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1869.12.31~1954.11.3)
[ 젊은 수병 ] 프랑스의 화가. 북(北)프랑스의 카토 출생. 처음에는 파리에서 법률을 배웠으나 화가로 전향하였다. 1892년 파리의 장식 미술학교에 적을 두고, 미술학교 수험준비를 하면서 아카데미쥘리앙에서 부그로의 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그 아카데믹한 가르침에 만족할 수 없어 루브르미술관에서 모사(模寫) 등을 하고 있는 사이 G.모로의 눈에 띄어 그의 미술학교 교실로 입학하였다. 여기서 루오 마르케 등과 교우, 모로의 자유로운 지도 아래 색채화가로서의 천부적 재질이 차차 두각을 나타내었다. 97년 소시에테 나시오날 전람회에 출품한 《독서하는 여인》을 국가가 매입하게 되자 이 전람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 후 피사로 등과 알게 되어 인상파에 접근하였고, 또 보나르나 뷔야르 등의 영향도 받았다. 모로가 죽은 후에는 아카데미 카리에르에 다니며, 드랭과 알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웠다.
한편 예술적으로는 드랭을 통하여 블라맹크를 알게 되고, 1900년 이후에는 세잔풍(風)을 도입하여 극도로 구성적인 포름과 어두운 색조로 전향하였으나, 1904년 시냐크·크로스와 함께 생트로페에 체재하게 됨으로써 신인상파풍을 짙게 받아들였다. 이 새로운 교우관계가 이듬해에 시작된 야수파(포비슴) 운동의 강렬한 색채의 폭발로 나타나게 되었다. 드랭·블라맹크 등과 함께 시작한 이 운동은 20세기 회화의 일대 혁명이며, 원색의 대담한 병렬(竝列)을 강조하여 강렬한 개성적 표현을 기도하였다. 1908년경에는 강한 색채효과를 억제하는 한편, 새로이 전개된 피카소를 중심으로 한 입체주의(큐비즘)의 방향으로 눈을 돌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10년의 뮌헨 ‘근동미술전’의 인상, 11∼13년 두 번에 걸친 모로코 여행으로 왕년의 포브 시대와 다른 장식적인 현란한 색채를 사용하여 특히 아라베스크나 꽃무늬를 배경으로 한 평면적인 구성이나 순수색의 병치(竝置)로 독특한 작풍을 창조하였다. 이 무렵의 작품으로는 《목련꽃을 든 오달리스크》가 있다. 그 후 그의 예술은 차차 성숙해져 보색관계를 교묘히 살린 청결한 색면효과 속에 색의 순도를 높여 23년경부터 30년대에 걸쳐 확고한 마티스 예술을 구축함으로써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회화의 위대한 지침이 되었다.
인상주의의 영향
1898년 만년에 이른 피사로는 여러 건물의 위층 창문을 통해 파리의 가장 찬란한 풍경을 인상주의적 화풍으로 그리고 있었으며, 아울러 필법과 감수성의 양면에서 1870년대 개척기의 인상주의 화풍으로 되돌아간 일련의 작품으로 일생을 마무리짓고 있었으며 이 작품들이 그 뒤 몇 년에 걸쳐 마티스에게 끊임없이 도전해왔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세잔느의 그림을 사들인 것은 마티스는 자기의 습작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독자적인 예술 활동을 하기 이전에 면밀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는 당대 화가의 작품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분명히 보여준 셈이었다.
