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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리뷰
공백을 먹다, 엘리스의 언어를 얻는다
-정가을 시집 『바질 토마토』(작가마을)
-이기록 시집 『소란』( )
김남영(문학평론가)
1.
우리는 이것을 일러 상상만으로도 충분한 일이라 치부했다.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설마 나에게 일어나겠는가. 전면적 부인이 또 다른 상상으로 흐른다. 부디 나에게 오지 않기를. 그러나 우려보다 더 현실적인 어떤 시간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인식할 여유조차 없었다. 이것은 우리의 생활, 삶을 뒤흔들고 정치적 경제적 토대를 동요시켰다. 지금-여기에서 돌아보면, 우리가 함께 공유한 2020년의 시간은 무엇으로 그려볼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 발 딛고 있는 2021년의 현재는 무엇이 가능한 것이고 불가능한 것인가. 우연적인 것은 모든 불안을 감싸 안으며 삶을 필연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차라리 관람석에 앉아 영화를 바라볼 때처럼 최소한 나의 안전이 보장되는 그런 시절을 그리워만 해야 할까. 한 편의 드라마였으면 하는 바람도 잠시, 주변의 모든 것들은 폐쇄되고 우리는 우리의 이름과 얼굴을 가리는 데 2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지금 우린 어느 때보다 그 시간 속에 살아가기가 더디고 고되다. 누군가는 이 시간과 어울리지만 누군가는 이 시간과 어긋난다. 어긋나서 지치고 소진된다. 우리가 함께 공유한 이 시간이 어쩌면 ‘상실’했다기보다 ‘마비’되어 있다는 말이 더 실감나는 말일지도 모른다. 이때 시(詩)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모두가 부자가 되려하고, 모두가 아름답고 멋있어 보이려, 서로 경쟁하고 그래서 그 경쟁은 더욱 자유로이 체감하지만 그 자유는 자본으로의 예속으로 달려가는 길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도 매우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경제가 발전하면 나의 삶도 나아진다는 사실을 단순히 믿는 바보는 없다. 그럼에도 이른바 신자유주의, 이 새로운 자유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저당 잡히고 희생도 불사한다. 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기가 두려운 무능하고 유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당신을 둘러싼 장치들은 잘 정돈되어 있고 질서화 되어 있다. 지금 당신이 원한다면 모든 것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편리한 삶이지만 어딘지 쓸쓸한 감정에 휩싸이는 것은 도대체 왜일까. 풍요로움의 역설일까. 마비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인가. 동일한 조건에 동일한 방식으로 신자유주의는 우리의 행복을 발명하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물음. 시는 과연 행복할까.
시는... 그리고 시는...우리가 시에 대해 무심하거나 주저하는 사이에 어느새 시는 언제나 ‘있다’. 그것이 시의 가치 존재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언어는 분명 존재의 집과 같다. 그 언어를 기표로 혹은 이미지로 대상의 불가시한 것을 가시적으로 만드는 마법 같은 일을 시는 만들어낸다. 그래서 시는 계속해서 움직인다. 움직여 현실이 강력한 함수관계로 이루어진 만들어진 이미지라는 사실을 좀 삐딱한 자리에서 고발한다. 따라서 시를 읽으면 그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시에서 그런 해답을 찾지 못할 것을 잘 안다. 오히려 시는 자신의 삶을 더욱 미궁 속으로 안내한다. 그것도 아주 불친절하게 말이다. 말하자면 그런 문제에 대해 시는 사실 아무것도 없음을 읽는 이로 하여금 발견하게 하는 장소이다. 이 정도로 시를 읽게 만들었다면 아주 매력적인 일을 한 것이다. 그리고 우린 말을 한다. 농담처럼, 시는 시시하다. 시(詩)시(時). 시의 때, 시의 시간, 시를 읽는 시간. 아날로그적 감성으로 시는 늘 시간의 힘에 부딪치고 저항하고 때론 그 힘을 이용하여 시를 견뎌냈다. 그리고 견딤의 시간 속에서 나는 두 명의 시인을 만났다.(이기록, 『소란』, 책읽는저녁, 2020. 정가을, 『바질토마토』, 작가마을, 2020.) 서로 무관한 듯 배열된 사유의 흔적들을 따라 무심히 읽으면 전체의 그림이 확 다가올 것 같은 기대는 하지 말아야 했다. 애초에 그런 형식적인 틀은 전제하지도 않고 ‘선험적 지평’은 없었다. 이기록 시인은 그의 말대로 “내내 잃어버려서/ 쓸 때마다 허기가 진다”라는 말대로 공백을 먹는다. 반면 정가을 시인은 “지금 이상한 나라로 가는 바이킹”에 탑승준비를 막 마쳤다. 두 시인은 삶의 파편들을 끝내 시집에다 숨겨 두었다.
