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맑다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영산강의 하류에 자리잡고 있음. 서쪽으로는 망월리와 연접해 있고 동으로는 영산강을 사이에 두고 영암군 학산면과 마주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간척사업이 이루어져 넓은 농경지가 있으며 현재는 주룡, 청호, 우비 3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고 총면적은 3.68㎢임.
주룡(住龍)마을 (청호1리)
대표성씨 :
羅州羅氏
지명유래 :
마을의 옛이름은 주변의 산세가 龍같고 영산강의 맑은 물을 본따「龍湖」라 하였으나, 지금의 이름인 住龍은 龍이 머무를 만한 곳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임란이후 나덕명(1551∼1611)이 입향한 후부터라고 함.
羅州丁氏 정용옥이 나주에서 1626년경 이곳이 이주해 왔으며 정착 후 어업을 주로 하였고, 그후 차츰 黃氏, 金氏등이 이주해 왔다고 함.
망월리
일로읍에서 가장 남쪽에 자리한 망월리는 청호리, 죽산리와 접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삼향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음. 옥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망월리는 망월동, 사양동, 비노촌 3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면적은 4.44㎢임
망월동(望月洞) 마을 (망월1리)
대표성씨 :
全州李氏, 利川徐氏
지명유래 :
마을 동쪽 망모산위로 달을 바라본다 해서 붙여진 이름
마을형성 :
全州李氏 이준마가 임진란(1592) 직후 경기도 양평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온 것이 처음이라고 전함
배출인물 :
- 이판호 : 전 영암군수
사양동(士良洞)마을 (망월2리)
대표성씨 :
全州李氏, 金海金氏
지명유래 :
어진 선비가 많았고 뛰어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
마을형성 :
인접해 있는 망월1리에서 全州李氏 이찬보가 1736년 분가 이주하여 형성 됨.
배출인물 :
- 이한수 : 전 면장
비노촌(飛鷺村) 마을 (망월3리)
대표성씨 :
全州李氏, 金海金氏, 仁同張氏
지명유래 :
마을앞에 있는 송도라는 작은섬에 백로가 자주 날아들었다 하여 마을이름도 여기에서 연유 됨.
마을형성 :
일로읍 의산리에서 이곳으로 처음 全州李氏 이성빈이 이주하여 정착
죽산리
산에 대가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의산리, 구정리와 이웃하고 서쪽으로는 삼향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음. 죽산리는 죽산, 양지촌, 당월촌, 도장포, 영화정 5개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면적은 7.42㎢임.
죽산(竹山) 마을 (죽산1리)
대표성씨 :
全州李氏, 金海金氏, 全州崔氏
지명유래 :
옛부터 이 마을에는 화살대가 많이 나서 죽고지라 하였는데 지금의 이름인 죽산으로 개칭된 것은 일로면 초대 읍장에 의해서라고 함.
마을형성 :
구전에 따르면 죽산마을은 임진왜란(1592) 이전부터 黃氏가 살고 있었는데 임란으로 폐촌이 된 후 全州李氏, 全州崔氏, 金海金氏 등이 점차 입주하였다고 함.
양지촌(陽芝村)마을 (죽산2리)
대표성씨 :
羅洲羅氏, 長興高氏
지명유래 :
양지에 많이 서식하는 芝草가 이 마을에서 많이 자생하여 유래 됨
마을형성 :
지금부터 400년전 당시 전남 광산에 살던 長興高氏 고처대에게 어명을 내려 지금의 이곳이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니 사방 30리를 다스리라는 명을 받고 정착하게 되었으며 지금도 이주 당시 심었다는 동백나무 2그루가 있음.
배출인물 :
- 나상동 : 조선대학교 교수
당월촌(堂月村) 마을 (죽산3리)
대표성씨 :
羅州羅氏, 羅州丁氏, 全州李氏
지명유래 :
마을 형상이 반달같고 동편에서 뜨는 달이 마을을 바로 비춘다하여 연유 됨.
마을형성 :
조선시대 말엽 이곳에 일로면사무소를 개소하면서 이주민이 늘어 났으며, 여기에 시장이 열리면서 거의 같은 시기에 약 18개 성씨들이 대거 정착하였음.
