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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이 낳은 창조성, IT산업에도...
1936년 헝가리에서 낙농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안드라스 그로프(Andras Grof).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어린 시절부터 친구들 사이에 소외됐던 그는 2차대전 당시 나치의 눈을 피해 도망 다니는 신세였다. 유태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곧바로 홀로코스트 대학살의 피해자가 되던 시절이었다. 신분을 숨기며 도망다니다 간신히 목숨을 구한 그에게 또다시 시련이 왔다. 1956년 소련의 붉은 군대가 헝가리를 점령한 것. 이번에는 `자본가`인 낙농업자의 아들이라는 점이 약점이었다. 결국 오스트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탈출했다.
뉴욕에서 무일푼으로 제 2의 인생을 시작한 그는 이름도 미국식으로 바꿨다. 앤드류 그로브(Andrew Grove). 세계 마이크로프로세서의 90%이상을 생산하는 반도체업계의 제왕 인텔의 회장 이름은 그렇게 생겨났다. 유난히 추위를 싫어했던 그는 뉴욕 시립대에서 미국 생활을 익힌 뒤 캘리포니아로 갔다. UC버클리에서 박사학위를 딴 뒤 1967년 잡은 첫 직장이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R&D(연구개발) 연구원. 다음해에 동료들과 함께 인텔을 창업했고 87년 CEO, 96년에는 회장이 되었다.
90년대 IT(정보통신)혁명의 한 복판에 우뚝 서 있었던 그로브 회장은 얼마전 포브스지와의 인터뷰에서 창조적인 힘의 원동력은 `두려움(fear)`이라고 얘기해 눈길을 끌었다. "편안하게 안주하는 생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은 두려움이다. 그것은 불가능해 보였던 어렵고 힘든 일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육체적인 고통을 경험한 사람들이 더욱 건강 유지에 노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는 설명이다. 수천년 동안 고난과 핍박을 많이 당한 유태인들의 `창조성`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해 주는 말이다.
그는 또한 함께 생존하는 `공존 공영`보다는 강자가 살아남는 `적자생존`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모든 사업은 그 안에 파멸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다. 사업이 커질수록 시장 점유율을 빼앗으려는 경쟁자들의 공격이 거세지는 탓이다. 따라서 그런 불가피하게 다가오는 위기를 미리 감지하고, 사전에 경쟁자를 철저하게 제거해야만 영원히 살아 남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제대로 된 경영자가 하는 일이다"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언제나 유랑생활을 해야 했던 유태인들이 느끼는 위기의식을 반영하는 말로 해석되기에 충분하다.
그런 창조적인 힘 때문일까. 빌 게이츠와 함께 세계 최대의 소프트웨어 회사인 마이크로소프트를 일군 스티브 발머(Steve Ballmer)가 바로 유태인이다. 디트로이트출신으로 하바드대학에서 수학과 경제학 학위를 마친 그는 지난 2000년 빌 게이츠가 CEO자리를 물러나면서 그 뒤를 이은 실질적인 2인자이다. 2백50억달러가 넘는 재산으로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유태인으로 꼽힌다. 스티브 발머를 비롯 마이크로소프트는 직원의 10-15%가 유태인이기도 하다.
"PC를 소비자에게 직접 판다"는 참신한 아이디어 하나로 대학 기숙사에서 창업을 한 마이클 델도 전형적인 창조적인 기업가이다. 65년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태어나 92년 27살 때 포춘지가 뽑은 `세계 500대 기업인`에 꼽힌 최연소 CEO이자 가장 어린 부자. 18살 때인 83년 텍사스주립대(오스틴) 기숙사에서 1천달러를 가지고 `델 컴퓨터`를 창업한 그는 20년만에 회사를 컴팩과 합병한 휴렛팩커드에 이어 세계 2번째 컴퓨터제조업체로 키웠다. 소비자의 요구에 맞는 가장 효율적인 컴퓨터 시스템을 제공한다는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성공한 셈이다.
마이클 델은 유태인의 전통에 따라 의사가 되길 원했던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못했지만 많은 돈을 유태인센터와 어린이박물관 및 병원등에 기부하는등 텍사스주에선 가장 존경받은 인물로 뽑힌다. 같은 텍사스 출신인 부시대통령이 가장 즐겨 만나는 기업인중 한 명이기도 하다.
창의력 하나만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일군 또하나의 대표적인 IT기업가는 로렌스 엘리슨 오라클 CEO. 1944년 시카고에서 태어난 그는 미혼모였던 유태인 어머니가 출산직후 아이를 친척에게 맡기고 캘리포니아로 가버려 부모없이 자랐다. 12살 때 자신을 키우고 있는 사람들이 친부모가 아닌 것을 안 그는 반항적인 소년으로 컸지만 수학과 과학에 남다른 재질이 있었다. 의사가 되려고 일리노이 대학에 들어갔지만 한학기만에 낙제, 학교를 포기하고 캘리포니아 버클리로 갔다. 한번도 컴퓨터학 강좌를 들어본 적이 없는 그는 암펙스라는 컴퓨터 프로그램업체에 들어가 책을 읽으며 스스로 깨쳐가면서 일을 배웠다. 이 회사에서 CIA(중앙정보국)을 위한 대형 데이터베이스 작업을 책임졌는데 이때 암호명이 바로 후에 회사를 창업할 때 차용한 이름인 "오라클"이었다.
사무라이에 반해 샌프란시스코 인근에 집을 일본식으로 꾸려놓고 사는 엘리슨은 요트와 개인비행기를 즐기고 여자를 좋아하는 유명한 플레이보이. 하지만 암 연구과 바이오기술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암과 노화방지를 위한 엘리슨 의학재단을 세우기도 하는등 자선과 기부에 앞장서고 있다.
최근들어 보석이나 섬유등 전통적으로 유태인들이 장악하고 있던 산업에서 젊고 능력있는 유태인들이 많이 떠나고 있다. 통상 3,4대에 이르기까지 대를 이어 비즈니스를 하는 유태인들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그러나 유태인 비즈니스의 본질이 `창의성`과 그로 인한 `더 많은 이익추구`에 있다는 점을 알면 의외로 대답은 간단해진다. 새로 태어난 IT산업은 다른 어떤 산업보다도 창의성의 요구되며 또한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인 까닭이다.
실제 IT 업계의 대표주자들중 상당수가 유태인들이다. 2001년에 야후의 CEO가 된 영화계의 거물 테리 시멜(Terry Semel), 한때 미국 최고 연봉의 CEO였던 로투스 디벨로퍼사의 미첼 카포(Mitchell Kapor), 2000년 브로드캐스트닷컴을 팔아 남긴 수십억달러로 프로농구구단인 댈러스 매버릭스를 인수해 지금은 프로농구업계에서 가장 유명한 구단주가 된 마크 쿠반(Mark Cuban)도 유태인 군단이다.
