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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련히 멤돌던 그 노래가 다시 들립니다
한시대를 짧게 살다간
하지만 잊을 수 없는 그사람의 노래입니다
가객, 배호(1942-1971)의 귀환
그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난지 40여 년이 흘렀습니다
세월은 갔지만 어떤 날은 그 사람의 노래가
툭하고 기억의 문을 열고 나옵니다
<돌아가는 삼각지>
삼각지 로타리에 궂은비는 오는데
잃어버린 그 사랑을 아쉬워하며
비에 젖어 한숨 짓는 외로운 사나이가
서글피 찾아왔다 울고가는 삼각지
삼각지 로타리를 헤매도는 이 발길
떠나버린 그 사랑을 그리워하며
눈물젖어 불러보는 외로운 사나이가
남몰래 찾아왔다 돌아가는 삼각지
감정 표현이 너무 리얼해요
진짜 배호노래 들으면 비가 올 것 같아요
옆에 비가 내릴 것 같아
누가 울어
아 진짜 요즘 말로 하면 처절함
그 자체인 거야
-임진모/음악평론가
배에서 끌어 오르는 소리가 있잖아요
배에서 나오는 소리가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 소리가 상대방이 들을 때
가슴에 충격을 주는 것 같아
-정원/ 가수
뱃 속 깊이에서 확 뿜어 내는 노래는 (부르기가) 사실 참 힘들어요.
빠른 노래는 그냥 하면 돼요
진짜 배호씨 같은 경우는 뼛속 깊이, 온 힘을
온 정열을 다 속에서 퍼내는 소리이기 때문에
참 그런 힘으로 노래할 수 있는 가수들이
많이 있을까요?
-문주란/가수
<안녕>전우 작사 나규호 작곡
후회하지 않아요 울지도 않아요
당신이 먼저 가버린 뒤 나혼자 외로워지면
그때 빗속에 젖어 서글픈 가로등 밑을
돌아서며 남몰래 흐느껴 울 안녕
후회하지 않아요 울지도 않아요
세월이 흘러 가버린 뒤 못잊어 생각이나면
그때 빗 속에 젖어 서글픈 가로등 밑을
찾아가서 또 다시 흐느껴 울 안녕
우리나라 대중 가요사에서 누구누구 창법이라는
칭호를 받은 사람은 딱 세 사람 있어요
현인 창법, 이미자 창법, 배호 창법입니다
현인 같은 경우는 스타카토 창법이라고
탁탁 끊기는 창법
이미자씨는 원곡 그대로
부르는 기교가 없는 목소리입니다
트로트는 이전까지 많은 가수들이
미성으로 노래를 소화했는데
배호가 등장하면서 배호만의 창법으로
트로트를 구사합니다
그것이 굉장히 거칠기도 하고 호흡이 짧기도 하고
또 짧은 만큼 더 절규하기도 하는 열정들이
배호 이전과 이후에 아무도 구사하지 않았던
배호만의 창법이거든요
-박성서/음악평론가
배호는 우리가 지나가다가 구멍가게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와도 '어 배호다' 딱 알잖아
-류복성/재즈음악가
독특한 개성이 있어요. 그것이 배호의 특성인데
그건 어느 가수도 흉내 낼 수 없지요
자기만이 가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음악인이다
음악인이지요. 가수 이전에 음악인에요. 배호는
-신중현/음악가
<누가울어>전우작사 나규호 작곡
소리없이 흘러내리는 눈물같은 이슬비
누가 울어 이한밤 잊었던 추억인가
멀리 가버린 내사랑은 돌아올길 없는데
피가 맺히게 그누가 울어울어 검은눈을 적시나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같은 이슬비
누가 울어 이한밤 잊었던 상처인가
멀리 떠나간 내사랑은 기약조차 없는데
애가 타도록 그누가 울어울어 검은눈을 적시나
어떻게 보면 보컬의 예술성을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준 인물이 아닌가(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나라 최고의 가수를 꼽으면
아주 옛날 사람이라 요즘 젊은 세대가 몰라서 그렇지
어른들한테는 압도적일 거예요. 배호는
그 이후에 조용필이 있겠지만,
그 시절의 최고의 가수, 이건 배호입니다
-임진모/음악평론가
지나간 것은 버려지고 잊혀지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프랑스 재즈음악가 에티앙이 한국을 찾았습니다
에티앙이 배호노래를 알게 된 지도 벌써 5. 6년 됐다고 합니다
