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영 국방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시니어과협 평위원 2023년 2월 4일
1. 노량진에 사륙신 묘 있었던 사연.
서울 노량진에 사육신묘가 있는 것은 매월당 김시습(1435∼1493) 때문이다. 사육신이 충절의 상징이 된 것은 추강 남효온(1454∼1492)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에 기인한다. 1456년(세조 2년)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할 때 남효온의 나이는 2살에 불과했다, 그래서 김일손과 김시습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455년 윤6월 삼각산 중흥사에서 과거 시험공부를 하고 있던 김시습은 단종의 양위소식을 듣고 3일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바깥에 나가지 않았다. 세조의 왕위찬탈은 유학사상의 핵심인 왕도정치의 붕괴였다. 주공(중국 주나라 성왕의 숙부)이 되겠노라고 한 수양대군의 언행은 거짓이었다. 통곡 끝에 그는 책을 불살랐다. 현기증을 느꼈는지 아니면 광기(狂氣)증상이 나타났는지 이로 인해 똥통에 빠졌다.
1456년 6월 단종 복위 운동 실패로 육신을 비롯한 복위운동에 가담한 자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김시습은 공주 동학사에서 한양으로 달려갔다. 그는 6월 8일에 군기감(지금의 서울시청 동쪽) 앞에서 성삼문 · 유응부 · 이개 · 하위지 등이 두 대의 수레로 사지가 찢기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이미 옥중에서 죽은 박팽년과 집에서 자결한 유성원의 시신이 거열(車裂) 당한 것도 보았다.
세조실록4권 세조 2년 6월 2일 기록을 보면, 성균 사예 김질과 우찬성 정창손이 성삼문의 불궤(不軌; 반역을 꾀함)를 고하여 단종복위 의거는 실패했고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한 자들은 심한 고문을 당했다. 성삼문에게 다그쳐 묻기를 ‘역시 그대의 뜻과 같은 사람이 또 있는가?’ 하니, 성삼문이 말하기를, ‘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도 알고 있다.’ 하였다."…다시 물으니 “신은 실상 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과 같이 공모하였습니다." 하였다. …더 추궁하니 대답하기를 "유응부(兪應孚)와 박쟁(朴崝)도 또한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하위지와 이개는 고문당했으나 알지 못한다고 했다. 박팽년에게 곤장을 쳐서 당여(黨與; 가담자 무리)를 물으니, 박팽년이 대답하기를,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이개(李塏)·김문기(金文起)·성승(成勝)·박쟁(朴崝)·유응부(兪應孚)·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同)·윤영손(尹令孫)·이휘(李徽)와 신의 아비(박중림;朴仲林)였습니다." 하였고 이개에게 곤장을 치고 물으니, 박팽년과 같은 대답을 하였다. 나머지 사람들도 다 공초(供招; 죄인을 신문한 기록)에 승복(承服)하였으나, 오직 김문기(金文起)만이 공초(供招)에 불복(不服)하였다. …유성원(柳誠源)은 집에 있다가 일이 발각된 것을 알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가담자들은 3일 동안 저잣거리에 효수(梟首)하였다. 또한 친자식들도 모조리 교형(絞刑; 중죄인에 해당하는 벌)에 처하고, 어미와 딸·형제·자매들은 변방 고을의 노비로 보내라고 명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렇게 살벌했으니 그 누가 이들의 시신을 수습했겠는가?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이때 김시습이 나섰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김시습은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 성승 등 다섯 시신을 수습해 노량진에 묻고 작은 돌로 묘표를 대신했다. 하위지 묘는 구미시 선산읍에 있으나 자결한 유성원의 묘는 없다.
