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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으로 가는길 (2부)
2부 ; 황산(광명정)에서 상해까지
일정 ; 2008년 3월22일~3월26일
동행자 ; 김종석,염영호
글쓴이 ; 염영호
< 광명정에서 본 절경 >
< 우리가 광명정에서 내려왔던 길 , 같은 짐꾼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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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오는데 저수지가 보이고 , 산속에 소화전들이 간혹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소화용 소화전이었다. 즉 산불 진화용으로 배치해 둔 것 같았다.
유명한 산이 아니어도 필요한 것이겠지만 자연을 보호하려는 배려가 너무나도 철저하다. 미국도 그렇지만 중국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곳곳에 설치해둔 쓰레기통은 항상 깨끗이 치우기 때문에 넘쳐 나는 일은 없다고 한다.
항주에 있는 서호에 가면 많은 유람선이 있는데 모두가 엔진동력으로 오일을 사용하지 않고 천년가스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호수의 오염을 막기 위해서다,
그리고 북경 용경협(협곡의댐)에 가도 역시 천연가스를 사용하여 유람선을 운항하고 있었다. 오일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혹시나 오일이 댐의 물에 오염될까 해서다. 이 얼마나 우리나라가 본 받아야하지 않겠는가?
미국에서는 산기슭에 집을 짓더라도 가능한 산을 훼손하지 않고 지지대를 세워 그 위에 집을 짓는다고 한다. 이렇듯 세심한 자연보호에 솔선수범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소방용수겸 저수지, 저수지아래가 서해빈관, 그리고 광명정 정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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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는 내려가면서 직접가까이 가 보지는 못했지만 광명정에서 볼 수 있었던 봉우리를 다른 위치에서 본 사진을 소개하겠다.
<연화봉 정상에서 본 천도봉 >
<연화봉에서 본 오어봉 그 넘어가 서해협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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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봉에서 본 광명정의 기상대>
<연화봉에서 본 광명정,백아령,시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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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병루에서본 연화봉 >
<연화봉 정상에서 본 용성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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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병루애서본 영객송과 천도봉 >
<아래쪽 배운정과 광명정 정상의 기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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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태평케이블카를 타고 광명정으로 올라갔지만
또 다른 황산으로 오르는 코오스는 운곡케이블카를 타고 트래킹하여 최고봉인 연화봉에 오를 때 본 광경들을 사진으로 소개하였다.
지금은 연화봉에서 내려오면서 배운정을 지나서 서해대협곡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트래킹 로드가 완공되어 몽환경구(夢幻景區)에서 가까이서 대협곡의 진면목을 접할 수 가있다.
그러나 우리가 갔을 때는 공사 중이었고 1달 후면 개통한다고 하였다.
광명정을 거의 다 내려와서 쉼터 같은 곳에서 쉬고 있는데 아래쪽부근에 우리가 가이드와 만나기로 한 서해빈관(호텔)이 보인다.
우리일행인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노인부부가 다른 길로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고 누군가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순간, 나는 ‘아니다! 길을 잘못 간 것일 것이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행에게 확인한 후 우리가 여기서 기다릴 터이니 일행 한 분에게 먼저 내려가서 가이드에게 알려주라고 하고서는 우리는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잠시 후 우리를 안내하는 가이드가 왔다. 그는 광명정에서 내려오는 도중 다른 길로 갈 곳은 한 곳 뿐이라며 그쪽 방면의 가이드에게 노인부부가 보이면 연락을 하라고 부탁 하였다고 한다.
30분이 지나자 그쪽 가이드가 우리 쪽 가이드에게 연락이 왔는데 노인부부를 발견하여 길을 안내했으니 걱정 말고 기다리라는 연락이 와서 우리는 다같이 안도의 환호를 질렀다.
사실은 노인부부와 함께 온 젊은 딸아이가 있어서 정상에서 내려 올 때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터이다.
이러한 해프닝을 거치며 다시 서해빈관(호텔)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도중에 아주 잘 자라서 범상하게 보이지 않는 소나무가 있었다.
이 소나무가 바로 단결송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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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결송(團結松)은 소나무가지가 56개이다, 이는 중국의 소수민족 수와 같다고 하여 56개 민족의 단결을 기원하여 단결송이라 부른다고 했다.
