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근대화의 선구자 求堂 李 豊
煥선생님의 발자취를 따라
글 : 김 인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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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인삼중흥의 인물( 1866년 3월 14일 ~ 1933년 6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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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6월 8일 향년 67세로 격동기의 삶을 마감하신다. 금계동
거처에서 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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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를 치루고 풍기초등학교에서 풍기지역 사회장(14개 단체) 영결식을
가졌다 | 글 싣는 순서
1, 글머리에 2, 풍기인이
되기까지 3, 목민정신 4, 근대산업화의 집념 5, 풍기초등학교 설립의 공노 6, 일제 강점기속에서 7, 자료로
살펴본 업적 8, 추모의 글
부록 : 풍기 인삼재배역사의 문화적 고찰
1,
글머리에 이풍환선생님이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귀한 함자를 접한 지 매우 부끄럽게도 6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부터
풍기인을 내 세우기 시작했고 풍기사람이란 글을 쓰면서도 선생님의 삶에 대하여 너무 몰랐음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향토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특히 지역산업을 알아야겠다는 작은 관심에서 출발하여 인삼 ? 사과 ? 직물에 관하여 자료를 모으면서 그냥 풍기인삼조합장을 21년간 하셨고
근대화 초기에 지역의 중심인물로 활동을 하셨던 분이었구나 하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가 우연히 인삼계에 직접종사하게 되자 보통사람이 아니었음을
은연중에 깨닫고 먼저 혈육을 찾아 나서게 되었습니다. 지난해가 선생님 탄생 140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습니다.
후손이 적지
않지만 자료를 구하기도 힘들고 전해 내려오는 얘기조차 크게 도움 되는 말은 적었지만 아는 대로 자료를 정리해 왔는데 불행하게도 조합이나
사회단체에서 일했던 자료나 기록은 전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께서 1933년 6월 8일 일생을 마감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80년이 되어 오니 생존해 계시는 분에게 직접증언을 듣기는 불가능하고 다음세대에게 들었던 말을 다시 전해주는 내용을 참고하였으며
다행히 후손 중에 손자 ? 증손자 ? 고손자분이 힘들게 소장해 왔던 여러 점의 자료가 그 뒷받침이 되어서 다행이라고 할지 극히 일부분이라도
선생님이 이 땅에 빛이 되었던 부분에 대하여 알려드릴 수 있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더 자료를 찾고 증언을 들어가면서 보완이
되더라도 우리 풍기인으로서는 빨리 이풍환선생님은 알아야하고 그러자면 알려야한다는 양심의 명령으로 미흡하기 짝이 없지만 최대한 사실에 접근하여
글을 엮어 보았사오니 이해해 주시기 바라며 아무쪼록 부족하지만 이렇게 글을 엮게끔 도와주신 후손들과 풍기인삼농업협동조합 신원균조합장에게
감사드립니다.
2, 풍기인이 되기까지 선생님께서는 1866년 3월 14일 개성시로 부터 약 20km 떨어진
천냥고개 마을에서 平山 李氏 부 이흥식, 모 황남하의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자는 향백(享伯) 호는 구당(求堂)으로 큰 아버지(宗字 植字)의 혈손이
없어서 양자로 들어가 성장기를 보낸다.
약관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훈랑직을 거처 정묘년 주사, 경자년 시종직을 그리고 마지막 관직은 통정대부(정삼품)의 벼슬을 끝으로 뜻 한바 있어 중앙관직을 그만두고 부친(영양군수: 이종식)이 직제를 가지고 부임해 계시던 안동도호부와 영양을
오르내리면서 죽령재를 넘나들다 그 경유지인 풍기에 자주 머물게 된다. 자세한 연유는 조사 중이나 생모가 욱금동 출신 평해 황씨임이 풍기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을 법하고 소백산의 산세와 풍기인삼재배를 관찰하면서 출신지인 개성보다 내륙 오지지만 환경과 기후조건이 매우 뛰어남을 간파하여
30대 중반 제 2의 인생을 펼치기 위해 이주의 꿈을 키워 왔다고 짐작된다.
당시 국가적 상황은 외세에 의해 자주권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시기였고 민초들의 삶은 이른바 병란, 전염병, 재해등 삼재(三災)로 인한 매우 절박한 지경에 이북지역 사람들이 민간신앙으로
전해오는 풍수지리와 관련 정감록 예언서에 의지하여 많은 주민이 스스로 남쪽으로 이주해 오던 때였기에 그 영향도 적지 않게 받았을 것으로
해석된다.
