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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제26차【밤티재 -비재(속리산)】구간
○ 산행일시 : 2006. 8. 20 (날씨 : 비)
○ 산행거리 : 실측거리 20.27 km (알바 접속거리 1.2x2)
○ 참여인원 : 18명
○ 산행시간 : 10:00시간【알바산행1:39⇒(갈령삼거리→갈령→주유소)2회】
순천 : 21:30→ 밤티재2:11 →문장대4:57 →신선대5:55 →천황봉7:02 →피앗재9:09 → 형재봉10:03 →갈령삼거리10:23 → (갈령10:55) → 비재11:30 →(갈령삼거리13:19)→ (갈령 13:50)
○ 산행 전 자료수집
이번 구간 동쪽은 경북 상주시 화북면 서쪽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으로 대간길이 충북과 경북을 가르고 속리산국립공원지역을 통과 하게 되며 속리산의 최고봉인 천황봉에서 한남금북정맥이 갈려나간다. 밤티재~문장대 구간은 입산금지구간이다.
“속리산”(1057m)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광명산(光明山), 미지산(彌智山), 소금강산(小金剛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화강암의 기봉(奇峰)과 산 전체를 뒤덮은 울창한 산림은 천년고찰 법주사와 잘 조화되어 승경(勝景)을 이루고 있다. 최고봉인 천황봉(天皇峰)을 중심으로 비로봉(毘盧峰), 길상봉(吉祥峰), 문수봉(文殊峰)등 8봉과 문장대(文藏臺), 입석대(立石臺), 신선대(神仙臺) 등 8대 그리고 8석문이 있다. 은폭동(隱瀑洞)계곡, 용유동계곡, 쌍룡폭포, 오송폭포(五松瀑布), 용화온천이 있으며 정이품송(正二品松, 천연기념물 제103호), 망개나무(천연기념물 제 207호) 등 672종의 식물과 까막딱다구리(천연기념물 제 242호), 하늘다람쥐(천연기념물 제 328호)등 희귀동물이 서식하고 있어 자연자원의 보고이기도 하다.
“문장대”(1,054m)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속리산에 위치한 석대이다. 원래 거대한 암봉이 구름 속에 묻혀있다 하여 운장대(雲臧臺)라 하였으나 조선시대 세조가 복천에서 목욕하고 이곳 석천의 감로수를 마시면서 치명할 때 문무시종과 더불어 날마다 대상에서 시를 읊었다하여 문장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문장대를 세 번 다녀와야 극락정토에 갈수 있다는 전설이 생길만큼 신비로운 이곳은 속리산 최고봉인 천황봉과 관음봉, 칠성봉, 시루봉, 투구봉, 문수봉, 비로봉등 높고 낮은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올 만큼 경치가 빼어나다.
“견휜산성” (경북 지정기념물 제53호)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산42번지에 자리 잡고 있는 신라시대 때 축성한 퇴뫼식 석성으로 화북면 용유리에서 속리산 국립공원 문장대 입구 오른쪽 산봉우리의 8~9부 능선에 큰 띠를 두르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쌓은 석성으로 둘레는 724m, 높이는 지형에 따라 2~12m로 쌓여 있고 성안에는 1개의 우물과 2개의 저수시설 흔적이 있고 건물이 있었던 터가 3곳이 남아 있다. 견휜은 상주 가은현(현 문경시)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신라의 비장으로 있다가 진덕여왕 6년(892년) 반기를 들고 효공왕 4년(900년) 완산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한 인물로 황간 윤씨의 시조이며 원래의 본성은 ‘이씨’ 였다고 한다.
“입석대”(1004,9m)는 큰 바위가 웅장하게 서 있으며 그 앞에는 입석대를 알리는 안내판과 그에 관한 전설을 기록하여 놓았다. 그 기록을 보면 임경업 장군이 7년간 수도 끝에 세웠다고 적혀 있다.