크기가 14.5m, 둘레가 12.2m 폭이 12.5~13.4m 이다.
<가지가 56개나 뻗어난 단결송(團結松)모습>
< 단결송 아래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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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결송은 원래 이름은 자손이 번성하기를 바란다는 다자송(多子松)이었는데
2001년5월 전 국가주석 강택민이 이 소나무 가지 수를 물었는데 56개라 대답하자 소수민족수와 같으니 중국민족의 단결을 위하여 단결송이라 부르자고 하여 단결송이 되었다고 한다.
단결송 외에도 황산에는 이름난 소나무가 많다.
영객송,송객송,봉황송,단결송,흑호송,접인송,탐해송,수금송,연리송,기린송,용조송 등 이다. 그중에서도 황산을 대표하는 소나무는 영객송이다.
그럼 지금부터 직접보지는 못했으나 이름난 소나무 몇 그루를 사진으로
소개 하겠다
< 영객송(迎客松), 옥병루 동쪽 1680m 고지에 있으며 높이13m 수령800년
나뭇가지가 사람이 팔을 벌려 환영하는 모습이고 자태가 아름답고 의젓 하여 황산의 상징이기도하다. 세계자연유산 등록>
< 송객송(送客松),옥병루 앞쪽 1716m고지에 있으며 높이4.7m 수령450년
손님을 배웅할 때 몸을 굽혀 읍하는 형상과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세계자연유산등록, 현재는 노화로 2006년.1월10일 고사된 상태임 >
<흑호송 (黑虎松), 백아령 케이블카역 1650m 고지에 위치 높이8m 수령 450년 도를 닦던 고승이 소나무위에 검은 호랑이가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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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단송(蒲團松), 옥병케이블카역 부근 1610m 고지에 있다, 높이29m 둘레35m 수령 350년 스님이 좌선할 때 깔고 앉는 부들방석(포단)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 >
<봉황송(鳳凰松), 봉황의 머리와 꼬리를 닮은 소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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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관계로 모두 다 소개를 할 수 없어 아쉽습니다.
황산의 경치를 요약한다면 구름바다의 운해(雲海), 화강암에 뿌리내린 강인한 소나무(松), 그리고 기이한 만물상의 괴석(怪石), 또 온천(溫泉)과 설경(雪景)이라고 이를 가리켜 중국에서는 4대(5대)경치 라고 말한다.
그리고 황산시(市)는 고속도로가 생기고, 우리가 갔을 때는 공항을 짓고 있었지만 곧 공항이 개통된다면 오지에 속하던 황산시가 교통의 요지로 바뀌게 된다고 한다. 지금은 개항중이다.
우리는 오후2시가 다되어 서해빈관에 도착하였다. 당초보다 1시간30분이나 늦게 도착하였다. 길을 잘못 들은 노인부부 어르신 내를 기다렸다가 같이 오게 되어서 그렇다.
서해빈관에서 대부분 점심을 다 먹은 때라 그런지 늦게 도착한 7~8명의 우리들에게는 늦은 점심이라 요리의 종류가 별로 없었다. 하여튼 허기가 진터라 맛나게 먹어 주었다.
노인부부는 연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계면쩍은 얼굴을 한동안 하고 있어 오히려 우리가 제대로 못 모신 것 같아 송구스러운 마음이었다.
우리일행은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왔던 태평케이블카를 타고 하산을 하다가 계곡 중하류에서 내려 걸어서 버스가 기다리는 곳까지 가게 되는데 이는 영화 ‘와호장용’ 촬영지인 뷔치계곡을 감상하기 위해서였다.
걸어서 내려가는 길은 1시간이상 정도 걸리는 꽤나 먼 거리였다. 좁은 오솔길 이었는데 산허리 양쪽에는 수령이 오래된 대나무가 즐비하게 하늘을 치솟고 있었다. 영화 ‘와호장룡’에서 주연발이 대나무밭에서 대나무를 춤추듯 날렵하게 비행하면서 칼싸움 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물색도 맑았고 풍광은 생각보다 초라하게 보였으나 거대한 암석과 대나무가 자연그대로 순수한 것 같아 그냥 이런 곳이구나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와호장룡 촬영지 계곡치고는 좁고 영화장면에서 보는 것 보다 초라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정도 경치면 우리나라에도 얼마든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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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래도 뷔치못 나름대로 독특한 모양과 광경은 특이하고 멋진 장관이라 해도 그리 과장된 말은 아니다.
