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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실 길(El Camin Real)과 로마 길(La Calzada Romana)
로마제국의 마지막 기독교 대박해(황제 Diocletian / 285∼305) 때 희생된 상당수의
순교자가 묻힌 곳이라는 사아군.
마을 이름도 사아군의 수호성인인 순교자 산 파쿤도(San Facundo)에서 유래된 산
파군(San Fagun)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아군(Sahagun).
그러나 중세 때에는 교회권력의 중심지였다는 사아군은 '수도원의 역사'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단다.
스페인에서는 드물게 석재 부족으로 짚을 섞은 적토벽돌 건물이기 때문에 대부분이
유적으로 남았지만 9c말에 세운 산 베니토 수도원(Abadia de San Benito de Real
de Sahagun)은 스페인 베네딕트 수도회의 가장 중요한 수도원으로 꼽히고 있다.
뜻대로만 되면 40여일 후(5월 말경) 다시 방문하게 될(마드리드 길을 걷기 위하여)
사아군의 밤은 요란한 우레와 소나기 소리로 나그네의 시름을 키워주었다.
비는 종일 오락가락 했지만 봄이 우기(雨期)라는 카미노에 들어선 이래 처음이므로
불평할 수도 없겠다.
오히려, 간 밤에 만난 S와 함께 알베르게를 나섰을 때는 갈증으로 고생하다가 밤에
내린 비를 마시고 생동하는 듯한 만물과 더불어 마음이 싱싱해지는 느낌이었다.
마을을 벗어나려면 세아 강(rio Cea)의 칸토 다리(Puente Canto)를 건너야 한다.
로마시대에 놓았으며 11c에 알폰소(Alfonso) 6세가 보수했다는 유서깊은 다리다.
짖궂었는가 힘겨운 순례자의 희망사항인가.(남은 거리가 그 쯤 되기를 바랐는가)
N-120도로를 우측에 끼고 가는 포풀러 가로수길(카미노)의 야립간판 시멘트 기둥에
'Santiago 315km'라는 노란 페인트 글씨가 적혀있다.(380km이상 남았는데)
도로를 건너 위치를 바꿔서 나아가면 카미노가 다시 둘로 갈린다.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까지 32km 정도를 프랑스 왕실 길(Real Camino Frances)과
비아 트라하나(Via Trajana),순례자의 길(Calzada de los Peregrinos)로도 불리는
비아 아끼타나(Via Aquitana/아스토르가와 보르도 간의 옛 로마 길)로.
역사성이 어떠하던 사도 야고보가 걸었던 길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순박한 순례자는
이 지점에서 다시 한 번 당황하고 실망하게 될 것이다.
두 길에는 각기 장단점이 있다.
전자는 차로와 동행하므로 산만하나 비상시 대응에 용이하고 후자는 차 없는 침묵의
들길이므로 정신적 안정과 평화를 누리는데는 그만이지만 마을 간의 간격이 20여km
나 되기 때문에 비상시에 난감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고려해 선택해야 할 것이다.
S와 나는 후자를 택했다.
전자(왕실길)를 택하지 않은 이유가 따로 있다.
이 기나긴 센다는1991년에 카스티야 이 레온 지방정부가 칼사다 델 코토에서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 까지 카미노의 정비랍시고 새로 만든 길이란다.
국내에서도 그런 혐오스러운 길은 거부하는데 하물며 양자 택일에서 그 길을 택할 리
없지 않은가.
A-231고속도로 건너 칼사다 델 코토(Calzada del Coto)를 지났다.
칼사디아 데 로스 에르마니요스(Calzadilla de los Hermanillos)도 통과하려 했으나
사아군으로 부터 겨우 14km쯤 걸었을 뿐이며 아직 11시 이전인데도 S가 알베르게를
찾고 있지 않은가.
오락가락 하는 비를 상대하며 다음 알베르게 까지 25km쯤 걸을 자신이 없다는 것.
한계를 본인보다 더 잘 알겠는가.
강요할 수 없는 일이기에 우리의 인연은 지극히 짧았다.
처음으로 오순도순 둘이 걸어본 카미노는 단명하고 말았다.
