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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 |
성명 |
생몰년대(生沒年代) |
전거(典據) |
발행년도 |
학통 및 관계 |
1 |
具鳳齡 |
1526~1586 |
柏潭선생문집 권9 雜著 墓表 |
1670 |
퇴계문인 |
2 |
權文海 |
1534~1591 |
大東韻府群玉 권1~20 |
1989 완성 1813 간행 |
퇴계문인 |
3 |
權 부 |
1589~1671 |
海東雜錄 권 3,4,6 |
17세기중엽 |
권문해의 子 |
4 |
李 魯 |
1544~1598 |
松巖先生文集 |
1852 |
曺植 문인 |
5 |
文景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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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祖實錄 上疏文 宣祖修正實錄 |
1602년 12월20일조 |
영남인 생원 정인홍 문인 |
6 |
崔 睍 |
1563~1604 |
認濟集 권12 題車原頫雪寃記後 一善志 別集 雜著條 |
인제집1778 일선지1618 |
김성일 鄭 逑 문인 |
7 |
柳夢寅 |
1559~1623 |
於于集 於于野談 車植神道碑銘 |
1832 |
北人 |
8 |
金 烋 |
1597~1683 |
海東文獻總錄 |
1637 |
退溪 文人 |
9 |
尹舜擧 |
1596~1668 |
魯陵志 |
1663 |
金長生 文人 |
10 |
尹 抍 |
1620~1638 |
明濟先生遺稿 卷1 |
1732 |
小論 |
11 |
李邦俊 |
1573~1654 |
混定編錄 文景虎 上疏 要約 |
17세기 중엽 |
成 煇 文人 |
12 |
李 우 |
1629~1690 |
冶隱先生拾遺 |
1615 重刊 |
宋時烈 文人 |
[설원기]는 위작으로 판단되며, 동시에 이 문건을 소유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車軾(1517~1575) 차천로는(1556~~16150)는 개성지방에 근거를 두고 서경덕(1489~1546)에게 직접 수학한 문인들로 花潭學派라 할 수 있다.
단편적이나마 그들의 문집에 남아 있는 인물들과의 교유관계를 살펴보면 차식은 전우치 양사엄(1517~1584)과 교유했던 흔적이 보이고 차천로는 <오산집>, <오산운림초고>에서 韓石奉(1513~1605), 등 여러 명의 인사들과 관계를 맺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설원기]에 대한 언급의 흔적이 없고, 구봉령, 권문해, 최현 등의 퇴계문인들이 집거하고 있던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설원기]가 확산되어 갔다고 생각된다.
퇴계 문인인 權文海(1534~1591)의 <大同韻府郡獄>에서 172권의 문헌 중 수록된 여러 문헌중의 하나로 [설원기]-박팽년 찬집, 현재 남아 있는 필사본의 필사시기를 확인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초기의 필사본 모 습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생각된다.
이 후 李魯(1529~1598), 柳夢寅(1559~1623), 崔晛(1563~1640)등의 서적에서 관련된 내용을 였 볼 수 있다. 한편 柳夢寅이 차식 부자와 긴밀한 교유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언급하고 차천로, 차운로의 문체가 뛰어나고 차식은 효성스럽고 덕이 있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유몽인과 차식 등과의 긴밀한 관계 및 [설원기]의 수용은 1619년 그가 지은 차식의 신도비명에서 종합적으로 구현 되었다.
최현은 <一善志>에서 하위지의 [설원기] 서문을 함께 실었는데 서문을 작성한 날짜는 생략하였고 필사된 것을 보고 그 자신이 일정부분을 가감 요약하여 실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게 퇴계 문인에서 조식 등 영남지방 중심으로 읽히기 시작한 이후 [설원기]는 尹舜渠, 尹抍, 李翊 등을 통해 노, 소론의 근거지인 기호지방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尹舜擧는 皇甫仁이 차원부의 설원을 주청했던 것과 차원부가 정도전 등에 죽임을 당하 것을 저서에 수록하였고 李翊도 차원부 집안이 멸문의 지화를 당했음을 언급하였다. 이렇게 필사 되면서 차원부의 죽음과 이야기들이 사람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고 그 간행은 차원부의 후손들이 주도하여 활자화 되었다.
