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蒙古와의 항쟁
◈ 대몽 항쟁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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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강동성의 역
ㅇ 금 지배하의 거란족이 몽고와 동진국에 쫓겨 고려 영내로 들어오자 고려도 연합작전을 하여 고종 6년(1219) 강동성을 함락시키고 거란장에 분산 시켜 살게 함.
ㅇ 몽고의 형제관계 요구를 받아들이고 세공을 바치며 국교 수립.
o 1차 침입
ㅇ 저고여의 무례 : 활을 맨채 왕의 손을 잡고 무례함. 전년에 그에게 준 포를 도로 가져와 왕앞에 던짐.
저고여 피살로 1231 살례탑 침입, 구주를 박서, 김경손이 굳게 지킴.
정부가 몽고와 강화 후 항복하도록 지시해도 거부하자 참형에 처하고자 하니 몽고군이 도리어 감동하여 춘신을 죽이는 것은 가당치 않다 하였다.
ㅇ 다루가치(達魯花赤) 72명을 남김. 일종의 민정감찰관, 이듬해 요동으로 철수, 대개 고려인에 피살되어 결국 몽고는 다루가치를 고려에 유지하기 어려웠다. 공물 동남 동녀 工匠까지 요구함.
ㅇ 지광수의 충주 노군잡류별초의 노예군은 양반별초가 도망을 가도, 노비문서를 불태우니 잘 싸워 성을 사수함.
o 2차 침입
ㅇ 1232 승장 김윤후(부곡민의 처인성에 피난한 승려)가 살리타(살례탑)사살.
고려 때는 각 사원에 수원승도(隨院僧徒)라는 것을 두어 노역에 종사시켰고, 국가 비상시에는 인적자원을 이용하여 승병을 조직, 윤관의 별무반 항마군은 승병, 몽고 침입시 승려 김윤후 부대 등
ㅇ 대구 팔공산 부인사 초조 대장경 소실
o 3차 : 1235~1239 ,
ㅇ 태종이 금 멸한 후 남송과 고려를 함깨 침.
ㅇ 전국토가 유린당하여 황룡사 9층목탑 문화재 불탐.
ㅇ 4차 : 1253 친조, 출륙 요구, 산성과 섬에 피난하여 투쟁
ㅇ 5차 : 1253 가장 혹심한 피해, 잿더미 포로 20만, 충주성 전투에서 김윤후는 침략군 격파 상장군 승진, 군공있는 관노 백정들에게도 관작을 줌.
o 6차 : 1255 차라대, 조수작전(큰 충격을 주고자)
o 7차 : 1257 차라대
o 1258 유경 김준→최의 살해, 왕정복고, 개경환도는 반대.
o 1259 태자 전을 몽고에 보내 쿠빌라이 만남. 강화도 내성 외성을 헐어버림.
o 1268 임연이 김준을 죽임.
◈ 문대와 이희적 (고려인의 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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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고종 18년 서창현 낭장 문대가 몽고군에 사로잡혀 끌려다니며 치욕을 당함, 칠주성에 와서 문대를 시켜 성위로 올라가 ꡒ참말 무서운 몽고군이 왔으니 다들 항복하는 것이 좋겠소ꡓ 하고 외치라 했다. 그러나 문대는 분함을 참지 못하고 "가짜 몽고군이 왔으니 항복하지 마시오" 하고 외쳤다. 차라리 모두 죽을 지언정 더러운 항복은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기를 두 번 그듭하자 몽고군은 문대를 죽이고 성을 함락시켰다. 그 때 그곳 판관 이희적은 부녀자와 아이들을 큰 집에 넣고 불을 질렀으니 모두 기꺼이 타 죽고 남자들도 모두 전사하였다.
삼별초의 항쟁과 배중손
◈ 삼별초의 항쟁(127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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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삼별초란 용사들로 구성된 선발군이란 뜻. 최우가 조직, 도둑을 막기 위해 설치한 야별초에서 시작→좌별초, 우별초로 확대. 몽고군에게 포로가 됐다가 도망쳐 온 자들로 구성된 신의군
o 경찰, 군사 등 공적 임무이나 실제로는 최씨의 私兵, 삼별초, 도방은 최씨정권의 2대 군사적 지주.
o 1270년(원종 11) 5월 27일 원종이 개경에 귀환했을 때 비빈(妃嬪)과 조정의 百官들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돌아와 왕을 맞이하였다. 이로써 출륙문제는 사실상 해결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고려조정에서는 삼별초가 출륙 개경환도에 불만을 품자 장군 김지저를 강화도를 보내 삼별초의 폐지를 전하고 명부를 압수해 갔다. 군사들은 이 명부를 몽고에 넘길지 모른다는 불안감.