집에 TV도 없는 엄격한 유태인인 버버트 베커 BEE멀티미디어의 창업주 겸 CEO는 TV가 인터넷으로 생방송되도록 만드는 소프트웨어를 처음 개발하기도 했다. 네트워킹의 거함인 노르텔네트워크스의 존 로스 CEO, 오랫동안 컴팩의 CEO였던 벤자민 로젠, 시스코시스템스의 창업자인 샌디 레너, 퀄컴을 창업한 어윈 제이콥스, 검색엔진인 구글을 공동창업한 세르게이 브린등도 모두 IT업계를 이끄는 거물 유태인들이다. 유태인 없이 IT의 역사를 쓸수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자랑 49가지
뉴욕 맨해튼에서 허드슨 강 넘어 보이는 뉴저지주에도 유태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동네가 많다. 버겐카운티 중심지인 티넥(Teaneck)도 그중 하나. 다운타운에 있는 세다 거리(Cedar Land)에는 식당과 서점등 각종 유태인 비즈니스가 활발하다. 지난 7월말 쥬다이카 하우스(The Judaica House)라는 서적을 비롯한 각종 유태인 관련 용품 판매점(전화 201-801-9004, info@judaicahouse.com)에 들렀는데 흥미있는 자료를 하나 발견했다. A4용지 3매에 복사해 계산대 앞에서 무료로 배포하는 이스라엘의 자랑 49가지였다. 세계에서 1백번째로 작은 국가이고 세계 인구의 1천분의 1도 못되는 이스라엘이 다음과 같은 자랑거리를 같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 자랑거리를 읽으면 이스라엘이 어쩔수 없는 작은 미국 혹은 미국의 두뇌란 생각을 절로 나게 만들어 준다.
1.전체 국민중 대학 졸업생의 비율이 전세계에서 가장 높다.
2.다른 어떤 나라보다 1인당 과학 논문 작성비율이 가장 높다.
3.인구 1만중 평균 109명이 특허를 갖고 있다. 이는 세계 최고 수준.
4.거의 3천5백개의 첨단기업을 자랑하는 미국을 제외하면 약 3천개 선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첨단 창업기업을 가지고 있다. 벤처 캐피탈 펀드 규모도 미국에 이어 2위.
5.미국과 캐나다를 제외하고는 첨단기업들을 주로 상장하는 미국 나스닥(NASDAQ)에 가장 많은 기업이 상장되어 있다.
6.중동지역에서 최고수준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2000년의 경우 1인당 평균 소득이 1만7천5백달러로 영국을 능가했다.
7.F-16 전투기 2백50대 이상등, 미국이외의 국가중 가장 많은 전투기 군단을 보유하고 있다.
8.1천억달러에 달하는 경제규모는 주변 국가를 모두 합한 것보다 크다.
9.1인당 기준으로 따져 가장 많은 생명공학 창업기업을 갖고 있다.
10.세계에서 가장 많은 철새가 몰려드는 철새도래지이다. 수십만종의 아프리카 철새가 아시아로 날아가기위해 이스라엘을 거친다.
11. 성인 근로자의 24%는 대학 학위를 갖고 있다. 미국과 네덜란드에 이어 세계 3번째 비율이다. 12%이상은 석사학위 이상 소지자이다.
12.중동지역 유일의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다.
13.1984년과 1991년에 에티오피아에서 위험에 처해 있는 2만2천명의 유태인들을 구해내 이스라엘로 데려왔다.
14.1969년 골다 메이어가 수상으로 당선되었을 때, 그녀는 민주국가에서 선거를 통해 국가지도자로 당선된 두번째 여성이었다.
15.1998년 케냐 나이로비의 미국 대사관에 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이스라엘의 구조팀은 하루 안에 사건현장에 도착해 무너진 빌딩 속에서 세 명을 구조해냈다.
16.기업 창업율이 세계에서 세번째로 높다. 여성과 55세 이상의 노년층의 창업율은 세계에서 가장 높다.
17.인구수를 기준으로 할 때 이민자 비율이 가장 많다. 이스라엘로 오는 이민자들은 민주주의, 종교자유, 그리고 경제의 기회를 찾으러 온다.
18.전세계에서 가장 먼저 다이아몬드 밀거래를 막는 킴벌리 프로세스를 채택했다. 아프리카 무장 반군의 자금줄이 되어온 다이아몬드 밀매를 막기위한 킴벌리 프로세스는 다이아몬드생산국 정부는 분쟁과 무관하다(conflict free)는 인증서를 발행하고 이들 공인된 다이아몬드만 거래하는 제도로 2002년 도입됐다.
19.항공산업 관계자들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가장 확실한 공항 안전 방법을 개발했다. 미국 정부도 공항 안전을 위해 이스라엘의 도움을 받는다.
20.이스라엘의 마카비 농구팀은 2001년의 유럽 대회에서 우승했다.
21.이스라엘국적의 테니스 선수 아나 스마쉬노바는 세계 랭킹 15번위이다.
22.마이티 몰핑의 파워 레인저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로 탈출한 하임 사반이 제작했다.
23.1991에 걸프전쟁중 이스라엘 오케스트라는 사담 후세인이 발사한 미사일이 텔 아비브에 떨어지는 가운데 가스마스크를 착용하고 콘서트에서 연주했다.
24.1인당 책 출판 비율이 세계 2번째 이다.
25.21세기들어 숲(나무의 숫자) 이 늘어난 유일한 국가이다.
26.1인당 박물관 숫자가 가장 많다.
27.히브류어와 아랍어가 두개의 공식 언어이다.
28.이스라엘 과학자들은 세계 최초의 컴퓨터화된 방사선이 없는 유방암 진단용의 기계를 개발했다.
29.한 이스라엘 회사가 환자에게 정확한 양의 약을 주는 컴퓨터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는 약을 주는 과정에서 인간 오류를 없앴다. 미국의 병원에서는 해마다 7천명이 이 과정에서의 오류로 목숨을 잃는다.
30.이스라엘의 기븐 이미징이란 기업은 첫번째로 몸 속에 집어 넣을수 있는 비디오 카메라를 개발했다. 이는 사람의 몸 속의 각종 기관들을 몸 안에서 직접 볼 수 있는 장비로 의사가 암이나 소화기 이상등의 문제를 제대로 진단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31.이스라엘의 연구자들은 움직임이 약화되는 심장을 박동시켜주는 기계를 개발했다. 이는 심장 문제가 있는 이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 이 기계는 센서를 통해 심장의 기계적인 움직임과 동작을 맞춘다.
32.이스라엘에는 3천개의 첨단기술 및 창업기업을 갖고 있다. 이는 미국 실리콘 밸리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첨단기업이 밀집된 지역이다.
33.물 부족에 대비해 혁명적인 관개 시스템을 개발, 농업에 들어가는 물을 최소화했다.
34.가구당 컴퓨터의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
35.전체 근로자 1만명중 1백45명이 과학자나 기술자들이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비율. 미국은 1만명중 84명, 일본은 70명, 독일은 60명 수준이다.
36.핸드폰은 이스라엘에서 개발됐다. 이스라엘에 최대 규모의 연구센터를 가지고 있는 모토로라가 주역.
37.윈도우스 NT 운영시스템의 거의 모든 부분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이스라엘 연구소에서 개발했다.
38.펜티엄 MMX 칩 기술은 이스라엘 인텔 연구소에서 개발되었다.
39.음성메일 기술은 최초로 이스라엘에서 개발되었다.
40.마이크로소프트와 시스코시스템스가 미국 밖에서 연구개발(R&D)을 만든 곳은 이스라엘이 유일하다.
41.AOL 인스턴트 메센저 기술은 1996년에 네 명의 이스라엘 젊은이들이 개발했다.
