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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끼리 / 이미란
우리 엄마, 우리 아빠, 우리 오빠, 우리 학교, 우리나라에서처럼 모두를 아우르는 ‘우리’라는 단어가 있다. 우리라는 말은 따뜻한 훈훈한 바람을 일으켜 행복하게 오순도순 어울려 사는 느낌이 있다.
양지바른 산 밑에 옹기종기 모여 저녁 밥하는 연기가 산 중턱에 목도리처럼 걸치는 마을의 정경이 떠오른다. 언제나 그립고 가슴 설레는 뛰어가서 안기고 싶은 따뜻한 우리 집이 떠오른다. 따뜻한 저녁밥을 지어 놓고 기다리는 우리 엄마와 우리 식구들이 따뜻한 아랫목에서 나를 기다린다.
‘자야 이 나물 작은 할아버지 집에 좀 가져다드리고 오너라.’ ‘숙아, 우리 집에 놀러 올래? 우리 엄마 외갓집 갔대이.’ 예로부터 우리들은 ‘우리’ 라는 따뜻한 모자를 쓰고 ‘함께’라는 공동체 의식을 중하게 여기며 살아왔다.
반면 ‘나’라는 말은 외톨이의 고독함이 느껴진다. 북풍한설의 계절에 소슬 대문을 꼭 닫아건 스크루지 영감 집의 황량한 크리스마스 마당이 떠오른다. 외동자식들의 혼자만의 ’내 엄마‘이지만, 우리 엄마라고 부르는 것이 익숙하고 듣기 편하다.
내가 자란 마을은 성산 이 가 집성촌이라 네 것, 내 것 가리지 않는 온 동네가 친척 사이인 그야말로 ‘우리 마을’이었다. 마을 사람 모두가 우리(we-feeling)라는 어깨동무를 하고 살았다. 즐거운 일은 같이 축하해 주고 슬픈 일은 같이 위로하면서 정답게 지냈다.
경조사에도 함께 참석하여 몸으로 도울 뿐만 아니라 부조로 어느 집은 막걸리 한 동이, 묵 한 판, 떡 한 말과 같이 행사에 필요한 물품을 서로 모아 큰일을 치르고 나중에 그 집 경조사에 똑같이 갚았다.
이와 같이 각 가정의 모든 일이 동네일이 되어 함께 웃고, 함께 울었다. 오늘은 자야네 집 제사, 내일은 돌이네 할아버지 생신, 다음 달 보름에는 석이 누나 시집가는 날을 동네 사람들이 자기들 일처럼 모두 기억했다. 심지어 누구네 모내기하는 날, 누구네 타작하는 날을 기억해 두었다가 틈을 내어 손을 보태고 막걸리 한 사발을 얻어 마셨다. 온 동네의 크고 작은 일에 나의 일이 아니고 우리 일 일이었다.
점점 자식들이 객지로 떠나면서 빈집이 많아졌다. 그 빈집에 타성他姓들이 들어와 살면서 마을은 바뀌기 시작했다. 어릴 때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앞에 택호를 두어 ‘~아재’ ‘~ 아지매’ `~할매‘ ’~할배‘ ’~ 형님‘으로 부르던 호칭이 요즈음은’누구 씨‘로 바뀌게 되었다.
새로운 무리에 맞서 뿌리 내리고 있던 동성同姓 者들 끼리 뭉쳐 텃세하기 시작했다. 타성자他姓者들은 자기들끼리 뭉쳐 세를 늘려가며 텃세에 대항했다. 이러다 보니 마을이 분열했다. ‘끼리’라는 덩어리 집단이 생겼다. 패가 갈려 서로 적대감을 가지고 대립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함께’와 비슷한 ‘끼리’라는 말이지만 부정적인 뜻이 포함되어 있어 우리끼리 뭉쳐 파당을 만들게 되는 조심해야 할 말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내 것’ ‘네 것’ ‘내 편’ ‘네 편’이라는 단어가 자꾸 사용되어 과거에 훈훈한 정은 풍선에 바람 빠지듯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우리’라는 단어 뒤에 ‘끼리’라는 무서운 놈이 자리를 앉자 무서운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다. 우리 안에서도 ‘내(my)쪽’이라는 단어가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이렇게 점차 서로를 위하고 배려하는 이타적利他的인 분위기에서 나만을 위하고 내 것만 중요한 이기심利己心이 맹위를 떨치게 되었다.
우리나라 정치판이 꼭 이러한 모양새가 아닐까 한다. 조선시대는 끼리끼리 뭉쳐진 사색당파 싸움으로 나라가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일본의 지배에서는 오매불망 목숨 걸고 하나가 되어 우리가 원하던 독립을 강대국 싸움에 어부지리로 얻다 보니 강대국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해방 후 강대국의 신탁통치에 대한 견해차로 친탁親託, 반탁反託, 공산주의, 민주주의를 나누어 끼리끼리 싸우더니 나라를 두 동강이로 만드는 비극을 만들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다른 민족끼리 보다 더 심하게 남한과 북한이 죽고 살기로 싸우고 있다.
우리 민족의 핏속에 지연地緣, 혈연血緣, 학연學緣의 끼리끼리 파당 의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여기에 ‘끼리, 라는 말이 붙어버리면 경쟁과 분열이라는 무서운 결과를 만든다.
작금에 또 나라가 소용돌이치며 시끌벅적하다. 그들의 머릿속에 우리 나라, 우리 국민은 사라지고 우리끼리 당, 우리끼리 지역 등 ‘끼리’라며 편을 갈라 목숨 걸고 으르렁거리며 싸우고 있다. 결국 ‘끼리’라는 단어는 파당을 만들어 투쟁하며 판단력을 잃게 하여 현명한 이성을 검은 구름으로 깊게 가리고 있다.
