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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전』, 1924 - 염상섭
아스팔트 칠을 담았던 통에 썩은 생선을 담고 석탄산수를 뿌려서 저리는 듯한 고약한 악취에 구역질이 날 듯한 것을 참으며 제각기 앞을 서려고 우당퉁탕대는 틈을 빠져서 겨우 삼등실로 들어갔다. 참외 원두막으로서는 너무도 몰풍경하고 더러운 침대 위에다가 짐을 얹어 놓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나는 우선 목욕탕으로 재빨리 뛰어갔다.
"웬 걸요. 이제 조선도 밝아져서 좀처럼 한 밑천 잡기는 어렵지만....."
"그러나 조선 사람들은 어때요?"
"요보 말씀요? 젊은 놈들은 그래도 제법들이지마는, 촌에 들어가면 대만의 생번보다는 낫다면 나을까,인제 가서 보슈.....하하하." 대만의 생번이란 말에 그 욕탕 속에 들어앉았던 사람들은 나만 빼놓고는 모두 껄껄 웃었다.그러나 나는 기가 막혀 입술을 악물고 치어다 보았으나 더운 김이 서리어서 궐자들에게는 분명히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욕객은 차차 꾸역꾸역 쏟아져 들어온다.
사실 말이지 나는 그 소위 우국지사는 아니나 자기가 망국 백성이라는 것은 어느 때나 잊지 않고 있기는 하다.
"그래 그런 훌륭한 직업이 무엇인데 어데 있단 말요 ?"
이번에는 그 시골자의 동행인 듯한 사람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욕탕에서 시뻘겋게 달은 몸뚱어리를 무거운 듯이 끌어내며 물었다. 그 자도 물 속에서 불쑥 일어서서 수건을 등 뒤로 넘겨서 가로 잡고 문지르며 한 번 목욕탕 속을 휘돌아다 보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네의 이야기에는 무심히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멱을 감는 것을 살펴 본 뒤에 안심한 듯이 비로소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벌린다.
"실상은 누워 떡 먹기지. 나두 이번에 가서 해 오면 세 번째나 되우마는 내지의 각 회사와 연락해 가지고 요보들을 붙들어 오는 것인데......즉 조선 쿠리 말씀요. 촌 노동자를 빼내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대개 경상 남북도나, 그렇지 않으면 함경 강원 그 다음에는 평안도에서 모집을 해오는 것인데 그 중에도 경상 남도가 제일 쉽습네다. 하하하."
그 자는 여기 와서 말을 끊고 교활한 웃음을 웃어 버렸다.
나는 여기까지 듣고 깜짝 놀랐다. 그 불쌍한 조선 노동자들이 속아서 지상의 지옥같은 일본 각지의 공장과 광산으로 몸이 팔리어 가는 것이 모두 이런 도적놈 같은 협잡 부랑배의 술중(術中)에 빠져서 속아 넘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한번 그 자의 상판때기를 치어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망국 백성이 된 지 벌써 근 십 년 동안 인제는 무관심하도록 주위가 관대하게 내버려 두었었다. 도리어 소학교 시대에는 일본 교사와 충돌을 하여 퇴학을 하고 조선 역사를 가르치는 사립 학교로 전학을 한다는 등, 솔직한 어린 마음에 애국심이 비교적 열렬하였지마는, 차차 자각이 나자마자 일본으로 건너간 뒤에는 간혹 심사 틀리는 일을 당하거나 일 년에 한 번씩 귀국하는 길에 하관에서나 부산, 경성에서 조사를 당하고 성이 가시게 할 때에는 귀찮아도 하고 분하기도 하지마는 그 때뿐이요, 그리 적개심이나 반항심을 일으킬 기회가 적었었다.