2. 공백을 먹다 - 이기록, 『소란』, 책읽는저녁, 2020.
여기 ‘그대(당신)’가 있었다고 하자. 다만 지금은 ‘그대’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대’가 있었다는 것을 모른 채 살아간다. 이기록의 시편을 무심히 읽다가 나는 어쩌면 ‘그대’를 잊고 사는 삶이 내 삶을 채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감으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나를 바라보는 ‘그대’의 얼굴이 떠오른다. 내 어두운 심연에서 그대는 “함께” 걸었고(「피는 그대」 부분), “이름”을 부르며 사라진다.(「지는 그대」 부분) 그래서 그대는 명멸을 반복하는 ‘죽음충동’에 지금 막 서 있다.
시인의 삶과 작품을 일치시키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삶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순전히 고등학교 후배였다는 사실보다 그가 아직 시를 쓰고 있었다는 점에 있다. 나는 이기록 시인의 고등학교 2년 선배이다. 그리고 나는 그를 문예부에서 만났다. 분명한 것은 그때는 나도 시를 쓰고 있었다. 그때는, 적어도 그때는 시가 위로이자 애도의 방식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한 번 떠나버린, 아니 내가 버린 잊힌 시에 대한 기억들은 그 시절 마주치는 타자들 속에 용해되지 않고 잔존해 있었기에 늘 나는 시에 대한 부채의식이 아직도 미련 남았나 보다. 반갑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고 아무튼 기표들은 얽히어 미끄러지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그이의 시를 나는 그와 분리해서 봐야만 한다. “당신과 나를 섞을수록 저만치 앉아서 썩어버려요”(「이명」 부분) 썩기 전에 냉큼 물러나니, 어떤 이미지가 유령처럼 앞으로 나타난다.
그 이미지는 시 전체에 언급되는 ‘당신’이라는 존재이다. 당신은 지금-여기에 있다, 그러나 볼 수가 없다. 당신은 부재하지만 당신은 분명 ‘있다’는 역설. 그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아는 지식을 초과해 존재한다. 나는 너를 잘 알지만 그것이 사랑인 줄은 모른다. 그래서 당신이라는 존재는 고민스럽다. 이런 식이다. “그래, 나는 이미 없는 사람과 살아간다 이미 없는 사람과 연애를 하니 고민스럽다”(「그러니 한번 말해보자」 부분) 또는 “알몸으로 기댄 당신이 들어올 순서지만 말을 걸어도 난 웃을 수 없어요”그리고는 당신을 쫓아보았지만 이미 부재하기에 “뒤를 찾아다니며 잡을 수 없는 결을 어루만”진다. (「테이크 아웃」 부분) 그리고는 급기야 냉정하게 “이것은 너에 관한 기억이며 내가 할 수 있는 기억이다/ 무너진 기억은 다시 살 수 없는 기억이다/ 잡을 수밖에 없는 기억만 기억된다”(「드라이플라워」 부분) 서서히 말라간다. 말 그대로 “오래도록” 당신과 함께 있어 왔으나 나는 결국 “자줏빛 유령 안에 들어가/ 밤새 온몸을 쏟아내”고서야 나의 몸에 “오래도록 금이” 간 사실을 깨닫는다.(「오래도록」 부분) 당신은 유령처럼 비밀스럽다. 비밀은 말할 수 없는 것이기에 말을 한 순간 비밀은 사라진다. 당신과 나의 교집합은 혹은 이기록 시인의 기표들은 사실상 언표 불가능한 사건이다.