전 세계는 불황의 늪에 떨고 강대국들은 보호무역의 높은 장벽을 쌓고 자기들끼리의 성지를 만들어 관세 폭탄을 터트리고 있다. 과거 우리 경제를 일으킨 헝거리(hungry) 정신은 온 국민의 어느 가슴에도 없고, 천연자원도 고갈되었다. 여기에 아무 대책도 없이 이렇게 내분으로 싸우고만 있다. 어쩌면 좋으랴.
요즈음 우리 국민은 코로나 이후 올라가기 시작한 인건비를 비롯한 고물가와 불경기에 가슴을 졸이며 허리띠를 당겨 매고 있다. IMF 때의 경기보다 훨씬 심각한 불경기다. 공장이나, 점포는 임대라는 붉은 깃발을 여기저기서 만국기처럼 흔들고 있다.
더구나 저들은 상대뿐만 아니고 자기들끼리도 친X, 반X라며 끼리 패를 나누어 자기 꼬리를 갉아 먹고 있다. 서로 무슨 티끌을 못 잡아 눈이 벌겋다.
정치인들이 ‘우리들끼리’를 위하지 않고 ‘우리 함께’를 위한 나라의 정책을 세워 나라가 하나의 목표를 위해 온풍을 불러일으킬 수 없을까. 우리 함께 모두 행복한 이웃이 되는 바람을 가지며 먼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14.1)
2.동안거冬安居
1).삶의 쉼표
백내장 수술을 받으라는 의사의 진단이 떨어졌다. 눈 수술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축 처진 눈두덩이도 끌어 올리란다. 70년을 훨씬 넘도록 열심히 닫고 열기를 하며 세상 안내를 해준 고마운 눈이다.
수정체에 세월의 때가 부옇게 묻고, 눈의 대문이 늘어졌다고 한다. 더 이상 일을 못 한다고 대청소하고 수리도 해달란다. 이 먼지투성이 세상에서 견디며 이 구석 저 구석, 이 일 저 일을 보여주느라 용을 썼으니 고장 날 만도 하다.
앞만 보고 바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으로 착각하였다. 어부지리로 내 생애 처음으로 생각지도 않든 동한거라는 귀한 선물을 받았다. 쉼 없이 달려온 삶의 열차에서 긴 휴식인 두 달의 쉼표를 얻게 되었다.
두 주 간격으로 두 번의 수술을 하는 동안 세수도, 목욕도, 머리 감기도, 파마도, 못하는 원시인 생활을 해야만 했다. 감히 바깥 외출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외딴섬에 갇힌 적막강산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평상시 내 이름 앞에는 ‘바쁜’이라는 말이 언제나 간판처럼 떡 버티고 있었다. 내가 휴가를 즐기며 하릴없이 이리저리 뒹굴고 있다고는 것은 생각도 못 할 일이었다. 찾아오는 사람은 고사하고 전화기조차 묵언 수행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커다란 침묵의 이불이 우리 집을 푹 덮고 있었다.
완벽한 나 혼자만의 외로운 왕따 신세의 시간을 가졌다. 눈을 건드려 놓았으니 불편하기 말할 수가 없었다. 책도 못 보니 머릿속의 흑백 필름을 돌려 천장에 옛날 추억의 그림을 소환해 보았다. 그것도 지루하면 텔레비전을 24시간 강제 노동을 시키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가는 편안한 휴가를 보냈다.
반세기 가까이 눈만 뜨면 이불을 스프링 퉁겨서 후딱 차고 일어나 뛰어가서 하던 새벽 운동도 접고, 따뜻한 이불 밑에서 게으른 숨쉬기 운동만 하면서 동안거에 들어갔다. 이 느긋한 새로운 맛을 음미하면서 즐길 수 있었다.
성격이 팔자를 만든다고 급한 성격은 삶의 시계를 삥삥 바쁘게 돌아가게 했다. 다른 사람들이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보낸다고 흉 같은 칭찬을 하곤 했었다.
바쁘게 사는 모습은 나의 등산 습관과 흡사했다. 오직 앞만 보며 정상 정복만 생각하고 헐떡거리며 올랐다. 산을 오르다 보면 계곡 물가에 예쁘게 피어 보아달라고 수줍게 고개 내미는 야생화도 있었고, 너럭바위에 펼쳐놓은 계곡서 씻고 다듬어 불어오는 시원한 산바람도 있었다. 하지만 쳐다보지도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며 무조건 남보다 빨리 정상 정복하여 정상석을 만지기 위한 것만이 유일한 등산 목적이었다.
정상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면 누가 뭐라고 하나. 정상석 만지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같이 간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여기 기웃, 저기 기웃거리며 맑은 공기 마시며 준비해 놓고 기다리는 산바람을 불러와 너럭바위에 다리 쭉 펴고 누워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주고받을걸. 푸른 하늘에 떠도는 뭉게구름의 자태를 보고 누워 준비해 준 자연에 고맙다고 칭찬하며 땀을 말리고 쉬었다 가지 왜 그랬을까.
그렇게 살아온 길을 돌아보면 못 보고 지나치고, 흘리고, 외면한 많은 이야기가 흩어져 있다. '쉼' 없이 바쁘게 사는 것으로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울 필요는 없다. 때로는 '쉼표' 가 필요하다. '쉼'은 게으름도, 멈춤도 아니다. 돌아보면 '쉼'을 통해 우리네 삶은 더욱 풍성해질 수 있다.