처가에 다니러 한국에 오는 길이면
틈을 내어 배호의 노래를 찾습니다
에티앙은 지난 2010년
자신의 앨범에 배호의 노래를 넣기도 했습니다
에티앙은 프랑스에서 잘 알려진 재즈음악가입니다
방송국 재즈DJ를 맡고 있으면서도
배호의 노래를 녹음한 밴드를 포함
4개의 프로젝트 밴드에서 리더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요사이 에티앙의 작업실에서는 배호의 노래가 자주 흘러나옵니다
40여 년 전 불려진 한국의 노래지만
에티앙에게는 여전히 연구의 대상입니다
에티앙은 올해 배호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배호의 노래를 재해석해서 음반으로 만드는 작업입니다
배호프로젝트를 함께할 밴드 멤버들도 새롭게 구성했습니다
오늘은 배호의 노래를 같이 들어보고 의견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이들의 아버지 세대들이 듣던 노래
그것도 이들의 아버지 시대에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을
먼 나라의 노래입니다
배호의 이름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곳입니다
삼각지 로타리 이제 로타리는 없어지고
삼각지로만 이름이 남아있습니다
이곳을 배경으로 한 돌아가는 삼각지는 1967년 당시
가요순위 20여 주 연속 1위라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돌아가는삼각지>이인선 작사 배상태 작곡
삼각지 로타리에 궂은 비는 오는데
잃어 버린 그 사랑을 아쉬워 하며
비에 젖어 한숨 짓는 외로운 사나이가
서글피 찾아왔다 울고 가는 삼각지
삼각지 로타리를 헤매 도는 이 발길
떠나 버린 그 사랑을 그리워 하며
눈물 젖어 불러 보는 외로운 사나이가
남 몰래 찾아왔다 돌아가는 삼각지
돌아가는 삼각지 이후 4년 남짓 짧은 활동기간 동안
배호는 무려 50여 장의 앨범과
수 십개의 히트곡을 내며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다른 가수들이 배호씨 다음에
잘 안 부르려고 했어요
앙코르가 나오니까 우리도 끊기 힘들고
-방일수/코미디언
트로트 가수가 모자 쓰고 안경 쓰고
비스듬히 서서 트로트를 부르는데 앙코르가
그렇게 (많이)나오는 것은 대단한 인기예요
지금 트로트 가수가 아무리 한다고 해도
7창, 6창 나오겠어요? 최고의 인기가 있다는 가수가
앨범을 통해 남겨진 배호의 모습은
중년신사 쯤인양 보이지만
요즘으로 치자면 배호는 당시의 아이돌스타였습니다
21살의 젊은 나이에 가수로 데뷔한 이후
29살까지 활동했던 배호는 그 시대 젊은이들의 우상이었습니다
배호 역시 중학교를 자퇴하고
가수의 꿈을 꾸었던 신세대였다고 합니다
중학생 시절에는 그 형이 원체 공부하는 걸 싫어했습니다
(등교할 때) 가다가 학교로 안가고 보리밭으로 들어 가요
부산에는 유난히 보리밭이 많습니다
들어가면 그냥 행방불명이에요
학교 끝나고 (집에)오는데
보리밭에서 노래 소리가 나더라고요
그래서 누가 노래를 하나 (하고 들여다)보니까
그 형이 책가방 메고, 도시락은 (벌써)먹고
도시락 통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저한테 학교 안 간 사실을 틀켰어요
-정광훈/배호의 고향후배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상경한 배호는
당시 유행했던 나이트클럽과 음악살롱에서
가수의 꿈을 키웠습니다
이곳은 무명시절 배호가 음악을 하던 곳입니다
여기 말이야. 50년, 55년
세월이 벌써 그렇게 많이 흘렀네
-유영석/前배호악단
이곳에서 배호는 드럼을 치며 밴드활동을 했습니다
무명시절이라고 하지만 이미 장안에선 입소문난 가수였습니다
(배호가)카우보이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조끼 입고 빨간티 입고(드럼)을 치면서 노래 부르면
여기 관객들이 전부 기립박수 치고
인기가 대단했다고
-유영철/前배호악단
이곳에서 배호는 어느정도 성공을 거뒀지만
꿈을 이루기 위한 그의 노력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남달리 본인 혼자만의 노력이 대단했죠
