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로 키워 남자답게 씩씩하게. 바지도 입히고 넥타이도 매게 하고 단발이면 어때 운전도 하는데. 축구, 야구는 물론 태권도, 검도도 시키고 야근 및 숙직도 하게 하고 군대도 보내고 오줌도 서서 싸게 시키는 거야. 처음부터 잘되는 일이 어디 있어?
원형감옥(Panopticon)
'01년 <교단문학> 가을호 발표작
중앙을 차지한 망루, 그 안에 틀어박혀 뱀눈을 하고 있는 감시자가
24시간 죄수들 향해 불을 켜고 있다
무엇을 먹고 있는지,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속속들이 알아내기 위해
푸른 옷 걸쳤지만 불빛에 늘 발가벗겨져 사는 죄수들은
그러나 감시자를 볼 수 없다
그가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감시탑의 불은 언제나 꺼져 있으므로
이렇게 늘 우리는 빛 속에 열려 있고
그는 어둠 속에 닫혀 있다
어제는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편지가 날아오더니
오늘은 전화가 왔다
어떻게 전화번호와 주소를 알았느냐고 묻자
다 아는 수가 있단다
다 아는 수가?!
그는 인터넷, 신용카드의 속내를 통해
또는 감시 카메라를 동원, 심지어 도청까지 하면서
우리를 엿보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나의 충치의 개수와 등의 검은 점까지도
헤아리고 찾아낼 수 있단다
그러나 난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도무지 없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원형감옥 안의 죄수라면
그는 하늘을 주름잡고 있는 셈
그에 의해 나의 사생활이 양파처럼 벗겨지고, 아니
어쩌면 조종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면
벤담의 파놉티시즘이 드디어 어둠처럼 깔리는가싶어
순간, 피의 흐름 멈. 추. 어. 진. 다.
나는 한 마리 튼튼한 우리 안의 짐승,
망루에서 쏟아지는 검은 불빛을 끌 수가 없다
감시탑 안의 불을 밝히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
그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내 방과 내 몸의 등(燈) 모두 끄고
심혼(心魂)에 불을 지피는 일
그리고 이웃들과 용오름하듯 손을 잡고
힘을 모아나가는 것‥‥‥
(2000)
벗에게
- 선택을 강요하는 세상
'01년 <교단문학> 가을호 발표작
벗아,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차 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
그럼에도 자동차에 짐짝처럼 몸을 얹을 수밖에 없는 것은
걸어다니거나 자전거를 이용하기에는
도로가 온통 개불알꽃 천지이기 때문이지
나는 지하도 건너는 것을 정말이지 싫어해
하지만 무단횡단이라는 불명예와 추돌하기 싫어
어쩔 수 없이 내리락 오르락 시소를 타지
벗아, 자네도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컴퓨터가 생기면서 우체통이 점점 야위어가더니
휴대폰이 나오니까 공중전화도 호흡조절을 하고 있더군.
'컴맹'이라는 무식한 단어와 마주치기 싫어서가 아니라
이메일 외에는 얼굴 볼 수 있는 길이 없어
할 수 없이 그 놈의 노예가 되었고,
공중전화 찾아 숨바꼭질하는 것이 너무도 숨차
어쩔 수 없이 그 년에게 몸을 맡기고 말았지
벗아, 역사의 수레바퀴가 직진하면 할수록
점점 자유로운 세상이 된다더니
웬걸 후진만 거듭하고 있지 않는가?
어찌된 일인지 광음이 계절처럼 동그라미 짙게 그려갈수록
하기 싫은 일 억지로 시키고,
강요하는 것 또한 점점 많아지는 거냐고?
참말 마음의 동의 없이 내 몸이 움직이고 있어
예전에 주인이 종 부리듯 지켜 서서
이거 하라 저거 하라
잔소리하고 매질하고
나는 선택의 자유를 잃었어
곡마단의 곰이나 원숭이로 전락했다고
벗아, 눈물겨운 얘기 하나 할까
아이들에게 밖에 나가 놀다오라고 하였더니
글쎄, 놀이터고 골목이고 도무지 놀 친구가 없다는 거야
그래 어쩔 수 없이 아이들로 넘실거리는 학원으로 보냈지
가서 친구들과 맘껏 놀라고!