여기저기에 천천히 쉼표를 찍어가며 나를 쳐다보는 많은 눈길을 느긋하게 쳐다보며 웃어주기도 하고, 손도 잡아 주면서 쉬엄쉬엄 가면 얼마나 좋았을까. 고개 들어 둘러보니 이미 해는 서산에 나지막하게 걸려있어 나를 기다려 주지는 않는 것 같다.
저 아름다운 저녁노을이 서산 너머로 숨기 전에 쉼표를 찍어가며 가자. 흘리고 빠트리고 지나친 곳곳의 이야기를 연결해 보고 싶다. (9.9)
3. 말글살이 / 이미란
카톡 소리가 고요한 밤의 정적을 깨트린다, ‘카톡’ ‘카톡’
‘주경야독해 보려는데
이친자가 종방이라네.
밝혀진 살인자를 보고 깜놀 ㅠㅠㅠ
멍때리다가 답이 늦었다.
쏘~~리
사요나라.’
기다리던 친구의 카톡을 들여다보고 머리가 복잡하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 사전을 펼쳐도 없는 단어들이다. 해석이 어렵다. 이리저리 짜맞추어 보면 대충 이런 내용이다.
‘낮에 일하고 밤에 책 좀 보려고 하는데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라는 연속극이 마지막 방송이라네. 연속극에서 밝혀진 살인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있다가 답이 늦었다. 미안해, 안녕.’
이 짧은 카톡에 도대체 몇 나라말이 있나. 한문, 영어, 일본어에다가 축약어, 은어隱語까지 동원되었다. 이런 상태가 요즈음 우리의 말글살이 실정이다.
우리나라 사람끼리도 말의 뜻이 통하지 않는다.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을까. 외국어의 함부로 사용뿐 아니고, 길거리 간판, 아파트 이름이 대부분 외국어다. 걱정스럽다. 또 대화할 때도 긴 문장을 그대로 하는 경우가 없고 뭐가 그리 급한지 말을 압축한다. 아나운서들이 사용하는 언어조차도 신조어와 은어 투성이다. 매스컴과 방송에서 부추기는 실정이다.
우리는 고조선 이후 나라는 있어도 말을 표현할 수 있는 우리 문자가 없어 중국의 한자를 빌려다 사용하였다. 생활에 사용되는 글자는 한문뿐이었다.
뜻글자인 한문 글자가 워낙 어려워 일반 백성들은 익히는 데 긴 시간을 요구했다. 거기다가 문자를 깨우칠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자연 국민의 대다수가 문맹자였다. 이에 세종대왕께서 문맹 백성들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쉬운 문자를 창제하려 했다.
노력 끝에 우리말을 소리 나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과학적인 소리글자인 한글을 만들었다. 하지만 조선 사회에서는 이 소중한 한글을 언문이라 무시하면서 아녀자들이나 힘없는 서민들이나 쓰는 글로 취급했다. 사대부나 국가 기관에서는 대부분 한문을 그대로 사용했다. 과거급제 시험도 당연히 한문을 사용했으니, 한문의 위세는 짐작할 수 있었다.
한글 창제 이후 지식층이나 권력자, 학자들은 한문을 오히려 더욱 고집하며 사용했다. 한글을 쓰면 무식한 부류라 업신여겼다. 한글을 무시하고 한문을 중시하는 조류가 조선시대 계속되다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이름이나 지명, 사자성어를 신문 지상이나 신문, 사회생활 전반에 거의 한문으로 된 말이 사용되고 있다.
한문뿐만 아니고 한글이 제자리 뿌리내리기도 전에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연히 관청이나 일본 유학을 다녀온 지식층들은 일본어를 쓰게 되었다. 더구나 일본은 내선일체를 외치며 조선 민족정체성 말살 정책을 시행했다.
백성들의 이름뿐만 아니라 생활 구석구석에 우리말이 아닌 일본어만 사용하기를 강요했다. 힘없는 백성들은 일본의 강압 때문이거나, 지식층들을 흉내를 내기 위해 일본어를 쓰게 되었다. 우리 말글살이가 한문에 이어 일본어가 푹 스며들게 되었다.
36년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일본이 주도하는 신진 산업화가 이루어졌다. 산업화 전반에 걸친 말이 일본어가 판을 치다 보니 지금도 공구工具 명칭이나 건축 용어, 일반 생활어一般生活語에 일본어가 많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해방 이후에는 우리나라가 의존하고 영향을 많이 주는 나라가 미국이 되었다. 오늘날 국제어가 영어라 학교 교육과정의 학습 시수 중에 영어가 많은 시간을 차지하게 되었다. 전 국민의 영어에 대한 열기는 대단하다. 학교생활 중에는 물론 심지어 우리말도 배우기 전인 어린아이들까지 비싼 교육비를 지불하고 영어 유치원에 다니는 실정이다.
쏟아져 들어오는 외국 문물들이 모두 영어로 쓰여 있으니, 영어를 모르면 생활에도 어려움이 있게 되었다. 영어를 잘 쓰고 잘하는 사람이 지식층이고 살아가는데 편리하게 되었다. 영어를 잘해야 좋은 대학에 진학도 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할 수 있으며 사회적, 국제적으로 지식층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영어교육에 밀린 한문이 학교 교육과정에서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점차 제외 당하게 되었다. 그러하다 보니 젊은 세대들이 일반생활에 널리 사용되고 있는 한문 문구로 된 단어들의 해석이 힘들어 문해력의 저하를 가져오고 있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이처럼 사회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 한문을 평소 생활에서 제외할 수가 없는 우리 말글살이 실정이니 문제는 심각하다.
이북에서처럼 라면을 꼬부랑 국수니, 전구를 불알, 스타킹을 양말 바지 등으로 사용하자고는 하지 않겠다. 전 세계의 뚜껑이 열려 각국 문물의 왕래가 활발하다 보니 외국의 문화, 문물과 함께 들어온 외래어가 생길 수밖에 없다.