화장실에 가서도 혼자서 흥얼흥얼
어디든지 옆에서 노랫소리 나면
배호가 연습하는 거예요
고향인 부산을 떠나 근 10년 밴드활동을 하면서
음악수업을 했던 배호는
마침내 영화에도 출연하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립니다
배호는 당시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하던 수 많은 젊은이들의 우상이자
동경의 대상이 됐었던 것입니다
배호의 극적인 인생이야기는 최근 뮤지컬로도 만들어졌습니다
배호의 삶과 음악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이 뮤지컬은
올 해로 3년째 공연되고 있습니다
말로는 이 뮤지컬의 음악감독으로
배호의 노래를 편곡했던 재즈음악가입니다
10여 년 간 5개의 정규 앨범을 내며 활발한 활동을 해온 말로는
이번 작업을 통해 배호의 노래를 다시 평가하게 됐다고 합니다
<누가울어> 동영상에서 배호씨가 그 노래를
빅밴드와 완전히 신나는 스윙리듬으로
손을 2박자, 4박자에 이렇게 튕겨가면서
노래를 할 정도로, 아주 힘찬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더라고요)
아주 부드러운 트로트 리듬이 있었었는데
이것 조차도 완전 스윙으로 바꾸어 놓은 데다가
노래도 아주 스윙의 느낌을 타면서(부르더라고요)
-말로/재즈가수
재즈보컬들이 잘하는 멜로디 바꿔 부르는 것이 있어요
그걸 페이크(Fake)한다고 하는데
(배호씨가) 멜로디를 바꿔서
자기 마음대로 부르고 있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역시 재즈와 얽혀있던 시대상황이
그 순간에도 들어나 있고
배호씨 자기 자신도 거기에 대허서
음악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있구나
저렇게까지 자유롭게 노래를 했구나
그랬구나!
-말로/재즈가수
안개낀 장충단공원을 ****
(라이브에서)이런 스타일을 많이 해요
차차차도
굿바이 같은 것도******
그때 당시 60년대 말, 70년대 초인데
그런 박자, 그런 노래가 어디 있느냐고요
배호는 가수데뷔전 미8군밴드에서 1년간 활동하며
음악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8군 밴드는 미 8군 클럽에 가서 매일 출근하면서 그러니까
하우스밴드라고 그러지 거기서 연주하는 밴드예요
그때 당시에는 여러 장르의 음악을 독학해서
다 해내야 합니다. 오디션이 있기 때문에
심사위원들이 군인들이 (심사를)보는 것이 아니라
LA나 라스베이거스 이런데서 연예계 종사하는
심사위원들이 있어요. 그런 분들이 와서 심사를 (합니다)
세계 수준에 맞는 그런 레벨에서 합격이 되고
그러다보니 (그 시절) 음악 수준이 엄청 높았어요
원래 그 집안이 다 음악성이 굉장히 수준이 높은 음악이에요
김광수 선생님은 옛날부터 라틴(음악을)하셨고
<베사메 무초><쿠쿠루쿠쿠 팔로마> 이런 건
옛날에도 못했거든요
50년대 얘기예요. 그런데 그분들은 그런 음악하셨고
그 조카이니까
-쟈니리/가수
배호의 외삼촌 김광수 김광진은 각각 방송국 초대 악단장을 역임할 정도로
당시 최고의 실력을 갖춘 분들이었습니다
음악가 집안이라는 배경과
미8군 밴드라는 다양한 음악수업을 받을 수 있었던 배호는
라틴음악에서 팝송까지 60년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섭렵하며
음악적기반을 닦았습니다
배호가 있었던 시대를 함축한 것이 바로 배호입니다
배호가 그 시대를 잘 설명하고 있고요
바로 배호를 앎으로, 현재를 알 수 있고
미래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배호는 60년대, 그리고 대한민국 대중문화에 중요한 코드입니다
배호가 활동하던 시대의 음악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이곳은 당시 서울에서 가장 유명했던 녹음실로
대부분의 배호노래가 이곳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배호노래도 작곡하기도 하고 연주에도 참여했던 아코디언 연주자 심성락 선생입니다