도장포(道壯浦) 마을 (죽산4리)
대표성씨 :
全州李氏, 晋州鄭氏
지명유래 :
마을의 옛이름은 장호였으나 마을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영친왕궁에서 축조한 제바으로 인해 도촌과 연결되면서 도장포로 개칭 됨.
마을형성 :
1650년경 全州李氏 이종우로 부친 이항을 따라 전북 남원으로 이거 했다가 전남 광산을 거쳐 현재 이곳에 정착하면서 형성 됨.
배출인물 :
- 이연호 : 전 변호사 - 이용수 : 전 여수중앙초등학교 교장 - 이윤주 : 부대 부사단장 - 이학주 : 로케트전기 이사장
영화정(永化亭) 마을 (죽산5리)
대표성씨 :
全州李氏, 海州吳氏
지명유래 :
마을형상 당시 누가 언제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영화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그후 마을이름도 영화정이라 하였음.
마을형성 :
최초 입향성씨는 全州李氏로 이진만이 대대로 살아왔던 영광 용사의 난(1592)을 당해 동생 종만과 함께 화를 피해 이곳으로 이주하여 정착 이로부터 10여년이 지나서 海州吳氏가 입촌 함.
배출인물 :
- 오병두 : 전 일로면장 - 오세면 : 전 일로면장 - 오세남 : 전 전남보사국장 - 오천석 : 서울남부지원 판사
구정리
아홉개의 우물이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의산리와 죽산리를 이웃하고 동쪽으로는 영산강변과 마주하고 있음. 구정리는 구정, 두무동, 숯굴의 3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면적은 5.34㎢임.
구정(九井) 마을 (구정1리)
대표성씨 :
全州崔氏, 晋州姜氏
지명유래 :
마을의 옛이름은 입향시조의 호를 따서 鳩亭이라 하였으나 현재의 이름으로 고친 것은 일제시대 때라고 함.
마을형성 :
全州崔氏인 최희창이 대대로 살아왔던 남원군 주천면에서 정유재란(1597)을 피해 이곳으로 이주하여 정착
배출인물 :
- 최영보 : 전 일로면장
두무동(斗武洞), 숯굴마을 (구정2리)
대표성씨 :
羅州丁氏, 全州李氏 , 全州崔氏
지명유래 :
마을의 형성초부터 한곳에 모여산 것이 아니라 이곳저곳에 흩어져 드문드문 살았다 하여 유래 됨.
마을형성 :
全州李氏 이화민이 일로면 망월리에서 이거해 왔는데 지금처럼 집촌이 아닌 듯 함.
의산리
어질고 의로운 사람이 사는 곳이라 하여 의산리라 이름하였던 이곳은 세상사를 풍자하여 노래했던 각설이 타령의 근거지이기도 함. 읍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펼쳐진 평야지대에 우뚝 솟은 仁義山의 주변마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의산리는 북쪽에 영화농장의 넓은 간척평야가 있으며 인의산, 산두, 돈도리, 무룡동, 내동, 소지 6개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면적은 6.03㎢임.
인의산(仁義山) 마을 (의산1리)
대표성씨 :
羅州羅氏, 全州崔氏, 密城朴氏
지명유래 :
인의산의 남쪽 기숡에 자리하고 있어 마을의 이름 또한 산이름을 따서 그대로 부르고 있음.
마을형성 :
羅州羅氏 나경의가 1680년경 나주에서 분가하여 이곳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곳에는 이미 淸州韓氏와 林씨 2세대가 살고 있었다고 함.
배출인물 :
- 나란수 : 전 병무청 징모과장 - 이 도 : 전 일로면장
산두(山頭)마을 (의산2리)
대표성씨 :
淸州韓氏, 羅州崔氏, 密陽朴氏
지명유래 :
마을의 인의산의 머리부분에 자리한다 하여 여기에서 유래 됨.
마을형성 :
인의산마을에서 淸州韓氏 한명숙이 분가하여 이곳에 터를 잡아 이루었다 하나 확실하지 않음.
