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만인가? 수채화 같이 소박하면서도, 때로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일상의 질곡에서 전율마저도 느끼게 하는 감동을 주는 한국영화를 대한 것이.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김기덕 감독) 이후 오랫만인 것 같다.
‘밀양’ ‘오아시스’ ‘초록 물고기’ 등에서 현실적인 가치가 없는 대상 속에 끈질기게 관객의 마음을 뒤흔드는 그 어떤 것을 추구한 이창동 감독이 이번에는 ‘시’에서 각본까지 손수 써 통념과 편견에 찌든 우리들을 다시 한 번 부끄럽게 만든다. 그 노력에 걸맞게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획득한 것은 자연스러운 결실이라 할 수 있겠다.
영화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노 배우 윤정희 씨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세월의 더께를 마다 않고 자연스럽게 노년에 이르는 윤정희 씨의 모습은 비단 영화배우로서뿐만 아니라 한 일상인으로서 시사하는 바 크다고 본다. 오늘 날 어느 여인의 참 모습을 알려면 손 보기 전 그의 자식을 보아야만 한다고까지 할 정도로 여인들의 모습을 갈고 닦는 게 일상화 된 한국사회에서, 윤정희 씨의 고결하게까지 느껴지는 자연스러우면서도 맛깔스러운 노년의 모습은 영화의 내용만큼이나 감동스럽다. 어쩌면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 지극히 비정상적인 것 들 속에서 돋보이게 되는 한 예가 아닌지.
이 영화는 이창동 감독이 작심하고 영화로 만든 詩論 내지 藝術論 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는 대중시인 김용택 씨까지 직접 영화에 출연시켜 시란 어느 특정 시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것인데 그것을 날게 할 수 있는 날개를 달아주지 못하기 때문에 태어 나지 못 할 뿐이라며, 홀로 중학생 외손자를 키우기 위해 간병인 노릇을 하며 어렵게 살아가는 한 할머니 (윤정희 역)를 통해 시를 풀어 나가고 마침내는 그녀의 누추하고 구차스러운 삶을 한 편의 시로 승화시킨다. 그녀에게 시가 없었더라면 타인의 불행과 나의 수치를 무감각으로 마비된 일상 속에 묻어버리고 말았을 것을, 그녀는 시를 끌어안음으로써 그 모든 것들에게 진솔한 길(죽음)을 택하는 시인으로 거듭 태어나게 된다.
시를 쓴다는 것은/ 동지섣달 이른 새벽/ 관절이 부어 오른 손으로/ 하얀 쌀 씻어 내리던/ 엄마 기억 하는 일이다./ 소한의 얼음두께 녹이며/ 군불 지피시던/ 아버지 손등의 굵은 힘줄 기억해 내는 일 이다.
조영혜라는 분의 시 중에서 인용한 윗 부문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원초적으로 고여있는 시심이 어느 노 부인에게 깃들게 됨으로써 그녀의 삶이 엄청난 변화를 겪게되는, 한 이름 없는 참된 시인에게 바쳐진 헌사가 이 영화의 주제라고 할 수 있겠다.
시를 동경하는 한 우체부와 이태리에 망명중인 칠레 시인 네루다의 이야기를 주제로 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한 이태리 영화, 마이클 래드포드 감독의 Il Postino(우체부)에 버금가는 감명을 주는 영화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이창동 감독에게 박수를 보낸다.
첫댓글 극장에서 영화 본지가 10년도 더 된것 같은데 그렇게 극찬하니 꼭 보아야 겠네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