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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강해(36) 2025. 3. 26
아사의 종교개혁
열왕기상 15:9~25 (대하15:16~16:6)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얌’은 그의 아버지가 지은 모든 죄를 그대로 따라 했습니다.
아버지인 르호보암의 모든 죄는 14:23-24절에서 요약되어 있습니다.
14:23~24 “이는 그들도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상을 세웠음이라/ 24 그 땅에 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의 모든 가증한 일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
1) 그들도 높은 언덕과 푸른 나무 아래마다,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습니다.
2) 그리고 아세라 신전이 있는 곳에 남창들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민족의 가증한 일을 이스라엘이 본받아 행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악이 되었고,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한 왕으로 평가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에게 왕위를 이을 후사를 주셨습니다.
<왕 위에 오른 아사>
아비얌은 불과 3년 만에 죽고, 그의 뒤를 이어 ‘아사’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9절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 제 이십 년에 아사가 유다 왕이 되어/ 10 예루살렘에서 사십일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마아가라 아비살롬의 딸이더라.”
‘아사’가 왕위에 오른 때는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 제 이십 년입니다. 그러므로 북왕국의 초대 왕 여로보암은 자신의 재위 기간 남왕국 3대 왕(르호보암, 아비얌, 아사)을 상대한 셈입니다. 그런데 대하 13:20에 의하면, 여로보암은 아비얌과의 전투 이후 다시 강성하지 못하고 결국 여호와의 치심을 입어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사가 즉위할 무렵 여로보암은 패전의 후유증으로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내고 있을 때였습니다. 여로보암은 아사의 통치에 별 위험이 되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아사가 비교적 안정된 정세 속에 눈을 내부로 돌려 종교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아사’는 무려 41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렸습니다. 아사는 유다의 역대 왕 중 세 번째로 장기간 통치한 인물입니다(최장기는 므낫세 55년, 웃시아 52년). 아사의 통치 (B.C.910-869) 기간에 북이스라엘의 왕위는 무려 여섯 차례(나답, 바아사, 엘라, 시므리, 오므리, 아합)나 바뀌었습니다.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마아가라 아비살롬의 딸이더라’는 말씀은 오해하기 쉽습니다. 앞서 마아가는 아비얌의 어머니로 소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1~2절). 그것은 마아가의 아들 아비얌이 왕이 된 지 3년 만에 요절하여 죽자, 어린 손자 아사를 키우면서 그를 왕으로 세워 뒤에서 자신이 섭정을 하였으므로 할머니인 마아가를 그의 어머니로 표현한 것입니다(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은 할머니라고 번역).
<아사의 종교개혁>
아사는 그의 조상 다윗과 같이, 주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습니다.
11~13절 “아사가 그의 조상 다윗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12 남색 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의 조상들이 지은 모든 우상을 없애고/ 13 또 그의 어머니 마아가가 혐오스러운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어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나.”
1) 그는 성전 남창들을 나라 밖으로 쫓아내었습니다.
당시 풍요를 얻기 위해서 아스도롯 신을 섬겼습니다. 아사다롯 성전에는 신을 섬긴 후에 성적으로 음란한 행위를 하였습니다. 이들을 위해서 남창이 있었습니다.
2) 조상들이 지은 모든 우상을 없앴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이 틈틈이 숭배해 오던 우상들에는 아세라(14:23), 아스다롯, 밀곰, 그모스(11:5-7), 바알(18:18) 등이 있습니다(레 26:1-13).
특히 할머니 마아가가 세운 혐오스러운 아세라 상을 토막 내서, 기드론 시냇가(예루살렘 성과 감람산 사이에 있는 길이 약 5Km의 골짜기 이름)에서 불살라 버렸습니다. 아마도 마아가가 세운 혐오스러운 아세라 상이 감람산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당시 감람산은 ‘범죄의 산’으로 불릴 정도로 산당이 유명했습니다.
11:6~7(솔로몬이 지은 산당이 감람산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따름 같이 따르지 아니하고/ 7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3) 그리고 자기의 할머니(마아가)를 태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자기 아들 아비얌(2절) 때로부터 종교 혼합주의 세력의 주동자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아비얌이 일찍 죽고 손자 아사가 아직 어린 동안 실권자로서 섭정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아사의 단호한 개혁 의지를 보여줍니다. 즉 가족이라고 해도 종교개혁의 대상에서 예외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동시에, 왕권의 회복을 위해서도 필요한 작업이었을 것입니다.
<아사의 한계>
‘아사’는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다는 평가를 듣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아쉬운 실패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14~15절 “다만 산당은 없애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으며/ 15 그가 그의 아버지가 성별한 것과 자기가 성별한 것을 여호와의 성전에 받들어 드렸으니 곧 은과 금과 그릇들이더라.”