사실 지금 이 여행기를 쓰면서 알게 되었는데 여기는 여행 스케쥴에 나와 있는 비치계곡이 아니고 뷔치못 이었던 것이다. 비치계곡은 운곡케이블카가 있는 다른 곳에 위치해있다.
이곳은 와호장룡 영화 촬영지인 비취계곡(翡翠溪谷)이 아니고 비취못(翡翠池) 이었던 것이었다.
< 뷔치지 ‘池翠翡’ 자와 불 ‘佛’ 자가 바위에 새겨져있다>
뷔치지(못)은 황산에서도 잘 알려진 수경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부용봉 기슭에서 1km 떨어진 태평케이블카아래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못의 길이는 15m 너비는 8m 깊이는10m로 좁지만 깊은 계곡물로 채워진 곳이다. 주변은 거대한 암석으로 이루어져있고 물이 맑고 산과 나무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화려하고 아름답게 비친 모습은 한동안 트래킹에 지친 우리들의 피로를 청량감을 느끼게 하여 말끔히 씻어주는 듯하였다.
암석에 새겨진 불(佛)자가 크기가 3m나된다고 하는데 글쎄다 싶었다.
< 뷔치못에서 한컷 >
< 하산하는 트래킹로가 잘 만들어져있고 옆에는 대나무가 즐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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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가 숲을 이룬 트래캥로 >
뷔치못을 지나 하산하는 트래킹로 옆에는 50년만의 폭설로 쓰러진 대나무를 베어서 쌓아둔 모습 뒤에는 멋진 황산이 멀어져간다.
이로서 황산의 트래킹이 끝난다.
1개월만 늦게 왔더라도 서해대협곡의 새로 만들어진 트래킹 로를 따라 좀 더 가까이서 황산의 진면목을 감상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오래도록 남는다.
그리고 옥에 티라면 가이드 녀석이 개인적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고 사전에 협의도 없이 혼자서 당초에는 운곡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서 사자봉, 시신봉, 서해협곡(원경), 광명정, 비래석, 몽생필화, 필가봉을 거처 운곡케이블카를타고 하산하여 뷔취계곡을 관광하기로 되어 있는 것을 합의도 없이 혼자서 일정을 변경하는 무례가 불만스러웠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황산 비경에 만족하였고 다시 한 번 오고 싶은 곳으로 기억되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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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일행은 호텔로 돌아와 간단히 샤워를 하고 시내에 나가서 식사를 하는데 왼 일인지? 이제까지와는 달리 저녁 매뉴가 푸짐하고 각 테이블에는 술도 한 병 놓아져 있었다.
가이드가 우리들의 불만 낌새를 알았는지 자기의 수입이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털어 놓는다.
그것은 싼 여행 경비도 문제지만 요즘 와서는 한국 관광객이 약아서(?) 아니다, 현명해서이다 가이드가 안내하는 상품판매코너에서 상품구입을 대부분 하지 않기 때문에 가이드 나름대로 당초 예상 수입보다 적어서 불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상품을 구입하면 가이드가 활 당 받는 수입이 있는데 상품을 사주지 않으니 가이드가 예상수입이 줄어든 것이었다.
그래서 일행들이 합의하여 1인당 5불씩 거두어서 별도로 주었더니 그때서야 좋아라하고 추가 요리도 나오고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만찬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옆 신안강 야경이 멋있게 조명되어 이국의 밤을 한잔한 술과 함께 더욱 여행의 정취를 느끼게 해주었다.
< 황산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신안강의 야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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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차; 2008년 3월25일 화요일
황산의 호텔에서 아침 일찍 식사를 한 후 버스를 타고 항주를 향하였다.
절강성의 최대 규모의 자연호수인 서호, 화중지역의 최고사찰이라는 영은사, 그리고 중국 10대 명차인 용정차의 농원, 중국전통 오페라인 송성 가무쇼를 관광하기로 오늘의 일정에 따라서 항주로 가는 것이다.