3. [雪冤記]의 이본과 그 간행
필사본이 유통된 이후 [설원기]는 1708년부터 [諫議大夫車原頫雪寃記], [車文節公遺事], [雲巖先生雪寃錄]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출간되기에 이르렀다. 그 간행은 문중별로 족보의 간행과 함께 혹은 비슷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번호 |
간행년도 |
족보 간행 |
[설원기] 간행 |
1 |
1708 (숙종 34년) |
平山 星老手段權勢譜 |
간의대부 차원부설원기 |
2 |
1760 (영조 36년) |
河東 錫良修二卷波譜 戊寅譜 |
간의대부 차원부설원기 |
3 |
1764 (영조 40년) |
大興 彦甫三卷波譜 甲申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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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1769 (영조 45년) |
寧邊 鳳轅修三卷世譜于金天 己丑譜 |
金天板이 기록 |
5 |
1781 (정조 5년) |
瑞興 載輔修三卷波譜 辛丑譜 |
瑞興板이 기록 |
6 |
1791 (정조 1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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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문절 공유사 |
7 |
1802 (순조 2년) |
用川 信用修十一卷世譜于順天 壬戌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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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1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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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선생설원록 |
1700년대부터 여러 곳에서 간행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1) 필사본[雪寃記]
오래된 필사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車原頫雪寃記]로 뒤편에는 류몽인이 작성한 차식신도비명이 합본, 상권은 가정대부 행형조참판 박팽년이 1456년 5월17일 記를 작성하고 가정대부 행형조참판 하위지가 1456년 5월21일 서문을 쓰고, 하권은 48명이 남긴 응제시가 개인에 따라 한 수 혹은 두 수가 실려있다.
초기 단계의 필사본은 아니지만 현재 전해지는 [설원기] 판본들 중 가장 완벽한 체제를 갖추고 있다.
2) [諫議大夫 車原頫 雪原記]
필사본으로 유통된 [설원기]가 목판으로 처음 간행된 것은 1708년(숙종 34년)인데 구봉령의 문집에서 사료로 확인된 이후 약 120년이 지나고 연안차씨의 족보가 최초로 간행된 시기로 차원부의 12세손 차성로 주도로 [설원기] 이루어졌다. 차성로는 魯山君이 상왕으로 있을 때 박팽년에게 명하여 차원부 [설원기]를 작성하도록 명하였고 이와 같이 필사된 [설원기]를 소유하고 있었을 거라 생각된다.
이후 1760년(영조 26) 차원부의 14세 손 차석우가 河陽處舍에서 木活字本으로 중간하였다. 발문에서 [설원기]가 오래되어 낡고 닳았으므로 다시 간행하려는 목적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날짜가 1455년 5월 17일 박팽년이 記를 쓰고 1455년 5월21일 신석조가 서문을 완성한 것으로 변화되었다.
1708년 초간된 판본속의 시 7수가 동일한 것으로 보아 문중내에서 또 다른 필사본을 소유하고 있었을 듯 하다.
3) 1768, 1781년 판본
1925년 판본에서 1768년(영조 44)과 1781년 김천 판본, 서흥판본을 언급하고 있어 [설원기]가 족보간행과 동시에 이루어졌고 장소와 간행처가 동일한 것으로 볼 때 평안도 금천, 황해도 서흥, 함께 간행 시켰을 추론이 된다.
4) 차문절공유사(車文節公遺事)
1791년 (정조 15)에는 규장각 운각본(芸閣本)으로 2권1책의 [차문절공유사]가 간행되었다. 차원부의 13세 손 차석주가 순천에서 1748년(정조 1)간행하였다. 1456년 5월 17일 박팽년이 撰者, 서문은 하위지가 등장하며 1760년 중간된 판본과 큰 차이를 보이l고 있다.