개풍군(개성)이 고향이셨던 이풍환선생께서 높은 관직을 가졌었고 집안사정도 비교적 넉넉해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왜 고향을 등지는 모험적인 이주를 결심했는지 그 직접적 원인은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선생님의 가계를 거슬러 보면 조부(秉源)께서
통훈대부, 대사헌부감찰을 엮임 하셨고 조모(金氏)님이 배우자로서 내조의 공을 높이 사서 유인 김씨 숙인(淑人)으로 봉하는 교지를 받으셨으며
부(宗植)께서는 감역, 영양현감, 통정대부의 교지로 보아 집안의 덕망과 명망가의 혈통을 한 눈에 찾아 볼 수 있으므로. 당시의 체재에서 권력과
재산을 가지고 부를 향유(享有)하며 편하게 지낼 수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교통과 7백리 머나 먼 길 정든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이주하는 결단을 실현하게 된다.
19세기 말 풍기에서도 산업의 중심지로 알려 져 있던 당시 풍기군 서부면 금계동 298번지에
아버지와 함께 정착을 결심하게 되는데 여러 가지 사유가 있었겠지만 추측컨대 당시 국가적 상황이 중국(靑), 일본(倭)를 비롯해 서양세력이
물밀듯이 들어오는 혼란기에 관직에 얽매는 정치적 야심을 접고 민초(民草)들과 동거동락(同居同樂)하며 산업근대화의 꿈을 실천해 보겠다는 의지를
굳혀 산업일선에 헌신하는 지혜로움을 그의 업적에서 읽어 볼 수 있다.
이때의 결심이 우연하게도 선생님의 아호인 구당(求堂)인 것처럼
풍기를 구하고 살리는 근대화 산업의 선구자(先驅者)로 풍기인이 되어 역사적 계기가 마련되는 시점에서 출발하기에 이른다.
3,
목민정신 19c 말 이북에서 월남하는 주민들을 보건데 직접적 동기는 북쪽은 오랑캐의 땅이 되고 남쪽으로 가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민간신앙이 한강 이북 쪽에 풍문이 돌고 있었다고 하는데 선생님의 경우는 꼭 정감록을 신봉했다기보다 여러 차례 다니면서 살펴본바 산세와
기후를 비롯해 토착민들의 삶에 호기심을 가졌고 특히 인삼재배의 적지가 개성보다 낫다는데 매력을 가졌다고 보는 것이다. 이 부분은 각종 자료에서
들어나듯이 인삼재배나 인삼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에서 그 사실이 여실이 증명된다.
국가적으로는 개화세력과 수구세력과 틈에서 세력가의
고민이 적지 않을 때 풍기라는 고장이 널리 알려져 있어도 내륙의 오지일 뿐만 아니라 작은 고을이 이상하게도 꿈틀거리게 되는 모습은 타 지역보다
근대화의 빛이 비쳐오는 것이었다. 개성 쪽에서 내려오신 분은 산업근대화에 기여하고, 평양 쪽에서 내려오신 분은 교회(新敎)설립에 관심을 가지게
되니 개화의 바람이 빠르게 전파되는 양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선생님이 정착하면서 마음에 품고 계신 화두(話頭)는 시세상황을 바르게
판단하고 지역주민들과 어떻게 살아가야하는 당면한 현안이 무엇보다도 잘 먹고 잘 살아야하는 문제였을 것이다. 결국 민초들의 지도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에 개화의 흐름을 이미 중앙관직에서 눈여겨 본 터라 미래를 예측하는 통찰력을 가지시고 인간의 보편적 평등사상아래서 주민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어려운 이웃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며 어려움에 동참하는 애민정신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농경지를 적절하게
관리하게하고 일감을 창출하여 절대빈곤에서 벗어 날 수 있도록 고심하면서 때로는 과거 관직의 힘을 빌러 관청내의 향청을 자주출입하며 지방수령과
긴밀한 협의를 자주 가지고 고을 살림에 적극참여하게 되니 경직되었던 관과 민의 관계를 완화시켜주었을 것이다. 예를 든다면 인삼재배에 대한 면적
허가를 받는 어려운 민원사항도 민의 입장에서 적절하게 조율하고 해결해주는 역할을 해 주셨고 모르는 것은 가르쳐 주고 못하는 것은 대리해주며
필요한 위치에서 지역주민의 손과 발이 되어 상당한 예우를 받아가며 살 수 있는 위치에서 오히려 궂은일까지 손수 앞장서서 위민봉사정신을 실천해
오셨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위엄을 가지고 얼마든지 권력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지만 사리사욕(私利私慾)에 마음을 두지 않고
어떻게 하면 풍기고을을 글자 그대로 풍요로운 고장으로 가꾸어 갈 것인가에 골몰하신 흔적을 산업, 경제, 교육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으니 이는
주민을 사랑하는 애민정신과 고을을 사랑하는 목민정신의 표본으로 바라보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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