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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4월 10일, 미국인 선교의사 알렌(H. N. Allen, 1858~1932)의 병원설립 건의를 고종이 받아들여 개화파 홍영식의 집이었던 서울 재동(현재 헌법재판소 자리)에 광혜원을 세우면서부터입니다. 1884년 9월, 최초의 선교의사로 한국에 온 알렌은 1884년 12월, 갑신정변에서 심하게 부상을 당한 민비의 조카 민영익을 살려내면서 서양의학의 효과를 입증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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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이 세워졌고 곧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꾼 후 왕실에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진료하는 기관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개원 첫해만 10,000여명의 환자를 진료했다고 하니 서양의학에 대한 당시 관심의 정도는 엄청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제중원은 보다 많은 환자를 진료하기 위해 1887년 구리개(현재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 부근)로 이전, 병원의 규모를 확대했습니다. 제중원은 정부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동시에 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전자는 재정지원과 행정을, 후자는 의사와 간호사의 파견 및 진료, 병원 운영 등을 담당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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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이 성공적으로 운영되자 알렌은 계획한 대로 한국 내 의료진 양성을 위해 의학교육을 추진하였고, 드디어 1886년 3월 29일, 경쟁시험을 통해 선발된 16명의 학생으로 한국 최초의 서양의학교육 기관인 제중원의학교가 문을 열었습니다. 1887년 9월, 알렌이 주미 한국 공사관의 참찬관으로 취임하자 제중원의 책임은 헤론(J. W. Heron), 빈튼(C. C. Vinton) 등으로 이어지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병원의 운영은 점차 부실해졌습니다. 그러자 1893년 7월, 새로 부임한 에비슨(O.R. Avison, 1860~1956)은 정부에 제중원의 정상화를 위한 요구 조건을 내걸었고 마침 운영비를 부담할 여력이 없었던 정부는 1894년 갑오개혁 때 제중원의 운영권을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 넘기게 되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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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부터 제중원은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는 완전한 사립기관이 되었습니다. 그후 에비슨을 비롯한 많은 선교의사들은 제중원을 중심으로 더욱 활발한 의료 활동을 전개하였고 몇 명의 학생들을 모집하여 알렌이 시작했던 의학 교육을 다시 체계적으로 진행하였습니다. 이때 해부학을 비롯한 다양한 의학 교과서를 한글로 번역해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1895년 우리나라에 콜레라가 유행했을 때 에비슨은 방역의 총책임자로서 제중원 직원들과 함께 방역과 환자 치료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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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보다 나은 시설이 갖추어진 병원의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던 에비슨은 1900년 미국에서 만난 클리블랜드시의 부호 세브란스(L. H. Severance, 1838~1913)에게서 병원설립기금 45,000달러를 기부받아 마침내 1904년 남대문 밖 복숭아골(현재 서울역 맞은 편 세브란스빌딩 자리)에 병원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병원의 이름은 제중원 대신 기증자의 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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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딴 세브란스병원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세브란스는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그 후손들에 의해 기부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에비슨은 10여 년 동안의 오랜 노력 끝에 드디어 1908년 제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하였고 이들은 정부로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면허 1번에서 7번까지를 부여받았습니다. 1909년, 학교 이름을 세브란스의학교로 개칭하였고 1913년에는 서울에 있던 각 선교 교파가 공동으로 세브란스를 지원하게 되면서 학교 이름을 세브란스연합의학교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일제는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전문학교 규칙을 반포했는데 일반 사립기관으로서는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에비슨을 포함한 선교의사들의 각고의 노력 끝에 1917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가 인가되었습니다. 일제하에서 세브란스의학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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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교는 사립학교라는 특징을 발휘하여 경성의학전문학교와 같은 관·공립학교와 달리 오직 한국인 학생들만을 교육시켜서 일본인은 한 명도 의사로 양성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미국 선교부가 지원했지만 세브란스만큼 민족적인 학교는 없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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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06년 9월, 쉴즈(E. L. Shields, 1868~1941)가 세브란스병원에 간호부양성소를 세웠으며, 1915년에는 쉐플리 (W. J. Scheifley, 1892~1958)가 내한하여 한국 최초의 전문 치과학교실을 만들었습니다. 