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2. 미세먼지 보통. 화창하지는 않지만 맑고, 아침엔 서늘하고 점심 무렵 따뜻한 가을날
전날 밤 일찍 잠든 땅꼬가 숙면을 취했는지 아침 댓바람부터 일어나 늦잠에 취한 나를 조르고 있다. 조급함과 초조함이 묻어있는 조르기. “가을날이야. 가을은 짧아. 오전 햇살이 얼마나 좋은데... 늦잠이나 자면서 가을 햇살을, 아니 생을 허비할 참이야?” 이렇게 외치고 있음이 분명하다.
유래 없이 덥고 길었던 여름이 가고 드디어 당도한 가을. 날씨 변화와 함께 산책을 대하는 땅꼬의 태도도 달라졌다. 늦게 일어나는 나를 차분하게 기다렸다가 차려주는 아침을 야무지게 먹고 나서야 현관을 향하던 땅꼬. 그럴 때마다 ‘참 바른 생활 고양이야!’ 감탄했었는데 가을이 오자 땅꼬는 들떴다. 아침 식사는 안중에도 없다. 나른하게 침대를 나서는 나를 재촉하여 종종걸음으로 현관으로 이끈다. 땅꼬 성화 덕에 엘리베이트에 동승, 1층 공동현관문을 열면... 가을날 오전, 바람과 햇살이 손잡고 빚어낸 대기가 깔깔깔 웃고 있다. 뺨을, 목덜미를 애무하는 햇살. 호의에 가득한 바람의 감촉을 느끼고 있자면 땅꼬에게 감사할 수 밖에 없다. 땅꼬는 이미 풍덩...가을 속으로 다이빙을 했다. 건물 그림자가 드리운 인도의 응달과 소방도로를 환히 밝히는 양달의 경계에서 다이빙 보드에 선 선수처럼 팽팽했다가 머리부터 입수...눈부신 가을볕의 대해를 헤엄치는 것이다. 매일 온몸으로 햇빛 샤워를 하는 땅꼬 덕에 공동현관 입구 앞 소방도로 갓길은 반들반들하다.
삶의 순전한 기쁨. 이 가을 햇살과 바람만 있다면 더 바랄 것 없이 생은 완벽하다. 오늘은 함께 뒷산으로 가자.
공동현관으로 등을 돌리는 대신 아파트 출구 계단으로 향하는 내 발길을 확인하면 땅꼬는 신이 난다. 그 발길이 어떤 신호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출구 계단을 내려가 바로 옆, 뒷산을 향하는 골목길을 오른다.
8년 동안의 동행. 뒷산 산책은 서로에게 익숙하다.
첫 번째 위기, 뒷산에 닿는 100m 남짓한 골목길 초입에서 얼른 땅꼬를 안아 들어야 한다. 골목에 주차된 차에 묻은 냄새를 일일이 체크하면서 늑장을 부리는 땅꼬를 재촉하다 보면 체력도 시간도 바닥이 나기 때문이다. 땅꼬를 안고 재빠르게 골목을 올라 뒷산 초입, 개울가에서 땅꼬를 놓아준다. 식재된 소나무 숲과 아파트와 주택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산을 오른다. 문득, 둥치가 듬직하게 굵어져 건장한 사내 같아진 소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그렇구나. 대면한지 20년... 숲은 자랐다. 땅꼬와 함께 걸은 시간도 그만큼 유서 깊다. 가을날 오전 햇살은 오솔길에 짙은 숲의 그림자 그물을 드리웠고 우리는 그물코 사이를 따끔따끔 지난다.
두 번째 위기가 닥쳐왔다. 주택가 쪽 오솔길 비탈에 무성해진 개나리 덤불이다. 이 덤불 앞에 멈춰서 앞장 선 내 눈치를 살피면 낭패다. 어느새 덤불 사이로 들어가 덤불이 드리운 그늘과 고요 속으로 침잠하고 있는 땅꼬. 나는 또 궁색하게 엎드려 땅꼬를 부른다. 운이 좋게도 오늘은 금새 오솔길로 복귀했다. 덤불 틈새로 들어가 아파트와 주택가 사이, 고양이 길로 사라질 때면 나는 부러 낸 마음이 외면당한 서운함에 “의리 없는 년!!!” 땅꼬를 원망하곤 했다. 땅꼬는 차마 거절하지 못해 따라 나서다가도 피곤하거나 딴 볼일이 있으면 중도에 제 갈 길을 가버린다. 먼저 돌아가 공동현관 앞 거치된 자전거 사이에서 나를 기다리거나 중도에 마주친 뒷산 고양이들과 한바탕 말다툼을 하기도 했다. 이 길은 익숙한 영역이니까... 하지만 낯선 길을 갈 때면 절대로 이탈하는 법이 없다. 다행히 오늘은 위기를 넘기고 동행이 계속된다.