42.이스라엘에서 개발된 여드름용 치료법 ClearLight는 자외선을 쓰지 않는 높은 강도의 좁은 푸른 빛을 이용하여 여드름 박테리아를 주변의 피부를 손상시키지 않고 자폭하게 한다.
43.미국 캘리포니아 남부의 모자베 사막에 최초로 건설된 태양열 발전소는 이스라엘 회사 작품이다.
44.최초의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소프트웨어는 1979년에 이스라엘에서 개발되었다.
45.지난 2년간 테러리스트들에 죽은 이스라엘인은 모두 5천명이 넘는다. 이는 9/11 때 세계무역센터에서 테러공격으로 죽은 미국인(2천8백명)보다 훨씬 많은 숫자이다.
46.이스라엘은 중동에서 아랍인들이 자유로 투표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다.
47.이스라엘은 지난해 35억달러 이상의 무기를 수출했다. 이는 러시아의 무기 수출과 거의 같은 규모로 이를 능가한 나라는 미국과 영국뿐이다.
48.이스라엘은 군대가 성경의 윤리규범을 따르는 유일한 국가이다.
49.이스라엘 기술은 미국 군대에 많이 보급되어 있다. 미국이 이스라엘에서 구입한 신기술 물건들은 뽀빠이 공대지 미사일부터 헌터 앤드 파이오니아 무인 로봇, 브래들리 기계화 자동차의 컴퓨터 시스템에까지 다양하다. 확실한 정보는 아니지만, 이스라엘의 엘비트 시스템의 자회사에서 공급한 컴퓨터가 미국 군대의 브래들리 전투용 자동차를 이끌 가능성이 크다.
록펠러가 만들어낸 석유왕국
지난 99년 12월 1일. 세계 석유업계에선 아주 의미있는 날이었다. 미국 랭킹 1위 석유업체인 엑슨(EXXON)과 2위인 모빌(MOBILE)이 합병을 선언한 것이다. 두 회사가 합쳐서 된 엑슨-모빌은 단번에 유럽의 브리티시 석유(BP)와 로열더치쉘을 제치고 세계 1위로 올라섰다. BP도 미국계 아모크과 합병을 발표했지만 엑슨-모빌의 덩치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엑슨과 모빌의 합병은 석유업계 관계자들보다 두 회사의 역사를 알고 있는 유태인들에게 더욱 큰 의미를 주었다. 두 회사는 원래 유태계 회사인 스탠더드 오일이란 하나의 거대 독점 회사였던 것. 1911년 셔먼 반 독점법에 의해 강제로 분할되었고 우여곡절끝에 87년만에 재결합하게 된 사연을 가지고 있다. 분할과 합병의 역사가 있었지만 단순 총량면에서 유태계 기업의 영향력에선 변화가 없는 셈이다. 엑슨모빌은 한때 하루 생산량이 25억배럴를 넘어 쿠웨이트와도 맞먹는 규모를 자랑하기도 했던 거대 회사이다.
석유업계의 세계 최강 엑슨-모빌의 전신이었던 스탠더드 오일의 창업주는 석유왕으로 불리며 지난 20세기 세계 최대 부자의 대명사이기도 했던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 ). 스탠더드 오일의 역사는 바로 창업주인 록펠러의 생애와도 맥을 같이 하고 있다.
1839년 미국 뉴욕에서 6명의 자녀중 두번째로 태어난 록펠러는 53년 오하이오주로 이사를 갔고 거기서 침례교회를 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유태교회인 시나고그에는 열심히 다녔다는 흔적은 없으나 그는 분명 유태인이라는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록펠러가 유태인인 이유는 먼저 그의 어머니가 유태인이라는 점. 유태종교에서 누가 유태인인가를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머니의 유태인 여부이다. 어머니가 유태인일 경우 자식들은 무조건 유태인으로 인정한다. 만약 유태인 여성이 이종교들로부터 강간을 당했고 그렇게 해서 아이가 태어났다 해도 그 아이는 무조건 유태인으로 인정된다. 종파에 따라 다르지만 아직도 보수적인 종파의 경우에는 유태인인 남성이 이교도와 결혼해서 낳은 아이의 경우 그 아이가 유태인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개종이라는 공식적인 절차가 필요할 정도이다.
두번째 이유는 그의 이름에서 찾을수 있다. 록펠러란 이름은 원래 독일계통의 이름인 로겐펠더(Rogenfelder)를 미국식으로 만든 것이다. 로겐펠더는 동부유럽에서 흔히 유태인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1차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이 베르사이유조약으로 인해 유전이 있는 모든 식민지를 잃었을 때 히틀러는 이를 유태인의 공작이라고 공격했는데, 바로 록펠러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히틀러는 세계 석유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유태인인 록펠러가 독일을 압박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히틀러의 그런 판단은 나중에 6백만명의 유태인을 대학살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록펠러의 자수성가식 사업성장과 성공후 재산의 사회환원은 유태인 사업가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1855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문대학의 6개월짜리 비즈니스 코스에 들어간 그는 과정을 3개월만에 마치고 휴위&터틀 이란 조그만 중개업체의 서기 보조로 취업했다. 3개월만에 받은 급여는 50달러. 1주일에 3.57달러를 받은 셈이었다. 회사측은 일 잘하는 그를 정식 사원으로 채용하면서 임금을 한달에 25달러로 올려주었다.
록펠러는 그렇게 해서 번 돈 1천달러와 아버지한테서 빌린 1천달러를 합해 모리스 클라크라는 친구와 함께 1859년 아예 중개회사를 하나 차렸다. 1859년은 마침 서부 펜실베니아에서 처음으로 석유가 나온 해로 그가 살던 오하이오주를 비롯한 인근 주들이 빠르게 성장하는 석유산업의 중심지가 되고 있었다.
1868년 석유정제업에 뛰어든 록펠러는 1870년 1백만달러의 자본으로 스탠드 오일 컴패니를 세웠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회사를 성장시켜 나갔다. 하지만 록펠러는 진정한 석유인이 아니었다. 매장된 석유를 파거나 이를 정제하는 본연의 업무를 통해 회사를 키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유전과 정제시설을 아주 싼 값에 매입해 막대한 이익을 남기는 식으로 재산을 모으는 이른바 금융비즈니스로 석유산업을 송두리째 장악했다.
대형사가 아니었던 스탠다드 오일이 그렇게 빠른 성장을 할수 있었던 이면에는 당시에는 철저히 가려져 있었던 숨은 스토리가 하나 있다. 록펠러는 석유를 운반해주는 유니온 탱커 카 회사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통해 회사를 확장했다는 설명이다.미국에서 1800년대 후반까지는 석유를 주로 포도주 저장탱크 같은 나무로 된 통으로 운반했다. 때문에 중간에 석유가 새거나 증발되어 없어지는 일이 흔했다. 이때 공간이 밀폐된 철로된 탱크를 처음 개발한 것이 바로 록펠러의 유니온 탱커 카 회사였다. 이 회사로 인해 다른 운송업체들이 모두 망했고, 록펠러 운송회사가 운반량을 줄여나가자 판매수단을 잃어버리게 된 대부분의 석유 석유 업체들도 파산직전에 이르렀다.
