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집 딸은 아니지만
심 영 희
어제가 외손녀 생일날이다. 1박 2일 문학행사에 다녀오느라 집에 늦게 도착했으니 나는 물론이고 엄마인 딸도 딸의 생일을 위해 떡을 만들지는 않았다. 으레 생일날에도 케이크와 피자를 주문하지 우리 전통 떡을 먹겠다는 아이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내 아들 딸이 어렸을 땐 정말 열심히 생일 떡을 만들어 줬다. 이것은 친정어머니께 물려받은 모정이며 정성이다.
어머니께서는 그 많은 자식들을 위해 매달 떡을 만드셨다.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던 절편에 오빠가 좋아하는 찰떡. 동생이 좋아하는 송편. 내가 제일 좋아하던 기정(증편)등을 만들기에 분주하셨고 특별히 좋아하는 떡을 정해 놓지 않은 자식들은 종류를 바꿔가며 떡을 만드셔서 온 가족의 입을 즐겁게 해주셨다. 여러 가지 떡을 만드시던 어머니의 일은 지금 생각하면 중노동이다.
지금은 입맛대로 아무 때나 떡을 사먹을 수 있지만 예전에는 떡가루를 만드는 일도 절구나 디딜방아를 이용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가 좋아하는 기정은 오빠 생일날 먹던 인절미와 바로 밑에 여동생이 먹던 송편에 비하면 두 배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던 떡이다. 불린 쌀을 빻아서 쌀가루에다 막걸리를 섞어 발효시키는 대도 하루가 걸렸던 것 같다.
발효가 되면 어머니는 큰 가마솥에다 밑판을 깔고 삼베 보자기를 펴놓은 후 발효된 묽은 떡 반죽을 주르르 붓고는 그 위에 예쁜 수를 놓듯이 고명으로 장식하신다. 고명에 절대로 빠져서는 안될 계율이라도 있는 듯 첫 번째 주인공은 맨드라미 꽃이다. 먼저 붉은 맨드라미 꽃을 모양 있게 찢어 간격을 맞춰 놓은 뒤 그 사이사이에 석이버섯 대추 와 곶감 썬 것을 순서대로 배열해 놓으면 꽃무늬 천을 펴놓은 듯 했다.
고명으로 장식을 한 후엔 가마솥 뚜껑을 덮고 김빠져나가면 떡이 잘 익지 않는다면서 뚜껑보다 더 큰 보자기 몇 겹을 뚜껑 위에 덮고는 장작불을 집혀 기정 떡을 쪄내셨다. 생일날이면 생일 맞은 자식에게는 따로 떡을 한 접시 담아 주시며 많이 먹고 얼른 크라시며 어머니도 흐뭇해 하셨다.
막걸리나 이스트로 발효시킨 기정과 찐빵을 좋아한다는 것이 지금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술이라면 회갑 진갑 다 지난 이 나이에도 소주와 막걸리는 지금까지 마신 술 합쳐도 작은 소주 한 병 막걸리 한 병이 안되고 맥주는 마신 것 다 모으면 맥주 열 병은 될 것이다.
이렇게 술과는 거리가 먼 내가 예전에는 술 떡이라고까지 불렀던 기정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지금도 술은 안마셔도 시큰한 술 냄새가 나는 기정을 여전히 좋아한다. 어머니께 기정 떡 만드는 기술을 전수받겠다고 해놓고는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못 배우고 어머니는 오래 전 고인이 되셨고 지금은 떡집에서 기정을 사다 먹고 있지만 내 떡 만드는 솜씨도 보통은 넘는다고 자부하고 싶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내 자식들 생일에는 나도 꾸준히 생일 떡을 만들어 줬다. 세월이 흘러 방앗간도 많고 떡을 사올 떡집도 많았지만 난 고집스럽게 친정어머니처럼 생일에 떡을 만들었다. 아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 새 건물을 지어 유치원이 이사를 하게 되어 임원들이 집들이 음식을 한가지씩 맡아 해오기로 했는데 나는 자신 있게 떡을 해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양이 많고 여러 사람의 입맛에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던 약속은 지켜야 하니까 쌀을 물에 불려 방앗간에서 빻아 절반은 생 가루로 가져오고 절반은 절편 빼듯이 묽은 반죽으로 빼와서 저녁때부터 떡을 만들기 시작했다. 생 가루에는 식염색소로 고운 물을 들여 색깔마다 다른 속을 넣어 송편을 빚고 기계로 뽑아온 반죽으로는 온갖 모양으로 꽃처럼 떡을 만드느라 밤을 꼬박 새웠다.
다음날 집들이 잔치에는 부형들 솜씨자랑 대회라도 하듯 팥죽을 비롯해 부침에 전 국물김치 포기김치 잡채 화채에 식혜까지 상위에는 부형들의 정성과 솜씨로 가득 찼다. 물론 내가 만들어간 떡 접시도 음식들 사이에서 생긋 웃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먹으니 음식 그릇을 연신 갈아놓아야 하는데 임원 중에 가장 나이가 어리던 나에게 심부름이 많이 돌아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군말 없이 일을 척척하다 “나 어제 밤에 떡 만드느라 한잠도 못 자서 피곤하다”고 했더니 모두 깜짝 놀라며 이 떡을 손수 만들어 왔느냐고 반문한다. 당연하다는 나의 대답에 엄마들은 입을 딱 벌리고 떡이 너무 예쁘고 맛있어서 으레 떡집에서 맞춰온 줄 알았다며 칭찬이 대단했다. 몇몇 부형이 떡집 딸이냐고 물어 그렇다고 대답했다. 종종 듣는 말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내가 만든 떡을 보면 의아한 듯 떡집 딸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항상 그렇다고 답하면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거짓말이래요 떡집 딸이 아니고 조합장 집 딸이래요” 해서 한바탕씩 웃고 했는데 떡을 만들지 않고 사다 먹는지도 십 년이 훨씬 넘는다.
떡집 딸은 아니지만 내가 떡집을 했다면 정말 예쁘고 맛있는 떡을 만들어 사람들의 눈과 입을 유혹하며 떡집 주인으로 이름을 날렸을 것이다. 조카며느리가 정성껏 만들어다 드린 생일 떡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온 동네 사람들 앞에서 덩실덩실 춤추며 자랑하시던 작은 시어머님 생전 모습이 눈앞에 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