사전에서 인정한 외래어는 사용하더라도 순수 우리 정서를 품고 있는 우리말이 있는데 구태여 인정하지도 않은 외국어를 꾸역꾸역 사용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우리는 단어를 만들고 문법을 지켜야 하는 작가인 만큼 책임을 느낀다. 혼탁한 말글살이 현실에 가능한 우리말에 적합한 한글을 많이 사용하여 주체성 함양에 이바지했으면 좋겠다. (13.2)
4. 동안거 冬安居
2). 망모亡母, 애절함에 젖는다.
느닷없이 주어진 긴 시간의 동안거는 삶의 달콤한 간식처럼 여유롭다. 온돌 매트에 누워 이것저것 텔레비전 드라마 쇼핑도 하다가, 타임머신 열차를 타고 추억 여행도 해본다. 꾸벅꾸벅 졸며 만든 제목만 아는 지난 드라마 보는 맛이 새롭다.
드라마 굽이굽이에 숨바꼭질하듯 똬리를 틀고 있는 단어는 ‘엄마’다. 우리 엄마의 지친 모습이 눈 앞을 가린다. 눈에 뜨거운 것이 고인다. ‘더 일찍 할 걸‘, ’그렇게 하지 말 걸’ ‘그렇게 할 걸’의 후회가 소용돌이로 파도를 일으킨다. 엄마가 보고 싶다.
먼지 쌓인 추억의 창고 문을 열면 엄마라는 단어가 하얀 쌀밥에 서리태 나오듯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가슴에 바위를 눌러 놓은 듯 답답하다. 눈앞에 떠오르는 그리운 엄마 얼굴 영상들은 모두 가슴 저린 것들이다.
철없던 시절, 꺼멓게 거슬린 거친 얼굴에 머리는 빗질도 곱게 하지 않고 수건을 푹 눌러쓴 엄마 모습이 싫었다. 왜 좀 여자답게 정리된 모습일 수 없을까. “저러니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 한 눈 팔지.” 엄마에게 칼날 같은 원망을 쏟아부었다.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던 눈물 고인 엄마 얼굴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말을 속으로 삼키고 있었을까.
엄마가 머무는 곳은 언제나 외롭고 썰렁한 부엌 한구석이었다. 우아한 모습으로 자신도 치장하고 방 안에 둘러앉아 떠들썩하게 웃으며 손님들과 즐기고 싶었을 것이다.
사실 엄마는 부잣집의 사랑받던 막내딸이었다. 힘들고 억울할 때는 귀하게 아껴주시던 외할머니가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그렇게 힘들 때 엄마도 부르고 싶은 엄마가 있었을 것이다. ‘엄마’라는 소리가 목에서 쫓아 나와 입술에 매달려 달랑거려도 한 번도 뱉어내지 못하고, 소리 내지 않았다. 입속으로 삼키면서 살아온 인고의 세월이 화병이 되어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을 것 같다. 결국 삶의 마지막에는 뇌졸중으로 고생하시다가 혼자만의 여행을 떠났다.
아버지는 한평생 종손이라는 멍에에 얽매여 힘들게 살았다. 가족들 모르게 일본으로 건너간 유학 생활도 종손은 집안을 지켜야 한다는 절대적인 이유로 포기하였다. 꿈꾸던 희망에 참 푸른 미래를 현해탄 건너에 묻어 둘 수밖에 없었다.
집안끼리의 합의에 따른 강제 결혼식을 피해 달아나다가 붙잡혀 자정에 임박해서 억지 결혼식을 올렸다. 비상사태로 이루어진 현실의 가정과 이루지 못한 꿈의 세계를 방황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산 너머 남촌에서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기를 기다리는 긴 아픈 세월을 보냈다.
담 너머 바깥세상을 쳐다보고 있는 지아비 대신 종갓집 소임은 엄마 차지가 되었다. 고단한 세월을 살다 간 엄마 몸과 마음에서는 얼마나 아버지의 사랑 갈증을 느꼈을까.
하지만, 종갓집을 이끄는 듬직한 종부요, 사랑 없이도 살 수밖에 없었던 정숙한 아내요, 어려움에서도 자식을 잘 지키고 키우는 의지의 엄마 모습으로 살았다.
보태어 나는 딸인지 시어머니인지 주제도 모르고 엄마한테 맘에 안 든다고 잔소리만 하였다. 엄마가 우리 집 주춧돌이었고 고마운 과 감사함이 가슴 가득했다. 아무렇게나 생각을 휘갈겨 쓰는 낙서장처럼 엄마한테는 가시 같은 잔소리를 쏟아 내었다.
내 마음을 걸러서 조심스럽게 부드럽게 이야기할걸. 두 손을 잡고 눈을 맞추고 엄마의 하소연에 장단 맞추어 줄 걸, 힘들겠다고 어깨라도 주물러 드릴 걸 후회가 가슴을 후빈다. 영원히 우리 곁에 있어 줄 것이라는 착각이 나중에 잘해드릴 수 있다는 안일함으로 더욱 섭섭하게 했다. 다음 세계에서 다시 만나면 맘에 쏙 드는 딸이 되고 싶다.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16년 투병 생활을 하시다가 떠나신 후 뒤이어 엄마까지 같은 병으로 자리 보존했다. 노쇠한 엄마를 위해 김치나 담아 주고, 국을 끓여다 주고, 반찬 해주고, 고기 사다 주고, 비싼 옷 사다 주면, 효도하는 줄 알았다. 그것이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인 양 자만했다.