돈도리(敦道里) 마을 (의산3리)
대표성씨 :
慶州鄭氏, 全州李氏, 金海金氏
지명유래 :
여러 성씨가 마을을 이루고 살기 시작하였는데 이들 성씨들이 서로 도우며 우대를 돈독히 하자는 의미에서 유래 됨.
마을형성 :
마을이 형성된지 오래되지 않았으며 약 70년전 영산강개발공사를 하게되자 차츰 인구가 늘어 큰마을을 이루게 됨.
무룡동(舞龍洞) 마을 (의산4리)
대표성씨 :
金海金氏, 全州李氏, 慶州鄭
지명유래 :
마을이 들어선 위치가 용이 춤추는 형상과 같다하여 부르게 된데서 유래됨.
마을형성 :
조선말기 金海金氏, 全州李氏, 慶州鄭氏 등 여러 유랑민이 龍의 형세를 이루고 있는 인의산 아래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 됨.
내동(內洞)·덕치(德峙) 마을 (의산5리)
대표성씨 :
金海金氏, 密陽朴氏 , 慶州李氏
지명유래 :
처음 마을에 터를 잡고 있던 사람이 德으로서 주민을 다스리고 德으로 이웃마을까지 교화한다 하여 덕치라 함.
마을형성 :
입향사실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조선 선조년간(1567∼1607)에 김해김씨와 전주이씨가 처음 들어와서 정착.
소지(小池)마을 (의산6리)
대표성씨 :
金海金氏, 密陽朴氏 , 海州吳氏
지명유래 :
마을에는 옛부터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작은 우물이 있어 마을이름 또한 우물에서 비롯되었음.
마을형성 :
지금부터 350여년전 密陽朴氏와 金海金氏가 처음 들어와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하나 확실하지 않음.
월암리
읍 소재지가 자리한 곳이며 호남선을 비롯하여 각 지역으로 통하는 도로망이 이곳을 지나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함. 달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월암이란 지명이 유래되었으며 황우동, 신흥 덕산, 월암, 강남산, 부흥정, 다복동, 중앙동, 연소동, 읍동 10개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면적은 3.17㎢임.
황우동(黃牛洞) 마을 (월암1리)
대표성씨 :
金海金氏 , 全州李氏, 密城朴氏
지명유래 :
마을의 생김새가 황소가 앉아있는 형국이라 하여 유래 됨.
마을형성 :
마을의 역사는 조선시대 驛과 驛을 연결하는 院(황우원)이 있었던 곳으로 전함.
배출인물 :
- 박병언 : 전 일로면장 - 노동환 : 전 일로면장
신흥(新興)마을 (월암2리)
대표성씨 :
金海金氏 , 全州李氏, 利川徐氏
지명유래 :
월암리가 1971년에 1·2리로 나누어지면서 마을이름도 신흥이라 함.
마을형성 :
상인들이 모여들면서 마을이 시작되었고 1971년 월암1리에서 분리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음.
배출인물 :
- 박병윤 : 목포교육청
덕산(德山) 마을 (월암3리)
대표성씨 :
咸平李氏, 金海金氏 , 全州崔氏
지명유래 :
옛날 이 마을의 지명은 해인동이라 불렀으나 풍수지리에 능한 사람이 이르길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 德이 있다하여 유래 됨.
마을형성 :
200여년전 咸平李氏 이건직이 나주에서 이거한 것이 처음이라 하나 자세하지 않음
월암(月岩) 마을 (월암4리)
대표성씨 :
羅州丁氏, 全州李氏, 풍천任氏
지명유래 :
마을에 달처럼 생긴 바위가 있기에 마을이름도 달바우 또는 월암이라 함.
마을형성 :
입향유래가 밝혀진 성씨는 羅州丁氏 정봉원이 1886년경 무안군 삼향면에서 이곳으로 이거한 사실 밖에 알수 없으며, 이거 당시 노씨, 金氏, 任氏 등이 선주민으로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함.
강남산(江南山) 마을 (월암5리)
대표성씨 :
密陽朴氏 , 利川徐氏, 金海金氏
지명유래 :
옛날에 이 마을에는 영산강물이 밀려 들어온 곳이기도 하였다하며 강남의 남쪽에 자리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
마을형성 :
읍의 중심지로 상가가 들어서기 전 이곳에 정착했단 성씨들로 羅州丁氏, 利川徐氏, 金海金氏, 密陽朴氏 등이 살고 있었다고 함.