신인상주의의 영향
《외젠느 들라크루아에서 신인상주의까지》라는 책을 읽고 시냑과 신인상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 책은 원래 그가 파리를 떠나있던 1898년에 《르뷔 블랑슈》에 연재되었다가, 이듬해 단행본으로 나온 것이었다. 바로 그 매력에 사로잡혀 있을 동안에 그가 들라크루아의 작품 <레베카의 납치>(1899년)를 펜과 잉크로 모사한 습작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마티스는 이 습작을 통해서 인물들을 이례적으로 넓고 아주 짙은 그림자로 에워쌈으로써 불쑥 솟아오른 듯한 부조감을 강조하려고 했다. 결국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야수파 회화의 흑백판이 되는 드로잉 양식으로서 그것은 마티스가 공인된 거장의 작품을 놓고 그때까지 만들어낸 습작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었다. 신인상주의의에 관한한 그 궁극적인 결과는 마티스가 시냑을 직접 만나 볼 기회가 있었던 1904-5년에서야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
마티스는 <사치, 평온, 쾌락>에서 큐테라 섬(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있는 섬, 따라서 사랑의 본거지)과 같은 이 주제를 세심하게 갈고 다듬었다. 이리하여 그는 1905년 여름 콜리우르에 머무는 동안 개인적으로 발전시킨 야수주의로 나아가는 돌파구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그곳에서 신인상주의풍의 작품 몇 점이 나왔지만, 그 작품들의 모자이크와 같은 효과는 넓고 연속적인 강렬한 색점을 특색으로 하는 <열린 창문, 콜리우르>에서의 한층 더 생동하는 무엇으로 바뀌었다.
입체주의의 영향
야수파 동료들과는 달리 마티스는 당시에 갓 태어난 입체파 화가들의 기법에 빠져 외도를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힘찬 선의 장식적 율동을 창출하고 넓은 평면적인 색면과 명암을 강력하게 대비시키면서 인물에 살을 붙이는 모델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듯하다. 그의 목표는 입체파 화가의 목표와 비슷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 수단은 정반대였다 (그 목표는 내재적으로 모순되는 두 가지 문제를 화해시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실재와 똑같이는 아니더라도 일종의 입체 환각, 적어도 그리려는 인물의 입체감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전체 구도를 통하여 화폭의 평면성을 고스란히 보존하는 것이었다). 이때 마티스는 자신의 개성있는 방법론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와 동시대의 많은 화가들이 처음으로 입체파에 접했을 때 빠져들었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야수파 가운데서도 브라크만이 그 새로운 운동에 공헌했는데, 사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갓 자리잡은 야수파의 지도자의 자리를 놓고 마티스와 다툴 경쟁자로 보았었다. 그밖에 드랭, 뒤피와 심지어 블라맹크마저도 세잔느의 구축적인 교훈을 시험하여 1907년에서 1910년 사이에 입체파의 원형 Proto-Cubist이라고 할 성과를 올렸다.
1910-13년경 까지의 여행은 작업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생애에 독특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 결과 일련의 주요한 작품들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그가 돌아온 뒤 그때의 인상이 화실에서 다른 작품을 구상하는 영감의 구실을 했다. 이 시기에 <모로코 사람들>(1916년)을 그렸는데 이례적으로 세부분으로 나누어진 이 그림에서 화가는 1914년 시작된 입체파의 수법을 시도하고, 그 시각적 이미지에 불연속 효과를 투사한다. 그는 이 그림의 세 부분 사이에 명목상의 이음새를 잘라버리고, 각 부분을 공간적으로 불확실한 검정색 영역에 걸어놓는다. 여기서 하나의 장식면을 세 부분으로 나눈 것은 1914년에서 1917년 사이에 마티스가 때늦게 입체파의 개념에 일부나마 동화했던 사실을 나타내주는 고안이다.