1) 우상숭배의 근거지가 된 산당들을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되기 전까지는 이스라엘인들이 산당에서 여호와께 예배드려왔습니다(12:31). 다시 말하면, 산당이 지방 호족들의 힘이 모이는 곳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지방 호족들의 심기를 건드려야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산당까지 없애지는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남겨진 산당으로 인해, 아사가 죽은 후 다시 우상숭배가 우후죽순처럼 다시 일어납니다.
한편, 산당에 대한 대대적 파괴 작업은 훗날 요시야(B.C. 640-609) 왕에 의해 이루어집니다(왕하 23:4-20).
산당을 없애지 못한 것 외에는,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랬기에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다는 평가를 듣습니다. 그는 자기의 아버지와 자기가 거룩하게 ‘성별하여’ 바친 은과 금과 그릇들을, 주의 성전에 들여놓았습니다. 여기서 '구별한 것'이란 '하나님께 드리는 성물'이란 뜻입니다. 즉, 이는 보통의 물품 중에서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따로 떼어 둠으로써 거록하게 된 물품을 의미합니다. 역대기 기록에 따르면 아사 왕은 그의 부친 아비얌이 여로보암과 싸워서 취한 전리품(대하13:8)과 자신이 구스인들과 싸워서 얻은 전리품(대하 14:15) 중에서 은과 금과 그릇들을 모두 하나님께 바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아사의 두 번째 실패는 하나님이 아닌 외세의 힘을 빌린 것입니다.
16~22절 “아사와 이스라엘의 왕 바아사 사이에 일생 동안 전쟁이 있으니라/ 17 이스라엘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여 사람을 유다 왕 아사와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 한지라/ 18 아사가 여호와의 성전 곳간과 왕궁 곳간에 남은 은금을 모두 가져다가 그 신하의 손에 넘겨 다메섹에 거주하고 있는 아람의 왕 헤시온의 손자 다브림몬의 아들 벤하닷에게 보내며 이르되/ 19 나와 당신 사이에 약조가 있고 내 아버지와 당신의 아버지 사이에도 있었느니라 내가 당신에게 은금 예물을 보냈으니 와서 이스라엘의 왕 바아사와 세운 약조를 깨뜨려서 그가 나를 떠나게 하라 하매/ 20 벤하닷이 아사 왕의 말을 듣고 그의 군대 지휘관들을 보내 이스라엘 성읍들을 치되 이욘과 단과 아벨벧마아가와 긴네렛 온 땅과 납달리 온 땅을 쳤더니/ 21 바아사가 듣고 라마를 건축하는 일을 중단하고 디르사에 거주하니라/ 22 이에 아사 왕이 온 유다에 명령을 내려 한 사람도 모면하지 못하게 하여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하던 돌과 재목을 가져오게 하고 그것으로 베냐민의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더라.”
북왕국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공격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고, 누구도 유다 왕 아사와 왕래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라마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불과 8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입니다. 이런 곳에 요새가 생기면 유다 입장에서는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위기를 느낀 아사는 성전과 왕궁에 있는 보물들을 신하들을 통해 다메섹의 벤하닷에게 주고 다메섹과 동맹을 맺자고 제의합니다. 다메섹의 벤하닷은 아사의 그 요청을 수락하고 아사의 요구대로 북왕국 왕 바아사를 공격합니다. 이에 바아사는 라마를 건축하던 일을 중단하고 북왕국 이스라엘로 후퇴합니다.
열왕기에서는 이 부분이 나오지 않습니다만, 역대기에서는 선지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어찌하여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방의 왕 다메섹의 벤하닷을 의지하느냐는 하나님의 책망을 전합니다.
역대하 16:7~10(선지자 하나니의 경고) “그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와서 그에게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8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10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의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 때에 아사가 또 백성 중에서 몇 사람을 학대하였더라.”
그러나 아사는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도 회개하기는커녕,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는 선지자 하나니와 일부 백성들을 학대하고 옥에 가둡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가 경고했을 때 자기 옷을 찢어 회개했는데, 아사는 회개하지 않고 그 말을 전하는 선지자를 학대한 것입니다.
<말년에 발에 병이 들어 죽음>
이 일이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하여 아사의 발에 병이 생깁니다.