“천황봉”(1058m) 보은읍(報恩邑)·청주(淸州)·문경(聞慶)·상주(尙州)의 경계에 걸쳐 있는 속리산의 최고봉으로 한남금북 정맥이 갈라진다. 천왕봉(天王峰)은 속리사(俗離寺)의 남쪽에 있는데, 문장대(文臟臺)와 서로 마주보고 있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지지>에 명확하게 ‘천왕봉(天王峰)’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입증하듯 대동여지도에도 ‘俗離山 天王峰’이라는 글자가 또렷하다. 이후 1911년 5월 일본 육군참모본부에서 만든 한국지형도(충북대 도서관 소장)에는 천왕봉으로 적혀 있으나 일본총독부에서 만든 1918년 지도(국토지리정보원 소장)부터 천황봉으로 표기되어 있다. 정상에는 ‘天皇峯 해발 1058m’라는 표지석이 있다. 천황봉 바위 틈새로 스며드는 물은 세 갈래로 나뉘는데 이 물줄기를 삼파수(三派水)라고 부른다. 정상 동쪽은 낙동강으로, 남쪽은 금강, 서쪽은 한강에 합쳐진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속리산 문장대에서 흘러내리는 세 가닥의 물에 관해서 적었다. 예로부터 이 물은 ‘속리산 삼파수’라 하여 좋은 물의 으뜸으로 일컬어져 왔다.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이행’은 달밤에 술통을 실은 소를 타고 산수를 노닐어 ‘기우자’라는 호를 얻은 사람인데 충주 달천의 물맛을 으뜸으로 치고 속리산 삼파수를 그 다음으로 꼽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에 적힌 바와 같이 달천 역시 속리산 삼파수의 한 가닥이니 속리산 삼파수야 말로 우리나라 좋은 물의 으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한남금북 정맥”은 한강과 금강을 나누는 분수령으로 속리산에서 시작하여 칠현산에서 끝난다. 도산(547m), 상당산성, 좌구산(657m), 보현산(481m)등이 한남금북정맥을 이룬다.
“법주사”는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속리산(俗離山)에 위치하며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이다. 553년(신라 진흥왕 14년)에 의신(義信)이 창건하였고 그 뒤 776년(혜공왕 12)에 진표(眞表)가 중창하였다. 절 이름을 법주사라고 한 것은 창건주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돌아올 때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이 절은 진표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됨으로써 대찰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즉, 금산사(金山寺)를 창건한 진표는 제자 영심(永深) 등에게 속리산으로 들어가서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을 택하여 가람을 이룩하고 교법을 펴라고 하였다. 이에 영심 등은 속리산으로 들어가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길상사라 하였다. 그 뒤 1101년(고려 숙종 6)에는 숙종이 그의 아우 대각국사(大覺國師)를 위하여 인왕경회(仁王經會)를 이 절에서 베풀었다. 조선시대에는 세조가 병을 고치기 위하여 복천암(福泉庵)에 와서 3일 동안 법회를 열기도 하였다. 신라 영심의 중창 이래 60여 동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 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것을 1624년(인조 2)에 벽암(碧巖)이 중창하였으며, 여러 차례의 중건·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법주사팔상전(法住寺捌相殿:국보 제 55호)을 비롯하여, 쌍사자석등(국보 제 5호), 법주사석연지(국보 제 64호), 사천왕석등(보물 제 15호), 마애여래의상(보물 제 216호) 등의 문화재가 있다. 한편 법주사의 정신을 상징하는 중심 법당이던 용화보전(龍華寶殿)은 1872년(고종 9년) 경복궁 복원을 위한 당백전 주조의 명목으로 불상이 압수되고 헐리게 되었다. 이 터에 1964년 시멘트로 만든 미륵불입상이 조성되었다가 1986년에 청동미륵대불로 대체되었다. 법주사와 관계하였던 고승들로는 진표율사와 영심 외에도 도생(導生)·자정(慈淨)·신미(信眉)·수미(守眉)·고한희언(孤閑熙彦) 등이 있어 그 법통을 이어왔다.
“피앗재”(619,8m) 내속리면 만수리와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를 연결한다.