2. 사륙신 이름이 회자(膾炙)된 사연
한편 추강 남효온은 세상을 떠돌다가 1489년에는 고향 의령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병마로 몸도 가누기 힘든 상태였으나, “내가 죽는 것이 두려워 충신의 이름을 없어지게 할 수 있으랴” 하고 붓을 들었다. 그는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의 충절을 기리는 「육신전」을 집필했는데, 무오사화의 희생자인 사관 김일손(1464∼1498)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1490년 가을에 남효온은 김일손과 함께 삼각산 중흥사에서 김시습을 만났다. 세 사람은 밤새 담소하고 백운대를 올랐으며 닷새 동안 같이 지냈다. 김일손의 문집인 ‘탁영선생문집(2012년 간행)’의 ‘탁영선생 연보’에는 “1490년 4월에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 초안을 사관(史館)과 「승정원일기」에 의거해 다시 고쳐짓고 집안에 깊숙이 갈마 두다(모아 두다)”라고 기록돼 있다. (천지일보.2028.02.22.)
남효온(南孝溫)의 육신전(六臣傳)은 자신이 생육신 중 한 명으로써 계유정난 때 사형당한 많은 충신들 중에 그의 판단 하에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순으로 여섯 신하의 일대기를 전기 형식으로 기록했다.
인종 원년(1545년)에 육신은 비로소 실록에 나타났다. 시강관 한주가 조강(朝講)에서 ‘육신은 대죄를 입어 마땅하나 본심은 충의’라고 한 것이다. 1576년에는 박계현이 경연에서 선조에게 성삼문은 충신이라면서 「육신전」을 읽으라고 말했다. 책을 읽은 선조는 망령되이 세조를 욕했으니 책을 모두 불태우라고 했는데 겨우 진정시켰다. 이 와중에 백호 임제는 꿈속에서 단종과 사육신을 만나 비분한 마음으로 흥망의 도를 토론하였다는 내용으로 세조의 왕위 찬탈을 소재로 정치권력의 모순을 폭로한 한문소설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을 지었다. 이 한문소설은 원자허(元子虛)라는 인물이 꿈속에서 단종과 사육신을 만나 비분한 마음으로 흥망의 도를 토론하고 있다.
3. 사륙신 복직
민간 사이에 전하여 오던 사육신묘가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숙종 때부터이다. 숙종 5년(1679)에 왕이 노량진에서 열병(閱兵)하고 나서 유사(有司;사회모임에서 사무를 맡은 직책)에게 명하여 사육신묘를 봉식(封植)케 한 것을 비롯하여, 숙종 7년(1681)에는 사육신 묘역에 사육신의 사우(祠宇; 건물)로 민절서원(愍節書院)이 세워지고, 숙종 17년(1691)에는 성삼문 등 사육신을 복작(復爵)함과 함께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 제사지내는 일)케 했다.
정조는 계유정난(1453)과 단종 복위운동 실패(1456) 때 죽은 사람들을 육종영(六宗英), 삼상신(三相臣), 사의척(四懿戚), 삼중신(세 명의 중신들), 양운검(兩雲劒), 사륙신(死六臣)으로 구분하여 그들의 충성을 기렸다. 이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육종영(六宗英;여섯 명의 왕족들)
안평대군 장소공(章昭公) 이용(李瑢); 세종 3남
금성대군 정민공(貞愍公) 이유(李瑜); 세종 6남
화의군 충경공(忠景公) 이영(李瓔); 세종의 서자
한남군 정도공(貞悼公) 이어(李𤥽); 세종의 서자
영풍군 정렬공(貞烈公) 이전(李瑔); 세종의 서자
하령군 충민공(忠愍公) 이양(李穰); 태조의 이복동생인 의안대군의 손자
사의척(四懿戚) : 네 명의 아름다운 외척.
송현수(宋玹壽), 권자신(權自愼), 정종(鄭悰), 권완(權完)
삼상신(세 명의 제상들) 정1품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우의정 정분(鄭苯)
삼중신(三重臣) 정2품
이조판서 민중(閔仲), 병조판서 조극관(趙克寬), 공조판서 김문기( 金文起 )
양운검(兩雲劒)
성승(도총관;정2품), 박쟁(첨지중추원사;도총관;정2품),
사륙신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4. 남효온이 육신전 기록 사연
위 사륙신이 국문 당할 때 관직을 보면 아래와 같다.
박팽년은 집현전을 거쳐 1453년(단종 1) 우승지(정3품)를 거쳐 1454년 형조참판(종2품)이었다.
성삼문은 집현전을 거쳐 1454년에 집현전부제학(정3품) 그리고 1454년 예방승지/좌부승지(정3품)에 올랐다.
