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에서 보내는 문학편지 Ⅱ-유혹들 ⑪
‘너머’의 언어 한 포기
강은교
# 1)
비 온 뒤 잡초를 뽑아내는 맛은 특별하다. 잡아당기기 무섭게 뽑히는 잡초들, 그 부드러운 나동그라짐. 그 쪼그만 몸체에 그렇게 많은 뿌리가 달렸나 싶게 실뿌리들이 엉켜 흙과 함께 나동그라지는 것이다. 뽑힌 실뿌리들을 탁탁 털어 쓰레받기에 던진다. 그런데 아뿔사, 생각도 안 한 일이 생겼다. 지난주이던가, 맨드라미와 꼭 닮아서 한참 들여다보다가 잡초라고 결론짓고 그렇게도 열심히 뽑아냈는데, 오늘 작약 밑을 들추어가며 잡초를 뽑다 보니 거기 그 맨드라미 같은 잡초가 미처 뽑히지 않은 채 조금 자라있는 것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맨드라미였다. 나는 그 전에 백리향의 잡초를 뽑다가 백리향을 꼭 닮은 잡초를 그냥 백리향 싹인 줄 알고 두어둔 탓에 애를 먹은 적이 있었기에 맨드라미 잡초도 맨드라미 흉내를 낸 잡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가득 돋아난 싹들이 잡초가 아니라 맨드라미들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저기 숨어 자란 맨드라미가 손에 잡힌다. 뽑으려다 말고 제법 맨드라미의 꼴을 갖춘 그것들을 가만두기로 한다. 나는 안경까지 찾아 쓰고 맨드라미를 건드릴새라 조심조심 잡초를 뽑는다.
거기다 그 맨드라미들은 반대편 마당 끝에서 이곳으로 뛰어온 촛대 맨드라미의 후손(맨드라미 1세는 둥그런 화판을 마치 비로드처럼 부드럽게 흑자줏빛으로 꽃피우고 있다가 머리를 대지에 박고 시들어 누워 장엄하게 죽었었다. 그런데 어미를 떠나 반대편 마당 끝으로 뛰어와 피어난 맨드라미들은 어미와는 전혀 다른 촛대 모양이었다)들이어서 이번에는 어떤 모습의 변형된 꽃을 피울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다 버릇처럼 시를 생각한다. 시의 언어야말로 숨어 자라는 언어이리라, 라고. 히스파니올라적的 언어라고 불러야 할까. 콜롬버스 탐험대가 제일 처음 발견한 유럽인에게는 숨어 있던, 대륙 너머의 대륙을 순간 비춰준 자그만, 아름다운 섬, 신대륙의 끝자락에 하찮게 버려져 있었지만, 신대륙의 정수인 섬.
시 너머, 시 전체를 잊지 못하게 하고 밝혀줄 어느 순간을 위하여 은둔 속에서 숨어 자라는 <‘너머’의 언어 한 포기>가 한 편의 시 속에는 숨어 있는 것이다.
맨드라미의 여행과 은둔, 변형을 보며 언어 특히 시의 언어, 언어 운용들을 다시 생각한다. 곱씹을 만한 시에는 어느 구석엔가 이런 은둔, 변형의 언어가 마치 하찮은 잡초처럼 그러나 그 어떤 꽃보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길 염원하며 앉아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은둔의 언어가 숨어 자라고 있기에 그 시의 언어는 비의秘義, 또는 상징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은교여, 너는 과연 그런가. 그런 숨어 자라는, <‘너머’의 언어 한 포기>를 한 편의 시에 앉히고 있는가.
# 2)
어떤 문학지에서 청탁이 왔다. 이전에 발표한 시들 중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할 뿐 아니라 자신 있는 시 5편을 골라 달라는 것이었다. 고사하는 나에게 편집자는 너무 간절한 목소리를 보내왔다. 할 수 없이 선選하기로 했다. 마침 곧 출간될 시집의 마지막 교정을 보고 있던 참이라 거기서 5편 뽑는 일은 간단할 것 같았기에. 그런데 그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한 십여 분 투자하면 될 일이라 생각했는데....... 뭐랄까, 나의 시들은, 마치 작약잎들처럼 너무 많은 설명의 치마를 펼치고 있었다. 70편이나 되는 시를 싣고 있는 시집이었지만, 되읽어 보는 순간 깊은 실망 아니 절망에 빠진 것이다. 은둔의 언어, 구석에서 은둔하고 있다가, 그 시 전체를 새로운 빛으로 비추어주는, 놀랄만한, 숨은 언어, ‘너머’의 언어 그것,-이 없었다.