록펠러는 1900-1910년 사이에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미국 전역에서 파산직전에 달한 회사들을 거의 거저 줍다시피 하면서 회사를 단기간에 급팽창시켰다. 스탠다드 오일은 캘리포니아 텍사스 아칸사스 뉴저지 오하이오주등의 거의 모든 유전과 정제소를 소유했고 미국 에너지 비즈니스의 90% 이상을 통제한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물론 록펠러는 독점에 대해 나름대로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 때문이었을까? 그는 모든 불필요한 경쟁이 사라지고 하나의 가격으로 통일 되면 세상은 더욱 좋은 서비스를 받을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가 석유시장을 지배할 경우 석유시장은 아주 효율적으로 잘 돌아가는 기계처럼 만들수 있다고 확신했다. 1911년 반 독점법으로 스탠다드 오일이 여러 개 회사로 쪼개지면서 이런 꿈이 이뤄지지 않자 그는 대신 외국 회사들과 연대해 또하나의 카르텔을 만들었다. 세계 석유업체들이 가격을 담합한 것. 따라서 1911년부터 OPEC(석유수출국기구)가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던 1975년까지 세계 석유 가격을 하나로 단일화 할수 있었다. 당시엔 세계 석유회사들이 모두 서부 텍사스 원유값에 자신들의 가격을 고정시켰다. 석유는 세계 어디서 사던 거의 같은 값 이었다.
록펠러의 독점꿈은 석유산업에 만족하지 않았다. 철광산 삼림등을 지배하기위해 제조 운송업등 수십개의 회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1911년 대법원이 스탠다드 오일이 반독점 법에 어긋난다고 판결한 이후 그의 회사는 모두 38개로 쪼개어 졌을 정도이다.
록펠러는 1911년까지 스탠다드 사장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57세였던 1896년부터 중요한 일만 결정했을뿐 경영일선에서는 물러나 있었다. 이때부터 그가 치중한 일은 자선사업. 많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수십억달러에 달하는 그의 재산을 필요한 곳에 적절하게 기부하기 시작했다. 자서전에 나는 모든 사람들이 정직하게 돈을 버는 것과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남에게 주는 것이 종교적인 의무라고 생각한다라고 적었을 정도였다. 기부 문화를 중시하는 유태인의 종교관이 그대로 나타나는 대목이다. 자신이 소수인종으로 분류됐던 유태인인 만큼 록펠러는 흑인등 소수계와 종교단체 지원을 가장 중시했다.
그는 1890년과 1892년 시카고대학 설립에 6천만달러 이상 기부했고 록펠러 재단 일반교육재단 록펠러의학연구소등 셀수없을 정도의 사회복지 및 연구재단을 설립했다. 그가 기부한 금액만해도 모두 3억5천만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엑슨과 모빌이 합병하기 이전에 세계 석유업계는 7개의 주요 국제 석유회사들(International major oil company`들이 장악했다. 이들을 줄여서 메이저(major)라고 불렀고 7개 회사를 지칭해 `세븐 시스터스`라고도 얘기했다. 미국의 엑슨, 모빌, 걸프, 세브론, 텍사코등 5개사와 영국의 브리티시석유(BP)와 영국-네덜란드계열의 로열더치셀등 7개사였다. 대규모 자본을 앞세워 석유의 생산 ․유통 ․정제 ․판매 등을 통합한 일관조업(一貫操業) 회사로서 세계 석유산업을 지배해 온 이들 7대 메이저는 1965년 하루 1,692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 서방측 세계원유생산량의 68 %를 기록한 바 있으며, 한때 중동 석유생산의 99% 이상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은 물론 유럽의 메이저들도 모두 유태계 자본이라는 점. 로열더치셀은 유럽의 최대 갑부 유태인이었던 로스차일드가문의 소유이고 국영이었던 BP에도 실제 유태계 자본이 대거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 회사들이 앞으로도 합종연횡을 계속 하겠지만 결국 내용상으로 블랙 골드(Black Gold)라고 불리는 석유산업의 유태계 장악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실제 최근들어서도 기간산업중 기간산업인 에너지 산업에서의 유태계 인물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 역설적인 예이기도 하지만 지난해 회계부실 파동으로 미국 경제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며 파산한 엔론의 경우도 흥망성쇠의 주역은 바로 유태인이었다. 회사를 대표한 최고 경영층인 케네스 레이 회장, 제프 스킬링 사장은 유태인이 아니었지만 회사의 모든 자금을 줄을 통제하며 회사를 움직였던 CFO 앤드류 파스토우는 아주 독실한 유태인이었다.
엔론은 1990년대 초까지 평범한 천연개스 파이프라인 회사였지만 파스토우가 실리콘밸리의 첨단기술과 월스트리트의 금융기법을 회사 경영에 도입시키면서 규모가 급속히 커졌고 주가도 폭발적으로 올랐다. 파산 직전 엔론은 천연가스 전력 인터넷서비스는 물론 나무 펄프의 선물거래까지 하는 최첨단 에너지 중개 회사가 되어있었다.
파스토우가 개발한 각종 첨단 금융기법은 정부 당국의 규제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회계조작이 드러난 이후 증권당국이나 담당 회계사들은 그동안 왜 눈을 감고 있었냐는 지적에 일부러 봐준 것이 아니라 몇발자국 앞서서 움직이는 파스토우의 천재적인 아이디어들을 따라갈수 밖에 없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아무도 파스토우를 규제할 만한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일각에서는 제2의 록펠러가 아깝게 무너졌다는 동정론까지 나오기도 했다.
파스토우는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유태인 이었다. 그가 다니는 휴스톤의 시나고그에서는 지금도 아주 훌륭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을 정도이다. 그가 5천만달러 이상을 챙겨 외국으로 도망갔다는 소문이 나돌아 수사관이 그의 소재지를 파악했을 때 그는 시나고그에서 학생들에게 유대축일에 대한 교육을 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부인과 함께 자선재단을 세워 휴스톤 지역의 시나고그와 어린이클럽 현대미술관등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생활도 나름대로 검소했다. 그의 집은 휴스턴 근교에서 싯가 70만달러 수준이었다. 엔론의 내부 사정을 수사기관에 고발, 지난해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의 인물로 표지모델로 등장하기도 한 세론 왓킨스가 파스토우 집 근처에 1백만달러이상의 호화저택에서 살고 있었던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세계의 `먹거리`를 한 손안에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유태인 지도자들의 모임이 열렸다. 제 1차 시오니스트 회의. 회의가 비밀리에 열린 만큼 많은 사람들이 회의 내용에 대해 궁금해 했다.그러나 회의 내용은 상당기간 알려지지 않았다.
회의가 열린지 12년 후인 1907년. 러시아의 세르게이 닐즈라는 사람이 번역했다는 `시온 의정서(Zion Protocol)`라는 책이 발간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책이 바로 `바젤 회의`의 비밀 회의록이라고 믿었다. 의정서에는 유태인들이 장차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필요한 전략들이 상세히 들어 있었다. 핵심은 세계의 정보망과 연료와 식량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
책이 나오자 사람들은 `세계 지배 음모`를 꾸민 유태인들을 규탄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히틀러는 이를 유태인 박해의 명백한 구실로 삼아 엄청난 학살을 자행했다. 학살을 보다 못한 학자들이 나중에 이 책의 내용을 검증해 본 결과 이 책은 `바젤 회의록`이 아닌 유태인을 음해하기위해 꾸며낸 책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 6백만명의 유태인이 나치의 손에 학살된 뒤였다.