세상에서 가슴 아프게 하는 죄는 모르고 짓는 죄라고들 한다. 고분고분하게 엄마 말을 잘 따르는 편안한 딸이 아니었다. 죄송한 마음이 뭉게뭉게 피어난다. 엄마와 딸의 진정한 화해는 죽고 나서야 이루어지나보다.
엄마에 대한 추억은 봄 냄새 풍기는 따뜻하고 아기자기한 모습의 영상이 아니다. 가슴이 시리고 아프고 저리는 뜨거운 그리움이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지금에서야 쌓여서 화석이 된 엄마의 아픔이 그대로 마음 깊이 전해온다.
과거는 수정도 보완도 안 되는 흘러간 강물이다. 가슴속 깊은 곳에 새하얀 바람이 아리게 불어온다. (11.8)
5.동안거 冬安居
3). 어제와 내일 사이
어제와 내일 사이에는 오늘이 있다.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삶의 현장인 ‘오늘’의 중요함을 왜 몰랐을까.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매일매일 쏟아지는 ‘오늘’과 부딪히며 세월을 쌓아가는 일이다.
오늘을 살아 어제의 장으로 보내고 나면 어김없이 턱 밑에 얼굴을 들이대는 내일은 하루가 늙어진 또 다른 오늘이었다. 다가올 다른 내일을 위해 찾아온 오늘은 또 희생시켰다. 이러다 보니 평생 희생으로 점철된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리하여 억울한 어제가 쌓이기 마련이고 후회가 연속된다.
돌이켜보니 오늘을 희생시키며 꿈에 부풀었든 내일은 툭하면 수정, 보충이 불가한 부도어음이 되어 과거의 광장인 어제에서 걸, 걸, 걸을 외쳤다. 좀 더 믿을 수 있는 내일의 페이지를 위해 오늘의 어려움을 참고 힘들게 살았다. 바보짓을 한 것 같다.
지난 세월 엄마는 우리가 먹고 싶어 하는 것들을 그림의 떡으로 만들었다. 눈을 빤짝이며 침을 삼키고 있는 오늘의 당신 자식들의 간절함을 내일의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손님의 접대를 위해 냉정하게 외면하였다. 자식들 가슴에 쌓이는 원망은 안중에도 없었다.
마루 밑 고방에 차곡차곡 쟁여두었다가 상해서 버릴지언정 우리 손에 안겨주는 몫은 없었다. 십 리나 되는 오일장에서 힘들게 사서 머리에 이고, 지게에 지고 온 것들이었다.
예약 없이 줄줄이 대문을 밀고 쳐들어와서 며칠씩 주무시고 가는 손님들의 그림이 엄마 머리에는 가득했을 것이었다. 침을 삼키며 쳐다보는 아이들의 먹거리로 인심 쓰기에는 내일의 걱정이 컸으리라.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만, 그때의 서운함이 두고두고 가슴에 덩어리가 되어 쌓였다. 그때 원망의 연속이 그대로 세뇌되고 습관이 되어 내 생활 태도로 만들어 버렸다. 요즈음은 물자가 넘쳐 흔한 먹거리에도 좀처럼 손을 내밀어 집어 먹지를 못한다. 상하여 버리는 경우가 있어도 내 몫으로 반듯한 생선 한 토막을 굽지 않는다. 전해오는 말에 욕하면서 배운다더니 섭섭하여 원망을 목 안으로 꾸역꾸역 삼키던 내가 또 다른 그때 엄마가 되어 있다.
사과를 한 상자를 다 먹을 때까지 못생기고 상하려는 것만 먹는다. 한 상자 모두 먹을 때까지 나는 못생기고 상한 것만 먹은 억울함을 마음에 쌓으면서 먹고 있다. 비싼 옷을 큰맘 먹고 장만하고서는 아끼느라 옷장 안에서 유행의 세월을 다 보내게 한다. 아이들 교복은 얼마나 큰 것을 구매했던지 졸업식 때가 되어야 몸에 맞았다. 당연히 오늘의 즐거움은 내일의 행복을 위해 참고 미루며 사는 것이 몸과 머리에 익숙해져 버렸다.
이렇게 앞으로 다가올 내일의 페이지만 걱정하다가 진작 써야 할 오늘은 페이지는 수양하는 스님 같은 엄격한 도덕 생활의 일지를 썼다. 지나고 보면 추억의 창고인 어제의 페이지에 재미없는 흑백영화를 만드는 바보가 되어 있었다.
어찌 사람이 살아가는데 흰색과 검은색만 있겠는가, 약간은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분홍색도 있고, 숨겨놓은 파란색도 있어야 재미있게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화려한 내일을 위해 회색빛의 하루하루를 열심히 꾹 참고 살아왔다. 힘들여 살아온 어제를 돌아보니 참 재미없게 하루하루를 보냈다는 후회가 밀려온다.
옷장 안의 색깔은 짙은 구름 낀 회색이 즐비하다. 미술을 전공한 올케언니가 내 옷장을 열어 보고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아가씨 고운 색 옷 입으세요.” 한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다. 화려한 빛깔의 옷을 입고 환하게 웃으며 즐기면서 살 걸 후회가 된다. 누가 말리기나 했나. 내 탓이지 뭐.
아직 오지 않은 내일에 희망을 걸지 말자. 지금, 이순간만 생각하며 오늘에 최선을 다해 살아보리라. 어제 내린 비에 젖은 옷을 탓하지 말고, 또 내일의 흐린 날씨를 걱정하여 우산을 미리 준비하느라 힘들이지 않으리.