o 배중손 : "왕과 권신이 나라와 백성을 버렸도다. 이 수치를 씻고 나라를 구할 자 나를 따르고, 살고자 하는 자는 바다를 건너가서 몽고의 개가되어라ꡓ
o 노영희 : ꡒ너희의 명부가 이미 몽고 놈의 손아귀에 들어갔도다. 항복하여도 이제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진저! 더럽게 죽느니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이 너희 대장부의 일이로다 다들 떨쳐 일어나 성문을 지키고 해로를 끊어라!"
o 왕족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 관부설치. 안방열 술사는 <龍孫十二盡 向南作帝京>이라는 옛 참설을 들어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었다.
ㅇ 그러나 도내(島內)의 인심은 동요되고, 문무관 중에서 강화도를 탈출하는 자가 속출하였으므로, 배중손은 1,000여 척의 배에 公私 재물과 도내의 자녀들을 싣고 전라도 진도(珍島)에 들어가 용장성(龍藏城 ; 둘레 38,740 여척)을 쌓고, 그 곳을 대몽항쟁(對蒙抗爭)의 근거지로 삼았다. 남해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한 삼별초는 한때 거제(巨濟)․탐라(耽羅) 등의 30여 도서(島嶼)를 지배하고 나주 전주까지 진출 세금을 거두었으며 하나의 海上왕국을 이루었다. 그러나 김방경(金方慶)이 거느린 고려의 관군과 몽골군으로 형성된 연합군에 의해 그 세력이 많이 꺾였다. 배중손이 전사하고 김통정(金通精)은 삼별초의 잔여세력을 이끌고 탐라로 들어가 대몽항전을 계속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여러 가지로 회유책(懷柔策)을 썼으나 삼별초가 끝까지 이에 불응하므로, 1273년(원종 14) 고려․몽골 연합군에 의한 탐라 공격으로 삼별초는 패망(敗亡)하였다.
원의 간섭
◈ 여원 연합군 일본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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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병선 900척 건조 요구, 감독관 홍다구(맨 먼저 몽고에 항복 향도역할 이적행위를 한 홍복원 아들.
왕족으로 인질인 양녕공 순이 몽고에서 홍복원을 참소→처형된데 대해 개인적 원한
o 1차 여원 연합군 일본(가마쿠라막부) 원정
- 고려에 둔전경략사를 설치 군비확보, 1274 원의 홀돈 2만, 고려는 전함 900척, 김방경의 5,300명.
- 합포 (마산) →하카다(博多), 초전에 승리, 일본군 야습피해 전선에 돌아옴, 태풍으로 절반이 손실됨.
o 2차 일본원정
- 1281 일본이 원의 수호사절의 목을 벤 것이 4년후 판명, 고려에 정동행성 설치
- 동로군(여원연합군) 4만과 전선 900척, (혼도, 홍다구의 원군 3만, 김방경의 고려 1만)
옛 남송의 강남군 10만과 전선 3,500척, 범문호, 두군은 6월 15일 이키섬에 합류하고자 하였으나 남송군이 늦어져 6월말 도착, 태풍을 만나 실패하였다(일본은 이를 '神風')
◈ 몽고의 간섭 , 몽고풍, 고려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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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피해, 부담
- 1231~1257 년 까지 28년 동안 7차례 침략중 6번째인 1254 년 한해동안 잡혀간 사람이 20만 여명 (1400년대 초 우리 인구 450만명)
- 당시 황해도에 주둔했던 1400여명의 몽고 군인들은 모두 고려 여성을 아내로 삼아 떠났다. 공녀 2만 서로 혈통이 섞임. 기자오의 딸은 원 최후의 황제 순제의 제 2황후가 됨.
ㅇ 정동행성(征東行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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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충렬왕 6년(1280)에 설치. 그 장에 해당하는 좌승상에는 항상 고려왕이 임명되었다,
ㅇ 원의 관인으로 충당되어야 할 직책인 평장정사, 좌 우승은 대개 공석으로 남겨둠.
ㅇ 운영으로 본다면 정동행성은 고려의 내정간섭 기구로 보기 어렵다. 고려내에 행성을 두고, 고려왕을 좌승상에 임명함으로써 몽고 제국 내에 있어서 고려의 위치를 확정해 두자는 의례적 기구 의의가 있다.