배출인물 :
- 양동관 : 전 면장
부흥정(復興亭)마을 (월암6리)
대표성씨 :
金寧金氏, 密陽朴氏 , 大邱高氏
지명유래 :
마을이 형성될 당시 피폐했기에 마을이 다시 일어서라는 뜻으로 부흥정이라 하였음.
마을형성 :
金寧金氏 김시걸이 전북 남원에서 숙종(1674∼1720)년간에 영암 아산으로 이주하였으나 기사사화(1689)를 맞아 시걸의 아들인 김항추가 이무렵 영암에서 이곳으로 옮겨 터를 닦게 되었다고 함.
다복동(多福洞)마을 (월암7리)
대표성씨 :
金海金氏 , 密陽朴氏
지명유래 :
가난한 부부가 늦게 아들을 낳은 후부터 살림이 늘자 아들 이름을 다복이라 하였고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 부자가 된다고 하여 다복동이라 함.
마을형성 :
이 마을에 어떤 성씨가 언제 들어왔는지 알수 없으나 전해오는 얘기 어느 노부부가 이곳에 정착하여 자식을 얻으니 재산이 늘게 되었고 점차손이 늘어 마을을 이루었다고 함.
중앙동(中央洞)마을 (월암8리)
지명유래 :
92년에 월암2리에서 나누어지면서 마을이름도 중앙동이라 함.
마을형성 :
월암2리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분구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음
연소동(蓮小洞)마을 (월암9리)
지명유래 :
92년에 월암6리에서 나누어지면서 마을이름도 중앙동이라 함.
마을형성 :
월암6리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분구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음
읍동(邑洞)마을 (월암10리)
지명유래 :
94년에 월암5리에서 나누어지면서 마을이름도 중앙동이라 함.
마을형성 :
월암5리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분구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음.
용산리
산세가 용처럼 생겼다 하여 용산이라 하였으며 호남선과 811번 지방도로를 접하고 있음.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다시 무안군에 편입되었으며 인동, 농장, 평정, 백호동, 연화동, 월성 6개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면적은 3.41㎢임.
인동(仁洞) 마을 (용산1리)
대표성씨 :
海州吳氏,利川徐氏
지명유래 :
마을 뒷산이 용의 형상이고 마을앞 우물에서 용이 승천하니 주위의 어진 사람들이 오여사는 곳이라 하여 인동이라 함.
마을형성 :
海州吳氏 오한규가 1748년경 삼향면 남악에서 분가 이주해와 마을을 이루게 되었음.
배출인물 :
- 오한규 : 의금부도사
농장(農場)마을 (용산2리)
대표성씨 :
金海金氏, 慶州鄭氏, 利川徐氏
지명유래 :
마을의 형상이 지네의 머리모양과 같다 하여 공수동이라 하였으나 그후 영화라는 일본인이 영화농장을 세워 농장이라 유래 됨.
마을형성 :
金海金氏로 무안군 삼향면 임성에서 온 김두훈이 살게 되면서 형성 됨.
평정(平亭) 마을 (용산3리)
대표성씨 :
平山申氏, 金海金氏, 咸豊李氏
지명유래 :
마을의 넓은 평야에 자리잡고 있기에 평정이라 함.
마을형성 :
자세한 입향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전하는 바로 平山申氏가 경상도에서 이곳에 정착하면 자손이 번창하게 될 형국이라 하여 터릅 잡게 되었다고 함.
백호동(白湖洞) 마을 (용산4리)
대표성씨 :
羅州丁氏, 慶州鄭氏, 全州崔氏
지명유래 :
마을형국이 황새모양이라 하여 마을이름을 황새밥통이라 하였는데 1928년경 정달선이라는 사람이 황새는 물을 좋아한다 하여 백호동이라 함.
마을형성 :
처음 이마을에 입향한 성씨는 羅州丁氏로 1914년 무안에서 온 정귀섭이 이곳으로 이거하게 된 계기는 불분명하나 전해지는 얘기는 지형이 좋고 농사에 적합한 곳이라 정착했다 함.