`시온의정서`는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놀라운 것은 `바젤회의`가 열린후 1백년도 되지 않아 그 책에 적혀 있었던 전략이 그대로 현실화 됐다는 점이다. 세계 석유업계의 메이저급 회사들이 대부분 유태인 자본에 의해 움직이고 있고 `정보=돈`인 금융시장 역시 유태인들 없이는 한시도 움직이기 어려운 실정이다. `시온의정서`에서 얘기한 3가지중 하나인 곡물 시장은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면 역시 유태인들의 손안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곡물시장은 미국의 카길(Cargill)과 컨티넨탈(Continental), 프랑스의 루이스 드레프스 (Louis Dreyfus), 아르헨티나의 번지&본(Bunge and Born), 스위스의 안드레 (Andre)등 5개 회사가 세계 곡물 교역량의 50%이상을 차지하며 이른바 5대 메이저라는 아성을 구축하고 있다. 세계 최대 곡물수출국인 미국의 경우 전체 무역 및 거래량의 85%를 이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자금력을 바탕으로 세계 각곳의 농산물 생산지나 시카고 선물거래소등에서 다량의 곡물을 매입, 정부와 기업에 판매하면서 막대한 이윤을 챙기고 있다. 소유 곡물의 수송 가공 하역 선적 배분 저장시설등 유통과정까지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들 곡물 메이저들의 특징은 창업주 가문들이 대를 이어 경영하는 철저한 혈족중심의 경영이라는 점. 유태인들이 창업하지 않은 기업의 경우 대부분 경영은 유태인들이 도맡아 하고 있다는 것도 특징이다. 유태인 없이는 곡물 회사들이 제대로 경영되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다.
메이저들이 세계 곡물시장에서 갖고 있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외부세계와는 거의 단절한채 같은 유태인들끼리 서로 협조하고 경쟁을 하면서 전세계를 뒤흔들어 놓고 있다. 자신들의 이윤 앞에서는 한 사회나 국가의 존립도 상관할바 아니라는 이윤 절대 지상주의가 특히 심하게 배어있는게 곡물 메이저들의 속성이기도 하다.
국제 곡물시장에서는 메이저들이 한 국가를 상대로 싸운 몇가지 유명한 얘기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컨티넨탈과 자이레의 밀가루 전쟁. 세계 2위의 곡물메이저인 컨티넨탈은 1973년 자이레에 현대식 밀가루 공장을 세웠다. 자이레 남부지역은 코퍼벨트(구리지대)라는 별명이 붙어있을 정도로 구리가 많이 나는 나라. 그러나 이 공장에서 사고가 나고 구리값이 떨어지자 자이레 정부는 컨티넨탈이 투자한 돈을 제대로 갚지 못했다.
컨티넨탈은 뭔가를 보여주기로 하고 76년 자이레에 대한 소맥 공급량을 줄이기로 했다.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빵집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고 곡물가게들은 매점매석에 열을 올리는등 심각한 식량난이 벌어졌다. 결국 자이레 정부가 무릎을 꿇었다. 밀린 미수금을 매달 갚고 소맥대금은 중앙은행에서 현금으로 지불하기로 했다. 향후 자이레가 수입하는 밀가루는 컨티넨탈이 독점한다는 요구사항까지 모두 받아들여야 했다.
현재의 컨티넨탈은 원래 사이몬 프리보그 (Simon Fribourg)라는 유태인이 1813년 벨기에 알론에 차린 곡물 무역회사가 모체. 1800년대 후반 증손자인 마이클 프리보그가 룩셈부르크 루마이나등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1914년을 전후해 런던 파리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무소를 내는등 대륙을 넘나드는 세계적인 거래망을 갖췄다. 그런 자신감으로 회사 이름도 컨티넨탈 컴패니로 바꾸고 1921년에는 시카고와 뉴욕에 사무소를 내며 미국까지 진출했다.
전세계에서 돈을 긁어 모은 프리보그 가문은 유럽의 최대 부자가문이었던 메디치의 왕가처럼 초 호화판으로 살았다. 하지만 유태인을 증오하는 나치가 1940년 프랑스를 침공하자 곧바로 미국으로 도망쳤고 미국에서 사업을 이어갔다. 프리보그 가문은 아직도 회사 지분의 90%이상을 장악하며 대을 이어 경영하고 있다.
세계 4위 곡물 메이저로 아르헨티나에 본부를 두고 있는 번지 & 본. 이 회사가 좌파성향이었던 메넴정권과의 수십년간 치른 싸움도 곡물메이저의 힘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1946년 페론이 처음 대통령이 됐을 때, 아르헨티나 정부는 카르텔을 형성하며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던 곡물회사들 배제하고 농민들로부터 직접 곡물을 직접 사서 수출을 하려고 했다. 1948년 이를 전담하는 무역촉진기구(IAPI)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페론에 의해 힘이 약화된 곡물 카르텔 회사들은 페론과의 투쟁에 들어갔다. 그를 물러나게 하는 것이 목표. 결국 55년 페론은 물러났고 IAPI는 사라졌다. 페론이 73년 다시 권좌에 올라 비슷한 목적의 국립 곡물 위원회를 만들자 곡물카르텔들은 또다시 격렬하게 반대했다. 74년 페론이 죽고 남편의 정책을 이은 부인 에비타가 대통령직에 올랐다. 하지만 에비타도 76년 물러났고 제일 먼저 국립곡물위원회가 폐쇄되었다. 그뒤 아르헨티나의 곡물과 육류 수출이 다시 민간 기업들의 통제권으로 돌아갔다. 메론시대가 끝나고 들어선 메넴정권의 특징은 친(親) 곡물카르텔. 이 정권의 첫번재와 두번째 경제장관은 모두 번지&번의 경영자출신이었다.
아르헨티나는 물론 남미의 거대 곡물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번지&본은 1750년 암스테르담에서 유태계 번지가문이 창업한게 모체. 19세기 중반 벨기에 앙트와프로 이전하면서 큰아들 챨스는 여기에 남고 동생 어니스트는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 함께 이주한 매제 조지 본과 함께 번지&본을 세웠고 1927년에는 독일계 유태인인 거대 곡물거래상 알프레드 허쉬(Alfred Hirsch)에게 경영을 맡겼다. 허쉬는 이후 30년간 회사를 경영하면서 세계적인 곡물 메이저로 키웠다.
곡물메이저들이 어떻게 유태인 인맥을 구축했는지는 세계 최대 메이저인 카길을 보면 분명해진다. 카길은 미국에서만 1만2천개의 창고와 1백대의 열차를 갖고 미국은 물론 전세계 곡물 시장의 25%를 장악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 곡물회사. 60여개국에 사무소를 운용하고 있으며 곡물저장능력은 우리나라 쌀 생산량보다 많은 7백만톤에 이른다. 1기를 건설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1억달러가 넘는 곡물 운송용 엘리베이터를 40기 이상 갖고 있다.
카길은 원래 유태계 회사가 아니었다. 창업주인 윌리엄 카길은 미국 남북전쟁직후 이민온 스코틀랜드출신의 전형적인 영국계. 미국 사회의 주류인맥으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1870년대 동생 샘과 함께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한 그는 영국 왕실의 대리인 역할을 하던 제임스 힐이란 인물과 동업을 하면서 영국 왕실을 배경으로 사업을 빠르게 성장시킬수 있었다.