ㅇ 원의 내지에 설치된 여러 행성들과 마찬가지로 체제를 개편하도록 주청하는 이른바 入省을 책동한 반민족적 책동이 있었으나 고려 상하 군신들이 일치단결하여 저지함. 공민왕 때 폐지됨.
o 몽고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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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원나라 양국간의 교류가 100여 년 지속되었기 때문에 몽고족의 풍습은 정치․사회․문화․종교 등의 각 방면에 깊숙이 들어와 많은 영향을 끼쳤다.
ㅇ 25대 충렬왕~31대 공민왕 일곱 임금이 몽골 공주를 왕비로 맞음. 부마국(駙馬國)
ㅇ 아이 거친 이름(쇠돌 쇠똥 등 천하게 이름 지으면 귀신이 시샘하지 않아 수명이 오래간다),
ㅇ 소주(마유주 증류한데서 나옴), 호복, 변발
ㅇ 예를 들면 단령(團領 : 옛날 公服)과 수화자(水靴子 : 비올 때 신는 무신의 장화), 남자의 착수의(窄袖衣 :소매가 좁은 옷)와 홀태바지, 여자의 족두리, 남녀가 옷고름에 차는 장도(粧刀), 신부의 연지 찍는 풍속, ꡐ
ㅇ 장사치ꡑꡐ시정아치ꡑ'벼슬아치' 등 말 끝에 치[赤]를 붙이는 언어습관, 여자들이 귀뿌리를 뚫고 귀고리를 다는 풍속, 왕의 진지상을 수라[水剌]라고 하는 말, 여자들이 다리를 넣어 머리를 땋는 일,앞머리는 깎고 뒷머리를 땋는 몽고식의 머리 모양인 체두변발(剃頭 髮), 절다말[赤馬]․가라말[黑馬] 등의 몽골식 말 이름 등이다.
ㅇ 제주도 돌 하루방의 유래에 관한 학설 : ①몽고풍? ②발리섬→제주도 ?
ㅇ 고려양 (高麗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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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13세기 중엽 이후 중국 원(元)나라에서 유행한 고려의 풍습. 많은 고려 여인들이 공녀(貢女)로 들어가서 영향을 미침. 고려악(高麗樂), 특히 고려의 복식(의복․신발․모자)․음식(고려만두(高麗饅頭), 고려병(高麗餠), 고려아청(高麗鴉靑)
등의 생활양식을 말한다.
o 금속활자(몽골→아리비아 상인→서유럽 : 성서보급 종교개혁)
▣ 고려때 '입성책동'에 대해서
[질문] 하상철 wrote:
어느 칼럼에서 일부 사람들을 사대주의자로 공격하며 고려 때 친원파들의 '입성책동'과 다
를 바 없는 행태라고 비판을 했던데, 고려조 때 친원파들이 주장했다는 '입성책동'이 무엇을 말하는지요. 제가 가진 자료에는 "정동행성을 폐지와 행중서성 설치 주장"이라고만 간단하게 나와있습니다만,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 답변 ] <입성책동(立省策動> ☞ 작성자 : 사료조사실 고혜령 2001/07/31
고려 후기 원(元)나라의 간섭을 받던 시기에 고려를 원의 일부 즉 성(省)이 되게 하기 위하
여 고려에 성(省)을 세우려 하던 획책.
고려는 몽고족에게 저항하다가 마침내 평화를 얻게 되었는데 이후 양국관계는 긴밀해지고,
고려는 정치적 간섭, 경제적 수탈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변의 다른 민족들이 모두 몽고
족에게 정복당한 것과는 달리 고려는 독립국을 유지하게 되었는데 그러나 약소국으로서 끊
임없는 간섭과 수탈에 시달리게 되었다.
특히 고려의 왕은 몽고족의 황녀와 결혼하는 관행이 생기고나서부터 왕위계승문제는 몽고의
직접적인 간섭을 받게 되었다. 또 고려에는 정동행성이라하는 원에 종속된 정치간섭기구가
생겼으나 이 기구는 고려의 원의 다른 행성과 같은 지방행정기관은 아니었고 형식에 그치는
것이었다.
원의 간섭이후 고려의 신하들은 몽고(원)세력에 붙어서 자신의 출세를 획책하는 부류가 생
겨났으니 이들을 부원(附元)배라고 한다. 이들 부원배들은 고려에 행성을 세워서 고려를 아
예 원의 일부를 삼으려 하던 일파가 있었다. 이 사건을 입성책동이라고 하며, 입성책동은 충
선왕1년(1309) 요양행성우승 홍중희에 의해서 처음 제기되다가 잠잠해졌고, 10여년 후인 충
숙왕10년(1323) 에는 유청신등이 입성책동을 일으켰으며 그후에도 3차, 4차 입성 논의가 일
어났다.