이렇듯 당신은 나에게 하나의 증상(사건)으로 찾아온다. 증상은 현재화된 미래이다. 불확실하고 모호하고 애매하다. 시의 언어처럼 유령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 증상이 시인의 충동을 부추긴다. 결국 나라는 존재는 당신과의 마주침으로 가능한데 그런 나가 좀 수상하다. “당신을 인증하는 일이 중단된 후 화면에서 사라진 꽃들은 시들어가고 족제비가 핥고 있는 내 몸이 달콤하지요 난 눈만 있어요”(「허공이 창백할 때」 부분) 눈만 있고 입은 사라졌으니 그 이후로는 나는 침묵한다. “침묵을 눕혀 두고 꽁꽁 묶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언어가 실어증에 걸렸다”(「제 몸을 태우는 그늘」 부분) “바스러지는 침묵들” 그 침묵이 육화되어서 “살려달라고” 한다.(「이명」 부분) 나의 증상은 이렇게 법칙화 할 수 없는 것이다. 가변적이고 역동적인, 그 무엇으로 환원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 충동들은 현실을 “소란”스럽게 만들고 언어들을 교란하면서 질서 너머의 세계로 나아가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침묵은 유령을 소환하는 최적의 행위가 된다. 침묵은 말을 할 수 없는 사태가 아니라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산 자의 언어를 이탈하면서 죽은 자의 언어로 향해 간다. 그곳은 아무것도 있지 않는 진공상태, 공백이다.
시인은 공백을 탐하는 자이다. 그래서 기표들의 연쇄로 이루어진 현실의 이미지들을 소란스럽게 만드는 작업은 매우 유효하다. 그 공백을 무엇으로 채우는가. 기존의 언어로는 그 공백을 채울 수 없다고 판단한 시인은 포착 가능한 명사를 복원해 내는 것이 아니라 매번 실패와 달아남-“여전히 시계는 초침도 없이 달리고”(「이명」 부분), “무너졌다 몸을 가릴 만한 순간을 만들기 위해”(「소란」 부분)-을 연속으로 하는 포착 불가능한 동사를 복원해 낸다. 그것은 도무지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존재한다. 바로 이 지점이 당신과 나가 마주쳐서 생성되는 비밀스런 곳이다. 그곳은 황량한 사막이다. 그곳에서 시인은 “다시 살아날 겁니다/ 간절한 당신을 너무 늦게 알아버렸나 봐요/ 먼 곳을 돌아왔나 봐요/ 만질수록 가시 박힌 손에서 피가 납니다”(「출렁이는 사막」 부분) 이제야 그것을 깨닫는다. 당신은 처음부터 동화할 수 없는 존재, 시가 되고 사랑이 되고 급기야 허기가 된다. 그 공백을 시인이 함께 먹자한다. 그러나 저 기적적인 조우는 늘 연기된다. 나는 초대받지 못한 야릇한 망설임을 욱여넣고 이렇게 한 편의 글로 대답한다.
바질토마토
3. 마법처럼 일상을 탈주하는 엘리스의 언어 - 정가을, 『바질토마토』, 작가마을, 2020.