항주는 예전에 가보았던 곳이다, 항주(杭州)는 예로부터 소주(蘇州)와 함께 그 아름다움을 마르코 폴로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극찬하기도 했던 도시이며 “아침에 좋고, 저녁에도 좋고, 비오는 날에도 좋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름다음을 자랑했다고 한다.
항주에서 황산으로 올 때와 마찬가지로 황산시를 벋어나는데 고속도로변에는 마을마다 팬션처럼 보이는 가옥들이 눈에 많이 보인다.
농촌가옥들이 변한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지난번에(2003년) 왔을 때보다 자꾸만 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그때는 정말 볼 폼 없는 척박한 시골농촌 풍경이었는데
꼭 올림픽 때문만도 아니고 확실히 중국은 많이 발전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태양열 판이 많이 보였다. 중국경제가 커지면서 오일 수요가 늘어나 태양열에너지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경제대국답게 부를 공유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올해(2008년) 베이징 올림픽개최로 인한 가시적 선전용인지는 모르겠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으니까
고속도로에서 버스는 속도를 80km/h 넘기지 않고 규정대로 달린다, 벌점12점이면 면허가 취소란다. 한번 위반이면 벌점3점이다.
이상하게도 베트남에서도 절대로 규정 속도를 넘지 않게 운행을 하고 있었는데, 하긴 이상한 것이 아니고 정상운행이지만 공산권에서는 사심이 없어 그런가?
고속도로라고 하나 비수기 철이라 그런지 차량은 많지 않는데도 차량규정
속도를 유지하는 것은 우리도 본 받아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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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속도로 주변 마을의 가옥들 >
< 약간 엉성해 보이는 고속도로 >
고속도로에는 관광차량보다도 화물차량이 더 많이 다녔다 아마도 70~80%는 화물 차량들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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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소마다 화물차량이 길게 늘어서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이 보이고, 기름은 일정량을 만 받을 수 있단다. 수요가 급증한 탓으로 오일이 돈 있다고 마음대로 쓸 수는 없다고 했다. 그만큼 갑자기 중국경제가 늘어난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유류수요가 늘어나 공급이 딸린다는 것이었다.
황산에서 3시간 40여분의 장거리를 달려 항주에 도착하였다.
사실 나는 항주에서는 서호와 영은사, 용정차밭은 한번 가보았던 관광코오스라 별로 관심은 없고 밤에 송성가무쇼에 만 온통 관심이 있었다.
도심 바로 옆에 위치한 서호는 고대의 아름다움과 현대의 도시의 고층빌딩과의 대칭되는 풍경은 새로운 맛을 느끼게 하는 다시보아도 멋진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서호입구에 있는 소동파 시인 동상 >
먼저 서호(西湖) 입구에 있는 소동파 동상을 만나 볼 수 있었다.
항주(杭州)에서 서쪽에 위치해 있다 하여 붙여진 서호(西湖)를 비룻하여 뇌봉탑, 용정, 악비묘, 영은사. 육화탑등 수려한 자연경관이 어우러진 항주는 유명한 먹을 걸이도 많아 시내에는 음식점이 즐비하고 번창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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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폴로가 13세기에 항주를 보고서는 세상에서 ‘가장 곱고 아름다운도시’라 하였다는 생각이 난다.
<서호의 뇌봉탑 모습.>
그래서 당시 중국 사람들에게는 관직에서 은태 한 후 ‘미인과 함께 저택을 짓고 항주의 음식을 먹는 것’ 이라고 할 정도 이다.
11년 전에 내가 그리스에 갔을 때 그리스 사람은 ‘요트를 사서 가족과 함께 바다로 나가는 것’이라고 했고 그때 한국에서는 ‘자가용을 구입해서 가족과 함께 여행하는 것’ 이었다.
서호 선착장 부근에 지하통로가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리 깊지 않는 1층 지하인데도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상태로 보아 설치 된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마도 올림픽 때 찾을 관광객 때문인가(?)
유람선을 타고 이곳저곳 을 관광하는데 멀리 아름답고 신비하게 보이는 탑이 산허리에 솟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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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바로 뇌봉탑 이었다!