그러나 그때마다 고려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유신들에 의해서 이 문제는 실행되지 못하고 좌
절되었지만, 고려 정치의 독립성을 훼손하고 원의 정치간섭을 더욱 증대시키는 역할을 하는
사건이었다.
▣ 고려 충자왕들
[문] 고려왕들중에서 충렬,충서,충혜,충목,충정왕등이 있지 않나요?
그런데 그 중 원종도 그에 비슷한 것 같은데,원종앞에는 왜 충자를 안붙였나요?
답> ♣ 작성자 : 사료조사실 고혜령
고려는 13세기 후반 몽고족이 세운 원(元)과 강화조약을 맺은 이후 원에 의한 내정 간섭을 당하게 되었다. 원의 간섭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적인 것이었는데, 그중 왕의 칭호에 대해서도 왕명의 앞에 원에 충성한다는 뜻의 충성 충(忠)자를 붙이게 하고, 이제까지 독자적으로 사용하여오던 조(祖) 또는 종(宗)의 칭호 대신에 왕(王)자를 쓰게 하였다.
이제까지 중국의 왕이나 고려의 왕이 모두 다 같이 조(祖)나 종(宗)을 사용한 것은 고려왕조의 독립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나 종은 황제에게 쓰는 칭호인 대신에 왕(王)은 그보다 한 등급 낮은 군주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원의 황제 (조 또는 종)에 대하여 고려의 왕은 한 등급 낮은 왕으로 불러야만 하였던 것이다. 이런 식의 칭호가 강요된 것은 충렬왕 2년(1276)년 이었는데 이 때는 이미 원종이 승하하여 묘호(廟號)가 원종(元宗)으로 정해진 이후였기 때문이었으므로 이들과 같이 충(忠)자와 왕(王)자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 충렬왕(25대)때 일어난 일
♣ 작성자 : 자료정보실 류주희 (rjhee@history.go.kr)
충렬왕 때의 관제 격하는 몽고의 요구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고려사>> 권76, 지 30, 백관 1의 내용에 따르면, 충렬왕 원년(1275) 원에서는 고려의 관
제가 참월하다고 하여 사신을 보내 성(省), 원(院), 대(臺), 부(部)의 관명과 작호(爵號)가 그
들의 것과 비슷한 것은 개정하도록 명합니다. 그리하여 고려에서는 관제 개정에 착수하는데,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권28, 세가 28 충렬왕 1년(1275) 10월 임술. 관제를 개정하였
다." "권28, 세가 28 충렬왕 1년(1275) 11월 계유. 관제 개정을 종묘에 고하다."라는 내용이
보이며, 관제 개편의 자세한 상황은 백관지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 한편 충렬왕 2년(1276)에는 몽고 달로화적(達魯花赤)의 힐난에 따라 왕의 선지(宣旨)를
왕지(王旨)로, 짐(朕)을 고(孤)로, 사(赦)를 유(宥)로, 주(奏)를 정(呈)으로 고칩니다.(<<고려
사>> 권28, 세가 28, 충렬왕 2년(1276) 3월 갑신)
따라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내용은 전자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며, 고려사의 내용은 후자
의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국편에서 간
행한 <<한국사>> 19(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1996년을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2000/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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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선왕(26대) "세계화는 人脈에 달렸다"
◇ 이인화․소설가․이화여대교수 )
◇ 조선일보 2001.1/3 한국사의 세계인(1)
"세계화 성패는 인맥에 달렸다"...몽골 제국의 킹메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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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세계다. 세계의 흐름이 곧 한국의 현상을 만든다. 세계적 수준을 유지하지 못하는 한국에서만의 일류는 오래가지 못한다. 세계적 지평이 없는 시각, 세계적 스케일이 없는 경륜은 의심받는다. 5천년 역사를 되돌아 보면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국제적 형세를 부단히 살피며 「세계」의 경지를 탐색한 선구자들이 많이 있었다. 단순히 외국을 갔다 왔느냐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규모와 개방 문제다. 소설가 이인화씨의 사안을 통해 이들의 성취와 좌절이 오늘에 주는 의미를 더듬는 신년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우리 역사 속의 ꡐ세계화ꡑ를 살펴볼 때 지나칠 수 없는 한 대목이 있다. 그것은 1310년 4월 고려의 충선왕이 ꡐ심왕ꡑ으로 승격되어 요동과 만주까지 통치하게 된 사건이다. 몽골 세계 제국의 질서 속에서 빚어진 결과이긴 했지만, 5000년 한국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옛 고구려․발해․신라․백제의 땅이 하나의 나라로 묶여진 것이다.