일상의 사물-그것이 구체적이건, 추상적이건-에는 그 나름의 질감이 있다. 정가을 시인은 이 질감과의 마주침을 외면하지 않는다. 이를 테면 「구겨 신은 운동화 뒤창으로 걸어 들어온 한줄기 빛살에게」에게 모든 것을 “다/ 내어준다” 운동화 뒤창으로 걸어 들어온 한줄기 빛을 우리는 보고 느끼지 못한다. 이미-있음의 존재들을 무감각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일상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아직 이름을 얻지 못했지만 분명한 것은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사회적으로 기표로 인정을 받지 못했거나 인정받았으나 그 효용을 다한 것이기에 몫을 지니지 못한다. 시인은 그 몫이 없는 것들에게도 몫을 나누어 준다. 내어줌은 나 아닌 타자와의 마주침을 확인한다. 시인은 이 이질적이고도 낯선 이종들의 혼합, 엘리스의 언어만으로 표기가 가능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의 세계에 가닿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준비가 필요하다. 너와 나가 약속한 언어적 규칙들을 파기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눈 감지 않는 얼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이인지 분명한 것은 빨간 쟁반 위, 껍질째 곱게 썬 사과처럼 올려진 얼굴 분명한 것은 찬장 안, 겁에 질린 얼굴 문을 닫는다 놀라지는 않았지만 다시 문을 연다”(「바질토마토」 부분) 분명한 것은 어떤 얼굴인데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다. 시인은 분명한 것이라 말을 하나 실은 흐릿하다. 분명한 것을 우리는 원하나 이내 시를 읽고는 난처한 얼굴이 된다. 어떤 얼굴인가. 눈을 감지 않았으니 얼굴은 살아있다. 살아있는데 겁에 질린 공포의 모습이다. 그 닫힘과 열림 사이에 분명한 것이 사로잡혔다. 이것이 맺고 있는 묘한 느낌, 이 시는 아주 철저하고도 교묘하게 언어의 질서로부터 빠져 나간다. 그래서일까. 정가을 시인의 시에는 어떤 깊이를 갖지 않는다. 깊이의 상실, 깊이가 없으니 근원도 이면의 질서도 초월하려는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얇은 평면위에 놓인 세계, 곧 부서져 내릴 것만 같은 이런 가벼움이 왠지 시를 더 특별하게 만든다. 가벼운 것들의 마주침이 만만하지 않다.
스피노자를 따라 이 마주침의 감각은 기존의 감각적 질서를 변용시키고 새로운 정서의 감응으로 이어진다. 그렇기에 정가을 시인은 몸(신체)은 이 질감을 섬세하게 만져 언어로 형상화하는 데 익숙하다. 그래서 사물의 질감은 퍽 새로운 존재론을 예기한다. 한마디로 그 효과는 우리에게 익숙한 시각과 청각은 멀어지고 낯설지만 친숙한 촉각이 성큼 앞으로 다가온다. 이 촉각적 이미지는 ‘의태’를 통해 긴장감을 형성한다. 이런 식이다. “붉어지면서 점점 불어나는/ 해체된 몸뚱어리”(「생일」 부분)가 있고, “어제는 몸이 흐믈흐믈하”(「떠돌이」 부분)고 급기야 “엘리베이터에 나를 조금 흘렸다”(「살점 하나」 부분) 살점 하나가 몸에서 떨어져 나간다. 그것들이 “버스 손잡이를 덮은 실핏줄”(「머리 없는 검은 모직 등 하나」 부분)이 된다. 살을 가진 존재들은 해체를 거듭한다. “흐물해진 어깨를 주무르다 내 손도 흐물해”(「염증」 부분)지고 “액체 괴물”처럼 흩어졌다 모이길 반복하며 이 신체는 정서의 운동, 절망과 희망을 뒤섞는 어떤 형식을 이룬다.
거기서 시작된다. 그 몸에 파고드는 혹은 잠입해 들어오는 움직임이 있다. 맛과 냄새가 그것이다. 냄새에는 독특한 향이 존재한다. 그 향은 시각으로도 촉각으로도 그리고 일상의 이면으로 스며들며 퍼진다. 향의 기원은 현재로부터 생성되는 것이지만 전적으로 그 향의 이름들은 과거에서 나온다. 그 향이 현재에도 남아있다. 마치 기억처럼 신체에 각인된 어떤 향의 움직임을 따라가 본다. 그런데 따라가려다 멈추어 긴장한다. “가까이 오지마,” “포르기네이가” 나에게 “말한다,”// “네가 무서워,”(「동백꽃을 낳기도 전에 배를 잃어버린 기억」 부분) 포르기네이는 식인식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 식물이 위협한다. 아니 위협을 무시한 우리에게 고백을 한다. 공포는 정확히 대상이 있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어두운 관공서들이 매달린/ 도롯가 댕강나무 꽃향기”(「미끌한 베개 밑으로 손이 빨려 든다」 부분) 관공서는 어둡다. 어두우니 알지 못한다. 불안이다.