이 시기에 제작된 중요한 작품의 상당수는 이러한 집착의 흔적을 거의 보이지 않지만 다른 몇몇 작품들에는 1907년을 전후한 초기 단계에서 마티스의 개인적인 기법의 유기적인 성장에 유해했던 입체파 양식을 터득하려는 직접적인 노력의 흔적이 엿보인다. 그런데 1914년에 이르면, 입체파의 화려한 시대는 막을 내리고, 그 양식은 평면적인 장식과 단순화 경향(후기에 와서는 '종합적 입체주의'라고 불린다)으로 흐르고 있었다. 더구나 일부 입체파 화가들은 단편화된 평면과 뒤틀린 양감의 작품들에 강력한 색채를 도입하고 있었다. 이들은 보다 단색적 경향을 띠고 있었던 초기 입체주의와는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었다. 이렇게 발전한 모든 기법들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1914년경에 후한 그리가 내놓은 그림이라 생각되며, 여기서는 생생하고 때로는 서로 충돌하는 색채가 평평하고 무늬진 화면을 형성했다. 이런 현상이 계기가 되어 마티스는 자기 고유의 화법을 버리지 않고 입체파의 고안들을 실험할 수 있는 합리적인 기회를 잡았다.
어쨌든 1914년 직후의 주요 작품들과 아울러 수많은 이차적 작품들에는 입체주의의 성향이 배어 있으며, <강가에서 목욕하는 사람들>(1916-17)이 완성되면서 그 절정에 달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피아노 교습>(1916)은 수평, 수직과 대각선으로 이루어진 격자에 에워싸인 평면의 덩어리이고, 마티스가 입체파의 유산을 가장 일관성 있게 수용한 작품이 아닐까 한다. 아울러 이 그림은 입체파 운동에 힘입은 바 크지만, 단순히 그 기법을 불완전하게 빌어오거나 재해석한 집합체가 아니다. 얄궂게도 <파아노 교습>을 제작하고 있을 동안, 혹은 그 직후에 마티스는 그것과 짝을 이루는 <음악 수업>을 무르익고 부드러운 양식으로 그렸다. 그런데 이 작품은 분홍, 초록과 회색이라는 동일한 기본색으로 그려져 있어, 일단 입체파의 문제를 정복하고 난 뒤에는 등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체파는 그 뒤의 마티스 예술-후기의 자른 색종이 그림이나 대형 벽화 <춤>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신고전주의의 영향
마티스는 1920년대 낸 그는 하렘들과 그들을 잘 돌봐주는 수동적인 하녀들을 재현한 작품을 그리는데 정성을 기울였다. 따라서 드라크루아나 그보다 더 중요하게 연관되는 앵그르와 비교해보지 않을 수 없다. 잘 알다시피 앵그르는 입체파 세대의 화가들이 재발견하여 새로이 평가를 내린 인물이었다. 게다가 일찍이 1915년에 피카소는 위대한 프랑스 신고전주의자 앵그르의 양식과 기법을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듯한 소묘를 제작하고 있었다. 마티스가 <삶의 기쁨>을 그리고 있을 당시 또는 그 직후에 앵그르의 <황금 시대>를 알고 있었는지 증명할 길이 없다. 하지만 1920년대말 이후로 마티스가 앵그르에게 보다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음직한 조짐으로 볼 만한 유사성이 그의 작품에 뚜렷이 드러난다. 마티스 예술의 신고전적 요소는 대체로 깊숙이 숨겨져 있고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베일을 쓴 여인>(1927)은 한손으로 턱을 괴고 팔꿈치로 무릎을 짚고 균형을 잡은 채 앞을 보고 있는 자세는 앞서간 거장 앵그르의 전형적인 구도이다. 그 밖의 작품들에서 앵그르의 상투적인 구성 기법을 자기 작품에 단순히 접목시키기만 한 것은 아니었고 《어느 화가의 기록》에 제시했던 자신의 이론을 완성하고 정교하게 다듬었다. 그는 1930년대 거의 우연히 앵그르적인 국면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은 그의 이상이 지는 전통주의적 성향과 그가 앞선 거장들의 작품을 철저히 알고 있었음을 가리키는 또 하나의 지표에 지나지 않는다.
