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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호스피스 아카데미 원문보기 글쓴이: Lisa(상연)
1월7일자 매일경제 1면과 7면.(원래 기사)
호스피스 "마지막까지 당신을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
"호스피스는 `마지막까지 당신을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김창걸 신촌세브란스병원 호스피스실장(방사선종양학과 교수)은 호스피스를 `희망'이라고 정의했다. 죽음을 앞둔 환자가 `마지막까지 나를 돌보고 나와 함께 있어줄 사람이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말기 암환자가 육체적 고통을 덜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삶을 정리할 수 있도록 돕는 호스피스 봉사자들은 남의 고통을 가슴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96년부터 광주에서 호스피스 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주리애 씨(44). 그는 심장병으로 아들을 잃고 시아버지마저 위암으로 몸져 눕는 아픈 경험을 한 뒤에 호스피스 활동에 뛰어들었다.
"아들이 생후 10개월 무렵에 심장병에 걸렸어요. 의사들은 3개월만 산다고 했지만 3년 10개월 동안 곁에 있게 했어요."
그러나 아들의 간병은 너무나 힘들었다.
" 아이가 누워서는 잠을 못 잤어요. 안아주거나 휠체어를 태우고 밀어주어야 잠을 잤어요. 밤에 저희 부부가 2시간씩 번갈아 휠체어를 밀었죠. 하루에 2시간 이상 잠을 자면 소원이 없다 했어요."
어느 날 주 씨는 너무나 힘들어 "나도 잠 좀 자게 해달라"며 아이를 밀쳤다고 한다. 그러자 아이는 그후 몇차례나 "엄마. 왜 나를 던졌어"라고 묻곤 했다. 주 씨는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아들의 임종때 주 씨 곁에는 남편 뿐이었다. 마지막 4일을 병원에 입원했는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처음 간병때는 힘이 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하지만 1굛2굛3년이 지나고 정말 도움이 필요할 때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어요. `누군가가 조금만 도와주면 평생 힘이 되고, 가족을 끝까지 사랑으로 지킬 수 있을텐데'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군가가 옆에서 조금만 도와주었다면 아들을 밀치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들을 잃은 아픔으로 몸 져 누운 주 씨에게는 또 다시 비보가 찾아들었다. 시아버지가 윔암 진단을 받은 것이다.
"시아버지님을 돌보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어요. 그러면서 호스피스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죠. 결혼하기 전에 암병동에서 간호사로 일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됐어요."
주 씨는 1년의 가정간호전문간호사 과정도 이수했다. 말기 암환자의 집을 방문해 그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99년 3월 주 씨에게는 또 한차례 시련이 찾아왔다. 돌보던 호스피스 환자의 장례식장에 가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남들 같으면 `왜 이렇게 나에게만 시련이 찾아오나'하고 한숨을 쉬었을 텐데 주 씨는 달랐다.
그는 당시 느낌을 이렇게 썼다.
"중앙선을 넘어 달려드는 차를 어쩔 수 없어 커다란 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다.
병원에서의 삶. 허리와 목에 보조기를 하고 천장만 보고 있어야 했다. 기간이 흘러도 좋아질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포기 반 낙망 반하며 잔인한 4월을 탓하며 천장의 박힌 못들을 세어본 것도 수 백번이 넘었다.
나는 생각했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은 치유의 희망도 없이 하루 이틀 죽음을 기다리며 말할 수 없는 통증속에서 천장만 바라볼텐데. 그들의 외로움과 고통이 가슴이 시리도록 밀려왔다.
끝없는 절망과 좌절, 신체적 통증으로 깊은 늪 속에 있는 임종 환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며 그들의 곁에 있어주는 사람들이 너무도 필요함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주 씨는 혼자가 아니었다. 대학때 한국대학생선교회(C.C.C) 동아리 활동을 함께한 간호사 동료 28명과 함께 `C.C.C 사랑의 호스피스'를 조직했다.
이들과 함께 호스피스 자원봉사자 교육을 실시했다. "96년 이후 지금까지 5800명을 교육시켰다"며 "광주기독병원에는 100명의 자원봉사자를 파견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원봉사자들이 없다면 국내 호스피스 활동은 중단될 수 밖에 없다. 호스피스에 대한 정부 지원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호스피스병동을 설치한 곳도 가톨릭의료원 등으로 손을 꼽는다. 병원은 늘상 적자라고 하소연한다.
결국 한국의 호스피스 활동은 자원봉사자들이 떠 받치고 있는 셈이다.