연화동(蓮花洞) 마을 (용산5리)
대표성씨 :
平山申氏, 務安朴氏
지명유래 :
마을 어귀에 조그마한 연못에서 피어나는 연꽃이 매우 아름답기에 연화동이라 하였음
마을형성 :
영화농장의 넓은 간척평야를 중심으로 하여 마을을 이루게 되었는데 처음 정착했던 사람은 平山申氏 신운채로 1880년경 경상도 평산에서 이주하였다 함.
월성(月星)마을 (용산6리)
지명유래 :
99년 11월 용산3리(평정마을)에서 분구하였으며 달과 별처럼 빛나는 인물이 나온다하여 붙여진 이름.
마을형성 :
용산3리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분구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음
배출인물 :
- 이재현 : 민선자치 1·2기 무안군수
산정리
정자나무가 많이 있어 산정이라 하였으며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다시 무안군에 편입되었으며 산정, 방뫼, 도덕지 신원목 4개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면적은 3.40㎢임.
산정(山亭) 마을 (산정1리)
대표성씨 : 羅州丁氏, 金海金氏 지명유래 : 다산 정약용선생이 산에서 머물렀다하여 마을이름을 처음 山在라 하였으나 지금 이름인 산정으로 바뀐 연유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 수 없음. 마을형성 : 다산 정약용(1762∼1863) 선생이 유배길에서 잠시 이곳에 머물렀는데 당시 다산을 흠모했던 晋州鄭氏와 金海金氏등 여러성이 다산을 배알한 후 이곳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고 함.
방뫼(防山)·학두리(鶴頭里)마을 (산정2리)
대표성씨 : 密陽朴氏, 金海金氏, 羅州林氏 지명유래 : 옛날에 벼슬을 한 어느 길손이 이곳에서 쉬어가다 매화꽃이 만발한 좋은 경치를 보고 방매(芳梅)라 불렀으나 지금은 방뫼(芳山)로 부르고 있으며, 학두리는 마을주변 지형이 나르는 학의 형태로로 마을의 위치가 학의 머리부분에 있다하여 학두리라 칭함. 마을형성 : 입향유래는 알 수 없지만 130여년전 金海金氏, 羅州林氏를 비롯 여러성들이 모여살게 되었다는 말만 전해지고 있음.
도덕지(道德地) 마을 (산정3리)
대표성씨 : 密陽朴氏, 金海金氏, 利川徐氏 지명유래 : 마을앞의 논이 밥상모양과 같이 생겨 마을민들이 항상 衣食을 걱정하지 않는 부자마을이며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어 지나가는 길손에게 덕을 많이 베푸는 마을이라 하여 도덕지라 함 마을형성 : 영화농장의 주변에는 신흥마을이 많다. 도덕지 또한 이 가운데 하나이며 마을의 시작은 100여년전 영화농장의 넓은 간척평야를 대상으로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함.
북서쪽으로 몽탄면 양장리와 접하며 남서쪽으로는 호남선과 811번 지방도로가 가로지르고 있음. 넓은 반석이 있다하여 광암 또는 반동이라 불리며 광암, 등림, 진사동, 금태 4개마을로 이루어져 있고 총면적은 1.98㎢임.
광암(光岩) 마을 (광암1리)
대표성씨 :
羅州林氏 , 利川徐氏
지명유래 :
마을 뒷산에 넓은 바위가 있어 이 바위에서 마을일을 의논하고 흥겹게 놀았으며 낮에는 햇빛이 유난히 빛이나 마을이름을 광암이라 함.
마을형성 :
입향유래나 마을의 형성과 관련된 사실이 자세하지 않지만 전하는 바로는 약 200여년전 林氏, 徐氏, 朴氏 등이 입주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함.
배출인물 :
- 임경주 : 전 일로면장
등림(登林)·진사동(進士洞)마을 (광암2리)
대표성씨 :
羅州丁氏,驪陽陳氏, 道康金氏, 利川徐氏
지명유래 :
마을 뒷산에 숲이 우거져 있어 이곳에서 마을 어른들이 자주 마을일을 의논하며 여러 성씨가 의좋게 지내므로 등림이라 부르게 되었음. 또 마을이 등잔에 불을 켜놓은 것 같이 생겼다 하여 등림이라고 하며 진사동은 숲이 우거진 초당에서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닦아 진사를 많이 배출했다하여 진사동이라고 함.