마티스가 다루었던 모티브
마티스가 최초로 내놓은 독창적 작품은 정물화였고, 그 뒤 풍경화로, 뒤이어 대형 인물화로 그 세계를 넓혀 나갔다. 그는 일생에 걸쳐 이 세 장르에 전념했으며, 자기 생애의 주제들이 점진적으로 굳어감에 따라 이 셋을 결합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정물화, 풍경화와 인물화라는 3대 장르 하나 하나가 그 역할과 중요성을 달리하면서 그의 일생에 끊임없이 등장하곤 했다.
(1) 화실
마티스가 그린 화실은 흔히 화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실제로 그 안에 있더라도 그의 위치는 구석지거나 단편적이고, 이따금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만 등장한다. 그는 투쟁의 한복판에 자리잡은 예술가의 영웅적인 역할을 강조하려기 보다는 자기의 존재는 언뜻 스쳐지나가고 작품 그 자체를 유일한 주인공으로 내세우려 했다. 드디어 그 작품을 감상자의 깊은 사색에 맡길 때에는 그 완성된 구도에 균형과 고요가 담겨있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마티스는 자기의 화실을 끊임없이 모티브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화가의 화실을 어떻게 장식해야 하는가 하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초기 작품에서는 그 출처와 가치가 다양한 대상들이 아무렇게나 모여있는 일상적인 작업실의 내부가 드러나 있는 것들이 많다. 하지만 1909년에 이르면 그는 치밀하게 계산된 전체의 주요한 일부로 자기의 작품들을 배치한 보다 정교하고 원숙한 장면을 그렸다. 1902년 어려웠던 시절 뜻밖에도 <다락방 화실>(1903년)을 낳는 성과를 올린다. 이 작품에는 그가 일생 동안 만들어낸 수많은 작품의 주제와 체제가 시험적으로 나타나 있는데, 초기에 보여주었던 어두운 색조의 경향이 보인다. 그외 <귀스타브 모로의 화실>(1895년), <분홍화실>(1911년), <화실의 나부>(1935년), <빨간화실>(1948년)이 있다.
(2) 인물화
무용수들과 음악가들, 그리고 '풀밭에 누워 이야기를 하거나 꿈에 잠긴 사람들'이란 주제들은 모두 1906년의 그의 걸작 <삶의 기쁨>에서 나왔다. 이 목가적인 작품은 야수파로서 그의 절정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단계를 넘어서는 방향을 가리키는 지표이기도 했다. 그 전해의 봄에 제작한 신인상주의 작품 <사치, 평온, 쾌락>과 더불어 이 그림은 한층 더 기념비적인 일련의 인물화 습작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일찍이 1890년대초부터 그는 살아있는 모델의 습작과 고풍스러운 석고 조상의 연필화를 번갈아가며 그렸다. 그 소묘들에는 힘이 넘치고 선은 깔끔하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주의라고 규정해야 할 어떤 윤곽선들과 아카데미즘적인 이상화의 규범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보여주는 윤곽선들 사이의 갈등을 느끼게 된다.
<귀스타브 모로의 화실>에서 그가 정물화에서 이미 터득한 바로 그 음울한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인간상을 다루겠다는 결의가 뚜렷이 드러나 있다. 살아있는 모델이 역광을 받으며 화면의 중심 앞쪽을 차지하고, 오른쪽 적절한 거리에 화실의 기본적인 소도구인 서 있는 고대 석고 인물상이 하일라이트를 차지하고 있다. 당시 다른 어느 화실에서도 그와 같이 거침없는 필법과 강력한 사실주의를 허용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암울한 색조는 마티스가 모로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타는 색채에 관심이 없었음을 알려준다.