오늘 아침 밝게 떠오르는 태양을 반기며 꽃무늬가 예쁜 양산을 쓰고 즐기면서 살아 보리라. 내일 비가 오면 맞아 보지 뭐. 내일 일은 내일의 태양에 맡겨 보리라. (12.6)
6.흔적의 점 / 이미란
손녀가 점 위에 쓰인 숫자를 연결하여 토끼 그림을 그린다. 엉덩이를 들었다가 놓았다가 낑낑거린다. 완성된 그림을 보고 폴짝폴짝 뛰면서 좋아한다. 엉덩이를 토닥이며 칭찬하니 신이 났다.
숫자 공부시키느라 사준 그림책이지만 손녀는 재보다 잿밥에 관심이 많다. 그려진 그림을 보고 좋아하고는 다른 그림이 궁금해 입을 꼭 다물고 열심히 숫자를 찾아다닌다.
인간도 하얀 도화지에 삶의 흔적들을 한 점 한 점 찍어가는 일이다. 각자 다른 흔적들을 연결하면 선이 되고 면이 되어 무늬가 된다.
이것들이 모여 그 사람의 한평생 살아온 그림이 된다. 나아가서 한사람, 한사람이 어떤 삶의 그림을 남기느냐가 따라 그것들이 모여서 그 민족의 문화와 문명의 수준을 결정한다.
나의 흔적들을 머릿속으로 연결해 본다. 어느 맑은 봄날, 친구와 함께 마냥 즐겁게 웃으며 마을 뒷산 숲속 길을 산책했다. 따스한 햇살이 나무 사이로 내려와 얼굴을 쓰다듬고, 새들의 노래가 귀를 간지럽혔다. 그 순간순간을 마음에 담으며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심취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우수상을 받고 부모님이 기뻐하던 일, 부모님과 조부모님의 사랑을 가득 받고 자란 어린 시절, 할아버지께서 간식을 넣어둔 통을 나에게만 열어주던 추억, 할머니와 웃고 쫑알거리며 함께 걷던 고향의 들판이 풍경이 떠오른다. 어릴 때 사랑받으며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던 일들이 내 마음에 따뜻한 흔적으로 새겨져 밝고 아름다운 추억이다. 이것들의 연결은 아름다운 무늬를 만든다.
우리 생에 어찌 이러한 행복한 밝고 아름다운 자국뿐이랴, 힘들고 어려운 고통의 고비를 참고 견뎌야 하는 일들이 첩첩이 쌓였다. 교복을 입고 다니던 때부터 강산을 변화시키는 세월의 덩어리가 일곱 개가 넘도록 긴 세월이 흘렀다.
자매 이상으로 가까이 지내던 친구와 서로 배신감으로 헤어졌던 일, 무조건 내 편이었던 부모님, 오빠, 동생과의 영원한 이별, 믿었던 공장 직원들의 가슴 아픈 배신, 병원 침대에서 천식으로 숨을 몰아쉬며 힘들어하던 큰아이의 병원 생활, 아슬아슬하던 공장의 위기 사건들, 많은 아픔을 겪은 상처 자국들이 모여 어두운 무늬를 점점 넓힌다.
이렇게 넓혀진 밝은 무늬와 어두운 무늬들은 점점 모아져 나의 한평생 그림으로 완성되어 간다. 기쁨과 슬픔, 사랑과 이별, 희망과 절망이 뒤섞여 우리의 마음에 새긴 자국들은 새로운 형태의 다양한 변화한 무늬를 만들어 삶의 그림을 더 풍부하고 깊이 있게 그려준다.
문득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을 자세히 살핀다. 팽팽하던 얼굴은 어디로 가고 세월의 그림자들이 굽이굽이 묻어 있다. 주름 하나하나에 담긴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 주름들은 단지 나이 듦의 증거가 아니라, 내가 살아온 시간의 자국들이 외모에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주름도 무늬를 이룬다. 화내면서 만든 무늬는 항상 화난 얼굴을, 웃으며 만든 주름은 웃는 얼굴을 만든다. 거울을 보며 곱게 웃는 연습을 하여 예쁜 주름을 만들라던 엄마 말이 새삼 귓전을 때린다.
젊어서의 아름다움은 부모님 책임이고 늙어서의 아름다움은 본인의 책임이라고 들 하지 않나. 얼굴 주름만이 이러할까. 마음의 주름도, 삶의 자국 주름도 예쁘게 만들어 보기 좋은 그림을 그려야 할 텐데 마음이 무겁다.
살면서 찍어 놓은 흔적들이 만든 무늬는 비록 아픈 상처로 남았던 것이나, 따뜻한 기억으로 남았던 것이나 모든 기억의 잔고들은 나만의 유일한 삶을 이루는 소중한 조각들이다. 그 흔적들이 만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내 삶의 그림 덕분에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음을 감사하게 여긴다.
살아오면서 머리와 가슴, 여기저기에 새겨진 추억의 흔적 점들과 앞으로 살아가면서 만들어질 미래 흔적의 점들이 연결하여 어떤 그림을 그려낼지 몹시 궁금하다.
나만의 자취들이 그린 그림을 바라보며 만족의 미소 지을지. 후회로 가슴을 칠지 모를 일이다. 하느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후 ‘참 보기 좋다’라며 만족하셨다. 한평생 살아온 나의 흔적들이 만들 그림을 보고 나 스스로 ‘참 보가 좋다.’로 여겨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할머니, 일자 구자, 다음은 어디로 가야 해요? 빨리요! 빨리요!" 손녀는 다음 그려질 그림이 어떤 모양이 나타날지 안달이다. 이마에 땀방울을 송송 맺어가면서 숫자를 찾아가며 열심히 줄긋기한다.