마을형성 :
입향유래는 알 수 없지만 500여년전 羅州丁氏, 道康金氏, 驪陽陳氏 등이 숲의 울창함과 농사짓기에 알맞는 곳이라 하여 터를 잡았다고 함.
배출인물 :
- 정용진 : 전 일로면장
상신기리
광암리, 복용리와 연접하는 상신기리는 북쪽으로 몽탄면 당호리와 연접하며 서쪽으로는 811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음. 새터몰이라는 곳의 위쪽이 되므로 웃새터 또는 상신기라 불리며 상신, 환학동 2개마을로 이루어져 있고 총면적은 1.52㎢임.
상신기(上新基) 마을 (상신기1리)
대표성씨 :
慶州鄭氏, 金海金氏, 仁同張氏
지명유래 :
처음에 마을이 형성되었을 때 백연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일로읍의 가장 위쪽에 위치하였고 또 새로운 터라 하여 상신기라 함.
마을형성 :
마을이 형성된지는 약 300여년이 됐다 하나 이에 대한 근거가 희박하여 확실하게 유래를 밝히기 어렵지만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마을이 형성될 때 입주했던 성씨로 경주정씨, 인동장씨 등이었다고 하며 지금도 이들 성씨들이 다른 성에 비해 많이 사는 편임.
환학동(喚鶴洞)·중촌(中村)·신정동(新正洞)마을 (상신기2리)
대표성씨 :
利川徐氏, 羅州文氏, 全州李氏, 羅州林氏, 大邱高氏, 羅州羅氏
지명유래 :
옛날 마을 뒷산에 학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새끼의 먹이를 구하러 갔던 학이 돌아오지 아니하여 다시 돌아오라고 불렀던 곳이라 하여 유래 됨.
마을형성 :
조선조 말엽 利川徐氏와 南平文氏 등이 들어와 정착하면서 마을을 형성하였다는 내용외에는 자세하게 전하는 바가 없음.
복용리
지형이 용의 형상이라 하여 복용 또는 복용촌이라 하였으며 우리군의 자랑인 회산백련지가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 마을이며 복용촌, 회산, 사교, 양두, 두레미 5개마을로 이루어져 있고 총면적은 8.70㎢임.
복룡촌(伏龍村) 마을 (복용1리)
대표성씨 :
密陽朴氏, 金海金氏
지명유래 :
마을 뒷산의 형상이 용이 엎드린 것과 같다하여 유래 됨.
마을형성 :
密陽朴氏 박세철(1670∼1750)이가 나주에서 분가하여 이곳에 정착하여 자손을 늘려간 것이 마을의 시작이다
현재 살고 있는 마을민들은 마을의 형성유래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지만, 처음 마을에 입향한 성씨는 螺舟林氏 임서로 광해조의 난정에 대해 개정의 방책을 간하여 상주목사에 제수된바 있다. 그는 조상대대로 살아왔던 나주 회진에서 이곳 회산에 관해정을 짓고 말년을 보냈는데 후손들이 계속 이 마을에 살게 되었다고 함.
사교(沙橋)마을 (복용3리)
대표성씨 :
密陽朴氏, 達城裵氏
지명유래 :
마을이 형성될 당시 마을 어귀에 냇가가 있었는데 이곳에 많은 모래가 쌓여 다리처럼 생겼다 하여 마을 이름도 사교라 함.
마을형성 :
密陽朴氏 박한용이 1750년경 나주에서 이주한 것이 처음이며 이후 達城裵氏를 비롯 소수의 여러 성씨들이 이거해와 마을이 형성 됨.
배출인물 :
- 박하일 : 전남대 교수 - 박창표 : 전 일로면장
양두(羊頭)마을 (복용4리)
대표성씨 :
達城裵氏
지명유래 :
원래는 섬으로 섬의 형태가 염소가 호수위에 앉아있는 형상이라 하야 유래 됨.
