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그린 그림 / 최인호
Choi, In-Ho
최인호
실존을 추적하는 언어체계,
또는 '덜 그리기'로 포착하는 삶의 우수
실존적 가중치의 미학
최인호의 세계는 대체로 휑한 구도가 만들어내는 빈 공간들과 그것들에 동반되는 건조한 대기로 대변될 수 있다. 작은 돌기들을 포함하는 조심스럽게 거친 마티에르와 지극히 낮게 조율된 채도에 의해 메마름은 더 구체적인 것이 된다.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한 하늘이나 청명한 대기는 최인호의 세계가 수용하기 어려운 가치의 대변자들임을 분명히 하자. 그러한 것들은 결코 실존적 삶의 제대로 된 묘사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는 잿빛이거나 황사 낀 듯 뿌연 대기와 그 충돌을 뚫고 멀리까지 나가지 못하는 제한된 시계가 오히려 미덕이다. 가까운 것들의 윤곽마저 희미한 것으로 만드는 제한된 시계가 이 세계의 상황들을 훨씬 더 실존적인 뉘앙스를 띤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물과 인물들에 '실존적 가중치'를 부여하는 최인호의 회화적 기제이다. 예컨대 핑크색 안료가 만들어내는 붉은 노을조차 여기선 서정성 보다는 실존적 텍스트로서 작용한다. 구름은 그것을 묘사하는 색채나 톤보다 더 무거운 것이 된다. 황토색의 대지는 한층 더 푸석한 것이 되고, 가뜩이나 듬성듬성하고 앙상한 나무들은 더더욱 탐스러운 열매나 풍성한 이파리들과 관련이 없는 것이 된다. 최인호의 어린 왕자는 생텍쥐페리의 주인공보다 훨씬 노쇠하고 지쳐 보인다.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노을이건, 구름이건, 나무건-은 실존적으로 재해석되고 재구성된다.
시각적 효과, 회화론적 고려, 전위주의 미학의 노선들은 여기서 하등 의미가 없다. 그것들이 삶을 통찰하거나 관조하는데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단 말인가. 그게 자유거나 해방이라면, 끝없이 부조리만을 양산해낼 뿐인 실존을 포기한 대가로 얻은 위선적이고 게으른 자유나 해방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최인호는 예술의 트랜디한 흐름에서 관심을 거둬들인다. 덧칠한 형식주의의 유산들, 그럴싸한 사변에 더는 미련을 가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소박하게 자신의 자리, 자신의 실존을 마주하는 자리로 돌아온다. 형상들의 윤곽을 희미하게 하고, 덜 그리고, 덜 칠함으로써, 오히려 더 넓은 문학적 뉘앙스를 포용해내는 자신의 노선을 재확인한다.
실존의 가중치가 최인호의 깡마른 인물들과 그들의 정적인 동작이 조율해내는 함축적 내러티브에 주요하게 반영되었음은 물론이다. 노란 커튼 뒤의 중년 남성. 황사가 짙게 깔린 황토빛 벌판 저 멀리 걸어가는 사내나 목도리를 두른 채 <조기 한 손>을 들고 돌아오는 남자, 나비넥타이, 상고나 단발진 머리에서 그들이 지나왔던 시간들의 체취가 묻어나는, 그들은 하나같이 야위고 마른데다 자신들의 삶에서조차 어설프게 겉돌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이 이정표도 없는데다 자주 지나치게 구불거리기까지 하는 도상에 서 있곤 한다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가난하며 최소한의 실존을 영위하는, 아마도 장욱진, 박수근의 세계에서 보아온 듯, 친숙한 인물들이다.
심상용 / 미술사학 박사, 미술평론
'한국현대미술선 034'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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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그 예술적 영혼의 초상 '펠릭스가 만난 127인의 예술가'
2021. 1. 7 '갤러리 제이콥'에서... 화가 최인호.
화가 최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