하지만 회사는 20세기들어 거의 파산 직전에 이른 적이 두번 있었다. 첫번째는 창업주의 아들인 윌리엄 카길 2세가 1910년경 몬태나에 투자를 잘못했을 때였다. 당시엔 사돈 집안인 역시 영국계인 맥밀란 가문(MacMillan Family) 이 지원해 주었다. 이때부터 맥밀란 가문은 카길가문과 공동으로 회사를 경영했다.
두번째 어려움에 처했을때는 1929년 주가폭락을 시발점으로 대공황에 빠졌을 때. 이때는 거의 살아나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때 두명의 구세주가 나타났다. 한명은 유태인인 존 록펠러. 석유왕으로 불리면 엄청난 자산을 갖고 있던 록펠러는 자신이 소유하는 체이스 내셔날 은행을 통해 적극적으로 자금을 지원했다.
다른 한명은 러시아계 유태인 곡물 상인인 줄리우스 헨델(Julius Hendel). 그가 1920년대 후반 회사 경영에 참여하자 회사 안팎에선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미국 사회의 주류 세력인 영국계 미국인 회사의 핵심 요직에 처음으로 유태인이 들어간 탓이다. 하지만 당시 전세계 곡물업계는 유태인들의 손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다. 유태인들이 핵심에 있지 않으면 회사 경영을 제대로 할수 없는게 현실이었다. 카길 가문은 이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그것이 바로 헨델을 중시한 이유이다.
헨델은 곡물의 정상적인 거래가 아닌 투기와 헤지를 동원해서 회사를 세계 최고의 회사로 키워냈다. 예를들어 1930년대 중반 흉작으로 미국의 옥수수 생산량이 크게 부족할때였다. 그는 오히려 옥수수를 팔지않고 사들이는데만 집중했다. 보다못한 시카고상품거래소(CBOT)에서 옥수수를 팔라고 명령했지만 거절했다. CBOT는 카길을 거래소 회원사에서 추방했고 농무부는 카길을 미국 옥수수시장을 파괴한 혐의로 사법당국에 고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헨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헨델은 후에 마약 돈세탁에 관련된 금융기관들과의 은밀한 거래로 적지않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인정머리 없고, 편법적인 거래는 계속이어졌다.
헨델의 이같은 독특한 경영기법은 유태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곡물업계에선 `정통 경영 이론`이었다. 2차대전 직후인 1946년부터 52년까지 헨델 밑에서 일을 배웠던 드웨인 안드레아(Dwayne Andreas)는 나중에 역시 곡물 식품회사인 아커 다니엘 미들랜드의 회장이 되어 회사를 카길에 버금가는 거대 곡물회사로 키우기도 했다.
유럽에 있는 곡물메이저로는 프랑스의 루이스 드레프스(Louis Dreyfus), 스위스의 안드레아(Andre)가 있는데 모두 직간접으로 유태계와 연결을 맺고 있다.
시온의정서에 나온 대로 유태인들은 이제 정보 석유와 함께 식량도 장악하고 있다. 최근들어 점점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아랍인들이 석유는 많이 있으나 식량은 하나도 쥐지 못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사우디 이집트 이라크등 2억 인구를 갖고 있는 아랍권의 식량자급율은 1%에도 미치지 못한 실정. 많은 중동 전문가들이 이스라엘과 아랍의 향후 역학관계를 식량 패권주의에서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도 믿을 건 `부동산`
중세와 근대시절 유태인들에게 부동산은 계륵과 같은 존재였다. 버리기는 아깝지만 갖고 있어봐야 큰 의미가 없었던 탓이다. 종교적 사회적으로 핍박을 받는 상황에서 언제 있는 재산을 모두 몰수당하고 쫓겨 갈지 모르는 판에 환금성이 더딘 부동산을 보유하기는 힘들었다. 당장 돈으로 바꿀수 있거나 몸에 지니고 다닐수 있는 작은 동산(動産), 특히 다이아몬드등 보석 같은 작고 값비싼 귀중품이 유태인들 사이에서 선호되었던 이유이다.
그렇다고 유태인들이 원래 부동산을 멀리 했던 것은 아니다. 유태인들의 지혜서인 탈무드에는 사람은 항상 자신이 가진 재산을 세가지 형태로 유지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현금등 유동자산, 귀중품인 동산, 그리고 부동산이다. 투자위험을 분산시키는 안전한 포트폴리오 투자기법을 옛날부터 깨우치고 있었던 민족인 셈이다. 오랫동안 박해받는 처지에서 어느 한 곳에서도 안전하게 뿌리 내리고 살기 어렵다는 생존 현실이 삶을 뿌리내리게 하는 부동산을 어쩔수 없이 기피하게 만들었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유태인의 천적 나치의 붕괴를 가져온 2차대전이 끝나 이스라엘이 독립하고 미국이 이스라엘에 이어 유태인들이 정착할수 있는 제2의 가나안땅으로 여겨지면서 부동산은 다시 영리한 유태인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미국으로 이민 온 유태인들은 다른 이민자들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무일푼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거의 한 세기 만에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민족으로 자리잡았을 정도로 경제적인 부와 사회적으로 안정된 위치를 일궈냈다. 이들의 급속한 재산 축적 뒤에 부동산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실제 유태인 거부들의 절반 이상이 재산을 부동산이나 건설업을 통해 번 것으로 알려졌다. 컴퓨터 인터넷을 축으로 하는 90년대 신경제 바람이 불기 전인 1980년대 까지 포브스지가 발표하는 부자들의 재산순위에서 들어있는 유태인 자산가 상위 15명 중에 절반 가량인 6-8명은 늘 부동산 사업가들이었다. 하얏트호텔등 1백개 이상의 호텔을 소유하고 있는 로버트 프리츠커, 주택건설회사 카프만&브로드의 오너인 엘리 브로드, 캘리포니아 부동산재벌인 도날드 브렌등이 언제나 상위랭킹에 포진되어 있었다. 에드워드 샤피로라는 작가는 미국 사회의 유태인을 부동산 귀족들(real estate barons)이라고 불렀을 정도이다.
그러다보니 이제 미국 부동산 시장은 유태인 파워를 무시하고는 움직이지 못하는 유태인의 텃밭이 되어 버렸다. 미국에서 상업용이나 주거용 부동산이 가장 많은 뉴욕 메트로 지역의 경우 1만여명에 달하는 부동산 개발업자중 유태인의 비율은 40% 정도에 달한다. 더욱 놀랄만한 것은 맨해튼등 뉴욕 지역의 값비싼 대형 빌딩의 소유자중에서 유태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무려 80%에 달한다는 비공식 통계까지 있을 정도이다. 미국 최대 상업용 부동산 회사인 CB리차드 엘리스의 코리아데스크인 오종섭 이사도 정확히 몇 %인지는 알수 없지만 맨해튼의 좋은 건물들은 소유주가 거의 유태인으로 보면 틀림없다고 말한다.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뉴욕 맨해튼에서 유태인들은 금융중심지인 월가(유동자산)와 다이아몬드시장(동산)은 물론 부동산 시장도 확실하게 장악하는등 탈무드가 권고한 재산 구성 포트폴리오를 범 유태인 사회 차원에서도 훌륭하게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세계에서 가장 건물이 빽빽히 들어선 지역인 뉴욕에서 가장 잘 알려진 부동산 업자는 지난 4월 사망(1918년생)한 사무엘 르프레이크(Samuel LeFrak). 4대에 걸친 가족 기업을 이끌었던 그의 성장사는 가족경영 형태로 이어지고 있는 유태인 부동산 개발업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수백억달러의 개인재산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르프레이크가의 성공비결은 끈끈한 가족애를 바탕으로한 창의력으로 요약된다.