하위지는 집현전을 거쳐서 1454년(단종 2) 부제학(정3품)·예조참의(정3품) 1455년 예조 참판(종2품)에 임명되었다.
이개는 집현전을 거쳐서 1456년 집현전 부제학(直提學)(정3품)에 올랐다.,
유성원 집현전을 거쳐서 1453년 지평(정5품). 1455년 집의(종3품)에 임명되었다.
유흥부 1452년(단종 즉위년) 의주목사, 1453년 평안좌도도절제사, 1455년 4월에 판강계도호부사(종3품)를 거쳐, 1455년 윤6월에 동지중추원사(정3품)에 임명되었다.
남효온이 사륙신이 국문당하고 거열(車裂) 당했을 때 관직을 보면, 종2품 내지 정3품 그리고 종3품이다. 그리고 무인 유흥부를 제외하고는 전부 집현전 학자 출신이다. 남효온은 많은 죽임을 당한 사람 중에 젊은 신진 사류들의 의기를 높이 사서 육신전(六臣傳)을 썼던 것이다. 사륙신의 생년은 알 수 없으나 관직이 절정에 오르지 않음을 보고 알 수 있다. 당시 신진 사류를 대표하는 것이 집현전 출신이다. 무관들 중에는 성승, 박쟁, 유흥부 중에 유흥부가 가장 직위가 낮은 사람이다. 남효온은 앞이 창창한 신진 사류들이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한 것이다.
5. 1977년 성역화 사업은 어이없는 실패작이었다.
예전부터 노량진 사륙신 묘는 朴氏之墓, 兪氏之墓, 李氏之墓, 成氏之墓 그리고 성삼문 아버지 묘라고 전해 내려왔다. 최초 노량진 각 묘의 배열은 박팽년의 묘가 가장 남쪽에 있고, 그 북쪽으로 유응부 이개 성삼문의 무덤 순으로 서로 앞뒤에 위치해 있었고, 성승의 묘는 성삼문의 무덤에서 뒤쪽으로 10여 보 떨어져 있었다. 1620년 이후 효종(孝宗) 원년(1650) 이전의 어느 시기엔가 성승(成勝)의 묘 한 기는 주위에 다른 무덤이 새로 생기면서 그 위치를 파악할 수 없게 되었고, 묘갈(墓碣; 무덤 앞 작은 돌비)도 없어졌다. 그리하여 이 시기 이후 이곳에는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응부의 묘 4기만이 남아 전하였다. 그런데 1977년부터 1978년까지 사륙신묘 성역화 사업을 하면서 하위지, 유성원 허묘를 설치하고 김문기 허묘까지 만들었다. 그리고 성승의 묘는 멸실해버렸다.
(실패이유1) 김문기는 정2품 판서 자리에 있어서 3중신(정2품)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격을 낮추어 젊은 사류에 포함되었고 정2픔, 정3품 그리고 종3품 자리에 같이 하고 있으니 격이 맞지 않는다. 남효온은 종2품, 정3품 그리고 종3품 직위에 있었고 젊은 인재를 특별히 택하여 「육신전」을 썼는데 여기에 정2품 판서가 끼어 있으니 남효온이 웃을 일이 아니겠는가? 김문기는 정조 때 이미 3중신에 포함되어 있는데 격을 낮추는 꼴이 되었다.
(실패이유2)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 묘는 성삼문의 무덤에서 뒤쪽으로 10여 보 떨어져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멸실하여 이를 원위치에 복원하여 억울한 죽음을 두 번이나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김문기 허묘는 사육신 묘에 떨어져 있는 성승 묘와 나란히 세우는 것도 고려해 봄직하다.
(실패이유3) 노량진 사칠신은 한국 역사학자들을 웃음꺼리로 만들고 있고 죽음직전까지 심열을 기울여 저술한 남효온의 육신전을 의이 없이 뭉개버린 처사이다. 현 한국 역사학자들의 웃숨꺼리로 만들고 있는 사칠신을 정부관계자는 빨리 사륙신으로 되돌려 놓아야 할 것이다. 더구나 노량진의 사칠신은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