매내미’란 말은 장흥면 삼하리에 있는 가장 큰 자연부락 마을이름도 ‘매내미’이다.
이 매내미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9월9일에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지내던
마을제사인 ‘매내미 도당제’는 유명한 민속제였다. 매내미 내지 매너미란 말은 ‘이 고
개로 매가 날아 넘어 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말도 있고, 또 전해오는 말로는
매내미라는 명칭은 춘향의 어머니인 월매(月梅)에서 비롯된다고도 전해진다.
[향토문화전자대전]에 따르면,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이곳에 소설 『춘향전(春香傳)』
의 주인공인 춘향의 묘소가 있었는데, 이수광(李睟光)의 후손들이 이곳에 살면서 춘
향의 묘소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외부에 숨기려고 일부러 춘향의 어머니인 월매의
‘매’자와 남원(南原)의 ‘남’자를 합해 '매남'으로 불렀고, 세월이 흐르면서 이 '매남'이
'매내미'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예전에 마을근처에 있는 이 고개가
너무 가팔라서 "수레가 ‘매닥질’ (筆者註; 수레가 헛바퀴를 도는 모습을 의미하는 이
지방 고유어)을 쳐도 올라가기 힘들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말도 있다.
정종대왕빈궁성빈충주지씨단위(定宗大王嬪宮誠嬪忠州池氏壇位)
어떻게 정해진 이름이든 정류소 '오금동고개'에서 내려, 옛날엔 멀리 앞을 보면
돌기 느티나무가 보였고, 삼막골에서 내려오는 맑은 '오금천'이 있던 안말 계곡
입구에서 북쪽 매내미고개를 넘으면 양주시 권역이다. 이 매내미고개 안보용 구
축물 다리밑을 지나서 약 300m 거리에 이르면 ‘비석거리’ 버스정류장이 나온다.
이 비석거리 정류장 조금 못 미쳐 오른쪽 산비탈에 1978년 10월 10일에 '경기
도 기념물 제49호' 로 지정된 지봉 이수광(芝峯李晬光 : 1563~1628)선생의 묘역
이 자리하고 있다. 이수광 선생의 묘역주소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 산
90-1 번지로 노고산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이수광(李晬光)은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 성리학자(性理學者), 실학자
(實學者), 외교관(外交官), 저술가(著述家)이다. 그는 1563년(명종18년)
2월 조선 태종(太宗)의 7대 후손으로 태어났으며, 자(字)는 윤경(潤卿),
호(號)는 지봉(芝峯), 시호(諡號)는 문간(文簡)이다. 이수광(李晬光)선생
은 우리나라 최초로 천주교와 서양 문물을 소개하여 실학(實學)의 선구
자로 알려진 학자이다. 세 차례에 걸쳐 북경(北京)에 사신으로 왕래하는
동안 서양학술을 처음으로 소개함으로써 실학운동(實學運動)의 선구자
가 되었다.
비각 안에는 오른쪽부터 부친 동고 이희검(東皐李希儉; 1516~1579/戶曹·刑曹·
兵曹判書역임), 지봉 이수광(芝峯李晬光), 아들 분사 이성규(汾沙李聖求 ; 1584 ~
1644/領議政역임) 3기의 묘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선조(宣祖 ;재위 1567∼1608), 광해군(光海君 ; 재위 1608~1623), 인조
(仁祖 ; 재위 1623 ~ 1649) 세 임금 밑에서 병조좌랑(兵曹佐郞), 안변부
사(安邊府使), 순천부사(順天府使), 도승지(都承旨), 대사간(大司諫), 대
사헌(大司憲), 이조참판(吏曹叅判), 공조참판(工曹叅判), 이조판서(吏曹
判書)에 이르기까지 내외직을 두루 역임했고, 사신으로 3차례나 명(明)
나라에 다녀왔으며, 관리로서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묘호란(丁卯胡
亂)을 모두 치렀다.
젊었을 때부터 시문(詩文)에 능통했으며 북경(北京)에서 가져온 책(冊)
들을 탐독하여 그 개요를 적었는데, 이렇게 해서 60평생동안 저술한 책
이 <지봉유설(芝峯類說)>을 비롯해 모두 78권에 이른다. 지봉유설은 서
양의 종교를 소개함으로써 당시 사람들의 삶을 새롭게 하는 획기적인 계
기가 되었다. 특히 그가 소개한 마테오리치의 저서 <천주실의(天主實義)>
와 <교우론(交友論)> 등 천주교와 관련된 사적(史籍)들은 한국천주교가
성립되는데 바탕이 되었다.
상단에서부터 묘소의 순서는 제일 위에 이수광(李晬光)과 안동김씨(安東金氏)
그 아래에 아버지 이희검(李希儉)과 문화류씨(文化柳氏), 아들 이성구(李聖求)
와 안동권씨(安東權氏), 그리고 맨 아래에는 아들 이성구의 본처였던 파평윤씨
(坡平尹氏)의 묘가 각각 차례대로 위치하고 있다.
증정경부인 안동김씨 부좌 - 증의정부영의정 행이조판서 이공수광묘
(贈貞敬夫人安東金氏 祔左 - 贈議政府領議政 行吏曹判書 李公晬光墓)
~~ 두류봉이 추리해서 읽은 묘표문자이다~~
이수광(李晬光)의 묘가 아버지인 이희검(李希儉)의 묘(墓)보다 위에 있다.