“갈령 삼거리”에서 대간으로 붙어 내려선 후 경사진 곳을 올라가면 형제봉 정상이다. 정상 밑에는 ‘할배바위’가 있다. 특히 이 곳에서 주의할 사항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대간종주 시 길을 잃고 헤매는 경우가 많다.
【“갈령” 고갯마루에 25번 국도가 지나고 있다. 넓은 공터에 잔디밭을 조성해 놓았다. 앉아 쉴 수 있는 돌 의자도 마련되어 있고 갈령 표석이 우람하게 서있다. 이 표석은 1989년 상주군수 명의로 되어 있다. 그 옆에는 갈령 도로 개통비가 있다.⇒대간길이 아님, 갈령삼거리-갈령1.2km)】
“못제”는 백두대간상의 유일한 습지이다. 표지판이 없어서 찾기가 곤란하다. 전설에는 견훤이 보은에 있는 삼년산성의 신라 황충 장군과 싸울 때 매번 승리를 거두자 황충 장군이 그 비밀을 알아내기 위하여 염탐꾼을 시켜 뒤를 밟은 결과 견훤이 기진맥진한 상태에서도 이곳 못제에서 목욕만 하면 힘이 솟구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황충 장군은 견훤이 지렁이 자손임을 알고 지렁이는 소금물에 약하다는 점을 이용하여 소금 삼백 석을 풀게 하였다. 소금을 푼 물에 견훤이 목욕을 하고 난 뒤 힘이 빠지자 견훤을 쳐서 크게 이겼다고 전한다
“비재” 외서면 하송리와 화서면 장자동을 연결하여 주는 도로에 위치하고 있다. 나는 새의 형국이라 하여 비조(飛鳥)재, 비조령이라 불렸으나 최근에 와서 비재로 이름이 굳어졌다
○ 산행 소감
밤티재에 도착하니 비가 내린다. 오늘도 우중 야간 암벽산행을 해야 한다. 작년에는 비를 피해서 잘도 다녔는데 금년에는 비가 따라다닌다. 비가 올 때에는 물이 덜 필요하므로 물 한 병을 차에 두고 판초우의를 걸쳤다 문장대 까지는 위험하고 길 찾기가 힘이 드니 가급적 모여서 가야한다는 대장의 주의사항을 떠올리며 차에서 내렸다. 초입에는 밤티재에서 문장대까지 산행금지라는 공고문이 붙어있고. 선행자의 리본 표시기를 공원관리소에서 제거해 버렸다고 한다. 이 지역 산악회에서 돌에 페인트로 화살표시를 해 두었다는 정보를 얻었으나 야간이기 때문에 1개밖에 볼 수 없었고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한 시간 정도 산행을 하고나서부터는 길 찾기가 어려워 알바로 인해 선두는 후미가 되는게 예사이고, 길을 몰라 선두를 부르는 소리가 고요한 산에 메아리쳤다. 3개의 개구멍이 있는 암릉지대를 통과할 때는 비로 인하여 더욱 힘이 들었고 특히 개구멍을 통과할 때에는 입고 있던 판초우의가 발에 밟혀 어려웠다. 나중에 보니 판초우의에 조그마한 구멍들이 여러 개 생겼는데 암릉지대를 통과할 때 생긴 것으로 무릎보호대를 하지 않았다면 상처가 났을 것이라 생각된다. 문장대에 이르러서는 한기가 돈다. 어두움으로 인해 주변경관을 감상할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문장대는 올라봐야 하지 않겠냐 싶어 문장대에 올랐다. 커다란 바위 위에 5평정도 되어 보이는 공간이 있었다. 군대 군대 파여 있어서 물이 괼 수 있도록 되어있고 조망안내판 2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문장대 바로 밑에 문장대 휴게소가 있었으나 불이 꺼진 상태이다.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할 수 있어 대원들이 휴식을 취하고 간식을 먹을 수 있었다. 문장대에서 가까운 거리에 신선대가 있었고 그 밑에 신선대휴게소가 있었지만 그냥 지나쳤다. 천황봉에서는 보슬비를 맞으며 아침식사를 하였다. 천황봉에서 갈령삼거리 까지는 산행길이 좋아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갈령 삼거리에서는 이정표를 사진에 담았으나 갈령삼거리 임을 느끼지는 못하고 갈령재 방향으로 향했다. 10여m 앞서가는 아내에게 방금 지나온 이정표를 잘 보았느냐고 물으니 대간표시기를 확인하고 통과했다고 한다. 