마티스의 색채에 대한 그의 관심은 화면에 깊이와 부조적 특성을 부여하기 위한 노력과 언제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말을 바꾸면 공간적인 입체 환각과 인체의 모델링이라는 문제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 하나의 공식으로 이러한 필요와 욕구를 모두 결합하려고 노력한 나머지 1907년의 작품에는 긴장이 고조되었다. <푸른색의 나무, 비스크라의 추억>과 <사치 I> 및 <사치II>를 비교하면 얻는 바가 있다. 누워있는 푸른 인물상은 땅에 고착되어 있고 육중하고도 근육이 우람하다. 나체의 여인을 에워싸고 있는 푸른 풍경의 단편이 그녀를 앞으로 밀어내는 듯한 구실을 하고 있으며, 감촉할 수 있는 부피감을 극대화하면서 동시에 그 구도에 있어서는 인체의 겉모양이 지닌 단순하면서 장식적인 윤곽선들을 반영하고 있다. 사실 <사치 I>은 육중한 인물에서 곡선이 두드러지는 인물로 변해가는 과정이 여전히 드러나는 그림으로, 화가는 이 작품을 작가의 벅찬 노력의 증거로 남겨두었다.
<푸른색의 나부>는 힘차고 복잡한 색채 사용법으로 미루어 야수파의 후기 작품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사치 II>는 조화의 시대로 가는 길을 열었고,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형태와 색채가 어우러지는 시기의 산물이다.
<분홍색의 나부>를 <푸른색의 나부>와 연관지어 살펴보면, 마티스가 장기간에 걸쳐 발전해온 과정의 내적인 통일성을 엿볼 수 있다. 이들 두 작품을 비교 검토해보면, 여체의 이해와 표현을 거쳐 그의 양식이 점진적으로 발전해가는 과정이 드러난다. 실상 <분홍색의 나부>는 수많은 시행과 수정이 있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 포즈 및 앵그르를 연상시키는 비례에 도달한 작품이다. 결국 이 그림은 그보다 약 30년 전에 그린 <푸른색의 나부>를 거의 거울에 비친 상처럼 뒤집어 놓은 듯이 되어 있다.
(3) 파피에 데쿠페
파피에 데쿠페는 먼저 종이 여러 장을 단색의 과슈로 칠한 다음, 원하는 형상을 잘라내어 그림의 표면에 풀칠을 하여(남에게 풀칠을 시키는 경우도 있었다)붙였다. 그는 1931-33년에 반즈 재단에 남길 <춤>을 그리면서 일정한 색채 효과를 실험할 목적으로 처음 이 기법을 사용했다. 그후 1948년에서 세상을 떠나는 1954년까지 마티스는 이 기법을 즐겨 사용하게 된다. <재즈>의 삽화는 판형이 상당히 작을 수밖에 없었지만, 마티스는 오래지 않아 파피에 데쿠페를 대작에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러한 발상을 바탕으로하여 마티스의 마지막 5년 동안에 기념비적 대작이 태어날 수 있었다. 니스에 있는 마티스의 아파트에는 파피에 데쿠페의 제일 간소한 작품으로 일려진 <푸른색의 나부IV>(1952)가 들어있다. 그 포즈는 1925년의 <장식적 인물>과 비교됨직하고, 아울러 피카소의 뼈만 남은 <앉아서 멱감는 여인>(1930년)과 연관될 수 있다. 한편 평면적이고 양식화된 표현방법은 <분홍색의 나부>(1935년)에서 볼 수 있는 수준의 장식적 경향을 향해 한 걸은 더 나아간 것이다. 1952년 제작된 파피에 데쿠페의 가장 야심작은 <수영장>으로 전체의 길이가 16m에 이른다. 여기서도 다시 한 번 푸른 인물들이 흰 바탕과 대조를 이루지만, 이번에는 종이의 위쪽 여백과 나아가서는 아래쪽 여백을 훨씬 넘어 껑충껑충 뛰어 나간다. 그외 <임금님의 슬픔>(1952년)과 <달팽이>(1953년) 등이 있다.