그러나 칠 년이나 가까이 일본에 있는 동안에, 경찰관 이외에는 나에게 그다지 민족 관념을 의식케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원래 정치 문제에 흥미가 없는 나는 그런 문제로 머리를 썩여 본 일이 거의 없었다 하여도 가할 만큼 정신이 마비되었었다. 그러나 요새로 와서 나의 신경은 점점 흥분하여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을 보면 적개심이라든지 반항심이라는 것은 보통 경우에 자동적 이지적이라는 것보다는 피동적 감정적으로 유발되는 것인 듯하다. 다시 말하면 일본 사람은 지나치는 말한 마디나 그 태도로 말미암아 조선 사람의 억제할 수 없는 반감을 끓어오르게 하는 모양이다.그러나 그것은 결국에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민족적 타락에서 스스로를 구하여야 하겠다는 자각을 주는 가장 긴요한 원동력이 될 뿐이다.
지금도 목욕탕 속에서 듣는 말마다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것이 없지마는, 그것은 될 수 있으면 많은 조선 사람이 듣고 오랜 몽유병에서 깨어날 기회를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자아낼 뿐이다.
나는 배속에서 아침을 먹었건마는 출출한 듯하기도 하고, 차시간까지는 서너 시간 남았고, 늘 지나 다니는 데건마는 이때껏 시가에 들어가서 구경하여 본 일이 없기에, 조선 거리로 들어가 보기로 하고 나섰다.
부두를 뒤에 주고 서편으로 꼽들어서 전찻길을 끼고 큰길을 암만 가야 좌우 편에 이층집에 쭉 늘어 썼을 뿐이요, 조선 사람의 집이라고는 하나도 눈에 띄는 것이 없다. 얼마도 채 못 가서 전찻길은 북으로 꼽들이게 되고 맞은 편에는 극장인지 활동 사진인지 울그데불그데한 그림 조각이며 깃발이 보일 뿐이다. 삼거리에 서서 한참 사면팔방을 돌아다보다 못하여 지나가는 지게꾼더러 조선 사람의 동리를 물어보았다. 지게꾼은 한참 망설이며 생각을 하더니 남쪽으로 뚫린 해변으로 나가는 길을 가리키면서 그리 들어가면 몇 집 있다. 한다. 나는 가리키는 대로 발길을 돌렸다.
쓸쓸한 거리를 이리저리 돌다가 그 여인숙이란 데를 한 집 들어가 보고 싶은 호기심이 불쑥 났으나, 차시간이 무서워서 발길을 돌 쳤다. 다시 큰길로 빠져나와서 정거장으로 향하다가, 그래도 상밥 파는 데라도 있으려니 하고 이 골목 저 골목 닥치는 대로 들어가 보았다. 서울 음식같이 간도 맞지 않을 것이요 먹음직할 것도 없겠지마는, 무엇보다도 김치가 먹고 싶고 숟가락질이 하여 보고 싶어서 찾아 다니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 사람 집 같은 것은 그림자도 보이지를 않는다. 간혹 납작한 조선 가옥이 눈에 띄기에 가까이 가서 보면 화방을 헐고 일본식 창틀을 박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나 우스운 것은 얼마 되지도 않는 좁다란 시가지마는 큰 길이고 좁은 길이고 거리에 나 다니는 사람의 수효를 보면 확실히 조선 사람이 반수 이상인 것이다.
'대체 이 사람들이 밤이 되면 어디로 기어들어가누?'하는 생각을 할제. 큰 의문이 생기는 동시에 그 불쌍한 흰 옷 입은 백성의 운명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파출소에 들어선 나는 하관에서 조사를 당할 때와는 다른 일종의 막연한 공포와 불안에 말이 어눌하여졌다. 더구나 일본서 그런 종류의 사람들에게 대하듯이 퉁명을 부릴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라 와서, 제풀에 자기를 위압하는 자기의 비겁을 속으로 웃으면서도, 어쩐지 말씨도 자연 곱살스러워지고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지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이번에 올라가거든 좀 집에 붙어 앉아서 약 쓰는 것도 살펴보고, 모든 것을 네가 거두어 줄 도리를 차려라."
형님은 두 잔째 마시고 나서 이런 소리를 들려주었다. 나는 잠자코 말았다. 사실 내가, 약 쓰는 법을 알 까닭이 없는 일이다. 형님은 또 화두를 돌렸다.
