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웅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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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 갑사 www.gapsa.org
안내 및 문의 : * 국립공원관리공단 계룡산 관리사무소 갑사분소(041-857-5178)
* 갑사 (041-857-8981)
개 요 : 노송과 느티나무 숲이 우거진 계룡산의 서북쪽 기슭에 위치한 절이다. 공주에서 19km 떨
어져 있고, 동학사에서 도보로 3시간 정도면 갈수 있는 거리에 있다.춘마곡, 추갑사라는
말이 암시해주듯이 갑사의 가을 단풍은 더없이 아름답다. 삼국시대 초기 백제 구이신왕
원년(420)에 고구려에서 온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 갑사는 계룡갑사,갑사,갑사,갑사사,
계룡사 등으로 불리워 왔으며, 통일신라 화엄종 십대사찰의 하나였던 명찰이다.
대웅전 도지정유형문화재 제105호
이 건물은 갑사의 본전으로, 정유재란때 소실되었던 것을 선조 37년(1604)에 중건하였고,
고종 12년(1875년)에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위치는 원래 현재의 대적전 부근에
있었으나, 다시 세울때에 현재위치로 옮겨 지은 것으로 보인다. |
| | 갑사 삼성각 | |
갑사는 '하늘과 땅과 사람 가운데서 가장 으뜸간다'고 해서 갑등의 이름으로 갑사가 되
었다고 전한다.이름대로 하면 첫째가는 절인 것이다.조선 세종 6년(1423)에 일어난 사원
통폐합에서도 제외될 만큼 일찍이 이름이 났던 절이었으며, 세조 때에는 오히려 왕실의
비호를 받아 '월인석보'를 판각하기도 하였다.1597년 정유재란시 전소되었으며,선조37년
(1604)대웅전과 진해당 중건을 시작으로 재건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절 주위에는 용문폭포, 수정봉, 천진보탑, 군자대 등 수려한 경승이 줄지어 있으며 특히
남쪽 계곡은 이른바 9곡을 이루어 절경을 이룬다.
갑사 강당 도지정유형문화재 제95호
승려들이 법문을 강론하던 건물로 계룡갑사라는 현판이 붙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가구에
기교를 부리지 않은 웅장한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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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갑사부도 | |
갑사 공우탑
이 탑은 대웅전에서 대적전에 이르는 개울 건너 계곡변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데 본래 갑사
의 부속 암자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긴 것이라 전하고 있다. 탑은 3층으로 이루어진 탑신
과 기단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탑신의 1층에는 탑의 건립내용이, 2,3층에는 탑명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탑의 건립은 옥신에 새겨진 명문으로 보아 갑사 중창시에 큰 공을 소로 인해
이루어 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명문내용은 다음과 같다.
'쓰러진 탑을 일으켜 세우니 인도(人道)에 우연히 합치되었네.
세 번을 수고하고 수고했으니 그 공이 으뜸이라.'
갑사 부도 보물 257호
이 부도(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봉안한 묘탑)는 원래 갑사 뒷산에 있던것을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며,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양식일뿐 아니라 조각솜씨도 뛰어나 신라 말기와
고려초기의 부도양식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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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갑사 범종루 | |
갑사 동종 보물 제 478호
이 종은 갑사 해탈문을 지나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새로 지은 사모지붕의 종각안에 있
다. 몸체에는 명문이 있어 조선 선조 17년(1584)에 만들었음과 갑사의 절이름도 당시는 갑
사사였음을 알 수 있다. 종의 크기는 총 높이가 127cm, 입지름이 91.5cm 이다. 종의 크기
는 총 높이가 일제시대 헌납이란 명목으로 공출해 갔다가 해방후 되찾아 온 민족과 수난을
같이한 범종이다. 1584년(조선선조 17년)에 만든 종이며,신라 이래의 전통적인 범종 양식
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소리가 울려 나가는 용통이 없는 등 조선시대의 특징도 아
울러 가지고 있다. 용뉴(종을 매는 고리)에 새겨진 사실적인 용의 모습, 어깨부분에 붙
여 놓은 9개의 윤곽(젖꼭지 모양의 장식), 연꽃 형상의 당좌(종을 쳐 울리는 부분) 등은 신
라 이래 한국 범종의 전통적인 요소이다. 당좌 사이에는 비처낭 대신 지장보살이 조각되어
있다. 종의몸체에 만든 시기를 표시한 명문이 있어,우리나라 종의 변천을 이해하는데 중요
한 자료가 되며, '갑사사'라는 표기가 있어 절의 이름이 지금과 달랐던 것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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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갑사일주문 | |
갑사 철당간 및 지주 보물 제 256호
갑사 철당간·지주는 당을 다는 철깃대와 기둥이다. 당간은 절 앞에 세우는 깃대인데 부처나
보살의 위신과 공덕을 표시하고 사악한 것을 내쫓는 기능을 가진 당이라는 깃발을 달기 위한
깃대이며, 당간지주는 당간을 좌우에서 지탱하기 위한 버팀 기둥을 말한다.