23~24절 “아사의 남은 사적과 모든 권세와 그가 행한 모든 일과 성읍을 건축한 일이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그는 늘그막에 발에 병이 들었더라/ 24 아사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조상들과 함께 그의 조상 다윗의 성읍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여호사밧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대하 16:12)
하나니의 경고를 듣지 않고 오히려 그를 감옥에 가두자 하나님께서 아사를 징계하셨습니다. 그는 발에 큰 병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사는 이 질병을 놓고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의사들을 의지하여 약 2년 동안 앓다가 죽었습니다. 아사는 자신의 질병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고 회개하며 기도하였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병을 고쳐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의사에게 갑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의사란 오늘날의 의사와 같이 치료하는 자들이 아니라, 점술 행위로 치료하는 자들이니 결국 무당이나 점쟁이들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진노를 사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발에 병이 발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죽고 맙니다. 그 후 아사는 죽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잠드니 그의 조상 다윗의 성읍에 장사 되고, 그의 아들 여호사밧이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됐습니다.
<배우는 교훈>
오늘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1) 죄의 뿌리를 완전히 뽑지 않으면 언젠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아사’가 우상을 파괴하는 종교개혁을 진행했지만, 근본적인 뿌리인 ‘산당’은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끝내 산당을 없애지 못했다는 것은 죄를 이기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잘 보여줍니다.
그 결과, 그가 죽은 후 다시 우상숭배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은 속량’, 곧 ‘죄 사함’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그 죄사함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 안에 깊이 내재되어 있는 ‘죄의 뿌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은 것으로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마약에 중독된 사람이 그 죄를 용서받았다 할지라도 마약을 하고 싶은 마음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죄 사함을 받았다 하더라도 죄의 중독에서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에도 우리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롬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지 죄가 죽은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죄는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서 우리 내면 깊숙이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으로 채우지 않으면, 언제든지 살아나 우리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예수님과 함께 나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성령 안에서’ 열매를 맺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2) 개혁은 주변(가족)부터 해야 합니다. 아사는 자기의 할머니(마아가)를 태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였습니다.
‘아사’는 인간적인 관계보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한 자였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듯이, 사사로운 혈통 상의 정분(情分)을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아사 왕의 태도는 오늘날 모든 성도가 본받아야 할 모범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 10:34~38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 아사처럼 갑자기 큰 두려움이 닥쳐왔을 때 조심하십시오.
아사는 통치 초기에는 온전히 여호와께만 의지함으로 구스의 100만 대군과 싸워 승리한 적이 있습니다(유다와 에디오피아와의 전쟁 – 대하14:9-15). 구스 왕 세라가 대군과 최첨단 무기인 병거 300대를 거느리고 유다를 쳐들어왔습니다. 유다의 병력 58만 명과 구스의 100만 대군과의 전쟁은 유다에게 전혀 승산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사 왕은 이 위기 상황에서 다른 나라의 도움을 요청하거나 자기 힘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부르짖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사 왕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스 군대를 치심으로 아사 왕이 구스의 100만 대군을 진멸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어떠한 방식으로 구스 사람들을 패하여 도망가게 하셨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승리로 인하여 여호와의 구원과 승리는 군대의 수가 많고 적음이 상관없다는 사실이 분명히 입증된 것입니다. 얼마나 처절한 패배였는지 “구스 사람들이 엎드러지고 살아남아 돌아간 자가 단 한 사람도 없다”고까지 표현합니다.
아사 왕의 부르짖음은 이 전쟁이 유다와 구스의 전쟁이 아닌 하나님과 구스의 전쟁이 되게 했습니다. 이처럼 참된 신앙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할지라도 하나님께 모든 문제를 맡기고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아사 왕은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즉위 초, 중반에는 우상과 산당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을 지켜 행하도록 하는 종교개혁을 단행한 선한 왕이었습니다. 또 종교개혁을 단행할 때에 자신의 할머니에게조차 우상숭배의 죄로 폐위시키는 단호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말년의 아사는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의지하기 시작하였습니다(초심을 잃은 것).
북왕국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공격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자, 위기를 느낀 아사는 성전과 왕궁에 있는 보물들을 신하들을 통해 다메섹의 벤하닷에게 주고 다메섹과 동맹을 맺자고 제의합니다.
승리와 성공이 거듭되면서 교만해진 마음과 퇴색되어 버린 그의 신앙이 이런 잘못된 결정을 내리게 만든 것입니다.
한때 믿음의 결정을 내렸다고, 다른 때에 반드시 똑같은 결정을 내린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마음이 교만해지면, 신앙이 퇴색해 버리면 두려운 일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보다 사람은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일이 어떤 일이든 하나님께서는 그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크신 하나님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아사와 같이 믿음 생활을 잘하다가 인생의 말년에 믿음을 버리는 일들을 종종 봅니다.
중요한 것은 초심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요일2:24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계2:4~5(에베소교회에 주시는 말씀)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나태해지기 마련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은혜도 가물가물해집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바라기는 평생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은혜 속에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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