충선왕이 살았던 시대는 고려가 39년에 걸친 전쟁 끝에 몽골에 복속된 암울한 시기였다. 몽골 여자를 왕비로 맞아들이고 내정 간섭을 받았으며 여러 가지 공출과 부역에 시달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이 시기야말로 한국인의 활동무대가 국제 정치의 최상층부까지 뻗어간 시대였다. 충선왕은 이런 긍정적인 측면을 극대화하여 다뉴브강에서 발해만에 이르는 세계 체제를 움직였고 세계화의 윤리를 만들었던 걸출한 한국인이었다.
충선왕은 1275년 충렬왕과 쿠빌라이 칸의 딸인 쿠틀룩 켈미쉬 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몽골 이름은 ꡐ이지르부카(익지례보화)ꡑ. 1296년 그는 쿠빌라이 칸의 장남인 감말라의 딸 보타시린 공주와 결혼했다. 테무르 칸(원 성종)은 그의 처숙이며 카이산 칸(무종)과 아유르발리파드라 칸(인종)은 그의 사촌 처남이었다. 외국인은 물론 몽골인 중에도, 심지어 ꡐ황금 씨족ꡑ이라는 칭기스칸의 직계 혈손 중에도 혈통상으로 충선왕보다 더 존귀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충선왕은 이런 핏줄의 정통성과 개인적인 능력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사리에 밝아 기대을 모았던 그는 기품 있는 유학자로 자라났다. 카이산과 아유르발리파드라는 황궁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 충선왕을 형님처럼 존경하며 따랐다. 이제현은 ꡐ익재난고ꡑ에서 ꡒ세 사람이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나며 밤낮으로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ꡓ고 기록했다.
1308년 테무르 칸이 죽고 아난타와 카이산 사이에 후계 분쟁이 벌어졌을 때 충선왕은 부하들을 이끌고 쿠데타에 가담하여 카이산을 칸으로 옹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 결과 1308년과 1320년 사이 원 제국에서 충선왕의 권위는 몽골인 종왕들을 능가하는 킹 메이커의 위치에 있었다. 이같은 충선왕의 처신은 세계화 시대, 권력은 인간관계에서 나온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세계화 시대는 전통적인 경계가 확고하던 시대보다 훨씬 더 인맥이 중요한 법이다.
그러나 충선왕의 일생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인물도 국내에 들어오면 배척당한다는 한국적 졸렬성의 변하지 않는 정형을 보여준다. 충선왕이 즉위하여 고려의 개혁에 착수한 것은 1298년이었다.
충선왕은 세계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고려의 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당시 고려 사회는 강남 농법의 도입에 따른 농업 생산력의 발달과 신흥 권력층의 토지 탈점으로 극단적인 계층적 양극화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몽골이 요구한 ꡐ글로벌 스탠더드ꡑ에 맞추어 기관을 통폐합했던 구조 조정은 교위 이하 하위 직급들만이 희생되는 폐해를 낳았다. 정부는 대중영합적인 선심 행정으로 지방자치 단체들을 부곡에서 현이나 군으로 무차별 승격시킴으로써 세수의 감소를 초래했다. 몽골어 구사 능력과 몽골과의 친연성에 따라 급격한 신분 이동이 일어나면서 사회 불안은 심화되었다.
충선왕은 고려의 자주성을 확보하고 신흥 권력층의 횡포를 막아 국정을 정상화시킨다는 방향으로 개혁을 추진했다. 즉위 다음 날부터 30여개의 개혁 정책을 잇달아 발표할 만큼 의욕적이었다. 그러나 이 개혁은 몽골에 연줄을 가진 세도가들의 모함으로 좌절된다. 충선왕은 왕위를 박탈당하고 은퇴했던 충렬왕이 다시 정치를 맡게 된다. 충선왕은 10년 후인 1308년 귀국하여 다시 개혁 정치를 추진했지만 똑같은 반발에 부딪혀 정책은 표류했다. 환멸을 느낀 충선왕은 스스로 왕위를 내놓고 몽골로 돌아가 다시는 고려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개혁 실패의 원인은 권력의 원천을 몽골에 두면서 몽골로부터 자주화를 추구했다는 자가당착에도 있었고 충선왕의 오만이라는 인간적인 약점에도 있었다. 두뇌의 명석함을 자부하는 충선왕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 다른 사람이 중언부언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ꡒ너희들이 나를 얼러 손 안의 떡처럼 주무르려고 하는구나!ꡓ 국왕이 이렇게 불같이 화를 내면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결과 그의 개혁은 주자학을 공부한 소수의 지식인들을 제외하고는 이해 당사자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개혁의 방향은 옳았으나 실천에서 너무 전격적이고 독단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세계화와 관련, 충선왕이 주는 두번째 교훈이다.