마티스의 업적과 영향
[ 초록색 가르마 [마티스부인] 1905 캔버스 유채]
마티스는 오랜 예술 활동을 통해 신고전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등 반드시 그 순서대로는 아니더라도 19세기의 갖가지 미술 운동에서 영향을 섭취하여 자기 예술을 살찌우고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렸다. 전체적으로 보아 마티스의 양식은 이러한 전통을 무시하고는 생각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그는 20세기의 가장 창의적인 거장의 한 사람으로 변신했고, 오늘날 젊은 화가들에게 끊임없이 막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20세기 전반의 몇 안되는 화가이기도 하다. 마티스의 예술은 분명히 파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나, 그의 후기 작품들은 이러한 지역적인 양식을 철저히 뛰어넘고 있었다. 뒷날 이들 작품은 20세기의 국제 미술 문화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파리의 다른 몇몇 거장들에 못지않은 지위를 굳혔다.
미술사에 있어서 마티스의 명목상의 지위는 야수파의 선도자였다. 이는 피카소가, 그리고 어느 모로는 브라크가 입체파의 선도자로 간주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야수파는 연약하고도 단명한 운동이었고, 화파를 형성한 후에도 공식화된 강령을 갖춘 적이 없었다. 야수파의 모든 화가들 가운데서도 오로지 마티스만이 치열하면서도 단순화된 색채 조화와 세련된 소묘력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성취해 나가는 위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는 일찍이 마르케, 드랭등과 야수들의 우리에 모였던 다른 화가들 블라맹크나 루오등등과의 교류를 가졌고 그들과의 만남은 마티스가 대담한 색채 효과를 추구하려는 자세를 북돋워주는 데 분명히 이바지 했다. 그러나 이 그룹은 새로운 회화의 공통된 강령이 아니라 몇 가지 개인적인 취향이 우연히 일치해서 뭉쳤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마티스는 그에 못지않게 루브르 미술관이 옛 거장들을 연구하고 세잔느, 고갱, 그 밖의 근대 화가들에 몰입하고 피사로, 시냑과 크로스등 선배 화가들과 직접 만남으로서 배운 것이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그의 생애를 통틀어 마티스의 경쟁자를 꼬집어 낸다면, 피카소가 으뜸이었다. 이들 두 예술가들이 반세기에 걸쳐 조심스레 우정을 지키고 서로의 작품에 깊은 경의를 품고 있었다는 것은 뜻깊은 일이었다. 심지어 1945년에 그들은 합동 작품전을 열기까지 했다.
피카소의 초기 작품에는 충동적인 천재성, 무서운 속도로 과제를 빨아들이는 그의 감수성이 번득인다. 하지만 마티스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뚜벅뚜벅 착실히 앞으로 나아갔고, 그러면서도 전혀 진부하지 않고 이따금 현학적인 기미마저 보였다. 그가 스스로 선택한 기예의 전통에 자리잡은 그의 기반은 지나치다고 하리만큼 단단했다.
미국화가들은 마티스의 작품은 모든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입체주의를 바로잡을 수 있는 대항 수단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엘스워스 켈리나 프랭크 스텔라와 같은 젊은 화가들은 서로 다른 활동 시기에 그로부터 영감을 받았고, 톰 웨셀먼과 같은 팝아트의 화가는 자기 작품의 구성안에 일종의 장식으로 마티스의 회화를 그대로 복사했다. 보다 최근에 와서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이전까지 피카소와 몬드리안에게서 이미지를 차용해오다가 그 뒤 1973년에 화실을 소재로 한 작품과 정물화를 위한 도상학의 바탕을 거장 마티스의 주제 처리법에서 찾았다. 마티스의 마지막 작품들은 1960년대초에 문헌과 전시를 통해 널리 소개되어 20세기 후기의 새로운 세대에게 목표를 설정하고 노력을 기울일 수 있도록 고무하는 역할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49년 남(南)프랑스 니스의 방스성당의 건축·장식 일체를 맡아 여기에 모든 기법과 재료를 동원, 그의 예술의 집대성을 이룩하고 니스에서 죽었다. 오늘날 그의 작품은 세계 각국에 존재하고, 20세기 최고의 모뉴먼트의 하나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