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말씀배경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면서 이런 일 저런 일로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상처를 받지 않고 살 수도 없고, 주지 않고 살 수도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래나 저래나 주고 받은 극심한 상처는 우리들의 삶을 완전히 왜곡되게 만듭니다. 삶이 완전히 꼬이게 되는 것입니다. 풀어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상처로 반응을 하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받았던 그런 상황이 다가오면 외향적인 분은 폭발을 통해서 표출하고, 내향적인 분들은 그 아픔을 몸과 마음으로 자기가 안고 갑니다. 둘 중 하나의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상처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2. 그래서 상처가 있으면 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상처가 많은 사람 옆에 있으면 서로가 힘들어집니다. 여차하면 분노하고 삐지고 하는 것입니다. 상처가 많은 사람은 승진할 수도 없고 리더도 될 수 없습니다. 상처로 반응하기 때문에 따르는 사람도 없고 조직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사용하는 인물에 대하여 먼저 상처를 치료하십니다.
지금 상처가 있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 치료하시고 만져 주실 것입니다.
▶ 모세의 경우를 봅시다.
모세가 애굽에서 도망을 가서 미디안 땅에서 장인의 양을 치는데, 상처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애굽의 왕자 신분에서 그가 양치기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가증히 여기는 목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46:34] 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
더구나 자기의 기업도 아닌 장인의 기업입니다. 그 장인의 아들들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40년 동안 양치기를 하고 있으니 그 속은 썩을대로 썩었을 것입니다. 마치 문둥병처럼 말입니다.
애굽에서 자기 동족을 구해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순찰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학대하는 애굽인을 쳐 죽이고 또 자기 동쪽끼리 싸우는 싸움을 말렸는데 오히려 살인자가 되어 도망자의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를 죽이고자 한 애굽의 왕에 대한 상처도 있고, 애굽에 있는 자기 동족들에 대한 상처도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모세를 아들 삼은 하셉수트는 투트모스 1세의 딸로서 이복 오빠 투트모스 2세와 결혼하였으나 그가 일찍 죽자 투트모스 2세의 첩에서 태어난 투트모스 3세가 7살 나이에 즉위하였는데 (하셉수트의 섭정이 시작됨), 이가 모세를 살인자로 몰아 죽이고자 한 왕입니다. 이후 이 왕도 죽고 모세가 광야에서 돌아와 즉위한 아멘호텝 2세와 10가지 재앙으로 대결한 것입니다.
모세가 자기 동족에게 입은 상처가 어떠했는지 출 4:1절의 말씀을 보면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불신이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출 4:1]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이것은 그가 동족으로 부터 받은 상처에 의한 반응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기 동족을 구원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상처를 씻어야 사용할 수 있으므로 두 가지의 기적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한다는 증표이기도 하지만 그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먼저 지팡이가 뱀이 되었다가 다시 지팡이가 되는 기적이고, 또 하나는 가슴에 손을 넣으니 문둥병이 발병했다가 다시 넣었다가 빼니 고쳐지는 기적입니다.
① 지팡이 기적은 하나님께서 지팡이와 같은 사람(이스라엘 백성), 뱀(바로)과 같은 사악한 사람이든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팍한 애굽 왕도 이스라엘 동족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가 받은 상처의 치유인 것입니다.
② 그리고 문둥병 기적은, 모세의 마음속에 문둥병과 같은 상처가 있는데 이것을 치유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세의 상처를 치료하시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 요셉의 경우를 봅시다.
형들에게 죄 없이 팔렸고, 보디발의 집에서도 죄 없이 감옥에 갔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상처를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창 45: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창 50: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한다는 것은 오늘날 신약시대에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보내신 성령님이 함께 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시는 보혜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가슴에 부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믿는 우리들에게 십자가가 그의 가슴에 꽂힌 것과 같습니다.
상처를 준 자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사랑 뿐입니다.
나의 죄를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고 달려 죽으신 십자가의 사랑 뿐인 것입니다. 그 사랑을 경험 한 자가 상처를 준 자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매달려 계실 때 그들이 조롱하기를 오늘 말씀 40절, 41절을 보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외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 27: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 고통 가운데서 내려 오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자기는 구원할 수 있으나 남은 구원이 안됩니다.