-->1면에서 계속
자원봉사자 중에는 주리애 씨처럼 자신이 겪은 아픈 경험이 계기가 돼 호스피스 활동에 뛰어든 사람이 많다.
쿠웨이트 주재 대사를 지냈던 안세훈 씨(72)도 그런 경우다. 안 씨는 35년간의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지나친 음주와 스트레스로 간이 상해 92년에는 간경화, 95년에는 간암 진단을 받았다.
생명의 소중함을 가슴 깊이 깨우친 안 씨는 병이 나으면 호스피스 봉사를 하겠다고 다짐했고 2001년부터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호스피스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다.
`다른 일을 찾아보라'며 말리는 아내를 `죽음을 앞에 둔 처절한 심정을 위로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며 설득해 호스피스 활동을 고집했다는 게 세브란스병원측의 얘기다.
최근 안 씨는 고령으로 몸이 불편해 일주일에 한차례 반나절 정도만 봉사를 하지만 마음만큼은 `초심' 그대로다.
자원봉사자 중에는 아픈 경험은 없지만 `봉사' 를 하고픈 마음에 호스피스 활동에 뛰어든 사람도 많다. 세브란스병원 암센터에서 호스피스 봉사를 하는 문정순 씨(57)도 그 같은 경우다.
문 씨는 20여 년 전 장애인들을 돌보는 길에 나선후 줄곧 열성적으로 봉사활동을 했다. 중증 장애인들을 돌보면서 호스피스의 필요성에 눈을 떠 2001년 3월에 호스피스 교육과정을 수료했고 이후 말기 암 환자들을 돕고 있다.
문 씨는 말기 암 환자가 "나 살 수 있느냐", "나 살고 싶다"고 말을 할 때 가장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죽음의 문턱 가까이에 있는 있는 환자에게 위로의 말을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죽음'은 호스피스 봉사자들에게 낯선 이름이 아니다. 치료방법이 없는 말기 암환자들을 늘상 대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호스피스 봉사자가 되려면 죽음을 인생의 일부분으로, 삶의 한 과정으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말기 암환자와 그 가족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호스피스의 도움을 청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은 30대 초반의 여성 위암 환자 A 씨. 그녀는 암이 몸속 여러 곳으로 번졌고 항암제를 써도 상태가 계속 나빠졌다.
의사는 호스피스의 도움을 받을 것을 권했지만, 남편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항암제가 안되면 민간요법을 하겠다"며 아내를 데리고 병원 문을 나섰다.
하지만 의사의 눈에는`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끝까지 치료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남편의 다짐이 오히려 아내의 삶을 마지막까지 고통으로 이끄는 선택으로 보였다.
김창걸 신촌세브란스병원 호스피스 실장은 "치료를 고집해 환자를 고통으로 이끄는 나쁜 선택을 많이 봤다"고 말한다.
"불행하게 임종을 맞이하는 분이 많아요. 마지막까지 치료를 받다보면 호흡이 곤란해지는 상황이 오죠. 그러면 가족이 응급실로 모셔옵니다. 숨을 못 쉬니까 기관지에 관을 삽입해 인공호흡을 시키고 중환자실로 옮기죠.
그런데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으면 매우 고통스러워요. 그러니까 계속 환자를 재우죠. 중환자실은 면회도 제한돼 있고 면회시간도 30분입니다. 가족과 얘기할 틈이 없어요. 유언 한마디 못 남기고 돌아가시게 돼요."
`호스피스=사망선고'로 잘못 이해하고 식음을 전폐하는 환자도 있다.
남성 폐암 환자 B 씨는 암세포가 뇌와 뼈로 전이돼 더 이상 치료가 힘든 환자였다. 하지만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 증세가 잠깐이나마 호전되니까,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살았다. 이 때문에 항상 명랑했고, 의사를 믿고 따랐다.
그러나 의사의 눈에는 B 씨가 한달을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다. 의사는 B 씨에게 "간과 뼈에도 암세포가 퍼졌다"며 "호스피스 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게 좋겠다"고 권했다.
그 순간 B 씨는 모든 희망을 잃었다. 호스피스의 도움을 거부한 채 식음을 전폐했고 잠도 못 잤으며 2주만에 사망했다.
만약 B 씨가 죽음을 수용하고 아름답게 인생을 마무리했다면 남은 가족이 지고 가야할 삶의 무게는 훨씬 가벼웠을 것이다. 호스피스가 필요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60대 여성 췌장암 환자 C 씨는 마지막 삶을 아름답게 보낸 경우다.