이수광 사후 바로 부친의 묘 위에 이수광 묘를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유교시
대의 조선에서 특이한 묘 배치이다. 물론 학문적이나 지위가 높은 아들을 맨
위로 위치하였을 수도 있지만 조금은 의아한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다.
묘표(墓標)에는 6.25동란시에 생긴 많은 총탄자국으로 보통사람인 필자의
눈으로는 그 내용을 정확히 판독할 수가 없다. 그냥 몇 글자만 보이는 것으로
문장을 추리하여 보았다.
삼하리와 인근 선유리는 동란의 와중인 1.4후퇴시에 중공군의 대공세에 맞선
참전국인 영국군과 중공군의 전투가 치열했던 지역이다. 인근 선유리에서는
공릉천을 사이에 두고, 이곳 이수광 묘소 인근에서는 매내미고개를 포함한 노
고산능선을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이곳 전투에서 영국군
157명이란 귀중한 목숨을 나라 이름도 잘 모르는 신생독립국 KOREA란 곳
에서 공산군과의 싸움으로 전사한 지역이다.
이수광(李晬光)의 묘(墓) 바로 아래에 있는, 아버지 이희검(李希儉)과
어머니 문화류씨(文化柳氏)의 합장묘(合葬墓)가 있다. 부자(父子) 묘
소의 묘표와 상석 앞뒤 옆면 아래위 - 모든 곳을 살펴보아도 이것을 세
운 연도(年度)나 간지(干支)가 보이지 않았다.
묘표에 "정경부인문화류씨부좌(貞敬夫人文化柳氏祔左)"란 말은 조선
시대 외명부 중 문관·무관의 적처에게 내린 정·종1품 작호(爵號)를 정
경부인이라고 하였으며, 그 부인이 문화류씨(文化柳氏)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다음 부좌(祔左)란 말은 부부합장묘(夫婦合葬墓)에서 남편
의 왼쪽에 묻혀있다는 뜻이다.
다음 줄에서 "증의정부영의정 행병조판서 이공희검지묘(贈議政府領
議政行兵曹判書李公希儉墓)"란 行兵曹判書에서 '생전에 가장 높은 벼
슬은 병조판서'로 지냈지만, 贈議政府領議政이라 '돌아가신 후에 의정
부영의정이란 벼슬로 높여 추증된 분'이란 뜻이다. 그리고 李公希儉之
墓에서 이공(李公)은 벼슬을 지낸 이씨문중의 사람으로 이름(諱)이 희
검(希儉)이란 분의 묘이다.
이수광(李晬光) 묘 바로 아래에 부모님 묘소, 그 아래에는 아들인 이성구(李
聖求) 부부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증정경부인안동권씨부좌 의정부영의정
이공성구지묘(贈貞敬夫人安東權氏祔左 議政府領議政李公聖求墓)"라고 쓰
여있는데, 남편인 이성구(李聖求)가 영의정이 되었지만, 안동권씨(安東權氏)
는 국구(國舅: 임금의 장인) 한준겸(韓浚謙)의 생질녀이면서 의정부 사인(議
政府舍人) 권흔(權昕)의 딸이다. 이성구가 영의정끼지 올랐지만, 부인 권씨
(權氏)는 계처(繼妻)인 둘째부인으로 생전에 정경부인의 작호(爵號)를 받지
못하고, 죽은 후에 작호를 받았다. 이성구와 부인 권씨 사이에는 5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이 묘표(墓標)에 표기된 "증정경부인파평윤씨지묘(贈貞敬夫人坡平尹氏
之墓)는 이성구(李聖求)의 첫째부인인 파평윤씨(坡平州尹氏)의 묘이다.
파평윤씨(坡平州尹氏)는 전라도 병마사(全羅道兵馬使) 윤열(尹說)의 딸
인데, 자녀가 없이 일찍 죽었다. 이성구(李聖求)의 장모는 외동딸뿐이고
다른 가족이 없었으므로, 그는 첫째부인 윤씨가 돌아간 뒤에도 장모를
이웃집에 모셔두고 평생 돌봤다고 한다.
이수광(李晬光)선생 묘역을 나와 다시 371번 도로 곁을 걸으면 바로 ‘비석거리
정류소’ 가 나오고, 가족과 함께 놀꺼리가 많은 선유동으로 가는 3거리 표지판이
보인다. 그리고 조금 더 걸으면 매내미 마을의 화훼단지가 나온다. 원래 매내미
마을에서 주로 짓던 농사는 벼를 위주로 한 논농사에다가 서울로 들어가는 채소
농사가 많았는데, 도로가 넓어져서 서울시민들이 자동차로 오기 좋아지자 길거
리 쪽으로는 화훼농사와 묘목을 재배하는 농업으로 바뀌어졌다.
MBC농촌드라마 <전원일기>가 1980년 10월 29일부터 2002년 12월 29일까지
무려 22년 2개월 동안 총 1088회 방송된 장수프로그램의 기록을 남겼다.
이 드라마의 촬영장소가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 이곳 “매내미마을”에서 첫 방송
분부터 10여년간을 촬영한 곳이라, 마을이름까지 “전원일기마을”로 바뀌었다.
필자가 만난 마을주민 김기철(71세)씨는 이 동네에서 4대째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6.25동란 때 1951년 공산치하에서 재차 수복된 이
후 새로 집을 짓고 그 이듬해 자기가 태어난 집으로 2000년대에 현대식으로 리
모델링하여 계속 살고 있다. “매내미 마을”이란 고유이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
는데, 지금의 40대 이하사람들은 마을이름이 “전원일기마을”로만 안다면서 몹
시 서운해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