오솔길이 끝나면, 축대 길이 나온다. 왼켠엔 봄이면 지천으로 쑥과 들꽃들이 자라는 완만한 빈터가, 오른켠엔 고등학교 교정 너머 북한산이 조망되는 길이다. 봄날엔 부서지는 봄볕에 등을 데우면서 매일 이 언덕에서 쑥을 캤다. 땅꼬는 내 곁을 지키다 뒷산 토박이 물까치들이랑 다투기도 하고 사라졌다 나타나 장난을 걸기도 했다. 쑥을 캐고 나서 축대 길이 끝나는 개나리 그늘에 함께 앉아 간식을 먹여주며 북한산을 바라보던 나날들. 이 평화로운 장소는 우리에겐 특별하다. 아니 우리만이 아닐 것이다. 이 길은 등산 코스에서 벗어난, 사람과 동물이 동행하는 특별한 길이다.
그 길 끝에 열매를 떨구고 낙엽이 내리기 시작한 밤나무가 우람하고 그 너머로 사람들의 길인 계단이 있다.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나를 지켜보면서도 땅꼬는 늑장을 부린다. 할 일이 있는 것이다. 하수관 덮개 옆 배수로로 내려서서는 꼬리를 부르르 떨면서 마킹을 한다. 설마 여기까지 영역으로 삼으려고? 욕심쟁이!!! 예쁘장한 얼굴을 생글거리면서 오줌을 발사하는 발칙한 행동은 볼 때마다 우습기 그지없다. 그래, 다 네 땅 해라 ^ ^ 오랜 산책 동안 이곳에 마킹한 건 첨이다. 괜한 욕심인 걸 안다. 그래 그럴 때가 있지. 감당할 수 없는 기약을 할 만큼 탐나는...
마킹이 끝난 후 산비탈 경사를 오르는 계단을 지나면 운동기구가 놓인 공터를 만나고 거기서부터 단풍나무 터널 길이 나온다. 땅꼬는 단풍나무 사이로 아침 햇살이 고여 넘실대는 초록의 골짜기를 오래 응시한다. 나도 덩달아 땅꼬의 시선을 쫓는다. 무얼 보고 있는 것일까? 매혹된 표정으로... 단풍나무 길을 조금 오르면 갈림길이 나온다. 산비탈을 기어가는 좁은 오솔길이다. 이 길은 개울과 샘으로 연결되고 샘 곁에는 공터에 지어진 정자가 있다. 땅꼬는 이곳을 좋아한다. 작은 오솔길에서 땅꼬의 탐색은 계속된다. 대부분 산책하는 개들의 배설물 냄새일 것이다. 이번엔 나는 덩달아 코를 들이밀지는 않는다. 하지만 잔가지에 코를 가져다 대면 나도 코를 들이댄다. 대체 잔가지에서 무슨 냄새가 나는 것일까? 냄새로 그려지는 땅꼬의 지도는 어떤 세계일까? 나는 알 수 없는 세계. 그래도 오늘은 속도가 빠른 편이다.
샘과 정자에 이르면 세 번째 위기다. 정자 옆으로 흐르는 개울을 따라 곧장 내려가면 바로 숲길 초입이다. 집으로 향하는 지름길인 것이다. 몇 년 전 이 길을 따라 내려간 적이 있어 땅꼬는 이 마른 개울이 어디로 향하는지 잘 알고 있다. 여기서 더 걷고 싶어 샘을 지나 오솔길 오르막에서 손짓하는 내 눈치를 보다가 쌩 외면하고 개울 갓길을 허겁지겁 내달리는 땅꼬의 엉덩이를 보고 있자면...“의리 없는 년!!!”이란 소리가 절로 나온다. 저놈의 매정한 엉덩이...