"나도 며칠 있다가 형편 되는 대로 곧 올라가겠지만, 아버님께 산소 사건은 아직도 사오일은 있어야 낙착이 날 듯하다고 여쭈어라, 역시 공동 묘지의 규정대로 하는 수밖에 없을 모양이야."
나의 귀에는 좀 이상하게 들렸다. 내 처가 죽을 것을 기정의 사실이라 치더라도 죽기도 전에 들어갈 구멍부터 염려들을 하고 앉았는 것은 아들을 낳지 못하여서 성화가 난 것보다도 구석이 없는 짓이요. 일없는 사람의 헛공사라고 생각 않을 수 없다.
"죽으면 묻을 데가 없을까 보아서 그러세요. 공동묘지는 고사하고 화장을 하든 수장을 하든 상관이 없는 일이 아닌가요. 아버지께서는 공연히 그런 걱정을 하시지만, 이 바쁜 세상에 그런 걱정까지 하는 것은 생각해 볼 일이지요."
나는 이렇게 핀잔을 주고 눈살을 찌푸려 보았다.
"공연히가 무에 공연히란 말이냐?"
형님은 눈을 똑바로 뜨고 나를 꾸짖고 나서, 말을 이었다.
"너두 지각이 났으면 생각을 해 보렴. 총독부에서 공동묘지 제도를 설정한 것은 잘되었든 못되었든 하는 수 없이 쫓아간다 하더라도, 대대로 내려오는 자기의 선영이 남의 손에 들어가게 되고 게다가 앞길이 머지 않은 늙은 부모가 계신데, 불행한 일이 있는 나에는 어떻게 한단 말이냐? 그래 아버님 어머님 산소를 공동묘지에다가 모신단 말이 될 일이냐? 자식된 도리는 그만 두고라도 남이 부끄러워서 어떻게 한단 말이냐.……계수만 하더라도 만일에 불행한 경우를 당하면 어떻든 작은 산소 아래다가 써야지, 여기저기 뿔뿔히 허트러져 있으면 그게 무슨 꼬락서니란 말이냐?"
형님은 매우 화가 난 모양이다. 그러나 내게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이야기다.
"그래 어떻게 하신단 말씀예요?"
나는 속으로 웃으며, 다시 물었다.
"어떻든지 간에 충북도장관과는 아버님께서도 안면이 계시고 나도 아주 모르는 터는 아니니까. 아버님 대만이라도 작은 산소에 모시도록 지금부터 허가를 맡아두구, 계수도 사람의 일을 모르니까, 이번에 아주 자리를 잡아 놓아주자는 말이야,. 그런데 그 보다도 더 시급한 것은 큰 산소하고 가운데 산소의 제절압의 산판을 물러가지고 식목이라도 다시 하자는 것인데 뭐, 아주 말이 아니야, 분상이 벌거벗은 셈이요,……"
분상이 벌거벗었다는 말에 나는 속으로 웃었다.
"그 문제가 이때껏 낙착이 안 났어요." 하며 나는 또 잔을 들었다.
"낙착이 다 무어냐, 뼛골을 뼛골대로 빠지고 일은 점점 안 되어 가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지금은 붙들어다가 징역을 시킨달 수도 없고, ……"하며 형님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 일본 갔다 오시는 분은 모두 그런 양복을 입으십디다."
하며 궐자는 외투 위로 내다보이는 학생복 깃에 달린 금(金) 글자를 바라보고 웃었다. 일본 유학생이 더구나 합병 이후로는 신시대, 신지식의 선구인 듯이 치어다보이는 때라 이 촌 청년도 부러운 눈으로 나를 자꾸 치어다보며 이것저것 묻고 싶으나 무얼 물을지 몰라서 망설이는 모양이다.
"당신은 무엇을 하슈?"
나는 대답 대신에 딴소리를 하였다.
"네에, 갓(笠)장수를 다니는 장돌뱅이입니다."
그는 자비(自卑)하듯이 웃지도 않으며 자기 입으로 장돌뱅이라 한다.
"갓이요? 그래 요새두 갓이 잘 팔리나요?"