앞서 1760년의 [諫議大夫車原頫雪寃記]의 존재는 알고 있었고 1768, 1781년 판본을 소유했거나 혹은 다른 이본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1789년(정조 13)차원부를 배향한 오천서원(鰲川書院)이 세워진 후 운암사우중건시고토지축문(雲巖祠宇重建時告由土地祝文), 운암사우춘추향죽문(雲巖祠宇春秋祝文), 운암사우봉안제문(雲巖祠宇奉安祭文)의 글이 이 판본에 실린 것으로 생각된다. [차문절공유사]는 두 차례에 걸쳐 간행이 이루어졌다.
5) [雲巖先生雪冤錄]
1900년대에 이르러 간행되기 시작하여 1918년에는 3권1책의 목활자본이 완성되었다. 辛亥년의 [車文節公遺事]를 저본으로 하였기 때문에 내용, 체제면에서는 동일하다. 1925년 목판본 [운암선생설원록]이 2책으로 간행되었다.
[설원기]는 오랜기간 필사되고 난 후 차원부의 후손들이 여러 지방에서 간행을 지속시켰고 이 후 유통되는 과정에서 그 내용이 확산될 수 있었다.
4. [설원기] 내용 검토
[설원기]의 내용 중 위작이라 판단할 확실한 부분은 무엇인지, 내용 중 문제가 되는 점을 간략히 지적해보고자 한다.
차씨의 서얼들이 그들의 신분 출신이 족보에 기록된 원한으로 족보를 불태웠다는 것인데 “이수건은 차씨와 류씨가 同祖일리 없으며 족보를 불태운 것은 한국 족보사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평가 하였다.”
1432년(세종 14년) 撰된 [세종실록지리지], 1486년(성종 17년) 편찬된 [東國輿地勝覽]에서도 문화류씨는 황해도 풍천군 문화현의 來姓으로, 연안차씨는 沿岸都護府의 村落姓으로 기록되어 있어 두 성의 관련성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
[설원기]의 위작 여부와 관련된 다른 문제는 응제시를 지은 40여 명의 인물 중 중 박팽년이 살아 있을 때 쓸 수 없는 인물이 있다는 점이다. 남효온은 3살에 불과하고 결격자가 11명에 이른다. 1791년 48명에서 44명으로 축소되었다.
정사(正史)와 상반되는 전개도 [설원기]의 사실을 의심하게 만든다. 차원부는 방원을 지지하는 입장이였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하륜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록은 태조가 원년에 이미 방석을 세자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설원기의 내용을 믿었던 사람들은 이를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기록에 남기고 있거나 저사(儲嗣)를 도운 차원부의 공훈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의 활동 이력은 정사에서 전혀 확인 할 수 없는데 태조가 그를 불러 정언(正言)에 제수하였다고 하는 것은 태종 2년에서야 정언으로 바뀐 것으로 서술자체가 불가능하며 評議朗中은 후대에 꾸며낸 것으로 판단된다.
5. [설원기] 내용의 확산과 반응
이상의 문제점을 화인해 보면 [설원기]는 차식 등이 생존한 16세기 후반에 그 전반적인 줄거리가 완성되어 후에 유통된 것으로 보인다. 읽는 주체들의 다양한 목적과 의도하에 확산되어 ① 전혀 의심하지 않고 ② 위작임을 문집에 기록하였고 이 문집을 읽은 독자가 [설원기]에 대해 반응하는 후대의 모습 ③ 위작임이 언급된 뒤에도 또 다른 한편에서는 사실로 유통되어 가는 양상으로 구분할 수 있다.