하지만 지금은 선선한 가을날이고 숙면을 취한 땅꼬는 컨디션이 좋다. 나는 샘을 지나 오르막에서 손짓을 하고 땅꼬는 정자로 발길을 돌린다. 불길하지만 땅꼬를 배려하기로 한다. 정자에 앉아 햇살이 흘러내리는 숲의 사면을 지켜보다 폭우가 내리던 어느 여름날, 이 정자에서 만난 고양이 가족의 애잔함이 떠올랐다. 비를 뚫고 형제들과 정자에 도착했을 때 정자 마루 밑에서 비를 피하던 고양이 가족이 인기척에 놀라 장대비 속으로 내달려 숲으로 도망쳤다. 미안해져 금새 자리를 떠나면서 다시 돌아와 어린 새끼들과 안전하게 비를 피하기를 빌었던 여름날. 그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무사히 살아남았을까? 마음 속으로 안부를 묻고 있는 나와 고양이 가족이 웅크렸던 마루 바닥을 탐사하는 땅꼬. 다행히 땅꼬는 나를 따라 오솔길을 오르고 이제 우리의 고지가 바로다.
능선을 따라 난 서울 둘레길엔 토요일을 즐기는 사람들의 행렬이 부산하게 오간다. 둘레길에는 우리가 오른 초입길로 돌아 내려갈 수 있는 목재 계단이 있다. 이 계단에서 땅꼬의 기쁨은 절정에 이른다. 앞장서서 냉큼 계단을 내려가는 땅꼬의 꼬리가 바짝 들리고 꼬리 밑에서 똥꼬가 발랄하다. 오늘은 땅꼬가 왠일로 길막을 하면서 내 다리에 몸을 비벼댄다고 바쁘다. 내려가랴 몸을 부비랴 평소 단정했던 땅꼬의 뒷다리가 엉거주춤 벌어진다. 계단이 끝나고 들꽃이 가득한 오솔길이다. 이 길에서 땅꼬는 늘 나와 보조를 맞춰 나란히 걷는다. 곧 주택가 근처 개울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오고 계단 끝에 개울을 건너는 목재 다리가 있다.
다리를 건너면 산책 초입의 그 솔숲이다. 1800보, 그러니까 땅꼬에겐 대략 3000보, 6000보??? 가량 되는 우리 산책 코스가 끝나간다. 우리의 산책은 이 솔숲이 선물한 폭신한 낙옆 카페트에 앉아 숲의 여운을 즐기면서 끝이 난다. 지금까지는 한 번도 이 코스에서 위기가 온 적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 땅꼬는 다리에 앉아 솔숲으로 향하는 나를 쳐다보며 꼼짝 않더니 골목길로 발길을 돌린다. 설마... 돌아서 들어오려나 했지만 가버린다. 그래... 이젠 “의리 없는 년!!!”이라고 하지 않을께. 충분했다. 혼자 솔숲을 돌아 우람해진 소나무를 바라보며 감회에 젖어 돌아왔다.
늘 그렇듯.. 먼저 돌아와 공동현관 앞 거치된 자전거들 틈에서 기다리겠거니 했는데 땅꼬는 돌아오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집안일을 하고 아침을 먹는 동안도 땅꼬는 나타나지 않았다. 땅꼬는 바쁘구나. 냄새의 지도를 갱신하면서 영역 관리 중일 것이다. 오늘은 땅꼬가 자기 업무를 미루면서까지 나를 배려한 것이다. 확실히 가을날의 위력은 대단했다. 깍쟁이 땅꼬가...
땅꼬는 가을을 만끽 중이다. 벌써 8살... 땅꼬에게 남겨진 가을은 얼마나 될까? 내게 남겨진 가을은 또 얼마나 될까? 땅꼬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가을날을 살고 있다. 들떠서, 환호하면서, 조급하게 볕과 바람과 냄새와 또 무언가를 수확하고 있다. 나는 오늘 땅꼬의 수확물들이 궁금하다. 나는 궁금해하면서 기록한다. 이 기록이 오늘 나의 수확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