선을 그만두겠다는 전화를 할까, 말까, 이참에 시집도 관둬버릴까, 말까 하면서 스마트폰을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배롱나무 밑에 유난히 많이 자라나 있는, 맨드라미를 들여다보고, 들여다보고 하면서......
# 3)
「나는 지금 뛰어다니는 언어와 서 있는 언어를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뛰어다니는 언어’는 변형의 언어이며 시적 공간의 윗부분으로 상승ㆍ팽창하는 언어이며 또는 그런 다음 그 밑바닥으로 하강ㆍ수축하는 구상의 언어, 그리하여 추상의 공간ㆍ구체의 공간을 살아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언어입니다. 구상에서 추상이 되기도 하고, 추상에서 구상이 되기도 하는 시의 언어...... .」*
아, 그런 시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쓰고 싶다. 그러면 아마도 옥타비오 파스의 ‘시의 언어론’처럼, 나의 시적 공간을 확대시킬 것이다.
어떻게 내가 마당의 저쪽 끝에서, 머리를 대지에 박고 시들어 죽은 어미를 떠나 이쪽 마당 끝으로 뛰어와 어미와는 전혀 다른 모양의 맨드라미로 피어난 맨드라미처럼, 나의 몸체인 언어를 이 세상이란 마당의 저쪽 끝에서 이쪽 끝으로 던질 것인가. 그렇게 확대·변형할 것인가,
# 4)
그 언어는 상황 절단의 언어이기도 하리라. 부분이면서 전체인 언어, 나의 의견과는 다른 물리학적 표현이지만 베르너 하이젠베르그의, ‘안개’의 추억처럼. 은둔의 언어 하나가 숨어 자라 전체를 되생각하게 해주는 언어. **
# 5)
아무래도 나에게, 이 땅의 많은 시인들에게 이 말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꽤 괜찮은 시인이 서 있는 곳은 유배지가 되어야 하리라. 유배지 의식은 소수 의식이며 때로는 숨은 민중의식, 또는 객관화된 사회의식이다. 그것은 격절된, 격절되지 않은 공간의 의식이다. 히스파니올라적 시언어의 공간, 안개 속에 있는, 안개 너머의 공간인 것이다.
# 6)
오랜만에 벤야민의 에세이집을 펄친다.
‘작가의 기법에 관한 13가지 명제’ 중에서
Ⅲ. 작업환경을 조성할 때 평범한 일상을 벗어나도록 할 것. 맥 빠진 소음 속에서 반쯤 쉬어가면서 하는 작업은 품격을 떨어뜨린다. 그에 반해 피아노 연습곡을 치는 소리나 사람들이 일하면서 지르는 소리들은 유난히 고요한 밤의 정적과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다. 밤의 정적이 내면의 귀를 날카롭게 해준다면, 피아노 연습곡을 치는 소리와 일하는 사람들의 소리는 밖에서 들리는 기괴한 소음들까지도 자신 속에 파묻어 버릴 수 있을 풍부한 어법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를 판가름할 시험대가 된다.
Ⅳ. 아무 도구나 사용하지 않도록 할 것. 특정한 종이, 펜, 잉크를 좀스럽게 보일 정도로 고집하는 태도가 도움이 된다. 사치를 추구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도구들을 풍부하게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다.
Ⅴ. 어떠한 생각도 자기도 모른 채 흘려보내지 말 것이며, 외국인 등록일을 담당하는 관청처럼 자신의 노트를 엄격히 관리할 것.
Ⅵ .......착상이 떠오를 때 그것을 적는 일을 주저하면 할수록 그 착상은 그만큼 더 잘 익어서 품에 들어올 것이다. 말은 생각을 정복하지만, 글은 그 생각을 지배한다.
Ⅶ. 아무런 착상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해서 글쓰기를 그만두지 말 것. 지켜야 할 어떤 일정이 있다든지, 아니면 작품을 마친 경우에만 글쓰기를 중단하는 것이 문필가가 명예를 걸고 지켜야 할 계율이다.
Ⅷ. 영감이 떠오르지 않거든 이미 써놓은 것을 깨끗하게 정서하면서 시간을 보낼 것. 그러다보면 직감이 깨어날 것이다.
Ⅸ. 글쓰기를 하루도 거르지 말라. ......
Ⅹ. 한 번이라도 저녁부터 이튿날 훤하게 날이 밝을 때까지 앉아 있던 적이 없는 작품일랑 결코 완전한 작품으로 여기지 말 것.
Ⅻ. ......사고는 영감을 죽이고, 무네는 그 사고를 묶으며, 글은 그 문체를 보상해준다
ⅩⅢ. 작품은 구상의 데스마스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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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은교,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문학동네) 참조 바람.
** 베르너 하이젠베르그, 『부분과 전체』 (서커스출판상회) 참조 바람.
***벤야민, 『일방통행로』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