옛날에 그때가 65년 66년도이니까
내가 처음 세션맨이 되었을 때야 그때가
나도 그때 처음 왔어
-심성락/아코디언 연주자
심성락선생이 배호의 노래를 연주해 주기로 했습니다
<안개속에 가버린 사람>전우작사 나규호작곡
나는 연주하잖아요. 그냥 연주하는게 아니에요
마음속으로 노래해요
그렇지 않으면 그 감정이 절대 안 나옵니다
오버랩되는 느낌이에요. 과거의 한 장면이 재연되고 있고
제가 그 곳에 와 있는, 타임머신을 탄 느낌이에요
음악을 들었다기보다 어떤 시간의 흐름과 인생의 단면을
딱 자른 그 면 위에 제가 앉아 있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음악을 위한 공간이라기보다 삶의 의미를 위한 공간이랄까
그런 곳에 앉아 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배호의 음악과 인생을 다룬 뮤지컬을 맡으면 말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배호의 노래를 편곡해서 자신의 앨범으로 내는 작업입니다
<누가 울어>를 포함해 6곡의 배호노래가 다시 만들어질 예정입니다
<안개낀 장충단공원>최치수 작사 배상태 작곡
안개낀 장충단공원 누구를 찾아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
지난날 이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
다시 한번 어루만지며 떠나가는 장충단공원
비탈길 산길을 따라 거닐던 산기슭에
수많은 사연에 가슴을 움켜주고 울고만 있을까
가버린 그 사람이 날긴 발자취 낙엽만 쌓여 있는데
외로움을 달래 가면서 떠나가는 장충단공원
<비내리는 명동거리>백영호 작사작곡
비내리는 명동거리
잊을수없는 그사람
사나이 두뺨을
흠뻑 적시고
말없이 떠난 사람아
나는 너를 사랑했다
이순간까지
나는 너를 믿었다
잊지못하고
사나이 가슴속에
비만 내린다
비내리는 명동거리
사랑에 취해 울던밤
뜨거운 두뺨을
흠뻑 적시고
울면서 떠난 사람아
나를 두고 떠났어도
이순간까지
나는 너를 사랑해
잊을수 없다
외로운 가슴속에
비만 내린다
배호의 노래가 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비에 젖어 한숨을 토하고 또 눈물을 흘리고
쓸쓸이 돌아서는 사나이들
그들은 혹시 그시절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
<울고 싶어>황규영 작사 배상태 작곡
왜 그런지 나도 몰라 울고만 싶은 마음
너무나도 그 사랑에 상처가 깊었는지
몸부림쳐 울고 싶네 소리치며 울고 싶네
아무리 흐느끼며 울어도 소용없는
이 마음 누가 아랴! 어쩐지 울고만 싶어!
전부 우리의 언니와 오빠들이 공장으로
공장으로 밀려올 때에요
지금 우리나라가 이렇게 잘 사는게
그분들이 요즘 말대로 공돌이 공순이를 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이렇게 잘 사는거 거든요
그걸 배호씨가 속에 있는 그 울분 같은 걸로
끌어내어서 풀어준 거지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미친듯이
배호씨 노래에 환호했어요
-정훈희/가수
시대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던 배호의 노래
그 사람 역시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끌어 안고 살았습니다
광복군 대위였어요. 그때 당시 그러다가 8.15되니까
서울 와서 그때도 광복군이었지
그런데 광복군이 해산되면서부터
술 마시기 시작하는데 참 불쌍했어요
(간이 나빠져서) 황달에서 흑달까지 갔는데
얼마나 고통이 심했겠어요. 그러다가 세상 떠났어요
-故김광빈/배호의 외삼촌
해방 후 정치적 혼란기를 견디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배호는 13살의 어린 나이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인해서 척추를
다쳐 허리를 못 피셨어요
그래서 아스피린을 하루에 한 주먹씩 드셨어요
중독성이에요
제가 약방 가서 사다 드리는 심부름 하곤 했어요
하루에 한 주먹을 드셔야 통증을 없앤다고...