갑사 철당간은 지름 50센티미터의 철통 24개를 이어 놓은 것으로 당간의 높이는 약 15미터
이다. 그러나 1893년에 4개의 철통이 부러져 처음보다 낮아졌다.이 철당간·지주가 만들어
진 시기는 갑사가 신라 의상대사가 일으킨 화엄종 10대 사찰 중 하나였다는 점과 받침돌 측면
에 새겨진 안상조각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시대로 추정된다. 갑사의 철당간 지주는 온전한 모
습으로 남아 있어 당간 형태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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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문화재
갑사철당간 및 지주(보물 256호) 갑사부도(보물 257호)
갑사삼신괘불탱(국보 298호) 갑사동종(보물 478호)
선조2년간 월인석보판본(보물 582호) 갑사석조약사여래입상(충남 유형문화재 50호)
갑사석조보살입상(충남유형문화재 51호) 갑사사적비(충남유형문화재 52호)
갑사강당(충남유형문화재 95호) 갑사대웅전(충남유형문화재 105호)
갑사대적전(충남유형문화재 106호) 갑사표충원(지방문화재 52호)
갑사삼성각(지방문화재 53호) 갑사팔상전(지방문화재 53호)
갑사천진보탑(지방문화재 68호) 갑사 천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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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 가는길 | |
등산코스 : * 갑사 - 용문폭포 - 금잔디고개 - 남매탑 - 동학사 (4.7km / 3시간 소요)
* 갑사 - 연천봉고개 - 관음봉고개 - 은선폭포 - 동학사 (5.5㎞ / 3시간30분 소요)
* 갑사 - 삼불봉 - 관음봉 - 은선폭포 - 동학사 (7.1km / 4시간 소요)
도로안내 : * 천안논산고속도로 남공주IC - 32번국도 - 박정자삼거리 - 정벽교 - 갑사
* 호남고속도로 유성I.C. - 공주방면 32번국도 - 박정자 삼거리 - 정벽교 - 갑사
* 공주시- 공주대교 - 1.5km - 우측 23번국도 - 논산방면 10.8km - 계룡초등학교 - 왼편
길 - 오른쪽으로 계룡저수지를 끼고 - 중장교 - 우측에 갑사가는길
현지교통 : * 공주에서 갑사까지 시내버스 30분 간격 운행, 30분 소요
* 유성에서 갑사까지 2번 버스 7회 운행, 50분 소요(시민교통041-854-3163)
* 공주에서 갑사까지 택시로 20분 소요 |
정보제공 : * 국립공원관리공단 계룡산관리사무소
(전화 041-825-3002~3, 팩스 041-825-5755)
* 갑사 황금옥 님(041-857-8981)
공주 공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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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공주시 산성동에 있는 백제시대의 산성.
충남 사적 제12호.
둘레 2,200m. 웅진성(熊津城)·쌍수산성(雙樹山城)으로 불리기도 했다.
금강에 접한 표고 110m의 구릉 위에 석축과 토축으로 계곡을 둘러 쌓은 포곡형(包谷型) 산성이다.
475년 백제 문주왕이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하여 538년(성왕 16) 사비(泗沘:지금의 부여)로
옮길 때까지 64년 동안 백제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인 공주를 보호하기 위해 축조되었다.
축성시기는 국력이 안정된 동성왕 때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백제시대에 축조된 이래 여러 차례의 개축을 거쳐서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성의 구조는 석축 약 1,810m, 토축 약 390m이다.
석축산성은 안팎으로 돌을 쌓는 협축방식(夾築方式)을 이용했으며, 내탁외축(內托外築)을 한 부분도 있다.
상단의 너비는 약 70cm 정도이고, 안쪽에는 백회를 발라서 성벽의 석재가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
토축산성은 돌을 혼합하여 쌓았는데 대개 높이 1m, 바닥너비 8.5m, 윗면너비 3m 정도이다.
성내에는 깊이 2m 정도의 호(壕)가 형성되어 있다. 서쪽 성벽은 토축된 위에 돌을 쌓아 축조했다.
성에는 진남루(鎭南樓:南門)·공북루(拱北樓:北門)와 암문(暗門)·치성(雉城)·고대(高臺)·장대(將臺)·
수구문(水口門) 등의 방어시설이 있으며, 동문과 서문의 터가 남아 있다.
성내에는 영은사(靈隱寺)·광복루(光復樓)·쌍수정(雙樹亭)·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
쌍수산정주필사적비(雙樹山亭駐驆事蹟碑)와 주초석·창고터·연못터 등이 남아 있고,
만하루지(挽河樓址)·임류각지(臨流閣址)·장대지 등이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동쪽과 서쪽에는 보조산성이 있어 공산성을 보호하고 있다.
공산성은 백제멸망 뒤 백제부흥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던 곳이며,
1623년 이괄의 난 때 인조가 이곳으로 피난했던 일화도 있다. |
첫댓글 달호야 갔다와서 여기 다시 보니께 더 느낌이 나고 좋으넹~~
올리느라 욕 마이 봣데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