"그저 그렇지요, 촌에서들은 그래두 여전히 갓을 쓰니까요."
나는 좀 의외로 생각하였다. 두 사람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러나 당신부터 왜 머리는 안 깎으우? 세상이 바뀌었을 뿐 아니라 귀치않고 돈도 더 들지 않소?"
"웬걸요, 촌에서 머리를 깎으려면 더 폐롭고 실상 돈도 더 들죠……. 게다가 머리를 깎으면 형장(兄丈)네들 모양으로 내지어도 할 줄 알고 시체 학문도 있어야지 않겠나요. 머리만 깎고 내지 사람을 만나도 말대답 하나 똑똑히 못하면 관청에 가서든지 순사를 만나서든지 더 성이 가신 때가 많디요. 이렇게 망근을 쓰고 있으면 '요보'라고 해서 좀 잘못하는 게 있어도 웬만한 것은 용서를 해 주니까, 그것만해도 깎을 필요가 없지 않어요."
하며 껄껄 웃어 버린다.
"그두 그럴듯하지마는 조선 사람끼리라도 머리만 깎고 양복을 입고 개화장을 휘두르고 하면 대접이 다른 것 같이 역시 머리라도 깎는 것이 저 사람들에게 천대를 덜 받지 않소. 언제까지든지 함부로 후뿌리는 대로 꿉적꿉적 하고 '요보'란 소리만 들으려우?"
정거장 문 밖으로 나서서 눈을 바삭바삭 밟으며 큰 길거리로 나가니까 칠 년 전에 일본으로 달아날 제 오정 때 대전에 내려서 점심을 사 먹던 집이 어디인지 방면도 알 수 업이 시가가 변하였다. 길 맞은편으로 쭉 늘어선 것은 빈지를 들였으나 모두가 신축한 일본 사람 상점이다. 우동을 파는 구루마가 쩔렁쩔렁 흔드는 요령 소리만이 괴괴한 거리에 처량하다. 열네 다섯쯤에 말도 모르고 단신 일본으로 공부 간다는 데에 호기심이 있었던지 친절히 대접을 해 주던 그때의 그 주막집 주인 내외가 그립다.
다시 돌려 들어오며 보니 찻간에서 무슨 대수색을 하는지 승객들은 아직도 아니 들여보내고 결박을 지은 여자는 업은 아이가 깨어서 보채니까 일어서서 서성거린다. '젖이나 먹이라고 좀 풀어 줄 일이지.'하는 생각을 하면 곁에 시퍼렇게 일어서 앉은 순사가 불쌍하다가도 밉살맞다. 목책 안으로 들어오며 건너다보니까 차장실 속에 있던 두 청년과 헌병도 여전히 이야기를 하고 섰다. 나는 까닭 없이 처량한 생각이 가슴에 복받쳐 오르면서 한편으로는 무시무시한 공기에 몸이 떨린다.
'젊은 사람들의 얼굴까지 시들은 배춧잎 같고 주눅이 들어서 멀대로 망해 버려라!
나는 하여간에 정자의 열심으로 써 보내 준 편지에 어느 때까지 모른 척하고 내버려두기도 안되어서 이튿날 이런 답장을 써 부치었다.
"……나도 스스로를 구하지 않으면 아니될 책임을 느끼고, 또 스스로의 길을 찾아가야 할 의무를 깨달아야 할 때가 닥쳐오는가 싶습니다……. 지금 내 주위는 마치 공동 묘지 같습니다. ……이러다가는 이 약한 나에게 찾아올 것은 질식밖에 없을 것이외다. ……대기(大氣)에서 절연된 무덤 속에서 화석 되어 가는 구더기의 몸부림치는 질식입니다. 우선 이 질식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소학교 선생님이 '사벨'(환도)을 차고 교단에 오르는 나라가 있는 것을 보셨습니까? 나는 그런 나라의 백성이외다. 고민하고 오뇌하는 사람을 존경하시고 편을 들어주신다는 그 말씀은 반갑고 고맙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내성(內省)하는 고민이요 오뇌가 아니라, 발길과 채찍 밑에 부대끼면서도 숨이 죽어 엎디어 있는 거세된 존재에게도 존경과 동정을 느끼시나요?