1565년(명종 20년) 발간된 문화류씨 가정보(嘉靖譜) 이후의 문화류씨 족보편찬에도 [설원기]가 큰 영향을 미쳐 족보 발간의 편찬자들 역시 이후 족보를 간행하면서 嘉靖譜 이전의 세계(世系) 즉 고려시대 개국공신 柳車達이전의 선대 세계를 그려낼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문화류씨 족보는 고려 개국 공신 柳車達을 시조로 하고 있고, 그 다음 세대는 柳孝金 아들 한명 뿐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 [설원기]에서는 차원부의 선대를 류차달의 후예로 상정해 놓고 이예장의 응제시 주석부분에서 그 내력을 설명 한 뒤 류차달의 큰아들 효전에게는 車성을, 둘째아들 효금에게는 柳성을 쓰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정보(嘉靖譜) 다음 발간된 1689년(숙종 15년) 乙巳譜에 문화류씨원파기와 이예장의 글이 확인되는 것으로 알 수 있고 幼學 류처후(柳處厚)가 간행한 기사보(己巳譜)는 [설원기]의 계보와 거의 일치하고 있으며 그 내용이 그대로 수용되어 있다.(*류처후가 원파기(源派記)에 심한 의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후대 편찬에는 이를 그대로 기록되었다)
1768년 간행되는 사이에는 위작설(僞作說)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남극관(南克寬 !689~1714)의 몽에집{夢囈集} 잡저(雜著)편에 [설원기]가 비루하고 교만하며 위작되었다고 처음 판단하였다.
차천로가 문조가 있으나 차식(차원부의 6세손)이나 그 선대에서 족보를 넓히고자 하는 목적 때문에 성삼문 등의 봉교(奉敎)에 기탁하여 꾸며낸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이익(李瀷 1681~1783)은 [설원기]속 내용을 의심하면서 어디서부터가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분간하기 모호하지만 하륜이 80명에게 멸족당했다는 사실을 고증하고 차원부의 7세손임을 언급하였다.
홍계희(洪啓禧 1703~1771)는 1768년(영조 14년) 하위지 유고집을 간행하면서 [설원기(雪寃記)]가 위직임을 언급하고 서문을 싣지 않았다.
윤광소(尹光紹 1708~1786)는 선조인 윤중의 문집에 실린 [설원기]의 내용은 위작이라고 자기 문집에 싣지 않았다.(*“[차원부 설원기] 또한 위작이라 말한다. “내가 말하길 지난해에 남학명의 아들 남극관이 찬한 {몽예집}을 보니 또한 설원기를 말하였다. 육신제공(六臣諸公)이 지은 것이 아니라 차천로 부자 형제가 위작(僞作)하여 세보(世譜)를 넓히고자 함이라 하였다.”) 黃尹錫은 [설원기]를 읽었던 기억을 바탕으로 차천로 부자가 위작하여 그 세보를 넓히고자 하였다고 하였다.
위작설이 흘러 나왔지만 [설원기] 초기 필사본 단계에서부터 의심하지 않고 확산되었기 다른 한 편에서는 그대로 인용되어 사실로 확대 초기 타 문중의 족보 간행과 유통되었다.
이긍익(李肯翊1736~1863)은 {연예실기(練藝實期)} {세종조고사본가(世宗朝故事本家)}에 차원부와 관련된 이야기를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설원록} {해동잡록}을 전거로 차원부의 설원, 세종조의 相臣 皇甫仁 항목에 그대로 실었다. 여러 자료에서 인용한 형태이기 때문에 사실 여부를 판단하고 싣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박제가(朴齊家1750~1805), 申景濬(1712~1741~1791)은 저술에서 [설원기]를 의심하지 않고 실은 것으로 보인다.
서총대(瑞蔥臺) (차원부기 씨를 뿌렸다는 이야기) 설화가 柳夢寅의 車軾神道碑銘에 기록된다.
[설원기]에 실린 응제시들이 조선 초기 선조들의 문집을 간행하려 한 후손들에 의해 각 문집속에 실리고 있다.
[설원기]는 한 눈으로 살피면 의심하지 못할 만큼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어 그대로 유통되었다. 단종대에서 세조대에 활약했던 名臣들이 차원부를 위해 설원하는 일련의 스토리는 유통시키는 주체의 목적, 흥미에도 부합되었기 때문에 그 확산이 가능하였다.
6. 16세기~17세기 [雪寃記]의 유통과 차씨 일가
차윤덕(車熙胤)이 1526(중종 2) 급제 뒤 관직에 진출한 후로는 가문을 현양(顯揚)시킬 인재를 배출하지 못한 상태였다. 문장으로 명성을 쌓은 차식부자가 등장하였으나 한미한 가계로 벼슬길이 소외된 개성 지방을 근거지로 둔 이중적 경계에 놓여 있었던 인물이였다.