나 같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싹 쓸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끝까지 그 고통을 참으시고 달려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모든 죄를 지고 가기 위하여 모든 상처를 지고 가기 위하여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위한 무한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십자가가 가슴에 꽂히면 다 되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 질병의 문제, 상처까지 치유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우리들의 질병, 우리들의 가난, 우리들의 상처, 우리들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말입니다. 예수를 믿고 물세례, 성령 세례를 받으면 우리의 옛 사람과 죄의 몸이 죽어 장사되고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되어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롬 6:3-6)
이 후에 지은 죄는 물두멍에 손.발을 씻듯이 회개하면 되는 것입니다
[요 13: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출 30:18] 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 그것을 회막과 제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 19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3. 그러므로 상처 있는 가슴에 십가가를 꽂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장소가 어디입니까?
33절, 골고다 즉 해골이라는 곳입니다. 아람어입니다. 라틴어로는 갈보리입니다. 해골은 죽음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이 있는 장소입니다. 이 사망의 장소에 십자가가 선 것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망의 장소에 십자가가 꽂혀 그 사망을 예수님께서 지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가 죽으심으로 죽음의 장소가 이제는 생명의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망이, 상처가 가득한 우리 가슴에 십자가가 서기만 하면 그 모든 사망과 상처의 아픔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전되어 우리가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를 마라의 쓴 물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5:22]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수백만의 군중과 가축이 광야 사흘 길을 걸어서 겨우 물을 발견하였는데 쓴 물인 것입니다. 쓴 물이라 마실 수가 없습니다. 곧 죽음이 다가오는 절망적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게서는 한 나무를 가리키시고 그것을 물에 던지라 하시니 물이 달게 된 것입니다.
한 나무는 바로 십자가를 예표합니다. 쓴 물에 십자가가 들어가니 단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쓴 곳에, 사망이 있는 곳에 십자가가 서니 먹을 수 있는 생수가 된 것입니다.
마치 사망의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가 세워지니 모두가 살아나는 역사와 같지 않습니까? 십자가는 쓴 물의 독을 다 빨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 지고 가시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삶의 어려운 현장에 들어가면 이것처럼 문제가 풀어지는 것입니다. 사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독이 빠져 나가는 것입니다. 상처가 치유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받은 상처가 아무리 깊어도 그 가슴에 십자가가 세워지면 그 상처의 아픈 독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픈 상처를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것입니다. 그러면 용서가 가능한 것입니다.
저도 교회가 흩어지는 상황 속에서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교회를 위하여 분양받은 아파트도 팔아야 했고, 적금도 깨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흩어지니 얼마나 마음에 상처를 받았겠습니까?
그래서 심신은 더욱 쇠약해지고 우울증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뱀에 물린 것 같이 불뱀에 물려 영적으로는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영적인 뱀에 물리면 힘도 없고 의욕도 없고 자신도 없고 사람들이 보기 싫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상처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내 가슴에 먼저 십자가를 꽂았습니다.
십자가를 꽂는 퍼포먼스를 하면서 내 안에 더러운 상처의 독들이 십자가를 통하여 다 빨려 들어가도록 말입니다.
우리가 상처가 있는 가슴에 십자가를 세우기만 하면 상처의 독이 빠져 나가고, 오히려 예수님의 사랑이 흘러 들어가 그 상처가 씻어지고 또 상처를 준 자를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 7:33,39절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그 배에서 생수가 흘러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상처가 있으면 생수가 아니라 독이 든 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로 잃었던 에덴동산의 네 개의 강물이 다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물은 성령의 생수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주어지는 성령인 것입니다.
이 물을 마셔야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인도 살고 남도 사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맨 정신으로는 참 용서가 안됩니다.
오직 십자가의 사랑을 입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매달은 그들을 용서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이런 예수님을 만난 자가 이런 용서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입은 자는 어떤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한번 따라 해 보시길 바랍니다.
“주님 오늘 상처가 있는 내 가슴에 믿음으로 십자가를 꼽습니다. 상처의 독을 다 뽑아 가시고 대신 주의 사랑을 부어주십시오. 독이 흐르는게 아니라 생수가 흐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에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런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