몽골로 돌아간 충선왕은 더 넓은 정치 무대에서 일생의 사업에 주력했다. 그는 오랫동안 학자들의 인사권을 쥔 황태자의 스승(태자태부)로 있으면서 성리학을 세계 제국의 통치 이념으로 관학화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과거를 부활시키고 조맹부․염복․우집․요봉 등 중국 성리학의 조종으로 추앙받는 학자들을 발굴한 것은 충선왕이었다. 만권당을 짓고 안향을 등용하고 이제현을 후원하여 고려에 성리학의 씨를 뿌린 사람도 그였다.
몽골의 세계 제패는 유라시아 전지역에 걸친 물류의 자유화, 활동의 광역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같은 세계화는 기본적인 룰이 결여된 약육강식의 논리에 따라 이루어졌다. 제국이 만들어낸 권력과 금력은 자리위선, 그들의 이익만을 위해 돌진했고 사람들의 생활에 필수적인 사회적 안전망의 유지는 무시되었다.
충선왕은 이런 혼란 속에 세계화의 ꡐ논리ꡑ가 아닌 ꡐ윤리ꡑ를 모색했다. 그것이 치생, 즉 서민의 물질생활 안정과 수기수분, 각 경제 주체의 책임의식을 강조하는 허형의 북방 성리학이었다. 이 과정에서 고려는 중국 중심의 안정된 세계 질서 속의 주변국으로 자리매김된다. 충선왕은 몽골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만든 세계화의 윤리와 질서는 성리학 속에 살아남아 이후 600년간 한국인들을 지배했다.
( 이인화․소설가․이화여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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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편 국사묻고답하기]
▣ 충목왕(29대)에 대하여
[문] 고려의 임금들이 몽고인 원나라에게 꼼짝 못하고 부마가 되던 시절에 충목왕이 있던 걸로 아는데 재위 3년정도 만에 승하했더군요....그 충목왕은 누구 일까요?
답: 충목왕은 충혜왕의 맏아들로 이름은 흔(昕)이며, 몽고식 이름은 팔사마타아지입니다. 어
머니는 덕녕공주(~1375년: 원나라 무정왕 초팔의 딸. 이름은 역련진반). 1337년 4월 태어나
8살인 1344년 2월 부왕 충혜왕의 후임으로 제29대왕으로 즉위하였으나 12살이었던 1348년
12월 재위 4년 10개월 만에 사망하였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
명을 재촉한 것으로 봅니다.
[고려사] 기록에는 충목왕은 총명한 왕으로서, 우정승 채하중을 비롯한 수십명의 신하들로부
터 학문을 배우고 정치와 예의를 익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이 어려 어머니 덕녕공주가 섭
정을 하였기 때문에 왕권이 제대로 발휘되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충목왕 당시에는 '정치도감'
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민생문제를 해결하려는 여러 혁신정치를 추진하였던 시기로 평
가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개혁을 반대하는 구세력과 충목왕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개혁정
치는 중단되고 말았다. 충목왕의 후임에는 동생인 충정왕(어머니는 희비 윤씨)이 즉위하였습
니다.
▣ 이성계의 동녕부 정벌때 요동까지 정벌했다는데
-동녕부와 동녕부정벌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논문들이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ㅇ朴焞, 高麗末 東寧府征伐에 대하여, {中央史論} 제4집, 1985
ㅇ金九鎭, 麗․元의 領土紛爭과 그 歸屬問題; 元代에 있어서 高麗本土와 東寧府․
雙城總管府․耽羅總管府의 分離政策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 7, 1989.
ㅇ方東仁, 麗․元關係의 再檢討; 雙城摠管府와 東寧府를 중심으로, {국사관논총}
17, 1990.
ㅇ盧啓鉉, 高麗의 압록강 방면 영토변천 1269; 1269; 1388, {論文集} 18, 1994,
한국방송통신대.
ㅇ김구진, [여․원관계의 전개] {한국사} 20(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국
편, 1994.
위의 글들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공민왕 19년(1370)에 정월, 동북면병마사 이성계가
기병 5천, 보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동북면에서 黃草嶺을 넘어 압록강 중류의 우라산성을 공
격합니다. 이때 이성계는 우라산성을 평정하고 원나라 소속 民戶 3백여 호를 항복받으며, 동
녕부 지역의 고려 유민들이 모두 본국으로 귀속하여 왔습니다.