불안을 머금은 기억의 향기는 비릿하다. 비릿하지만 기억에 남아 현재와 중첩되면서 강한 향으로 우릴 자극한다. 그 기억들이 시집 문면에 흐른다. 그런데 그 기억이 좀 아프다. “빨간 원피스는 꽃잎 끝이 갈색으로 변하며 얇아지더니 목부터 꺾였어요”(「빨간 경쟁」 부분) 목이 꺾이거나 “일 달러의 맛을 모르는 혀”(「고용 허가서」 부분) 돈의 맛을 보지 못한 가난이 일상의 맛으로 변했거나 심지어 “병실 침대에 모로 누운 그의 뒷모습이 액자처럼 걸려 있다 가난한 시골집 칠남 삼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그는 그를 모른다」 부분) 가난, 그리고 유약함이 삶의 이력이 되어 버리거나 “소금 맛 나는 바람이라면 꼭 찾는/ 산양리 슬레이트 지붕아래 아름다운 그 마당”(「대화하는 빈집」 부분) 사라진 사람들, 평생 땀으로 얼룩이진 바람에 그 잔존하는 이미지가 실려 온다든지, “치즈 조각 없이 마시는/ 흙 잔의 와인”(「지하41층」 부분)처럼 지독한 가난의 맛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몸을 잃어버린 언어들이란 ‘날 것’ 그대로의 향기를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을 지도.
급기야 나는 책-먹기를 시도한다. 한참을 곱씹어서야 나는 비로소 시인의 마음 언저리에 도착한다. 물론 이 도착은 늘 해석의 실패 뒤에 오는 맛이고 그 실패를 거듭 씹어내면서 만들어지는 맛이다. 하이데거를 따라 그 맛(이미지)은 막혔던 일상의 문법적 질서와 겨루면서 그 질서와 부딪치며 만드는 이미지에 구멍을 뚫는 움직임과 흡사하다. 비로소 그 낯설지만 친숙한 맛에 당황하여 뒤로 물러서기를 반복하지만 그 반복 속에는 이미 사라졌던 기억 속의 맛들이 살아나면서 우리를 그 맛의 앞으로 오히려 인도한다. 그래서일까. “똥맛이었다/ 말하는 눈이 그렁그렁했다”, “주름 사이사이 한숨들/ 그 속 가득 찬 찐주황, 향”(「분홍성게 향, 메리골드 맛」 부분)일수도 있겠다는 생각.
반복하는 말이 되겠지만 정가을 시인에게는 위, 아래, 심연의 깊이는 없다. 오히려 이 없음으로 인해 일상의 감각은 다시 복원된다. 그럼 그이는 왜 시를 쓰려는 것인가. 이 말을 돌리면 그이는 도대체 어떤 세계에 서서 일상을 보고 있는가. 온전히 내 생각이지만 그이는 “옆”을 본다. “옆으로 누웠는데/ 시계 끝자리 영이 될 때”(「미끌한 베개 밑으로 손이 빨려 든다」 부분) “차례대로 없어진/ 내가// 옆방에서/ 발견되어졌다”(「떠돌이」 부분) 옆에서 죽은 나는 발견이 되고 옆에서 시간을 읽는다. 그리고 지운다. “글자 속으로 부풀어진 어둠”, “가까지 지우고”(「phone:who」 부분) 지우는 방식으로의 시-쓰기, 현실을 충실히 재현하기보다는 현실을 지우는 작업을 통해 새로운 경험들을 발명한다. 지우니 그 자리에 다른 단어들이 생겨나고 연결되면서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낸다. 주체는 그래야만 자유를 얻는다. 이 정도면 시인과 함께 “이상한 나라”로 갈 수 있을까.
김남영 2012년 《오늘의 문예비평》으로 평론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