어머니 수발해야지 먹고 살아야지 하니까
어린나이에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몰라요
돈 한 푼 안 쓰고, 아끼고, 절약하고
택시비 아낀다고 홀에서 자기도 하고
그래서 아마 집에 많이 안 들어갔을 거예요
제가 알기로는 힘들어서
-정광훈/배호의 고향 후배
15살 어린나이에 야간업소에서 잔심부름하며 드럼을 배웠던 배호
악단장을 하면서도 홀의자에서 잠을 자야했던 그에게
더 큰 시련이 찾아옵니다
저는 배호씨가 처음에 돈을 벌어서
인기가 올라가니까 살이 찌는 줄 알았어요
살이 자꾸 찌더라고요
얼굴 살이라고
나중에 알고 보니까 신장이 아프다고 하고
병원에 다닌다고 (하더라고요)
당시만 해도 신장염은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하지만 삶의 끝자락에 섰던 그에게
뜻하지 않은 제안이 들어옵니다
그때 <비겁한 맹세>하고 <돌아가는 삼각지>하고
두 곡을 들고 갔는데
배호가 이불을 쌓아 놓고 45도 각도로 누워 있는데
배가 이렇게 불러있어요. 숨결도 막 차고 있는데
배호 엄마는 아픈 애 죽인다고
못 시키게 하는 거에요
-배상태/돌아가는 삼각지 작곡가
그 이튿날 아침에 가서 연습을 했죠
녹음실에서 그때 당시 내가 숨이 굉장히 찼어요
그래서 한 번 일어섰다가 앉고
일어섰다가는 앉고
그러고 다음에 그 곡이 나는
절대 되지 않을 줄 알았거든요
-배호육성/1967년
아픈 몸을 이끌고 힘들게 부른 그날의 노래는
배호의 인생을 뒤바꿔 놓은 노래가 되었습니다
인생의 절망에서 나온 배호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무대에 서면 설수록 배호의 병은 깊어만 갔습니다
하지만 병마의 고통속에서도 그는 무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국민의 80~90%가 삶의 처절한 현장에 있었거든요
그 당시에는 그 삶의 처절한 현장에서
삶의 처절한 마음으로,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노래를 했기 때문에
배호씨 노래를 듣고 안 좋아 할 수가 없죠
배호에게 무대는 어쩌면 삶의 희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아프면서도 얘기할 때는 표정이 밝았어요
제 기억에는...
"우리 오래 살아야지, 좋은 거 놔두고 왜 그래"
"그럼, 그럼"
며칠 안 나왔다가 바로 (저 세상에) 간 거 같아
그때까지 일을 했어요
전혀 그런 내색을 안 하셨어요
안 하셨던 걸로 제가 알고 있거든요
몰라요 제가 어리니까
그런 내색을 안했었는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런 내색을 안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쇼할 때도 분장실에 아프니까 누워계셨다가
출연 시간되면 노래하고 그러셨어요
그거 하나는 대단해요, 어떤 때는 시간 됐다 하면
벌써 자기 순서 알고 일어나 있어요
정장 깔끔하게 (입고 있고) 옆에 있는 분들이
신 신겨주면 구두 신고 넥타이(까지) 자기 모습 확인하고
이미 무대 나올 준비를 하고 있어요
-방일수/코미디언
서서 노래하기 힘든 때도 있었습니다
동료들에게 의지해서라도 노래하려 했습니다
마지막까지도 다시 노래할 준비를 했습니다
참 마음이 안 좋다는 얘기는 못 하잖아요
내가 좀 찡해지는데
"야 너 너무 아깝다. 어떻게 건강회복이 안되니?"하면
본인이 울어요
"나는 음악으로 태어났다가, 노래로 태어났다가
노래로 죽고 싶다"하더라고요
-쟈니리/가수
어떤 마음으로 노래해? 물으니까
"나는 병원에서 죽고 싶은 생각은 없어
무대에서 노래하다가 숨이 끊어졌으면 좋겠어"
그랬었어요. 또 눈물 나려고 그런다
모든 가수의 마음이 그런데 그 분은 더 그랬죠
그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을 해야 했었으니까
-정훈희/가수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잘 아실 줄 믿습니다
<돌아가는 삼각지><안개낀 장춘단공원> 그 밖에 <안녕>
헤아릴 수 없는 히트송을 연발한 인기가수 배호군의 차례!