977년에 건축되었으나 지금의 것은 2002년에 재건축 되었다고 한다.
뇌봉탑은 북송 때 오월(吳越)의 왕 전홍숙이 사랑하는 황비가 아들을 낳은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웠다고 한다.
뇌봉탑 맞은편에서 낙조 때 서봉탑을 바라보면 더욱 신비롭고 아름답다 했다.
다시 소동파(蘇東坡) 이야기를 해보자
북송(北宋)의 시인인 소동파(蘇東坡)는 서호(西湖)와 때놓을 수 없는 관계라고 한다.
소동파가 항주통판(杭州通判)으로 재임시절에 항주를 위해 많은 일을 하였지만 시인으로서 산과 호수를 벗 삼아 유명한 시를 많이 남겼으며 이로 인하여 서호, 그리고 항주가 유명해졌다고 하기도 한다.
< 안개가 낀 서호의 모습, 멀리 뇌봉탑이 보인다. >
그의 작품 중에서 서호에 관련한 시(詩)와 사(詞) 수백 편을 남겼다고 한다.
그중에서 시 두 편을 소개 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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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한잔 하면서 비 내리는 서호를 바라보면서 지었다는 시(詩)다.
‘검은 구름이 먹빛으로 바뀌었지만 산을 모두 가리지는 못하고
흰 빗방울은 구슬처럼 흐트러져 어지럽게 배안으로 들어온다.
땅을 휘감고 불어오는 바람이 갑자기 흩어지니
누각에서 바라보는 호수는 파란 하늘과 같구나. ‘
그리고, 음호상초청후우(飮護上初晴後雨)라는 시는 미인 서시(西施)와 서호(西湖)를 비교한 시로 오래 동안 회자(膾炙)되었던 서호를 노래한 시중 으뜸으로 친다.
‘ 넘실거리는 호수 위에 반짝이는 맑은 햇빛이 좋아라,
가랑비 오던 산색은 비가 내리니 더욱 신기하구나.
가만히 서호를 바라보니 서시의 모습이 떠오르네,
때로는 은은하게 때로는 짙게 치장한 모습이 서로 잘 어울리는 구나. ‘
< 서호의 뇌봉탑을 배경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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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음 관광지인 영은사로 갔다.
영은사(靈隱寺)는 인도 승려 혜리가 창시한 중국 10대 선종의 고찰이라고 한다. 1700년의 역사를 지닌 고찰의 내부모습이 웅장하게 느껴졌다.
영은사는 첫 대전으로는 천왕전, 다음은 대웅보전, 그리고 영은사에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화엄전이 있고, 화엄전에서 우측으로 돌아 내려 오며는
500 나한전이 있다.
천왕전(天王殿)에는 ‘운림선사(雲林禪寺)’ 라고 쓰여진 편액이 걸려있는데 이것은 청대의 강희(康熙)황제의 자필로 알려져 있다.
천왕전에는 사찰 첫 대전으로 미륵부처님이 모셔져있으며 56억7천만년 후의 미래 부처인 미륵불을 모신 이유는 이렇다고 한다.
<천왕전내에 있는 미륵불 모습이 이체 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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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大雄寶殿)에는 정중앙 연좌석좌에 앉아계신분이 바로 높이 24.8m의 목조 불상으로 된 석가모니 부처님이시다.
부처님 양 옆으로는 호법신인 20제천이 기립해있고 뒤쪽에는 ‘12원각’이 가지런히 앉아있는 모습이 보인다.
< 대웅보전 >
< 대웅보전내 부처님 양옆에는 호법신인 ‘20제천’이 양옆으로 서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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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보전 중앙에 모셔진 석가모니 부처님, 높이가24.8m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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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화엄전에는 독특한 향을 내는 향장목으로 만든 삼존불이 계시는데 가장중앙에는 비로자나 부처님, 그리고 좌측은 문수보살, 우측은 보현보살님이 온화하고 근엄한 모습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의 평화를 주는 모습이었다.
< 제일 높은곳에 위치한 화엄전 모습이다 >
< 중앙이 비로자나 부처님, 좌측이 문수보살님, 우측이 보현보살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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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전을 내려와 영은 학당을 지나면 5백 나한전이 나온다.
