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중경(重慶)을 찾아서
1.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臨時政府)가 있던 중경(重慶)은 어디에 있었을까?
우리의 민족지도자들이 자리를 틀고 당시 꿈 많았던 대한(大韓)의 젊은이들이 조국의 독립에 목숨을 바치기 위해 다시 목숨을 걸고 찾아갔던 중경(重慶)이 과연 지금의 대륙 사천성 중경과 동일한 지정학적 위치였을까?
푸르디 푸른 청춘을 나라의 독립에 바치기로 맹세하고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중경(重慶)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갔던 장준하(張俊河,1918-1975)선생은 당시의 탈출과정과 광복까지 임시정부의 내부적 상황과 김구선생을 모시고 반도로 들어오는 여정을 자서전격인 <돌베개>에서 정확히 기술하고 있다.
이 책에서 장준하 선생은 1944년 찾아갔던 중경에 대한 묘사에서 중경이 암반(巖盤)위에 건설되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현재의 중경은 양자강(揚子江)과 가릉강(嘉陵江)이 합류하는 삼각주(三角洲)의 모래톱위에 건설된 도시다. 또한 현 중경은 네덜란드의 지리학자 블라우의 지도에서도 1650년경 모습에서 거대한 호수를 형성한 지역이었을 뿐이었다.
대만출신의 일본 사학자 진순신은 그의 책에서 중경(重慶)은 깍아지른 벼랑위에 있는 도시라 산성(山城)이라 불리기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순신의 기록과 장준하 선생이 촉령(蜀嶺)의 거대한 눈길을 넘어 양자강이 흐르는 곳으로 도달했다는 돌베개의 기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위치했던 중경이 바로 현 운남성(雲南省)의 북쪽 금사강(金沙江)의 하구쪽에 위치했음을 유추할 수가 있는 것이다.
1937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중국 국민당 및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로 인해 장개석(蔣介石)의 남경(南京)정부는 중경으로 옮기게 되고, 이에 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1940년8월부터 중경으로 이전하게 된다.
이때의 남경은 바로 현 사천성 양자강의 남쪽에 위치했던 것이고, 물자가 풍부했던 남경을 일본군에 빼앗기게 된 장개석의 국민당은 척박했던 운남성의 북쪽 양자강(금사강)가로 이전하게 됨에 따라 극심한 물자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장개석이 운남성 북쪽의 중경(重慶)으로 근거지를 옮기게 된 주된 이유는 바로 인도차이나로부터의 물자보급을 원할히 받을 수 있는 지역을 택하게 된 것이었다. 바로 버어마(미얀마)로부터 높은 고원지대를 통해 중경(重慶)은 물자를 보급 받았던 것이다.
2.
일본은 당시의 대만(臺灣-현 해남도)에 건설한 공군기지에서 발진한 비행기를 통해 중경에 대한 폭격을 수시로 행하여 장개석군을 괴롭혔는데, 이에 미군은 운남성 곤명에 미군 공군기지를 건설함으로써, 당시 일본군이 현 해남도에서 발진한 비행기가 중경에 다다르는 직선거리에 이르게 되면 이를 포착해 공중전을 통해 일본공군을 제압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일본의 공중공격이 멈추게 됨에 따라 장개석의 중경(重慶)정부는 안전을 확보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준하(張俊河)선생은 일본군에 징집되어 대륙 서주(徐州-쉬저우)에서 훈련을 받다가 김준엽선생과 더불어 4인이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한 후 중경 임시정부를 찾아 먼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이때가 1944.7월이었다.
이후 다른 동지들과 합류하게 되어 총 50여명이 결성되어 함께하게 되는데 이들은 새도 넘기 힘들다는 파촉령(巴蜀嶺)을 수일에 걸쳐 넘어가는데, 이때는 모두가 목숨이 경각에 달릴 정도의 어려움이었음을 선생은 토로하고 있다.