저 아이가 숫자 따라 그리는 그림이 아니고, 자기 인생행로에서 흔적을 따라 그리는 그림은 과연 어떤 그림일까. 그 그림이 궁금하다. 부디 손녀 자신이 그릴 평생의 그림이 보기 좋게 그려지길 기도한다.(12.9)
7. 허리 굽힌 나무 / 이미란
달성습지에 발을 들여놓는다. 계절은 이미 훌쩍 새 옷을 바꿔 입고 있다. 겨우내 힘든 추위만 지나가길 기다리던 새싹들이 고개를 살며시 내민다. 여기저기서 봄맞이 기운이 가득하다. 겨울을 벗어던지듯 입었던 두터운 잠바를 벗어 허리춤에 두르고 습지 속으로 뛰어 들어간다.
습지 남쪽 물가에는 아름드리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숲속의 키 낮은 나무 모양이 이상하다. ‘어떻게 이런 모습일까.’ 군인들 사열하듯 수십 그루가 일렬로 서서 예의 바르게 허리를 깊숙이 굽혀 북쪽을 향하여 절하고 있다.
큰 나무들이 여름에 잎이 울창해지면 햇빛이 들어올 틈이 없었겠구나. 저녁나절 북쪽 하늘의 힘 빠진 햇빛이라도 감지덕지 반기며 이렇게 굽혔나 보다. 적자생존이라는 생존의 법칙의 지혜다.
작은 나무들은 억울하고 햇빛의 모양새도 마음에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다른 길이 안 보였다. 허리 굽혀 환경에 적응해야만 약한 햇빛이라도 만날 수가 있었다. 북쪽으로 해굽성한 식물의 모양은 흔하지 않다.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쓴 선택의 흔적이다. 자연 생존의 법칙은 이처럼 무섭도록 철저하다.
우리 인간 사회 생존의 법칙도 칼날같이 정확하다. 환경에 맞추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외롭고 힘들게 살다간 동생의 얼굴이 떠오른다.
일찍 오빠 둘은 고등학교 때부터 시골을 떠나 서울로 유학을 하러 갔다. 동생과 나는 인근 대구로 와서 고등학교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자취생활을 했다. 그 당시 나는 부모 같은 누나로서 보호자가 되어 말썽꾸러기 동생을 관리하였다.
학교생활에 문제가 생기면 부모님께 알리지 않고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처리했다. 학업 성적 관리뿐만 아니라 교우관계 문제까지도 따라다니며 해결해 주었다. 그러다 보니 포근한 누나가 아닌 엄하고 찬바람 쌩쌩 나는 관리자가 되어버렸다. 사춘기에 변화무쌍한 갈등을 스펀지처럼 받아 주는 품이 넉넉한 누나였더라면 하는 후회가 앞을 가린다.
엄마는 외삼촌이 운영하는 홀치기라는 가내 수공업 회사의 총대를 하면서 공임으로 현금을 한 자루씩 가지고 다녔으니 자연 동생이 쉽게 현금을 만질 수가 있었다. 따라서 힘들게 노력한다는 것은 그 아이의 생활에는 없는 단어였다. 한량으로 놀고먹는 생활을 하며 한세월을 허무하게 보냈다.
동생은 연이은 사업의 실패와 음주 운전 사고와 감당하기 힘든 금융사고도 몇 번이나 일으켰다. 이에 따라 자신감도 용기도 잃고 몸도 부서져 세상의 순리에 적응하지 못하고 쓸쓸하게 살다 갔다. 동생은 어디서부터인지, 어느 때부터인지 적응을 못 하고 이리저리 허우적거렸다. 그때마다 무조건 안아주는 엄마 품에 기댔다.
일찍 교통사고로 종손인 큰 오빠를 잃어 가슴의 심한 상처가 있는 부모님들이었다. 남은 자식들에게 혹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을 마음 졸이는 부모님이었다. 그러기에 동생이 홀로 적응해야 하는 담금질의 필요성보다 그저 살아남기만을 간절히 원했다. 동생 탓이 크겠지만 엄마의 무조건적인 후원이 부적응자로 만들어 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결혼생활도 온전하게 유지하지 못했다.
끈 떨어진 연의 신세가 되어 공중을 부유하게 되었다. 현실과 꿈이 맞지 않아 사회와 맞추어 사는 생존의 적응 능력이 부족했다. 매사에 용기 없이 고개 숙인 남자로 살았다.
마지막에는 힘든 사회생활을 접고 고향에서 늙은 부모님 곁에서 보냈다. 굽은 나무가 先山을 지킨다는 말처럼 부모님들의 노후를 쓸쓸하지 않게 마지막까지 모시는 효도를 했다. 원래 동생은 천성이 싹싹하고 정이 많은 아이라 엄마 병시중을 여느 간병인보다 잘하여 입속의 혀처럼 모셨다. 고향을 지키면서 집안일도 자기 나름 처리하여 형제들의 걱정을 들어줬다.
그러나 커다란 언덕처럼 의지한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는 심신이 불안정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일상이 무너져 세상과 적응하지 못하고 찬물에 기름 돌 듯 이리저리 흔들리며 힘든 상태로 지냈다. 날마다 거의 술에 취하여 흐릿한 안개 속을 헤매다가 젊은 나이에 알코올성 치매라는 놈한테 끌려서 먼 길을 떠나버렸다.
달성습지의 저 작은 나무들조차도 현명하게 살길 찾아 저 큰 나무 밑에서 허리를 숙이며 살고 있다. 동생도 세상 흐름에 자존심을 접고 고개를 숙일 줄을 알았더라면 좀 더 안정된 삶을 살았을 것인데…
겨울의 찬바람은 외투를 벗기지 못하지만 봄의 온화하고 따뜻한 봄바람은 아무리 움켜잡은 외투라도 벗길 수 있음을 나는 몰랐다. 모난 잔소리보다 보듬고 공감하면서 쓰다듬고 아픈 마음을 다독여 주지 못한 후회가 크다. 조금만 氣를 살려주었더라면 자신감을 가지고 편안한 삶을 살다 갔을 것 같아 미련이 남는다.