마을형성 :
양두는 영산강 하류에 자리한 조그만 섬이었으나 회산과 다리를 놓아 능지화 되었으며 이곳에 처음 들어왔던 성씨는 達成裵氏로 배윤우가 정착하여 형성 됨.
배출인물 :
- 배맹진 : 전 일로면장 - 배무남 : 서울일신제강 이사
두래미(頭來米)마을 (복용5리)
대표성씨 :
大邱高氏 , 金海金氏, 慶州裵氏
지명유래 :
마을이 형성될 당시 마을앞에 있는 바닷가에 두루미가 많이 모여들고 있었는데 그 자리가 남쪽이라 하여 두남리라 하였으나 현재 두래미로 불리고 있음.
마을형성 :
구전으로 인근 회산마을에서 분가하여 정착하였다는 말이 있을뿐 자세한 유래는 전하지 않음.
지장리
지장골 또는 지장동이라 하고 광암리, 월암리, 감돈리와 이웃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몽탄면 봉명리와 연접하고 있음 대절, 송태, 청금성 3개마을로 이루어져 있고 총면적은 3.01㎢임
대절(大節) 마을 (지장1리)
대표성씨 :
順興安氏, 務安朴氏
지명유래 :
옛날에는 죽림속에 절이 있다하여 대사라 하였다가 후에 큰 스님이 도를 닦았다하여 큰절이라는 뜻에서 대절이라 함.
마을형성 :
임란(1592)때 이무신 휘하에서 전공을 세운 順興安氏 안억국에게 명하여 이곳에 살게 하였다는 말이 전해오나 확실하지 않으며 입향 사실이 밝혀진 바로는 務安朴氏 박민구가 조선 정조대에 경기 음죽에서 처음 나주 죽곡으로 이거했다가 다시 지금의 대절마을에 정착하였다는 기록이 있음.
송태(宋太)마을 (지장2리)
대표성씨 :
金海金氏, 密陽朴氏
지명유래 :
마을 뒷산의 지형이 봉황이 나는 형상이고 마을터가 정자형이라 하여 당시에는 덕정이라 하였으나 일제시대 송씨들이 많이 들어와 송태라 개칭하였음.
마을형성 :
구전에 따르면 金海金氏 김충억이 경상도 영주에서 이곳으로 유배되어 南陽洪氏의 딸을 맞아 정착하게 되었다고 전함.
청금성(靑衿城)마을 (지장3리)
대표성씨 :
密陽朴氏, 全州李氏, 利川徐氏
지명유래 :
마을의 형상이 여인들의 옷깃 같다하여 청금성이라 부름
마을형성 :
密陽朴氏 박정수로 남원군 주생면에서 병자(1636)난을 맞게되어 남하하여 이곳 청금성에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고 전함.
감돈리
일로읍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감돈리는 북동쪽으로는 몽탄면, 북서쪽 으로는 청계면 월선리와 서남쪽으로는 삼향면에 접하고 있음. 감돈과 선돌마을이 자리잡은 감돈리는 총면적이 4.14㎢임.
감돈(甘豚) 마을 (감돈1리)
대표성씨 :
南陽洪氏 , 利川徐氏, 金海金氏
지명유래 :
마을 뒷산의 산세가 험하여 은신하여 살기가 좋아 “돈”자를 써 마을이름을 감돈이라 함.
마을형성 :
南陽洪氏 홍치선은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경기도 남양에서 임진 (1592)을 맞게 되자 난을 피해 이곳 마을에 입향하여 정착하였음.
선돌(立石)마을 (감돈2리)
대표성씨 :
南陽洪氏 , 慶州鄭氏
지명유래 :
마을 가운데 세워진 돌에 의해서 마을이름을 선돌 그대로 부르고 있음.
마을형성 :
선돌마을은 작은 들을 사이에 두고 감돈마을과 마주하고 있는데 터를 잡게된 것도 감돈마을에 처음 입향한 南陽洪氏 후손들이 분가 하였다고 전함.
첫댓글 좋은정보감사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내가풍수로서 할일을 탈렌트 자네가해주에서 고맙네 다음기회에 나도힘써봄새.
당연히 지역에 살면서 고향소식 드려야 겠지라우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