차식은 牙州李氏 계원(繼元)의 여와 혼인하였는데 그 아들들은 뛰어난 문장력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차천로는 임진왜란으로 처를 더렵혔다고 버리고 종실의 처를 취하는 문제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차식 등이 속한 화담 학파는 신분이 미천하거나 불우한 인물들이 많았다. 그의 아들들은 불우한 처지를 드러낸 시를 많이 지었고 행실의 부정적인 면모에 대한 서술이 많이 등장하고 30세 때 선조가 주관한 親試에서 부정한일로 유배되고 그가 유림 사회에서 부정적 평가를 받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설원기]가 차씨 집안에서는 가문의 정체성을 들어내는 계기가 되고 선대의 조상을 문화류씨와 동조로 인식하였고 류차달의 아들 곧 연안차씨 시조인 차효전 이하의 ‘내외손’을 10세인 차중규 이후의 左右祖를 인척관계를 처계의 계통을 후대 조작할 가능성이 높아졌고, 처의 신분적 지위를 높이고자 하여 이들이 명문귀족의 후예임을 드러내었다.
[설원기] 적자(適者)인 차원부의 죽음이 차씨 집안의 서얼(庶孼)인 이들의 신분적 결함을 족보에 올려 원한을 샀으며, 고려의 충신으로 남고자 하였으나 조선건국에 동참하는 대립으로 멸족을 당했다는 이중적 구조를 갖고 있다. 16세기에 나타나는 복합적 현상속에 [설원기]를 위치시켜야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신분제도적으로 주자성리학에 적장자 중심의 가부장적 친족질서가 자리잡아 가기 시작한 시기였다.
[설원기]는 여말 선초의 조선시대의 중요한 유교윤리를 담고 있어 유통이 가능하였고, 왕명에 의해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후대 연안차씨의 족보편찬 시 선대세계를 고증하는데 있어 유일하고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7. 1791년 [車文節公遺事]의 편찬과 차씨문중
필사본의 유통 이후 [설원기]가 여러 이름으로 간행되는 모습은 16~17세기를 지나 차씨 문중이 대두 성장하여 통합, 결합되어 가는 과정이 된다.
차성로가 차양철은 六路의 同宗을 찾아가 世系를 모아 1708년 [설원기]와 1권의 첫 번째 족보를 어렵게 편찬할 수 있었다. 문화류씨의 己巳譜에서 류씨와 동종인 선계를 이예장의 글과 차식신도비를 통해서는 근거를 확인 하였다. 1760년대는 초간된 족보이후 剛烈公派가 중심이 되어 족보를 출간하였다.
[설원기]가 僞作說의 대두로 사실의 논란으로 일 때 남극관의 몽예집(夢藝集)을 보고 기록을 남겼던(1769 6. 29) 황윤석은 1776, 8, 15(丙申)에는 다시 [설원기]와 이제난고(頤齊亂藁)에 전하며 위작설과 이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일찍이 남극관이 차천로 삼부자가 위작하였다고 말하였다.
자식들이 차원부가 문절이란 시호를 1786,9,27, 1787,2,6, 1788년 세 차례 내려달라고 상소하였으나 거행되지 못하였다.
[車文節公遺事]의 편찬 시기에는 문절공파, 오산공파, 대언공파 등 차씨문중 여러 차씨의 인물들이 함께 서적 간행에 동참하였다. 1784년 차석주가 응제시를 남긴 후손에게 직접 찾아가 35세에 완성하였다.
정조 10년 이후에 단종복위 인사들이 집중되었고 박팽년의 후손인 박기정은 1792년(정조 16) <육신선생유고>의 간행을 도맡아 유묵(遺墨) 7건을 위작임이 언급되었지만 간행하였고, 문중에서의 선조 현양 의식이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차석주 잡안에서는 [차문절공유사], 차예광, 차충량 등 병자호란 때 순절한 수중작업이 이루어지고 정조는 차예랑의 집안 후손을 등용하고 녹봉을 하사하라는 명을 여러 차례 하였다.
