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곡교회와 명동서숙은 문화재청 등록문화제 제257호로 1907년 5월 김종숙, 장복우, 최재구 3인이 최초 창립하여 임시로 척곡리 버드나무골에서 예배와 교육을 시작하였다.
1909년 현재 위치인 건문골(명동)의 백운산 절골 초입에 와가 예배당과 초가 명동서숙을 창립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니 110년의 역사를 갖는다.
설립 당시 김종숙 장로(후일 목사)는 예배를, 장복우 장로는 교육을 담당하여 당시 일제 강점기에 신문화와 신문명을 교인과 지역 주민들에게 전파하였다. 이는 선교사가 아닌 일반인이 자생적으로 세운 것에 큰 의의가 있고 특히 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한 군자금 전달 등 독립운동으로 다양하게 활동을 전개하였다.
교회가 위치한 백운산 산자락은 완만하면서도 남의 이목을 피해 이동과 접촉을 하기에 용이한 지형이다.
암울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오지에서의 활동은 후세에도 지역 사회에 애국심을 일깨우고 공동체 정신이 지역민에게 간직되게 하였다. 현재 척곡교회에서는 나라를 빼앗긴 국치일에 '나라사랑 음악회'를 개최하고 소수의 신자임에도 유치부를 운영하여 어린이들의 교육 열의를 북돋우는 등 과거 명동서숙의 의미가 유지되어 오고 있다.
초창기 기독교 신앙과 교육이라는 기치는 대대로 신자들에게 이어져 오고 그 과정에서 김상규, 김진홍 등은 생전에 교회를 유지하고 부흥해 가는데 헌신적으로 기여해 왔다.
근래에는 김영성 장로가 지역내 거주하면서 새로히 문화재 등록과 복원사업에 노력한 결과 널리 알려져 명실공히 교계에서는 물론이고 지역내 명소로서 그 가치는 지대하다. 아직도 고령의 연세에서도 불구하고 미진한 미복원 사업과 미래 척곡교회의 청사진을 다듬는 등 매진해 가고 있다.
명동서숙은 근대 학교가 없던 시절 지역내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1945년 일제 탄압으로 폐교때 까지 당시 어린 학생들의 희망과 꿈을 키운 현장이기도 하다. 명동서숙은 건문골의 다른 마을명인 명동의 교육기관이란 의미로 후일 만주의 명동서숙의 산실이고 모태라고 하는 이도 있는 만큼 앞으로 고증되어야 한다.
양쪽에 동일인물이 있음을 밝히는데 고증 가능한 생존하는 여러분이 있다 하지만 고령이니 만큼 서둘러 상세 기록을 살펴봄이 요구된다.
지금도 그 당시로 돌아가 생각해 보면 유교사상이 강한 지역에서 나라 잃은 백성에게 기독교를 매개로 하여 교육과 신문명을 농촌 사회에 도입하기엔 어려움도 있었겠지만 선구적으로 헤쳐 나온 곳인 만큼 더욱 소중한 마음으로 유지, 발전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