또한 서주(徐州)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의 산천의 모습은 현 서주의 모습과는 하나도 일치하지 않고 있다. 즉 장준하 선생이 훈련받으며 탈출을 감행했던 서주는 대륙조선의 경상도(慶尙道) 지역이다. 당연히 그 서주(徐州)는 현 사천성의 북쪽 또는 감숙성 지역이 되어야 타당할 것이다. 감숙성의 황하(黃河)를 경계로 조선(朝鮮)과 명청(明淸)이 나뉘었음을 고려한다면 충분한 타당성이 있다고 볼수 있는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서 선생은 중국이 어부지리(漁父之利)로 대륙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조선(朝鮮)이 빠져나간 텅빈 대륙의 중앙부를 일제가 패망하게 되자 무주공산(無主空山)으로 변한 후 중국 국민당은 힘 하나 안들이고 접수해 다시 중국 공산당의 수중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책에서 젊은 대원들이 백범의 담력을 시험하는 장면이 기술되어 있다. 백범과 이범석 장군등 임정요인들이 서있던 뒤쪽에서 폭약을 터트린 것이었다. 꽝하는 소리와 함께 이범석 장군도 얼마나 놀랐는지 들고있던 밥통을 떨어뜨렸다고 하는데, 백범은 그저 껄껄웃고 있더라는 것이고 모두가 백범의 웅대한 담력과 도량에 모두 놀랐다는 후일의 기록이 있을 뿐이다.
만약 우리의 역사에 백범이 없었던들 후세에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후인들은 마치 반도 대한민국이 이승만에 의해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하는 어리석은 판단을 하고 있는 이들이 많이 있다. 이것은 구한말부터 이어진 역사흐름의 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소치이자, 이후 친일파들의 합리화 정책에 동조되고 세뇌된 까닭이다.
백범의 무장투쟁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면도 있으나, 무엇보다 당시의 강대국들에 조선(朝鮮)이 건재함을 만방(萬邦)에 피로써 알렸던 것이며, 또한 광복군이 미군과 더불어 첩보활동을 하는 등 대일전쟁에 목숨으로써 의지를 피력함으로써 이 반도땅에 대한민국이라는 정체성이 살려질수 있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서구의 강대국들에 대하여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은 처음에 외교적으로 조선의 독립을 추구했으나, 파리강화회의 이후의 정세에 실망을 느낀 조선의 독립투사들은 무장투쟁으로 방향을 일제히 선회했던 것이며, 이러한 가열찬 무장투쟁은 온 세계에 조선의 정신이 살아있음을, 피끓은 젊은이들이 존재했음을, 피의 근량대로 내 나라의 독립에 목숨을 바칠 지성이 있음을 세계에 호소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외로운 반도땅에 그나마 조선의 정신이 이식될수 있었던 것이고 그 중심에 백범이 찬란하게 버티고 서 있었던 것이다.
이 반도땅의 대한민국은 결코 친일파들이나 평화외교적 방법으로 하고자 했던 나약한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피를 흘리며 죽어서도 싸우리라는 피맺힌 절규를 온몸으로 표출한, 이 땅의 영웅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임을 우리는 현명하게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안중근과 윤봉길, 이봉창, 강우규, 조선의열단 등의 무장투쟁이 있었기에 그러한 의기는 세계를 흔들었던 것이고, 조선독립에의 열망은 비로소 힘이 실리게 되었던 것이다. 가만히 책상에 앉아 달콤한 포도주에 입을 적시며 독립을 논의한들 독립은 올 일이 없는 것이다. 중동전쟁이 발발했을때 백악관앞에서 피켓을 들고 평화를 주장했던 일부 아랍인들이 바라본 애국의 관점과 나라의 전장으로 목숨을 바치러 달려간 이스라엘 청년들이 바라본 애국의 관점은 결국 전쟁의 승패를 갈라 놓았듯이, 조선독립에 목숨으로 저항하며 무장투쟁을 이어간 숭고한 넋들의 애국이 어찌 이스라엘 청년에 못할 바인가?
이후의 일제강점기에서 현대사에 이르는 후학들의 역사연구에서 해방후 이승만정권의 탄생은 우리 근대역사에서 가장 최악의 악수(惡手)였음이 고증될 것이다.
백범과 독립투사들이 당시의 국제정세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음과 동시에, 이후 나라를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 명확한 비젼을 가지고 있었음에 비추어 볼 때, 당시 이승만과 친일파의 정권장악은 나라의 운명을 적어도 20-30년을 뒤로 돌려 놓은 것이다.