처음 들으실 곡목<누가울어>
무대에 설때 마다 배호는 자신의 생명을 조금씩 내어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무대야 말로 그에게 남은 마지막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1971년 가을 어느날
배호는 이곳 해인사에 내려왔습니다
(배호씨는) 늘 산책하고 고독에 잠기면서
그렇게 사셨습니다. 직접 또 나무를 해서 때기도 하고
그때 당시는 다 구들을 놓고 살았으니까
낙엽이 떨어지는 아침마다 마당도 쓸고
-도영스님/해인사
뗄감을 구하고 마당을 쓸고 배호는 다시 내일을 기다렸습니다
가을이 깊어갈 무렵 새로운 곡을 녹음하기 위해 서울로 갔습니다
당시 녹음한 곡은 <마지막잎새>
하지만 끝내 그 곡이 세상에 나오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잎새>
그 시절 푸르던 잎 어느 낙엽지고
달빛만 싸늘히 허전한 가지
바람도 살며시 비켜 가건만
그 얼마나 참았던 사무친 상처길래
흐느끼며 떨어지는 마지막 잎새
싸늘히 파고드는 가슴을 파고들어
오가는 발길도 끊어진 거리
애타게 부르며 서로 찾은 님
어이해 보내고 참았던 눈물인데
흐느끼며 길 떠나는 마지막 잎새
1971년 11월 7일 타계, 당시 만 29세
배호가 세상을 떠난지 40여 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그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의 발길은 지금도 이어집니다
남은 형제도 없이 요절한 배호의 묘를 돌보는 것은 팬들입니다
올해는 배호가 태어난지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팬들은 그가 부른 노래들을 내겁니다
수 십 년의 세월이 흘러도 팬들의 가슴속에 남은 노래들입니다
배호는 우리에게 노래를 통해 위안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그가 우리에게 내어줄 수 없는 모든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배호에게 진 빚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팬들만의 몫은 아닐겁니다
배호의 노래와 삶을 돌아보는 작업은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에티앙과 말로도 이곳을 찾았습니다
에티앙과 말로에게 배호의 노래는
흘러간 노래가 아닌 과거로부터 흘러온 노래
과거의 소중한 유산입니다
배호 선생님의 노래를 제가 불러보겠습니다
-말로/가수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랑 >
사랑이라면 하지말것을
처음 그 순간 만나던 날부터
괴로운 시련 그칠줄 몰라
가슴 깊은 곳에 참았던 눈물이
야윈 두빰에 흘러 내릴 때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랑
괴로운 시련 그칠줄 몰라
가슴 깊은 곳에 참았던 눈물이
야윈 두빰에 흘러 내릴 때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랑
말로가 배호의 노래를 부릅니다
배호의 노래는 다시 사람들에게 말을 겁니다
작은 목소리로 조금씩 조금씩
배호의 노래가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의 노래와 함께 그시대가 물려준 선물도
함께 돌아올겁니다
배호를 만난 것에 대해서 아주 다행스럽게 생각해요
만약에 배호라는 사람에 대해서 잘 몰랐다면
이렇게까지 제가 뭘 해야 할지
방향을 못 잡았을지도 몰라요
현재에 살고 있는 저를 아버지의 세대 과거로
연결해주는 끈이지요. 아주 잘 만들어진 끈...
-말로
배호를 좋아하기 시작했을 때 한국 사람들에게
배호에 대한 얘기를 해봤는데 대부분 잘 모르더군요
그래서 별로 유명하지 않은 사람인가 했습니다
나중에 배호에 대해 알아가면서
그가 당시 스타였고
영화에도 출연했고 300여 곡의 노래를 녹음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제가 훈계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현실이 슬프네요
그런데 (심성락 선생님의 아코디언 연주는)
정말 5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노래를 깊이 이해하고 계시다는 걸 느꼈습니다
(배호씨와) 문화도 같고 그때가 그분의 시대였고
오리지널 같았습니다, 정말로요
-에티앙/재즈음악가
사랑이라면
하지 말것을
처음 그 순간
만나던 날부터
괴로운 시련
그칠줄 몰라
가슴 깊은 곳에
참았던 눈물이
야윈 두 빰에
흘러 내릴 때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랑
일반 대중들에게 우리 나라 대중가요 가수중 누구의 목소리가 가장 매력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남자는 배호님, 여자는 문주란님을 꼽지않을까 생각됩니다.
그 이유는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이
두 분의 깊이 있는 저음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런데 두 분이 60년대를 대표하는 2대 저음 가수였기에
두 분의 음색이 비슷한 걸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두 분은 비슷한 듯 하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함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배호님이 낮고 부드러운 저음에다 적당한 기교와 애절한 감정을 실어
흐느끼듯 심금을 울리는 남아다운 호소력의 일인자 였다면
문주란님은 독특하고 고급스런 음색으로 기교없이
절제된 감정으로 허무한 듯 달관한 듯 상처입은 영혼의 울림을 토해내는데
천하일품의 호소력을 가졌다고 감히 표현해 봅니다.
이런 걸출한 가수 두 사람이 동시대에 등장해서 함께 활동했다는 것은
당시 60년대 가요 팬들에게는 노래의 복음이었던 거죠.
그렇다면 두 분의 선후배로서의 교분 관계는 어땠는지 한번 살펴볼까요?