송나라 때 세웠던 5백 나한전은 목각이었고 1936년에 아쉽게도 화재로 타버렸다. 현재의 나한전은 1999년에 새로 만든 것으로 나한전에 모셔진 500명의 나한은 모두 청동으로 주조되었으며 높이가 1.7m이고 인당 무게가 1톤이나 된다고 한다.
< 500나한전에 있는 네 분의 불상, 정면으로 보이는 불상이 문수보살이고,
좌측의 옆모습이 김교각 스님의 지장보살님 이시다 >
나한전내에는 누각의 4면에 각 면마다 금색을 입힌 불상이 네 분이 모셔져 있었다.
이곳에서는 우리나라 신라 때의 김교각 스님이 구화산이 성지인 지상보살로 모시고 있었고, 우측으로부터 순서대로 보타산의 관음보살, 아미산의 보현보살, 오대산의 문수보살이 4면에 앞을 바라보며 모셔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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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분이 중국에서 구화산이 성지인 지장보살님으로
500 나한전에 모시고 있는 우리나라 김교각 스님이시다.>
< 석가모니제자 500명의 세계 각국의 나한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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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주위에 십자모양의 통로 양옆에다 석가모니의 세계 여러나라의 500명의 나한 제자들이 청동으로 주조되어 만들어 져 있었다.
실제 인도 인물을 모델로 하여 각기 표정과 몸짓이 모두 다르게 만들었다고 한다.
< 가까이서 본 500명 나한들의 모습 >
점심시간이 겹쳐져 허둥지둥 하다시피 영은사를 둘러보고는 우리는 점심을 먹으로 이름난 식당으로 갔다.
이유가 있었다, 가이드에게 보조금을 거두어 주었기 때문에 약발을 받은 샘이다 . 특별 매뉴는 다름 아닌 동파육(東坡肉)이였다.
동파육은 항주의 대표적인 요리로서 돼지 오 겹 살로 만든 짜지 않고 깊은 맛이 풍겨 나오는 돼지 찜 요리이다.
소동파가 이곳에서 벼슬을 할 때 처음 요리가 개발 되었다고 하여 동파육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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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는 여가가나는 대로 돼지고기 찜 요리를 해먹는데 하루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바둑을 두다가 열중하는 바람에 돼지요리가 타는 냄새가 나도록 잊고 있었는데, 그 요리가 오히려 맛이 더 좋아져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야기만 들었던 그 유명한 본토 요리 동파육을 한입 베어 무는 순간 속살까지 부드럽게 향과 어우러져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맛이 이름값은 하는 것 같았다.
늦은 점심식사라 더욱 맛나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 이것이 돼지 오겹살로 만든 동파육이다 >
늦은 점심식사를 특별요리 통파육과 함께 맛 나는 점심을 먹고는 용정차 밭을 돌아 용정차 농원에서 용정차 한잔을 하고는 관광버스 안에서 잠시 나는 행복한 포만감에 잠이 들었다.
이제는 이번 여행에서 오늘 저녁에 ‘송성가무쇼’ 관람만 남았다.
황산(黃山)이 주가 된 요리라면 서호와 영은사는 주된 요리를 먹기 전에 입맛을 도우는 보조요리이고 ‘송성가무쇼’는 입가심을 위한 요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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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주인 들은 항주(杭州)가 송(宋)의 수도였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예로부터 항주에는 처녀가 천하 미인이고 총각은 결혼하면 살림살이를 도 맡아 하였다 한다.
항주의 송성가무(宋城歌舞)쇼는 세계 3대쇼 중 하나이고, 3000명을 수용하는 대 공연장에서 쇼를 펼친다.
남송시대를 배경으로 세계수준의 뮤지컬쇼로서 서호를 배경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과 남송시대의 영웅 악비(岳飛)장군의 무용담을 뮤직컬화 하였다.
< 송성가무쇼를 보기위해 줄을서있다. 출입매표소>
< 송대의 기리에서 야바위꾼이 놀이를 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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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구에서 입장권을 사서 입장하면 우리나라 민속촌처럼 송대의 거리를 재현해 놓은 광장과 골목이 나온다.