(차량을 이용하려 하지 않아 대견해 보였건만 그도 10여일 후 나를 실망시킬 줄이야)
신명나는 길과 아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
다시 나홀로가 되었다.
크고 작은 마을은 커녕 외딴 집 하나도 없다.
숲은 커녕 나무 한 그루 없고 수도꼭지 하나 없는 막막한 메세다다.
순례자 대부분이 프랑스 왕실 길로 갔으며 이 길을 택한 이들도 도중에 진로를 바꿔
그 길(프랑스 왕실 길)로 가버렸다.
홀로 산을 타거나 길을 걸을 때 받는 질문중 으뜸은 '외롭지 않으냐'다.
그러나 혼자라는 이유의 고독은 참 고독이 아니다.
참으로 무서운 고독은 군중 속의 고독이다.
전자는 쉬이 해결되지만 후자는 처방이 없기 때문이다.
홀로이기 때문의 외로움은 곧 인파에 묻히게 되므로 저절로 풀리지만 사람들 속에서
느끼는 고독이야말로 절망에 이르게 되고 키엘케고르가 말한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흔한 인사 '비엔 카미노'(bien Camino)를 주고 받을 사람이 없다.
유난 떠는 프랑스인의 '봉쥬르(Bonjour)'도 들을 일 없다.
앞서거니 뒤 따르거니 하는 자극이 없으므로 만만디 걸음이다.
광활한 평원의 지평선, 낡은 포장길이 관개용 수로를 건너 네거리도 지난다.
거의 훼손되지 않은, 원형에 가까운 로마시대의 길이란다.
쾌청한 날에는 피레네 산맥의 지류인 칸타브리카(Cantabrica)산맥과 해발 2.648m
에우로파 봉(Picos de Europa)도 보인다는데 유감스럽게 되었다.
대평원(meseta)이지만 습지가 많은 탓인지 개간되지 않은 땅들이 곳곳에 있다.
카미노는 기차길에 접근하다가 돌아선다.
레온을 거쳐 산티아고로 가거나 사아군을 지나 부르고스쪽으로 가는 레일이다.
빗발을 뚫고 오가는 열차가 겨우 보름된 늙은이에게 향수를 던져주고 가는가.
다양한 교통승용구들 중에서 득히 열차와 항공기, 배는 막연한 그리움과 아쉬움을
안겨주는 묘한 물체다.
레온행 열차는, 문득, 걷기는 커녕 일어서지도 못하던 때를 떠올려 놓고 달아났다.
한 시골역에 근접해 있는 작은 비구니 사찰에 유폐되듯 누워 지내던 때다.
민족 동란이 완결되지 않은 1.950년대 초의 일이다.
방안에 누워서도 열차의 진행 방향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북향열차가 지나간 후 얼마동안은 막연한 기대감에 차있다가 실망하기를 반복했다.
찾아올 누가 있다고 그랬을까.
세발로 라도 걷게 되길 갈망했던 그 때로부터 회갑의 세월이 흐른 지금 백두대간과
9정맥을 비롯한 산과산, 선열들의 애환이 묻혀 있는 옛 10대로(大路)를 비롯해 길과
길들로는 성이 차지 않은지 수만리 밖의 카미노 까지 누비고 다니는 중이 아닌가.
어머니 생전에 두 발로 당당히 걷는 아들의 모습을 보시게 된 것이야 말로 비할데가
없는 놀라운 은혜인데 카미노까지 좌지우지 하고 있지 않은가.
이 끝없는 지평선 길, 비아 아끼타나는 아마도 이 늙은이로 하여금 사모곡에 이어서
Amazing Grace를 마음껏, 목청껏 부르라고 제공된 스테이지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다시 신명나는 길이 되었다.
애매한 곳에서는 고맙게도 돌맹이 화살표가 나타난다.(복 받을 지어다)
그러나, 발데아르코스 천(Arroyo de Valdearcos)을 건너 수로(운하)공사가 한창인
휑한 들판에서는 대형 덤프트럭들만 분주하고 로마 길은 지리멸렬,우회를 거듭한다.
프랑스 왕실 길과 합류하는 렐리에고스를 앞두고 아직 남은 로마 길을 택했다.