먼저 배호님은 1960년경 아직 10대의 나이에 외삼촌 김광빈 악단에서
심부름으로 시작해서 드럼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미8군 등에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드럼 실력이 일취월장하자 김광빈 악단의 드럼 연주자로 자리를 옮겨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천지, 문화방송등의 전속 악단으로 활동하였고
당시 김광빈이 만들어준 최초곡인 "굿바이"와 "사랑의 화살"을(1963년 - 21세)
김광빈 악단의 연주속에 외삼촌이 지어준 배호라는 예명으로 음반을 발표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애띤 그의 목소리에서 가수로써의 이름을 날리지 못하였고
김광빈의 도움으로 20대 초반에 자신의 악단인 "배호와 그악단"이라는
악단을 만들어 업소에서 본격적인 자신의 음악을 키워가게 됩니다.
그때 쯤 김광빈은 그에게 본격 데뷔 음반을 낼 수 있도록
자신이 만들고 연주한 "두메산골" "굿바이" "차디찬 키쓰" "녹색의 장미"
"사랑의 마술사" "그대만이" 등 6곡을 발표하게 합니다.(1964년-22세)
아직은 나이가 어렸기에 김광빈은 그에게 나이 들어 보이기 위해
훗날 그의 마스코트가 되어 버린 금테 안경과 모자를 씌워줍니다.
그의 이름은 특출한 리듬 감각으로 신명나게 드럼치며 노래하는 가수 배호라는
이름으로 유명세를 탑니다.
이때 국내 최고의 작사가인 전우(비둘기 집 등)와 나규호 콤비를 만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한편 부산에서 노래와는 무관한 택시 회사집의 딸들중 막내딸로 태어난
문주란님은 1962년 약관의 12세 나이에 부산 mbc 주최 콩쿨대회에서 입상.
당시 부산 지방에 서 활동하던 작곡가 유금춘에게 픽업되어
{ 크리스틴 킬러} 와 { 내 사랑아 안녕} 을 발표한 것이 첫 녹음이었습니다.
그 후에 작사가 전우씨와 작곡가 백영호 선생에게 픽업되어
<동숙의 노래> 를 발표하면서 선풍적인 히트를 기록, 스타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1965년 - 15세 )
그러니까 가수로서의 첫출발은 문주란님이 순조로웠던 반면
배호님은 다소 무명 기간이 있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두 분이 본격적으로 교뷴을 나누게 된것은 배호님이 서서히 히트가도를 달리면서
인기가수 대열에 오른 1967년 이후로 보입니다.
배호님이 1967년 3월, 힘들게 병상에서 녹음한 "돌아가는 삼각지"를 발표하고
그의 숨이 찬 목소리가 이내 세간의 화제가 되면서 방송사의 인기와
팬들의 성원이 이어져 이내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는 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25세)
인기의 여세를 몰아 역시 병상에서 내놓은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은 더욱
큰 인기를 얻게되어 년말 MBC 10대가수에 등극을 시작으로
각종 가수상을 독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문주란님 역시 동숙의 노래 히트 이후 <돌지않는 풍차> <내 몫까지 살아주> <타인들>
등의 연속 히트로 1966. 1967년 연속 10대 가수에 등극하였습니다.
극장쇼 무대에서 숱하게 함께 노래한 두 분이지만 10대 가수 청백전의
시민회관 무대에서의 조우는 두 분 사이의 특별한 에피소드를 만들어냅니다.
이른바 불세출의 두 저음 가수의 상대방 노래 모창하기.*^^*
1967년 서울시민회관(현재 서울시의회회관)의 ‘10대 가수 쇼’에서
문주란님이 먼저 굵직한 목소리로 배호님의 노래를 흉내내자
배호님도 이에 뒤질세라 문주란님의 귀엽게 톡 튀어나온 윗입술을 흉내내며
성대모사를 해 관객들을 웃겼던 것입니다.
손가락으로 자기 윗입술을 앞으로 잡아당겨서 말입니다.
그 이후 두 분은 친남매 같은 교분을 돈독히 나누었습니다.
동시대에 함께 등장한 최고의 저음 가수인 두 분을 함께 묶어 다양한 극장쇼가 기획되었고
정훈희, 남진, 이상열 등과 동료 가수 이전의 또래 청춘으로 친목도 다져나갔습니다
하지만 두 분 사이의 감정은 연정은 아니고 남매애에 기초한 우정으로 보입니다.
당시 또래 청춘 스타들이 함께 몰려다니다 보니 염문설도 없진 않았는데
문주란님은 남진님이나 이상열님과 좋아하는 사이라는 헛소문이 났었고
배호님은 정훈희와 사귄다는 염문설이 났었습니다.