서구 유럽은 2차대전에서 나치의 부역자들을 지금도 찾아내 단죄하고 있다. 프랑스는 레지스탕스의 깃발아래 지금도 그들의 애국가에는 당시 나치와의 전투를 노래하는 가열차고 무서운 가사들이 가득차 있으나, 그들의 아이들에게 서슴없이 부르게 하고 있다. 내나라 내겨레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이들의 숭고한 피가 묻어있는 조국에 대한 존중과 경외(敬畏)를 만세에 전하며, 부역했던 더러운 자들의 정신을 철저히 뭉겨어 다시는 준동하지 못하게 하려는 전국민의 일치된 모습인 것이다. 2차대전후 프랑스와 서구 유럽의 대다수 국가는 독립투사들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고, 빠르게 나라의 경제를 회복시키고 현재 세계강국으로 모두 군림하고 있다.
그들이 바보라서 지금까지 나치 부역자들을 단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나라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부역자들이 설탕물을 빨며 희희낙락할때 배를 굶으며 와신상담(臥薪嘗膽)한 조국의 영웅들에 대한 당연한 후손의 의무이기에 그들은 그 의리(義理)를 지킬뿐인 것이다.
아직도 이 반도땅에 친일파를 두둔하고 이제는 화합하여 다 포용하자는 자들이 많다. 어리석고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이다. 왜 어리석은지 모른다면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유럽에서 왜 아직도 나치부역자들을 단죄하는지 가서 배우고 물어보라.
3.
선생은 새도 넘기 힘들다는 파촉령의 고원지대를 하루 100리씩 2주일이나 걸려 넘었다고 기록했는데, 그렇다면 이 길이는 700km의 거리라는 엄청난 여정이다.
당시 장준하선생이 찾아갔던 노정과 중경(重慶)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이 볼 수 있을 것이다.
2020.09.11. 송계(松溪)
첫댓글 그때당시 폭격기의 항속거리가 의심이 되는군요. 해남도에서 위 중경까지 거리가 꽤 되는걸로 아는데 더구나 왕복을 해야됨은 물론 공중급유기가 없던때라서 폭격을하고 되돌아올 수 있었을까요?
중경 인구가 중일전쟁 전에는 인구가 고작 20만명에 불과한 도시였는데, 전쟁후 피난민 유입으로 인구가 100만으로 증가 되었죠. 말씀하신대로 20만명의 소도시라면 산악지형에 위치한 도시가 맞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은 중경인구가 3,300만명의 거대도시...산악지형의 도시에서는 불가능한 일로 보입니다...도시의 위치를 변경해야 가능해 보입니다. 그리고 중경이라는 명칭이 송나라때 처음 생겨난 걸로 볼때 전에 말씀대로 남송의 위치가 그 근방으로 생각됩니다.
"맨하탄 크기만 한 장소에 빽빽하게 밀집한 건물의 대부분은 화재에 취약한 나무로 되어 있었다. 일본 폭격기들이 소이탄을 퍼붓자 화재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시가지 전체로 퍼졌다. 일본군은 1회 출격 때마다 약 1백여 대의 폭격기를 투입하여 폭탄을 퍼부었다. 라이프지의 중경 주재 특파원이었던 칼 마이던스는 어떤 도시도 일찌기 당한 적이 없는 맹폭격이라고 묘사하였다."
그리고 제로전투기 최대항속거리가 무려 3천 킬로미터에 달한다고 합니다.
대륙 운남성의 북쪽 중경의 북쪽으로는 가릉강이 흘러내려오고 있으며, 4천미터의 고지인데도 현재 철도와 도로가 잘 발달되어 있고, 사람들이 엄청 많이 살고 있습니다. 이 가릉강이 바로 감숙성을 통해 주천까지 연결되었다고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고증하고 있습니다. 구글어쓰로 살펴보고 정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또한 이 중경의 서쪽으로 삼국지에 나오는 촉나라가 존재했던 것이니, 기존의 역사오류가 얼마나 컸는지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비숍여사의 양자강을 가로질러~~라는 책을 몇번을 시도하다가 이제야 겨우 구했습니다...곧 읽을 예정입니다. 그리고 그럼 위촉오의 삼국의 위치가 대충 그려집니다.
김종윤선생님, 송계 선생님 등 모든 분들 존경합니다. 눈팅만 하는 회원입니다.
그래도 늘 대륙조선사의 건승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