이를 통해 세브란스는 한국민의 건강을 위해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리고 일제 시기에 진료 환자 중의 반이 무료 환자였는데, 주로 외국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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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원단체에서 보내준 경비를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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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아사히의학전문학교라고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세브란스는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고 1947년에는 6년제 의과대학으로 개편되었습니다. 하지만 곧 닥쳐온 한국전쟁으로 인해 병원 및 간호학교 본부 등은 피난을 가야했고, 거제도나 원주, 청도에 구호병원을 개설하였습니다. 의과대학 역시 전시교육령에 따라 전시연합대학에 편입 되었습니다. 전쟁이 종결된 후 파괴된 건물 및 시설물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캠퍼스 구상을 계획하게 되었고, 그 결과 1957년에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의과대학의 합동이 이루어지면서 두 학교의 머리글자를 딴 연세대학교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
이후 1962년, 미8군과 선교본부의 협력, 외부의 원조 등으로 인해 기존의 캠퍼스를 신촌으로 이전하였는데 이는 당시 동양 최대의 시설과 규모를 자랑하는 연세의료원이 준공되는 결실을 낳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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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부터 1977년까지는 치과대학, 간호대학, 보건대학원 등 다양한 대학들이 설립, 운영되는 등 의학교육의 종합화가 이루어 졌습니다. 또한 1978년부터 시야를 전국으로 돌려 원주의과대학의 설립(1978), 용인 및 광주분원 개원(1983), 영동세브란스병원, 인천세브란스병원 개원(1983) 등으로 그 규모를 점차 확대시켜 나갔고 1986년부터는 세계화에 발맞추어 심장혈관센터 개원(1991), 몽골의대와 자매결연 맺기, 몽골친선병원의 설립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시켰습니다. | |
이후 연세의료원은 임상의학연구센터 설립(1996), 안이비인후과병원 개원(1996) 이후 연세의료원은 임상의학연구센터 설립(1996), 안이비인후과병원 개원(1996), 최우수의과대학 선정(1997), 아동전문진료센터 개설(1999), 의료원 비전 선포(1999), 동은의학박물관 개관(2000), 이라크 의료봉사단 파견(2003) 등 새로운 시대로의 도약을 위한 꾸준한 성장을 이루어왔습니다. 그리고 2005년 5월 4일 세브란스 새병원은 지하 3층, 지상 21층의 규모에 총 1,004개의 병상을 갖춘 초현대식 병원으로서 유비쿼터스 시스템 및 로봇 수술이라는 국내 최고의 첨단진료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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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매우 비슷하지만 이 두 곳은 분명 다릅니다. 광혜원(제중원)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듯이 1885년 알렌의 건의로 설립되어 현재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어온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입니다. 이에 비해 광제원은 조선정부가 1899년 서울에 설립한 내부병원을 개칭하여 세운 한방병원입니다. 그러나 광제원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과 함께 일제 통감부에 의해 세워진 대한의원에 흡수당하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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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주장은 1980년대 초부터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중심으로 제기된 것입니다. 그 주장이 허구임은 이미 1998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과에서 발굴한 자료로 입증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서울대병원 홈페이지에서 그런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서울의대에서 제중원을 자신의 뿌리로 주장하는 이유 중 하나는 형식적으로 제중원이 ‘국립병원’이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형식적으로만 조선정부의 기관이었지 가장 중요한 의료활동에서는 선교사들이 독자성을 지니고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1894년 9월 말 제중원의 운영권이 미국 선교부로 이관되면서 정부와의 관계는 완전히 청산되었고, 제중원은 순수한 사립병원으로 탈바꿈됩니다. 제중원이 서울대병원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은 조선정부가 세운 성균관이 국립서울대학교로 이어진다고 보는 것처럼 허무맹랑한 것입니다. 서울대병원은 ‘국립병원’이었던 광제원 역시 자신의 뿌리라고 하는데, 지방의 국립대병원이 “우리도 ‘국립’이니 광제원은 우리의 뿌리다”라고 주장한다면 인정할지 의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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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교과서에는 ‘정부가 대한의원과 자혜의원을 세워 신식 의료기술을 보급하고 의료시설을 확장하였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내용에 일단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 문장의 표현만 보자면 대한의원과 자혜의원의 설립 주체를 ‘조선정부’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정부란 을사보호조약 이후의 시기이므로 일제의 통감부를 일컫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한의원과 자혜의원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첫째, 일본지배에 대한 한국민의 반일 감정을 누르고 일본의 ‘선정(善政)’을 선전하고자 이 병원들을 이용했다는 점과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이 병원들은 한국인보다는 일본인들이 더 많이 이용하는 병원이었다는 점입니다. 즉 서울에 있었던 광제원, 관립의학교, 적십자병원을 통합시켜 설립한 대한의원과 각 지방 13개도에 설립한 자혜의원은 모두 일본의 식민정치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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