르프레이크 가문의 창의력을 상징해 주는 것은 6층짜리 서민용 아파트. 뉴욕시의 퀸스나 브루클린에 거주하는 서민들이 저렴한 임대료를 내고 살수 있도록 대량으로 지어진 6층짜리 아파트형 빌딩이다. 지금도 이 지역에서 흔히 볼수 있는 이들 붉은색 계통 외벽의 아파트 건물은 르프레이크 가문에서 지금도 뉴욕시에 5만7천가구, 뉴욕 외의 지역에서 3만가구등 모두 8만7천가구를 소유하고 있다. 이정도 가구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신도시인 일산의 아파트 가구수와 맞먹는 수준이다. 소매시설과 체육시설을 갖춘 대규모 아파트군을 개발하면서 엄청난 부를 모은 르프레이크 가문은 부동산 개발 건설은 물론 엔지니어링 설계 디자인등 관련 업종을 수직계열화한 효율성으로 무장하면서 대형 상업건물에서도 손을 대 막대한 성공을 거두었다.
르프레이크는 유태인 특유의 가족경영을 유지하는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8살이던 1905년 사업을 시작한 아버지가 자신을 데리고 다니며 이것 저것 설명해주는 것에서부터 사업을 배운 사무엘은 최근 사망할 때까지 매일 점심 식사를 아들 및 두 손자와 함께 했다. 정주영 회장이 매일 아침 아들들과 식사를 함께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르프레이크 가문은 식사를 함께 하며 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또 서로 체크하는 기회로 삼았다. 사무엘은 후손들에게 가족경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가지를 꼭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나는 정직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들에게 대접받기 원하는 것처럼 남들을 대접하라는 것이었다.
`축적된 부의 사회환원이라는 유태 기업인의 대원칙에서 르프레이크도 예외는 아니었다.메릴랜드 대학의 극장 체육관, 주변 시나고그의 교육관, 퀸스대학의 컨서트 홀, 구겐하임뮤지엄의 조각 및 아트 갤러리등이 다 그의 돈으로 세워진 건물들이다. 어린 시절 그가 소유하고 있는 아파트에서 살았던 유태인 가수 겸 여배우인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도 무명시절부터 르프레이크의 도움을 받은 인연을 갖고 있다.
특유의 유태인 창의력을 부동산 시장에 접목시킨 또하나의 유태인 부동산 재벌로는 윌리엄 레빗이 있다. 그는 대도시 인근에 주택지역을 만들어 근교(Suburbia)라는 단어를 만들어 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1947년과 1951년 사이에 뉴욕주 롱아일랜드와 펜실베니아에 수만가구에 달하는 타운하우스 형태의 똑 같이 생긴 집을 만들어 레빗 타운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는 이러한 대단지를 개발하면서 주택의 대량 생산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만들었다. 예를들어 자동차 조립공장의 경우 사람들이 가만히 있고 자동차 생산라인이 단계적으로 옮겨지는 생산품이 조립된다. 그러나 주택의 경우 생산품은 가만히 있고 사람들이 옮겨가면서 똑 같은 제품을 만드는 방식이다. 그는 단순 작업은 지루한 일이지만 공장안에서 고정된 상태에서 일하는 것보다 야외에서 움직이며 일하는 단순작업이 훨씬 지루함을 줄여준다며 건설 산업 노동을 찬양하기도 했다.
2001년 비행기 자폭 테러 두달전인 2001년 7월 월드트레이드센터(WTC)의 운영권을 99년간 320억달러에 인수했던 래리 실버스타인, 뉴욕과 뉴저지주에 340억달러의 자산 규모의 부동산을 갖고 있는 맥-칼리, 한때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공동 소유하기도 했던 벤 토빈, 맨해튼의 크라이슬러 빌딩과 유럽에서 두번째로 높은 빌딩인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메서투름 빌딩을 소유하는등 아직까지 세계 최대 부동산 개발업자로 통하는 제리 스파이어등 뉴욕의 유명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대부분 유태인들이다.
수도인 워싱턴DC에서도 대부분의 건물들을 유태인들이 소유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챨스 스미스. 워싱턴 최대 부동산 재벌이란 소리를 듣는 그의 회사는 54개의 건물과 2만가구의 아파트를 관리하고 있다. 재산이 30-50억달러에 달할 정도.
다른 지역에서도 유태인 파워는 막강하다. 세계 최대의 쇼핑 몰인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의 아메리칸 몰을 소유하고 있는 미국 최대 몰 소유자 멜빌 사이몬,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 임대용 부동산의 25%를 갖고 있는 월터 쇼렌스타인, 시애틀 최대 부동산 업자 마틴 셀리그롤, 전국 최대 부동산 소유자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시카고의 샘 젤과 닐 블룸, 미시간 출신으로 중부지역의 거물인 스코트 셀리그맨등이 각 지역 부동산 업계의 대표선수들이다. 심지어 주민 대부분이 보수적인 몰몬교도들인 유타주에서도 존 프라이스라는 유태인이 12개의 쇼핑몰을 소유하고 있는등 부동산 시장을 장악하고 있을 정도이다.
미국과 비슷한 문화권인 인접 캐나다에서도 부동산은 대부분 유태인 차지이다. 국제 부동산 왕국이라 불리우는 라이크만 가문이 대표적이다. 부동산 거품이 꺼지기 전인 1980년대까지 세계 최대 부자 가문으로 꼽힌 라이크만 가문은 올림피아&요크 개발이란 회사를 통해 맨해튼의 세계금융센터를 건설하는등 서구 역사상 최대 부동산 개발회사로 꼽힐 정도이다. 매년 6천만달러라는 거금을 정통 유태교단에 헌납할 정도로 막강한 현금동원력을 갖고 있다. 90년대초 부동산 거품붕괴로 파산위기에 몰렸으나 역시 유태인인 조지 소로스와 합작으로 퀀탐 부동산 투자펀드를 설립하여 멕시코에 대대적으로 투자하는등 부활을 꿈꾸고 있다.
몬트리올의 시그램 브론프만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시그램스는 세계 최대 주류 재벌로만 유명한게 아니라 캐나다의 최대 땅 소유자로 유명하기도 하다. 브론프만 가문도 창업주인 에드가 1세가 오랫동안 세계 유태인 회의 의장을 맡아온 정통 유태교인들이다.