저 나무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허리를 폴드폰처럼 숙이고 있다. 생존하기 위해서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살아남는 적자생존의 지혜를 깨달았더라면 다른 삶을 살았을까. 가슴이 답답하고 아쉬움이 앞을 가린다. (12.2)
8.틈 / 이미란
태풍 매미로 경작지를 잃은 분이 작물을 지키기 위해 10년 세월 동안 혼자서 쌓은 것이 거대한 중세 성처럼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태풍의 이름을 따 매미성이라 불리게 되었다.
처음 쌓을 때는 튼튼한 방패막이로만 생각하다 보니 빈틈이 꼼꼼히 쌓았다.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파이프로 물구멍도 뚫고 군데군데 틈틈이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 틈은 겨울의 수축, 여름의 팽창, 바람, 눈비 등을 견디는 데 중요한 역할을한다 이틈이 오히려 돌담을 더욱 튼튼하게 한다.
자연 현상에서도 부족하게 보이는 틈이 생명을 키운다. 물 한 방울 고이지 않는 바위지만 틈에서는 씨앗이 날아와 꽃을 피우고 나무를 키운다. 단단한 나무껍질의 갈라진 틈에서도 작은 생명이 산다.
우리 인간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느슨하게 열린 틈 부분에서 편하게 숨을 쉴 수 있다. 빈틈없는 계획, 완벽한 목표 속에서 일상은 지치게 된다. 완벽한 사람보다 실수하는 틈이 보이는 사람에게서 편안한 인간미를 느낀다. 모자라는 듯한 틈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모른다. 사람과 사람, 일과 일, 부모와 자식, 부부, 이렇게 수많은 관계의 틈에서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틈은 단절이 아니고 끓지 않는 연결의 통로다.
수묵화에서 일종의 틈인 여백을 통해 여러 가지 상상도 가능하고 작가의 의도를 이해할 수도 있다. 글을 쓸 때도 틈을 의식한다. 글과 글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의 틈에서 행간의 뜻도 이해하고 작가의 의도한 바를 상상할 수 있다.
사람 사이에 서운함이라는 틈이 있어야 애틋함이 생긴다. 서로 사이에 거리라는 틈이 있어야 그리움도 생기고, 간절함도 생긴다. 살아가면서 실패라는 틈이 있어야 성장의 여지가 있고, 부족함이라는 틈이 있어야 도와주고 끌어안을 수 있는 정도 생긴다.
우리 부부는 오십 년의 세월을 함께 같은 목표를 꿈꾸며 살아가고 있다. 남편은 모든 일에서 가능하면 빠져 자신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전형적인 게으른 부잣집 막내아들이다. 반면 한 사람은 무슨 일이든지 나서서 해치우는 능동적인 부지런한 또순이 형이다.
느긋한 성격의 남편과 발뒤꿈치가 땅에 닿지 않게 동동거리는 나와는 성격이 완전 끝과 끝이다. 그뿐만 아니다, 식성도 그는 육식이고 나는 채식을 선호하고, 취미, 인생관, 잠자는 시간까지 닮은 것이 거의 없는 편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부부싸움이라는 것을 거의 하지 않았다. 아이러니다. 어찌 모든 일이 서로 부딪쳐 소리가 날 만도 한데....이유를 곱씹어보면 우리 사이에 틈인 침묵이 많은 역할을 한 것 같다.
남편은 경상도 남자들이 퇴근해서 한다는 최소한의 *세 가지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말이 없으니 내가 신경 줄을 당겨 눈치로 맞추어가며 살아왔다. 답답할 때도 있기는 하였지만, 부딪칠 때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문제가 일어나면 우선은 서로 말하지 않고 틈인 침묵으로 생각의 시간이 주어진다. 그 한고비를 넘기고 나면 마찰이 된 문제가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다. 그 이유를 서로 이해를 하게 된다. ‘뭐 그까짓 것 그럴 수도 있지.’ 한 발짝씩 물러설 여유도 생긴다. 우리 사이에 침묵이라는 틈이 없었더라면 지금처럼 온전한 가정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삶에도 의도적으로 ‘틈’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때리는 시간, 아무 계획 없이 떠나는 여행 등 일반 생활 중에 틈을 만들 필요가 있다. 그 틈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을 만날 수 있다.
삶은 불완전하다. 틈은 불완전의 상징이자 동시에 관계 발전의 가능성을 여는 문이다. 틈을 마주할 때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낀다. 숨 쉴 틈, 울 틈, 사랑할 틈, 밥 먹을 틈, 헤어질 틈 등등 모든 틈에서 살아가는 법을 깨닫는다.
그 틈을 두려워 말자. 그곳은 미처 정리 못 한 공간이 아니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우리의 발전 가능성이고, 아직 말하지 않은 이야기이며, 다가서지 않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틈 덕분에 용기를 내어 희망을 품고 내일을 새로 시작할 수 있다. 우리 부부의 침묵 틈은 좀 더 발전시킬 가능성의 샘이라고 여기고 싶다. 저 매미성의 언덕도 어떤 모양으로 쌓여서 완성될지 모르지만, 벽 사이의 틈들이 거센 태풍 속에서나, 한겨울의 추위와 삼복더위를 견디어 돌담의 안전을 지켜 내리라. (12.3)
* 아무리 말 없는 경상도 남자들이라도 하는 세 가지 말 : 아~~는, 밥도, 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