1791년(정조 15) <三峰集>의 편찬자는 전승되어 오는 내용 중 정도전에게 죽임을 당한 차원부의 [설원록]에 대하여 패승(稗承)의 말이라는 것은 근거가 없다는 글을 실었다. 1940년에 간행된 하륜의 후손 河晉賢은 <浩亭集> 발문에서 [설원기]가 한사람의 손에 의해 위작되었다고 하였다.
[설원기]는 후손들에게 혈연과 조상을 알려주며 새로운 정체성을 입증하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고 간행을 지속시켜 나가는 가운데 후손들은 이를 통해서 가문의 통합 결속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맺 음 말
[설원기]라는 텍스트가 변화되는 모습을 단계적으로 이해하고 유통시키는 주체, 모습과, 상호관련성을 시대적 변화의 흐름속에서 복합적으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1456,5,21 朴彭年, 河緯地에 의해 완성된 것으로 기록된 [설원기]는 1500년 후반 영남지방에서 기호지방으로 필사본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차씨 문중 후손들에 의해 간행되면서 여러 異本들이 여러 지방의 문중들이 소유하고 있던 것을 바탕으로 간행되었기 때문에 책의 서명, 작성자, 작성날짜, 구성에 차이를 보였다.
[설원기]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위작일 가능성이 높고 16세기 車軾시대에 줄거리가 완성되어 유통되어 오랜 기간 내용은 읽는 주체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보이며 확산되었다.
①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인용한 경우
② 위작임을 문집에 기록하였고, 이 기록을 읽고 [설원기]에 반응하는 후대의 모습
③ 이후에도 사실로 유통되어 가는 모습으로 나눌 수 있다.
16~17세기에 필사본이 의심 없이 유통된 이유는 차원부와 관계된 내용이 유교윤리의 보급으로 인한 성리학적 명분하의 사상적 신분제도적 배경에 부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박팽년의 설원기’는 절의와 명분을 중시하고, 가부장적 가족제도 확립에 의한 적서차별(嫡庶差別)이 등장하던 시대상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에 의심 없이 필사되어, 확대 재생산될 수 있었다.
차씨문중이 성장함에 따라 1791년 [차문절공유사]의 편찬을 통해 결속과 통합의 과정을 이끌어낼 수 있었고 위작설에 대해서도 문중의 힘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박은정의 학술논문을 축소하여 이곳에 올리며 감상 몇 말씀 올립니다.
1) 차씨3부자(차식, 차운로, 차천로)의 위작(僞作)으로 판명된 차원부 한 인간의 가공(加功)된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400여 년이나 조선사회에 만연되어 명맥을 유지하여 오고 차씨문중의 위상을 제고하여 왔는지 필자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2) 차씨문중에는 성직자, 학자, 교육자, 보학자(譜學者 ) 정치가 등 많은 인재들이 [처원부설원기]가 위조(僞造), 위작(僞作)된 위서(僞書)임을 진작 알았을 터인즉 어떻게 이 책이 차씨 문중에 용납되도록 방관하고 오히려 용납하였는지 필자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고 柳門을 가공(可恐)하리만치 왜곡(歪曲)함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3) 차문에서는 대승공 柳車達 은 없고 柳孝金이 문화류씨 시조라 가공할 왜곡(歪曲)을 하고 있습니다.
4) 문화류씨 종친 여러분! 우리는 {차원부설원기}의 실체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차문이 류문에 대한 행태를 알았습니다. 종문에 확산시켜 대처방안을 강구하여 갑시다.
5) 앞으로도 [차원부설원기]의 위작한 내용이 계속 세상에 드러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6) 차문여러분! 역지사지(易地思之)입니다. 거짓위에 세워진 사상누각(砂上樓閣)을 지탱하려 하십니까?
바른 것은 바른 것이요 틀린 것은 틀림이 아니겠습니까? 차문의 옳은 판단과 위조(僞造), 위작(僞作)이 되지 않은 바른 시행을 촉구합니다.
첫댓글 논리적으로 자료 확보 분석에 노고가 많으신데, 댓글이 없어 뒤늦게 나마 고맙다는 인사드립니다
이제 "차"씨측에서 시정해야 될 부분을 면밀히 점검해서 후속조치에 계속 힘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