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이야기가 겹쳐진다. 지난해 겨울 양평으로 옮기기 전까지 9년 동안 그는 동탄의 작업실에서 작업을 해왔다. 평화로운 농촌이었던 그곳은 동탄 신도시 개발 발표와 더불어 마을 전체에 빨간 측량 깃발들이 꽂히기 시작하더니 마을은 곧 사라졌다. 그 마을에는 각종 고물을 모아다가 앞마당에 잔뜩 쌓아놓는 노인이 살았다. 고물로 팔기 위한 것도 아니고 그저 끊임없이 쌓아놓아 노인이 살아온 날들만큼 늘어나기만 했다. 그러나 개발과 더불어 개인의 역사도, 마을의 역사도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이런 현실을 보면서 미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이 깊어졌다. 이 고민은 예술의 본질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여행 가서 길을 잃었을 때 가장 시급한 일은 목적지를 찾는 것이 아니라 현 위치를 확인하는 일이다. 지금같이 모호한 시기, 경계도 알 수 없는 시기에는 더욱 더 그렇다. 조각의 본질, 예술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
조각의 본질을 느낄 수 있는 큰 규모의 동상 작업이 탄생하게 된 이유다. 동상은 제작 방식뿐만 아니라 형상도 아날로그적이다. 사람을 매개로 해서 사상, 이야기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전 조각에서 보여주었던 개인적이고 몽환적인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끌어오려고 노력했다. 천성명은 언제나 진지했다.
쓰러진 동상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자기 자신이다.
“사람 조각은 늘 내용을 가져오기 때문에 고민하다가 내 얼굴로 만들었다. 자기 동상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작가밖에 없지 않은가.”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
민머리에 줄무늬 티셔츠를 입은 이전의 인물 조각들도 자신을 모델로 한 자소상(自塑像)이라고는 하지만, 상처투성이 얼굴로 등장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실물이 훨씬 나은 멀끔한 호남형이다. 상처투성이 얼굴의 조각은 혐오와 매혹적인 끌림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촉발시킨다. 무언가와 전투를 치러낸 상처투성이 얼굴은 ‘지금, 여기’의 고독하고 상처 입은 영혼을 담아낸다. 천성명의 페르소나인 줄무늬 티셔츠의 사나이들은 2001년에 이미 등장했다. 그 후 1~2년 사이에 진행된 개인전에는 마치 긴 연극의 한 에피소드처럼 이루어지고, 줄무늬 티셔츠 사나이 이외의 등장인물들도 전시회마다 조금씩 다르게 등장한다. 〈광대, 별을 따다〉(2000), 〈잠들다〉(2001), 〈길을 묻다〉(2002), 〈거울 속에 숨다〉(2003), 〈달빛 아래 서성이다〉(2005), 〈그림자를 삼키다:정오〉(2007), 〈그림자를 삼키다:밤〉(2008) 등 전시의 제목들은 마치 심우도처럼 줄무늬 옷을 입은 남자가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각 전시에는 별도로 그가 직접 쓴 헌정시가 붙어 있어 미술, 연극, 텍스트가 서로를 지지해주며 천성명만의 작품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2005 달빛 아래 서성이다_1 |
2005 달빛 아래 서성이다_2 |
2005 달빛 아래 서성이다_3 |
천성명의 이 독특한 작품 세계에서 진짜 연극적 가능성을 끌어낸 것은 안무가이자 비디오 예술가인 딘 모스Dean Moss였다. 딘 모스는 2007년, 2008년 작품을 위해 한국에 왔다가 천성명의 전시를 보았고 영감을 얻었다. 천성명은 딘 모스와 함께 이 공연 작품에 예술감독으로 참여했다. 2008년 전시에 사용된 헌정시의 첫 대목에 나오는 말인 〈이름없는 숲〉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연극은 록펠러 재단의 후원을 받았으며, 2011년 5월 실험적인 작품으로 유명한 뉴욕 첼시에 있는 ‘키친’이라는 극장에서 2주간 공연이 이루어졌다. 기존의 천성명 작품을 배경으로 하면서 새로운 부분들이 첨가되었다.
nameless forest 공연 이미지 |
공연은 전체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기존의 천성명 작품에서 나타난 충격적인 반(反) 유토피아에 대한 직접적인 오마주로 이름없는 숲의 고요함과 불안함을 배경으로 한다. 제2부에서는 세계 곳곳의 분쟁을 찍은 마이크 캠버의 사진이 제1부에 등장했던 순수한 개인적인 공간을 부숴버리면서 사회로 나아간다. 제3부에서는 설치미술가 간달프 가반의 거울, 네온을 활용한 카니발적인 조명을 이용해 개인과 사회의 화해 분위기를 고양시킨다. 백남준과 함께 작업한 경력이 있는 소리설치예술가 스티븐 비티엘로가 맡았다. 연극과 조각뿐 아니라 사진, 설치미술, 전위음악까지 결합된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종합예술인 셈이다. 특히 3부에서는 한국 마당놀이에서 착안하여 무대 위 양쪽에 관객이 앉고, 관객들이 극의 한 요소처럼 참여한다. 한국 관객들에게는 낯선 형식의 무대였지만, 공연은 진지한 분위기에서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2007 그림자를 삼키다_1 |
2007 그림자를 삼키다_2 |
2007 그림자를 삼키다_4 |
천성명의 조각 작품에 깔려 있는 상징적이고 압축적인 이야기가 문화적 차이를 넘어 공감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한 것이어서 언어와 문화권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충분히 사로잡을 수 있었다. 무언의 몸짓으로만 이루어지는 공연을 위해 7명의 배우들은 그의 작품이 수록된 도록을 끼고 매일 들여다보며 작품에 나타난 다양한 동작을 연구했다. 천성명은 미술가이므로 무대미술을 담당했을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예술감독으로 참여하면서 연기자들의 동작과 움직임을 함께 만들어나갔다. 그의 입장에서는 ‘몸’을 언어로 한다는 점에서 조각과 무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배우들은 그에게는 살아 있는, 움직이는 조각품인지도 모른다. 그는 하나의 이야기를 지금까지 조각, 그림, 설치미술, 책 등 다양하게 표현해왔다.
2008 그림자를 삼키다_1 |
2008 그림자를 삼키다_2 |
“공연은 내가 여태까지 해온 장르를 달리하여 하나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시도에 포함되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나는 새로운 표현방식을 얻게 되었다.”
이번 조각 작품에서 사회적인 문제의식을 본격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연극 작업의 영향이 컸다. 언제나처럼 예술가에게는 기쁨도 슬픔도 좌절도 희망도 어떤 행위든지 성장의 요소가 되어 작품으로 흘러들어간다. 멈추지 않는 성장은 예술가에게 주어진 과제이자 특권이다. 스케이프 갤러리에서의 전시는 10월 2일까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