중간 중간에 대간 표시기는 계속 있었다. 별 의심 없이 한참을 내려오니 가까운 거리에서 차 소리가 난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 더 내려오니 도로가 보인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려오니 차가 있었고 대장과 아무래도 그리고 여수선배 의사 부부가 계신다. ‘갈령’ 이다. 알바다. 갈령삼거리에서 비재구간을 어떻게 할 것인가? 머리가 복잡하다. 차에 오르니 차는 이내 출발하여 비재 가는 길가 주요소에 도착했다. 운전사에게 다시 갈령으로 태워달라고 하니 태워준 후 우리가 비재로 내려오면 선행자와는 별도로 태우러 가야하니 비포장도로를 2번이나 갔다 와야 한다며 난색을 표한다. 그렇다면 비재에서 올라가겠다고 하니 차는 비재로 출발했다. 대간 길을 이탈한지 약 1시간30분이 지났다. 갈령삼거리에서 갈령까지 접속거리를 감안하면 2시간을 낭비했으니 서둘러야 한다. 비재에서 산에 다시 오르면서 그래도 후미대장 조판훈 선배님이 계셔서 시간차를 감안하여 이렇게 출발할 수 있으니 선배님이 한없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은 급한데 왜 그리도 멀게만 느껴지는지... 갈령삼거리에 다시 도착해서 이정표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구병산(신선대)9.6km, 갈령제, 형제봉700m) 갈령삼거리 라는 현 위치 표시는 없다. 구병산과 갈령재는 대간에 속하지 않는다. 선행자의 대간표시기를 따라 조금 더 가면 대간 길과 갈령재로 나뉘는 삼거리가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갈령재 방향으로 향했던 것이다. 갈령에서 대기하고 있던 운전기사에게 비재에서는 마지막 하산 자를 태운 지 얼마나 지났냐고 물으니 1시간쯤 지났다고 한다. 비재 가는 길 주유소 앞 냇가에 도착하니 다른 대원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생각보다는 빨리 왔다고 한다. 여수 팀이 정성껏 준비한 삼겹살에 소주한잔 걸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10년 체증이 내려간 기분이다.
알바! 아무런 생각 없이 순간 방심으로 이렇게 되는구나.
모든 재난도 순간방심으로 되는 것이고,
그리고 방심의 댓 가는 엄청난 것이다.
○ 산행 후기
그동안 대간 길 588km를 걸어오면서 이정표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어느 지역은 이정표 하나 없는 곳도 있었고, 이정표는 있었으나 현 위치 표시를 하지 않아 행인들이 볼펜이나 칼로 긁어 현 위치를 써 놓은 곳도 있었고, 이정표 제작 시부터 현 위치를 표시한 이정표도 있었다. 현 위치 표시는 의외로 많이 생략되어 있으며 지역사람들은 설치한 지점을 잘 알고 있으니 가리키는 방향과 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 할 수 있겠지만 초행자는 현 위치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므로 관련자분들은 앞으로 이정표를 세울 때에는 현 위치를 필히 표시해 주었으면 한다.
오늘 알바는 표시기가 어느 쪽이 더 많이 붙었느냐를 순간적으로 간과했던 게 불찰이고 대간길이 아닌 곳에 붙은 표시기가 완벽하게 유도했던 것이다.
○ 26차 결과
실측거리 734.65km 중 588.83 km 80%
첫댓글 산악인님 무더운 날씨에 고생많으십니다. 산행후기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푸르른 녹음도 정말 좋네요. 아무쪼록 건강유의하시기 끝까지 대간종주 무사히 마치시길 28산우회 카페에서 기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