작금의 세상이 그래
우리 지금 인간 세상에 살고 있는 것 맞나?
지구에 살고 있는 것 맞느냐고?
벗아, 톱니바퀴처럼 물레방아 도는 세상
숨가쁘게 좇아 돌다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나나 너나 물위에 떠있는 나무토막 신세더라고
바람이 불면 부는 쪽으로, 물살이 일면 이는 쪽으로
부초처럼 나를 잃고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다는‥‥‥
순간 피가 역류하면서 섬뜩하더라구
벗아, 나는 지금 강가에 서있네
비가 며칠 왔기로서니 이렇게 많은 부유물이 강을 뒤덮을 수 있는가?
TV, 컴퓨터, 승용차, 아파트, 졸업장, 자격증, 명함…… 온통 쓰레기 세상
과학의 폭풍우, 물질의 홍수 속에
나는
우리는
저것들처럼 어디로 떠내려가고 있는 것일까?
벗아,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도 새벽처럼 빛나는 것이 있더군
거센 물살을 거스르며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 있었어
송사리떼‥‥‥
어쩌면 그렇게 크다못해 거룩하게 보이던지
나는 더 이상 나 아닌 나로 살지 않기로 했네
진정한 인간독립을 위해 물구나무를 서기로 한 거지
왜냐고? 나는 호흡하는 생명체이니까
(2000)
추풍낙엽(秋風落葉)
가을,
오르가즘은 잠깐…
올 것이 왔다 터질 것이 터진 것이다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추상(秋霜)이‥‥‥
찬바람 불자 우리는 모두 사시나무 떨 듯 잔뜩 숨죽인다
"평생 직장은 물론 노후 생활까지 보장한다"고 큰소리칠 때는 언제고
이제는 그만 집으로 돌아가 애나 보란다
비바람 몰아치는 장마철에도
뙤약볕 쏟아지는 한여름에도
알레그로… 프레스토…… 비바체………
어둠이 빛을 뿜는 시간- 야간 작업까지 강행하면서
죽도록 일했건만 이제 그만 옷을 벗으란다
청춘, 아니 일생을 꽃잎처럼 송두리째 바쳤는데,
이곳에서 뼈를 묻으려 했건만
이제 그만 나가달란다
겨울나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단다
아랫마을의 꿀벌과 개미들은 가뿐하게 겨울을 나는데
그들보다 곱절은 더 땀흘린
우리는
왜
겨울 앞에서 고개를 떨궈야 하는가?
지나치게 꽃잔치 크게 벌린 사람이 누군데,
노력 이상의 열매를 거두려고 무성한 욕심부린 사람은 따로 있는데,
"겨울은 오지 않는다 결단코 오지 않는다"며 늘 봄처럼, 여름처럼
손을 키운 문어족은 저렇게 건재하건만‥‥‥
왜 깃털들만 목을 내놓아야 하는가?
한 자락의 하늬바람이 물결치자
머리칼 빠지듯 한 움큼의 살점들이 뚝뚝 떨어져 나간다
모두들 이제는 자포자기 상태로 누렇게 떠가거나
더러는 억울함 참지 못해 핏빛으로 물들어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을까
어제는 이슬이 눈물처럼 끌어안더니
오늘은 비가 내려와 함께 울자며 흐느낀다
푸른 옷 걸치고 축복처럼 백설(白雪) 맞으며
크리스마스 캐롤 멋들어지게 한번 불러보는 것이
평생 소원이었는데
꿈은 역시 꿈으로 끝나나보다
이제 밤이 차면 서리가 내리겠지
그러면 모두들 파리 목숨 내놓고
어디로
가야할까?
하늘이여!
다음 세상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나라의
상록수 잎으로 태어나게 하소서
눈꽃을 온몸으로 이고
푸르름 마음껏 발할 수 있게
(2000)
구경꾼
입바른, 올곧은 소리를 하면 반골이래요
반골, 그것은 안된다네요
맹충이 되라네요
그러나 로보트로 살 수는 없지요
하늘빛 푸른 피가 펄펄 뛰는 생명체가
어떻게 숨죽이고 시키는대로만 할 수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