공연하기 전까지 30분정도 여유가 있어 자유 시간을 허락하여 우리는 송대의 거리로 가보았다.
당시의 먹을거리 와 생활용품, 농기구.. 등이 보인다. 송나라 시대의 복장을 한 아르바이트생이 공짜로 옷도 빌려주고 사진 촬영을 허락한다.
먹을거리도 많이 팔고 있었는데, 사서 먹고 싶어도 배가 불러 먹질 못했다.
어쩌다 중국여행을 하며는 저녁 야시장에 대부분 가보는데, 꼭 호텔에서 식사를 한 후에야 가기 때문에 이번이 3번째 중국여행인데도 공교롭게도 또 겹쳐져서 배가 불러서 먹을거리를 맛보지 못하고 구경으로 만족해야 했다.
< 재현해 놓은 송나라 시대의 밤거리 구경>
공연시간이 임박하여 공연장으로 가니까 우선 객석이 3000석 이나 되니 그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고 관광객의 무질서가 입장하는데 혼란스러웠다. 애초에 입장할 때 입장권에 공연요금이 지블 되었기 때문에 공연장은 누구나 프리 패스였으니 그렇게 된 것 같았다.
아무튼 공연이 시작되자, 관객들은 조용해지더니 이내 우~와~!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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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황찬란한 조명을 받으며 본격 쇼가 시작 되고 있었다.
쇼의 내용은 대충 이러하였다.
제1막은 ‘항주의 빛’ 이다.
송나라 때 항주는 인구 100만의 대도시였고, 곳곳에서 노래와 춤으로 태평성대를 구가 하고 있었다.
황제의 생일 연회에는 세계 각국에서 축하 사절이 오고, 무대부분이(당시 연회장) 온통 황금으로 치장하여 화려함의 절정을 보여준다.
< 황제의 생일 연회장의 무희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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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회장의 무희들 축하쇼(?)는 절정에 다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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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막은 ‘금과 철마전쟁’ ( 악비장군의 무용담 )
송나라가 금나라에게 공격을 받아 위기에 처 했을 때 악비(岳飛)장군이 군과 민이 합심하여 용감한 전투를 벌려 승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무대연출이 뛰어난 수준급으로 실제로 무대에 말이 등장하고 활이 쏟아져 꼽히고 대포를 쏘는 등 실전을 방불케 하는 무대연출은 여기저기서 탄성을 지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송은 금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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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비장군이다. >
< 위기에 처한 나라를 악비장군의 활약으로 승전으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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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비장군이 마침내 금나라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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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막은 ‘서호의 전설’이다.
서호를 배경으로 괴기하면서도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있다. 영화로도 촬영된 봐 있는 ‘백사전(白蛇傳)’이 극화되었다.
예날 허선이 약재를 구하러 산에 갔다가 다치게 되었는데 백낭자(白蛇))를 만나 치료를 받고 살아난다. 허선에게 반한 백낭자는 1000년 동안 도를
닦아 인간으로 변하여 서호의 다리 위에서 허선을 만나 사랑을 나누다가 결혼까지 하게 되는데, 어느 날 우연히 괴이한 행동을 하는 아내를 본 허선은 당황하게 된다. 결국 금산사(金山寺) 법해(法海)스님에 의해 그녀가 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허선은 관계를 끊으려 한다.
이에 따라 스님은 백낭자를 바루에 집어 넣어버린다. 그로부터 그 탑의 이름이 뇌봉탑으로 부른다, 뇌봉탑은 서호 옆에 있다.
이런 내용이 서호를 배경으로 한 무대연출의 극치를 보여준다. 스크린을 이용하여 서호의 배경이 비치고 그 아래 무대에는 실제로 물이 잔잔한 호수가 된다. 그리고 서호의 다리위에서 만나고, 헤어짐을 보여주는 사랑이야기가 전개된다.
< 서호의 아름다운 무대연출 (실제 무대가 호수로 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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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선과 백낭자는 서호의 다리에서 우연히 만난다.>
< 허선과 백낭자는 서호에서 서로 사랑을 나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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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서호에는 비가내린다, (실제로 비를 뿌리는 연출을 하고 있음)>
< 허선은 백낭자(白蛇)에게 우산을 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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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을 돌려 받기위해 다시 만난 두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된다>
< 그러나 결혼 후 백낭자의 실체를 알게 되어 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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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낭자는 결국 법해스님에 의해 뇌봉탑에 갇히게 된다 >
서호의 전설은 이렇게 슬픈 사랑의 이야기로 끝난다.