얼마 가지 않아 돌연 세차게 내리는 비에 사방이 막혀 애로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덮프트럭을 세워보려 했으나 약올리려는 듯 내 앞에서는 더욱 기세좋게 달아났다.
렐리에고스(Reliegos)마을로 들어섰더라면 수월했을 텐데 로마 길에 충실하겠노라
세운 고집 때문에 막판에 생고생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는 짐은 항상 실제보다 가볍듯이 고생길까지도 신명나는 길이었다.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
N-625도로에 진출하여 우선 컴퍼스(compass)로 방향을 확인했다.
달리는 차량을 세워 마을을 확인하려 했으나 거듭 실패하다가 외딴 농가에서 나오는
승용차를 세우는데 성공했다.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 길을 물었을 뿐인데 동양의 늙은 순례자에 대한 배려인가.
그는 흠뻑 젖은 나를 태우고 마을 중앙부까지 2km 정도를 달렸다.
우중 38km의 일정에 행복한 마침표를 찍게 한 고마운 그에게 그라시아스(gracias)
한 마디 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안타깝다.
그는 내게 42세라는 것 외에는 자기 신상의 아무 것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게 도움을 준 분들에게 귀국 후 일일이 감사 인사를 드렸지만 그에게는 길이 없다.
두 루트가 합치는 지점의 마을인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Mansilla de las Mulas)는
예전(12c)에는 이 지방에서 가장 크고 번성한 가축시장이었단다.
마을 이름 'Mansilla'는 'Mano en Silla'(hand on the Saddle / 안장 위의 손)에서
유래되었으며 마을의 문장((紋章/coat of the arms) 역시 그렇게 되어 있다.
'de las Mulas'는 'of the Mules', '노새의'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노새 안장 위의 손'이라는 마을 이름이 가축시장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예전 한 때는 순례자들을 위한 3개의 병원과 다섯 교회, 많은 숙박시설을 갖춘
순례자 마을이었다는 자부심을 가진 인구 1,800여명의 마을이다.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마을을 돌아보러 나섰다가 산타 마리아교회(Iglesa de Santa
Maria)에서 들은 마을 자랑이다.
마침 교회 부녀들이 예수의 고난주간 행사를 하는 중이었다.
기독교, 특히 가톨릭교회에서는 사순절(부활 전 40일)행사중 클라이맥스(climax)인
고난주간 행사를 갖느라 교회 마다 바쁜 시기다.
신부실로 안내받아 스탬프도 찍고 걸어온 카미노 이야기도 나눴다.
역시, 77세 할아버지가 보름 만에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 놀라운 화제였다.
5월 1일, 주일 낮에는 아마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오브라도이로(Obradoiro)
광장에 서있게 될 것이라는 내 말은 그들을 더욱 놀라게 했다.
앞으로, 13일이면 족하다는 자신감이 이미 확고하니까.
우중의 알베르게는 장마당 처럼 소란하고 어수선할 수 밖에 없음을 처음 알았다.
비에 젖은 옷과 배낭, 소지품 들이 널려 있으니 당연하다.
카미노 프랑세스에 들어선 이후 처음 많은 량의 비를 맞았으니 그럴 수 밖에.
그렇긴 해도 미로처럼 복잡한 구조의 알베르게지만 출입문 위에 붙은 '아미고스 델
페레그리노(Amigos del Peregrino'/순례자 친구들) 대로 분위기는 괜찮아 다행.
내가 걸어온 로마 길에는 사람이 없었는데 정원 74명의 알베르게가 만원이라니.
순례자로 부터 이처럼 외면당하면서도 생명력이 있다는 것은 역시 역사성 덕인가?
카미노 낙수(2) - 순례중 주워 온 이삭들 -
1
우리나라 지자체들의 현안중 하나가 지역내의 묘지(공원, 공동) 문제일 것이다.
마을 인근에 조성하는 것을 한사코 반대하는데 그 이유는 집값의 하락이다.
조상과 가족이 영면중인 유택인데도 혐오시설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효심이 재산에 밀리는 현상이다.
이베리아 반도는 어떤가.
전역을 샅샅이 보지 못하고 단지 카미노들에서 확인한 것이지만 우리와 정 반대다.
우리에게는 취락형성의 조건이 양질의 충분한 물이지만 그들에게는 묘지인 듯 싶다.