`구겐하임뮤지엄`으로 꽃핀 광산재벌
문화를 사랑하는 뉴요커들에게 구겐하임 뮤지엄은 분명 뉴욕의 최대 자랑거리중 하나이다. 맨해튼 88가 센트럴파크 옆에 자리 잡은 구겐하임은 건물 외양 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맨해튼의 거의 모든 건물이 기본적으로 직사각형 형태의 성냥갑 구조를 갖고 있는데 비해 구겐하임은 거대한 달팽이 모양의 나선형이다. 전통과 형식을 거부한 겉 모습에 걸맞게 구게하임은 현대 미술, 특히 추상미술분야의 세계 최고 걸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으로 유명하다. 지난 2000년 봄엔 구겐하임 역사상 아주 이례적으로 살아있는 작가인 비디오 아티스트인 백남준에게 건물 전체를 활용한 대규모 회고전을 열어주기도 했다. 지난 52년 설립된 구겐하임 뮤지엄은 미국 서부의 라스베가스는 물론 스페인의 빌바오, 오스트리아 비엔나, 독일 베를린등지에도 대형 미술관을 두고 있어 세계인들의 문화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이 세계 최고 현대미술관에 붙어있는 구겐하임(Guggenheim)은 누구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스위스에서 미국으로 이민와서 성공한 한 유태인 가문의 성(性)이다. 무일푼에서 시작해 몇대에 걸쳐 큰 재산을 모으고 또 이를 문화재산으로 사회에 환원하는 구겐하임 가문의 역사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성공한 유태인 가문의 모습을 잘 그려주고 있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문이 됐지만 1848년 마이어 구겐하임이 맨손으로 신천지인 미국땅으로 이민왔을 때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엄청난 사회적 차별을 받아야 했다. 필라델피아에 처음 정착한 마이어는 이런 차별을 극복하기위해서라도 이를 악물고 돈벌이에 나섰다.
마이어는 유럽에서 섬유레이스를 수입해 팔아 마련한 돈으로 콜로라도의 은광에 투자했다. 사업이 확장되면서 채굴과 제련을 전문으로 하는 미국 제련 회사(Ameican Smelting and Refining Companay=ASARCO)를 정식으로 설립했다. 콜로라도주의 구리와 질산염에 머물던 사업도 점차 멕시코 알라스카 칠레등 전세계 다른 광산으로 확대되었고, 막대한 부를 모을수 있었다. 지금도 구겐하임가문에 광산 재벌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이유이다.
마이어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중 다니엘 머리 이삭 솔로몬 시몬 5형제는 아버지 사업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막내인 윌리엄과 바로 위인 벤자민은 어려서 아버지 사업을 직접 돕지 못했다.아버지와 함께한 노력으로 막대한 부를 일군 형제들은 나름대로 모두 의미있는 일들에 돈을 썼다. 1905년부터 아버지를 대신해 가업을 이어받은 맏형 다니엘은 항공기와 로케트추진의 열렬한 애호가였다. 전국의 많은 대학들이 항공연구소를 설립해 운영할수 있는 기금을 만들어 주었는데 아직도 그런 재단활동이 계속되고 있다. 둘째인 머리는 뉴욕 빈민들의 치과치료를 위한 재단을 만들었고, 다섯째인 시몬은 1907년 연방상원의원(콜로라도주)에 당선되어 정치적인 봉사 활동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구겐하임이란 이름을 세상에 가장 널리 알린 형제는 바로 구겐하임 뮤지엄을 세운 넷째 솔로몬. 예술작품 수집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다양한 미술관에 자금을 지원했고 52년에는 직접 자신의 이름을 딴 솔로몬 R. 구겐하임 뮤지엄을 만들었다.
구겐하임 뮤지엄을 얘기할 때 빼놓을수 없는 인물은 마이어의 여섯번째 아들 벤자민의 딸로 솔로몬의 조카인 페기 구겐하임. 비교적 어린나이인 13살때 아버지를 잃고난 후 유럽과 미국을 오가면 예술가를 후원하고 예술품을 모은 그녀는 타임지로부터 미국 예술가들의 경제적인 천사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지금 구겐하임에 소장되어 있는 많은 작품들이 그녀가 컬렉션한 것들로 오늘날 구겐하임 뮤지엄의 명성은 그녀의 안목있는 컬렉션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는 얘기를 듣고 있을 정도이다.
구겐하임은 타이타닉호의 비극을 안고 있는 가문으로도 유명하다. 페기의 아버지인 벤자민이 1912년 1500명의 희생자를 낸 타이타닉호 침몰이란 대참사로 목숨을 잃었던 것. 하지만 그의 최후 모습은 지금도 살아남은 모든 이에게 감동과 교훈을 주고 있어 구겐하임이란 이름에 품격을 더해주고 있다.
침몰 당시 아비귀환이었던 배안에서 벤자민은 여자와 어린이 우선이라는 구명 보트의 승선원칙을 지켰고 자신에게 순서가 돌아오지 않자 아예 구명 조끼까지 양보한다. 그리고 함께 있었던 시종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신사답게 가라앉겠다고 말한다. 만찬용 정장으로 갈아입은 그는 브랜디 한잔을 들고 최후를 맞았다. 배가 침몰하는 마지막 순간 그가 시종에게 한 유언은 아내와 자식들에게 내가 나의 의무에 최선을 다했다고 전해달라였다. 제임스 카메론이 감독한 타이타닉이란 영화에서 그린 모습이지만 실제 상황을 충실하게 재연했다는 평을 듣는다.
구겐하임 가문의 이야기가 길게 이어졌지만 이 칼럼에서 다루려는 것은 미국의 광산 산업 역시 주류는 유태인들이라는 것이다. 미국에서 50위권 안에 드는 알부자인 아이라 렌너트(Ira Rennert)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광산업으로 큰 돈을 번 인물이다. 열렬한 시오니스트로 알려진 그는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는 구겐하임과는 달리 그의 회사(렌코 코퍼레이션)가 미국환경청으로부터 미국에서 가장 유해독소를 많이 방출하는 회사로 선정되는등 좋지않은 평판을 듣고 있다.
그는 최근 맨해튼 인근 롱아일랜드에 방 30개 화장실 39개, 200대이상의 차량을 주차할수 있는 주차장등을 갖춘 저택을 지었다. 백악관보다 크고 미국에서 가장 호화스런 집은 대번 언론의 도마위에 올랐지만 사람들은 도대체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의 재산이 정확하게 얼마인지를 잘 모른다. 철 납 석탄광산은 물론 험비라는 군용차와 비슷한 모양의 험머라는 일반차량제조회사를 갖고 있지만 모두 개인회사이고 회사 회계사항은 거의 비밀에 붙여지고 있다.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고 해서 언론은 그를 미스터 노바디(Mr. Nobody)란 별명으로 부른다.
유태인중에는 이처럼 일반 사회와는 거의 격리된 채로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미국 사회와는 거의 담을 쌓고 오로지 이스라엘과의 관계구축에만 온 정성을 쏟는다는 점. 돈을 벌어도 유태종교단체나 이스라엘을 위하는 일에만 쓸 뿐이다. 일각에서는 이 같은 현상을 그동안 집단적인 차별을 받아왔던 유태인들의 역차별적인 분노표출로 해석하기도 한다.
아프리카에서 미국 동부 애팔라치아 산맥에 걸쳐 국제적인 광산 신디케이트를 구축, 막대한 부를 모았고 후에 애팔래치아 산맥 북쪽에 있는 아드론덱지역 전체를 개인 돈으로 공원화했던 해롤드 호크쉴드(Harold Hochschild)도 역시 빼놓을수 없는 유태인 광산 재벌이다. 유럽으로 눈을 돌리면 전 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을 나홀로 지배하고 있는 세계 광산산업의 대명사 격인 드비어스(De Beers)의 오펜하이머(Oppenheimer) 가문 역시 유명한 유태가문으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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