오히려 배호님은 문주란님이 아니땐 굴뚝에 연기 난다고 엉뚱한 헛소문에 시달릴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명을 해주는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 ... ( 전략 ) ....가수 배호씨는
문주란이 얼마전 터무니없는 뜬소문 때문에 고민하는 걸 봤다고
전한다. 그는 어떤 나이 많은 영감과 살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면
서 억울해 못살겠다고 푸념하더라는 것..... ( 하략) ( 1969년 2월 23일 선데이 서울 22호)>
그렇게 돈독한 우애를 나누던 그들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깃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배호님의 신병이 깊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70년 6월 부터는 병의 악화로 외모가 달라지기 시작하더니
그렇게 유쾌하고 동료 가수들과 잘 어울리던 사람이 말수가 적어지며
공연 직전까지 분장실에 누워있다가 간신히 자기 차례가 되면
노래하고 내려오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그러다 70년 10대 가수 청백전때는 분장실에서 대기중 쓰러져서 사회자 최성일과
이대성의 등에 업혀 간신히 노래를 불렀습니다.
배호님의 병이 깊어지자 그 누구보다 문주란님이 애통해했던건 물론이죠.
당시 문주란님은 활동이 여의치않아 슬럼프에 빠져있던 시절이라
그 아픈 마음이 배가했을 듯 합니다.
그러나 문주란님의 애통함에도 불구하고 배호님의 병세는 더욱 깊어져서
급기야 71년 11월 지병인 신장염으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당시 문주란님의 슬픔이 얼마나 컸었는지는 다음의 인터뷰에서 잘 드러납니다.
< ....“참 재미있었어요. 그 시절 팬들도 요즘 오빠부대 못지 않았어요.
어딜 가나 구름처럼 몰려 따라다녔죠. 요새말로 치면 ‘스토커’같은 사람들도 있어서
힘든 부분이 없진 않았지만 무엇보다 즐거웠던 기억은 동료가수들과 가족처럼 지내며
울고 웃고 지낸 시간들입니다. 그 시절 연예계는 시쳇말로 군기가 엄청 강했죠.
하지만 그만큼 끈끈한 정으로 서로를 형제 이상으로 아끼고 살았답니다.
지금도 시간 나면 남진을 비롯해서 그 친구들과 자주 어울려요.
그런데 요즘은 돌아가신 분들이 많아 맘이 섭섭하고 허전할 때가 많아지네요.”
큰 눈을 반짝이며 옛날 이야기를 해주던 그녀의 낯색이 갑자기 어두워지는 듯 싶더니
가수 배호의 요절을 살아오면서 가장 슬픈 기억으로 떠올린다.
먼저 떠나간 친구의 이야기가 나오자 목소리가 더욱 저음으로 가라앉았다..... >
다음은 문주란님이 배호님 30주기때 가요무대에 출연해서 들려주었던
배호님에 대한 회상입니다.
마지막으로 두 분의 노래 교류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배호님은 생전에 문주란님의 <동숙의 노래>를 배호 스타일로 해석해서 취입하였고,
문주란님은 배호님의 대표곡 및 파란낙엽,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낀 장충단 공원.. 등
대표곡을 거의 모두 리바이벌 취입했습니다.
배호노래 50곡 녹음곡
노래/가요사랑서영민
1.검은나비
2.굿바이
3.굿바이(경음악)
4.그이름
5.기다리겠어요
6.내고향남촌
7.내고향영광(개사곡)
8.누가울어
9.능금빛순정
10.님의목소리
11.당신
12.돌아가는삼각지
13.돌아오지않는밤
14.두메산골
15.마지막잎새
16.막차로떠난여자
17.만나면괴로워18.목련화
19,물방아고향
20.비겁한맹세
21.비내리는명동
22.비내리는경부선
23.비린내나는부두
24.비오는남산
25.사랑은하나
26.사랑의옛고향
27.센치멘탈쟈니
28.아빠품에
29.안개낀장춘단공원
30.안개속으로가버린사랑
31.안녕32,애타는사나이
33.영시의이별
34.영시의이별(081130)
35.영시의이별3절
36.오늘은고백한다
37.울고싶어
38.울면서떠나리
39.웃으며가요
40.위자료
41.이순간이지나면
42.잊어야할사람
43.조용한이별
44.죄많은밤비45.종말
46.찾아온고향
47.파도
48.향수
49.황금의눈
50.황토십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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