집에서 가까이 있어야 수시로 방문하고 여전히 함께 기거하는 느낌일 수 있으니까.
우리에게도 인식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화장실과 처가(妻家)는 멀 수록 좋다던 예전의 고정관념이 깨진지 오래다.
화장실이 집 안으로 들어왔고 처가는 가까울 수록 편리하다.
문화의 발전이며 변화다.
2
돌이 많은 나라에서 일부 돌은 개간의 부산물이다.
이 많은 돌들을 처치하려면 돌집, 돌담, 돌길이 당연히 불가피하다.
자원의 적절한 활용이다.
그러나 카스티야 이 레온 지방에서는 돌집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건축용 돌이 없기 때문이다.
이베리아 반도의 하수로는 우리와 달리 대부분 도로의 중앙에 있다.
빗물이 차로 한가운데로 몰려 흐른다.
특히 좁은 골목에서는 도로의 물이 중앙으로 몰리므로 많은 비에도 보행자들이 물이
괴지 않은 양쪽 가장자리를 걸을 뿐 아니라 노폭을 넓게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은 지혜다.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져있는 우리의 당국자들도 모든 분야에서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하며 필요하면 벤치마킹(bench-marking)도 과감히 해야 할 것이다.
3
내 집 앞마당에서 여러 종류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
어찌나 잘 자라는지 전지하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이 나무들을 전지할 때마다 나는 소심하고 심약한 늙은이라고 자평하기 일쑤였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거나 모양새를 망치게 될까봐 과감하게 자르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카미노에서 무수히 다짐두었으며 귀국 즉시 시행에 옮긴 것이 나무들에 대한
무자비한(?) 가위질과 톱질이다.
동양적인 섬세한 미(美) 보다 선이 굵은 서구풍을 선호하게 되었다 할까.
오밀조밀하고 아기자기하지만 곧 실증을 주는, 생명력이 약한 정원보다 단순하지만
야성적인 대담성이 반영된 자연미를 벤치마킹해 온 것이다.
영감의 파격적인 작업에 조마조마하던 늙은 아내도 공감하는 듯 해서 다행이고.
4
환전소에서 유럽연합의 유로가 미국 달러보다 훨씬 비싸다.
그런데도 유로는 달러보다 헤프다는 느낌이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유중 하나는 지폐와 동전에 있는 것이 아닐까.
지갑 안에 들어앉아 정중히 대접받는 것과 주머니 속에서 홀대받는 것의 차이라고.
달러화의 지폐는 1달러부터인데 반해 유로화는 5유로부터 지폐다.
그러니까 1달러와 5유로부터 지갑 안에 들어갈 수 있다.
즉, 5유로가 1달러의 대접을 받는 느낌이다.
가령 거리에서 적선을 할 때 주머니 속에서 마구 딩구는 동전 2유로는 무심코 꺼내
던져주지만 지갑에서는 비록 1달러를 꺼낼 망정 신중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구매 심리에도 지불 화폐(지폐 또는 동전)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유럽연합은 왜 지폐의 최소 단위를 5유로로 했을까. <계 속>
(Santiago까지는 아직도 380km 이상 남았는데 왜 1백 50리 이상 줄여서 써놓았을까)
세아 강의 칸토 다리(위1)를 건넌 후의 카미노(위2~ )
위치를 바꿔(도로를 건너) 도로와 나란히 나아가면 카미노는 프랑스 왕실 길과
고대 로마 길로 나뉘고 로마 길 첫 마을이 칼사다 델 코토 마을이다(아래)
(알베르게와 비르헨 데 로스 돌로레스 소예배당/위 아래)
칼사다 데 코토 ~ 칼사디야 데 로스 에르마니요스(위)
칼사디야 데 로스 에르마니요스 ~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아래)
역사적인 고대 로마 길이라 하나 장장 23km에 이르는 대평원(meseta)에 마을은 고사하고
외딴 집 하나 없고 쉼터는 커녕 그늘이 될만한 나무 한 그루 없고 샘 하나 없다.
(농사용 소운하/위)
(공사중인 운하)
(초대형 살수기springkler/위)
(산타 마리아 교회/위1.2)
(알베르게/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