평소 당뇨병을 앓던 C 씨는 당뇨 수치가 갑자기 높아져서 큰 병원을 찾았더니, 췌장암 말기 진단이 나왔다. 병원에서는 C 씨의 며느리에게 "가망이 없으니 집에 모시고 가라"며 돌려보냈다.
하지만 가족들 누구도 말기암이라는 것을 C 씨에게 말할 수 없었다. C 씨는 "나를 집에서 죽게 내버려 두려느냐"며 며느리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지친 며느리는 호스피스 봉사자를 불렀다. 봉사자는 몇차례 C 씨를 방문한 후 "임종을 준비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그 자리에서 C 씨가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불필요한 염려였다.
C 씨는 며느리를 불러 "그동안 너무 미안했다"며 며느리 손을 붙잡고 울었다. 아들도 불러, 평소 아들의 잘못을 용서하고 당신의 잘못에 대해서도 용서를 구했다.
평소 고된 시집살이로 C 씨를 원망했다는 며느리는 "어머니가 삶을 잘 정리하고 가셨기에 어머니에 대한 미움도 없어졌다"며 "어머니가 죽음을 준비하고 화해하시지 않았다면 아직도 어머니에 대한 미움을 가지고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삶을 아름답게 정리하는 환자들은 봉사자에게도 귀감이 된다. 신촌세브란스병원 암센터 호스피스 봉사자인 황혜선 씨(43)는 "호스피스 활동을 통해 배우는 게 많다"며 71세 남성 암환자에 대해 얘기했다.
"그 분은 `앞만 보고 가족들을 위해 돈을 벌려고만 했다'며 `그렇게 살아온 게 후회된다'고 하셨어요. `건강만 되면 봉사를 하며 살겠다'는 말씀을 늘 하셨어요."
실제로 이 환자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도 봉사자들을 배려했다. 황 씨는 "그 분은 늘 웃으려고 노력하고 아픈 모습을 안 보여 주시려고 했으며 저희에게는 `봉사하느라 힘드니까, 그냥 앉아 있으라'고 했다"고 회상했다.
황 씨는 6년 동안 호스피스 활동을 하면서 "돌아가실 때 모습이 너무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아름답게 돌아가시는 분이 있는가하면 끝까지 "내가 왜 죽어야 하나"며 원망하며 떠나시는 분도 있다고 했다.
임종의 순간까지 남편을 용서하지 못하는 암환자를 봤을 때는 가슴이 너무 아팠다고 했다.
"남편을 그렇게 미워했어요. `남편 때문에 암에 걸렸다'며 병문안도 못 오게 했어요. 돌아가실 때 남편이 `용서해달라'고 했는데, 끝까지 `용서한다'는 말을 못하고 떠나셨어요."
이제 4명중 한 사람은 암으로 죽는다. 말기 암에 따른 육체적 고통을 최소화하고 미움을 떨어낸 채 생을 마무리하는 게 최선이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이 바로 `호스피스'가 존재하는 이유다.
첫댓글 귀한 자료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_()_
호스피스는 '마지막까지 당신을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이라, 정말로 가슴에 와 닿는 말인것 같습니다. 그리고 호스피스는 마지막까지 함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작년 46세인 젊은 보살님께서 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병원에 입원하여 3개월동안 병실에 가서 기도를 해 드렸습니다.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지켜 드렸는데,
다인실에서 독실로 옮길때 조금은 불안한 모습도 있었지만 그동안 기도를 통해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드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스님 이제 가질것 같습니다'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스님 제 곁에 있어 주실꺼죠? 예 제가 마지막까지 보살님 곁에 있어 드릴것이고 그리고 아미타불을 마음에서 놓지 않으시면 함께 하여 주실꺼라'
했습니다. 마지막까지 아미타불을 하시면서 편안하게 임종 하셨습니다. 결코 가시는 길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도록 해 줌으로써 편안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임종을 맞을 수 있도록 하는것이 호스피스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자료 고맙습니다. _()_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마지막 배웅을 함께 해 주는 일은 정말 중요한일인것 같습니다. 누구나 갈길이지만 처음가보는 길이라 두려움이 더욱 큰것 같습니다. 그 길을 함께 해 주는 이가 있다면, 그길을 배웅해 주는 이가 있다면 좀더 편안하게 가실수 있을것 같습니다. 호스피스의 존재이유가 여기에 있는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