같은 해 8월에 이성계와 서북면 상원수 지용수, 부원수 양백연 등이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
너 동녕부 지역을 공격하는데, 이때 고려의 군대는 동녕부의 근거지인 遼城(요양성)을 공격
합니다. 이때 요양을 공격한 고려 군사들은 동녕부의 고려 군민들에게 요양은 본래 우리
나라 國界라고 회유하고, 고려 유민 2,300여 호를 본국으로 귀환시키고 있습니다.
◇ 고려 인당장군
인당( -1356)은 고려 공민왕때의 무신이다. 충목왕때 밀직사라 되어 자연도와 삼목도에 침
입한 왜구를 막기도 하였으며, 원에서 강남에 난리가 일어나자 고려에 원군을 요청하여 토
벌군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첨의평리, 참지정사에 올랐으나 원의 황제가 고려의 국경침입을
구실산아 80만대군으로 문책하겠다고 위협해오자, 이에 당황한 왕에 의하여 죄를 뒤집어 쓰
고 사형당하였다.
공녀출신 기황후
★ 조선일보 2002.4.3 / [다시 읽는 여인열전]
★ ( 이덕일․역사평론가 )
* 대제국을 지배한 여자 기황후 공녀에서 元황후로…현지화 전략으로 ꡐ운명 개척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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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세계 제국의 지배자로 군림한 기황후의 출발은 절망뿐이었다. 고려인 기자오(奇子敖)의 막내딸이 원나라에 바쳐지는 공녀(貢女)로 결정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비참한 인생길을 동정했다. 목은 이색이 ꡒ공녀로 선발되면 우물에 빠져 죽는 사람도 있고, 목을 매어 죽는 사람도 있다ꡓ고 말할 정도로 비참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기씨 소녀는 달랐다. 비록 자원한 공녀길은 아니지만 이왕 뽑힌 이상, 이를 새로운 인생의 계기로 삼겠다고 결심했다. 세계를 지배하는 원나라이니 만큼 더 많은 기회가 있으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원 황실에 포진한 고려 출신 환관들의 대표였던 고용보는 기씨 소녀같은 인물이 꼭 필요했다. 기씨 소녀라면 황제 순제(1320~1370)를 주무를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고 그녀를 순제의 다과를 시봉하는 궁녀로 만들었다.
ꡐ원사(元史) 후비열전ꡑ이 ꡒ순제를 모시면서 비(妃:기씨)의 천성이 총명해 갈수록 총애를 받았다ꡓ고 기록한 것처럼 그녀는 곧 순제를 사로잡았다. 여기에는 고려에 대한 순제의 남다른 추억도 작용했다. 명종의 장자로서 황태자였던 토곤 테무르(순제)는 1330년 7월 원 황실 내부의 싸움에 패배해 인천 서쪽 대청도에 유배된 적이 있었다. 1년 5개월을 대청도에서 보낸 그는 원나라로 돌아가 2년 후에 황제에 즉위한다. 동아시아에서 동유럽에 이르는 세계제국의 후계자에서 고려의 작은 섬에 유배되었던 기억은 어려운 시절에 대한 향수와 어우러져 기씨에 대한 호감으로 작용했다.
기씨는 순제를 통해 자기 뜻을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기씨는 곧 큰 시련에 부딪쳤다. 다름 아닌 황후 타나시리의 질투 때문이었다. 타나시리는 채찍으로 기씨를 매질할 정도로 질투가 심했으나, 기씨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순제를 내세워 타나시리와 싸웠다. 타나시리의 친정에 불만을 갖고 있던 순제는 기씨의 의도대로 1335년 승상 빠앤과 손잡고 타나시리의 친정을 황제역모사건에 연루시켜 제거했다. 그리고 타나시리에게 사약을 내렸다.
타나시리를 제거하는데 성공한 기씨는 순제를 대주주로 한 원제국의 CEO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 순제도 그녀가 황후가 되는 것을 지지했으나 원 제국의 또 다른 대주주였던 빠앤이 적극 반대했다. 관직 이름만 246자에 달했던 빠앤은 사실상 순제를 능가하는 실력자였다. 고려의 공녀 출신이 황후가 되겠다는 구상은 원나라의 지배구조상 무리였다. 몽골족은 태조 징기스칸 이래 옹기라트 가문에서 황후를 맞이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에 따라 순제 5년(1337) 황실 전통에 따라 옹기라트 가문의 빠앤후두가 황후가 되었으나 기씨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빠앤까지 축출하기로 결심했다. 기씨는 1339년 순제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낳아 입지가 더욱 확고해졌다. 기씨의 조종을 받은 순제는 스승 샤라빤과 손잡고 빠앤을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녀는 드디어 세계를 지배하는 원제국의 제2황후가 되었다. 기씨의 성공에는 고려 출신들을 주축으로 철저하게 현지화 전략을 펼친 것이 주효했다. ꡐ원사(元史)ꡑ는 그녀가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먼저 징기스칸을 모신 태묘(太廟)에 바친 후에야 자신이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현지화 전략으로 명분을 축적하면서 원의 황실을 장악했던 것이다.