……이제 구주(歐洲)의 천지는 그 참혹한 살육의 피비린내가 걷히고 휴전 조약이 성립되었다 하지 않습니까. 부질없는 총칼을 거두고 제법 인류의 신생(新生)을 생각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소학교 교원의 허리에서 그 장난감 칼을 떼어놓을 날은 언제일지? 숨이 막힙니다.…….
우리 문학의 도(徒)는 자유롭고 진실된 생활을 찾아가고, 이것을 세우는 것이 그 본령인가 합니다. 우리의 교유, 우리의 우정이 이것으로 맺어지지 않는다면 거짓말입니다. 이 나라 백성의 , 그리고 당신의 동포의, 진실된 생활을 찾아 나가는 자각과 발분을 위하여 싸우는 신념 없이는 우리의 우정도 헛소리입니다.……."
나는 형님이 떠날 제 초상에 쓰고 남은 것이라고 동경갈 노자와 함께 책값이며 용돈으로 내놓고 간 삼백원 속에서 백 원을 이 편지와 함께 부쳐 주었다. 혹시는 다른 의미나 있는 줄로 오해할 것이 성이 가시기도 하나, 동경에서 떠날 제 선사받은 것도 있으려니와, 정자의 새 출발을 축하하는 의미라고 한 마디 쓰고, 다소 부조가 될까 하여 보낸 것이다. 실상은 동경 가는 길에 들르지 않겠다는 결심을 다시 하였기 때문에, 아주 이것으로 마감을 하여 버리고, 나도 이 기회에 가뜬한 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한 열흘 더 있다가 졸업 논문도 있고 아무래도 학교 일이 걱정이 되어서 떠나고 말았다. 정거장에는 큰집 형님, 병화 내외, 을라 들이 나왔다. 을라는 입도 벌리지 않고 오도카니 섰고, 병화 내외도 플랫폼의 보꾹에 매달린 시계만 쳐다보며 선하품을 하고 섰었다. 그러나 병화의 얼굴에는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모든 오해를 풀고, 인제는 안심하였다는 듯이 화평한 기색이 도는 것 같았다.
차가 떠나려 할 제 큰 집 형님은 승강대에 섰는 나에게로 가까이 다가서며,
"내년 봄에 나오면 어떻게 속현할 도리를 차려야 하지 않겠나?"
하고 난데없는 소리를 하기에 나는,
"겨우 무덤 속에서 빠져나가는데요? 따뜻한 봄이나 만나서 별장이나 하나 장만하고 거드럭거릴 때가 되거든요!……"
하며 웃어 버렸다.
젊은 사람들의 얼굴까지 시들은 배춧잎 같고 주눅이 들어서 멀거니 안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빌붙는 듯한 천한 웃음이나 '헤헤'하고 싱겁게 웃는 그 표정을 보면 가엾기도 하고, 분이 치밀어 올라와서 소리라도 버럭 질렀으면 시원할 것 같다.
'이것이 산다는 꼴인가? 모두 뒈져 버려라!'
찻간 안으로 들어오며 는 혼자 속으로 외쳤다.
'무덤이다. 구더기가 끓는 무덤이다 !'
나는 모자를 벗어서 앉았던 자리 위에 던지고 난로 앞으로 가서 몸을 녹이며 섰었다. 난로는 꽤 달았다. 뱀의 혀 같은 빨간 불길이 난로 문틈으로 날름날름 내어다 보인다. 찻간 안의 공기는 담배 연기와 석탄재의 먼지로 흐릿하면서도 쌀쌀하다. 우중충한 남폿불은 웅크리고 자는 사람들의 머리 위를 지키는 것 같으나 묵직하고도 고요한 압력으로 찌긋이 내리누르는 것 같다. 나는 한번 휘돌려다 보며,
'공동 묘지다 ! 공동 묘지 속에서 살면서 죽어서 공동 묘지에 갈까 봐 애가 말라하는 갸륵한 백성들이다.'
하고 혼자 코웃음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