제1황후가 있었지만 자기 능력으로 황후가 된 기씨의 위세는 제1황후를 능가했다. 그녀는 흥성궁(興聖宮:현 베이징 중남해 자리)에 거주하면서 황후부속기관인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개편해 심복인 고용보를 초대 자정원사(資政院使)로 삼았다. 자정원은 기황후를 추종하는 고려 출신 환관들은 물론 몽골 출신 고위관리들도 가담해 ꡐ자정원당ꡑ이라는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했다. 기황후는 1353년 14세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황태자로 책봉하는데 성공, 안정적인 경영기반을 구축했다. 또한 그녀는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를 군사 통솔의 최고책임자인 추밀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만들어 군사권까지 장악했다.
기씨는 이렇게 장악한 권력을 누구를 위해 사용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공녀였던 그녀는 힘없는 백성들의 고초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ꡐ원사 후비열전ꡑ은 1358년 북경에 큰 기근이 들자 기황후가 관청에 명해 죽을 쑤어주고, 자정원에서는 금은 포백․곡식 등을 내어 십여 만 명에 달하는 아사자의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규모 아사자가 발생하는 것은 원제국의 위기였다.
기씨는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원 황실의 근본적인 체질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ꡐ원사ꡑ는 순제가 ꡒ정사에 태만했다ꡓ고 기록한다. 기황후는 이런 무능한 대주주를 젊고 유능한 인물로 교체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기황후는 순제를 양위시키고 황태자를 즉위시켜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 칼리 피오리나 HP회장이 ꡒ디지털 경제시대에 경쟁력을 갖추려면 기업의 과감한 체질개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ꡓ며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적극적 경영마인드를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 논리였다. 피오리나의 남편 프랭크는 회사를 그만두고 피오리나가 CEO가 될 수 있게 도왔지만 순제는 달랐다. 기황후의 지시를 받은 자정원사 박불화(朴不花)가 양위를 추진하자 순제는 거칠게 반발했다. 순제는 무능․태만해도 최고경영자 자리를 내놓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대신 황태자에게 중서령추밀사(中書令樞密使)의 직책과 함께 군사권을 주는 것으로 타협했다.
이것이 기황후의 실수였다. 당시 과감한 구조조정은 원나라의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이런 위기의 시기에 순제라는 무능한 최고경영자를 둔 원나라는 급속히 약화됐다. 1366년 원제국은 주원장에게 대도 연경을 빼앗기고 북쪽 몽고초원으로 쫓겨가야 했다. 공녀 출신으로 황후까지 된 기씨 소녀의 ꡐ몽골리안 드림(Mongolian dream)ꡑ도 몽골 초원에 묻혀져 잊혀졌다.
▲기황후의 친인척
오빠-조카 기고만장하다 역모혐의 처형당해
기황후가 우리 민족의 뇌리에 부정적으로 각인된 이유는 오빠 기철(奇轍) 등 친인척 관리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기철은 「고려사」반역조에 올라있을 정도로 평판이 나빴다.
기철은 동생 덕에 원나라로부터 정동행성 참지정사에 임명되고 고려로부터도 덕성부원군에 임명되면서 고려 임금을 우습게 알았다. 공민왕 2년(1353) 기황후의 모친 이씨를 위한 연회에서 공민왕이 조카인 태자에게 무릎꿇고 잔을 올리고 태자가 왕에 앞서 이씨에게 잔을 권하는 것을 본 기철은 기고만장했다. 그는 공민왕과 말을 나란히 하며 걸어가려다가 호위군사들에게 제지당하기도 하고, 공민왕에게 시를 보내면서 신하라는 말을 쓰지 않기도 했다. 여기에 조카 기삼만 등 친족들이 백성들의 전토를 함부로 빼앗는 전횡을 저지르면서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기철은 1356년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로 공민왕에게 주살 당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기황후는 태자에게 ꡒ이만큼 장성했는데 어찌 어미의 원수를 갚아주지 않느냐ꡓ고 원망했다. 1364년 기황후는 공민왕을 폐한 후 충선왕의 3자 덕흥군(德興君)을 왕에 책봉하고 최유에게 1만 여 군사를 주어 압록강을 건너게 했다. 하지만 최영과 이성계의 군사에게 전멸 당하면서 친정 복권계획은 무위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