지금도 항주 사람들이 말하는 또 다른 전설은 이렇다, 서호에서 백사가 처녀로 변하여 항주총각을 만나 사랑을 나누는데, 부처님이 이를 알고 뱀은 사람이 될 수 없다하여 탑 밑에 백사를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 나서 서호가 물이 마르면 만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였는데 실제로 1900년대에 탑이 무너지면서 흰 혼백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서호의 풍경을 아름답게 해주는 현재 뇌봉탑은 2002년도에 재건축되었다고 한다.
제4막은 ‘세계는 여기서 모인다.’에서는
세겨 여러나라의 고유복장을 한 모습을 무대에서 선보이는데 이는 모두 항주의 무희들이다.
물론 우리나라도 한복입고 장구 치는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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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지산이 보이고 일본 복장을 한 무희들 >
< 캄보디아 또는 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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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 복장을한 무희들, 달속에 인도상징 타지마할이 보인다.>
< 중국 무희들이 한국복장을 하고 한국의 부채춤을 선보인다.>
마지막 각국 무희들의 춤은 한국이 가장 인기가 많다고 했다. 그래서 부채춤, 장고춤에 이어 농악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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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의 무대는 막이 내린다.
중국이 세계3대 쇼에 속 한다고 자랑할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우리일행은 전용 관광버스를 타고 상해로 이동 하였다.
3시간여를 달려 상해에 들어서 도심을 달리는데 전번에 왔을 때는 도심에 몇 개 안되던 지하차도를 수 없이 지나고 있었다. 그만큼 교통이 신호를 받지 않고 차량흐름이 좋다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지하차도를 많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상해의 늦은 밤거리의 가로등 불빛 찬란한 입체교차로를 통해 고가도로를 달린다. 버스 차창에 비친 눈에 익숙한 포동의 풍경이 뒤로 멀어져 가는 것을 졸린 눈으로 처다 보는 것만으로도 여행은 즐겁다. 아마도 포동을 지나 멀리 변두리의 호텔로 가는 것 같았다.
상해 호텔에 돌아와 잠을 청하는데 환상적인 뮤직컬 장면이 뇌리를 떠나지 않아 한동안 잠 못 이루는 이국의 밤이 되기도 했다.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간다.
-5일차; 2008년 3월 26일 수요일
아침에 일어나 호텔 창문을 열어 보니까 상해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인 것을 알았다.
그러나 놀란 것은 변두리이지만 끊임없이 개발을 하고 있는 중국 대륙의 땅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수많은 크래인과 덤프 차량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호텔에서 여유 있게 조식을 끝낸 후 상해 포동공항으로 이동하여 잠시 자유
시간을 얻어 아이 쇼핑을 한 후, 12:05분에 인천공항으로 이륙 하는 것으로 이번 여행은 끝났다.
- 감사합니다. 2011. 12월 씀 염영호 -
-90- 끝
첫댓글 紀行文 1.2部 다 읽기에 너무 지루했지만 정말 가봐야만 할곳이라 할수있겠습니다. 祖國을 빼앗기고 찾아야만할 獨立運動 愛國鬪士 臨時政府 였든 잊을수 없는 中國상해와 日本 천황生日 慶祝式場에 도시락을가장하여 목숨을 걸고 包彈을안고 日本수늬부를 爆殺한 尹奉吉義士(홍구공원)巨士場을찾아보는 정신이야 말로 觀光을 떠난그 愛國心이 大端하십니다.그러고 약3年前日記를 어떻게 記憶하여 훈륭한 紀行文을 썼나요?
먼저 뽕나무님께서 저의 글을 잘 봐주어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는 국내나 외국이나 여행을 하게되면 약간의 메모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갔다 와서는 내가 다녔던 길을 지도를 갖고 확인도 하구요,
회사에 다닐 때는 글 쓸 여가가 없었으나 , 지금은 다소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까 간간히 글을 써보게 되더군요. 아무튼 고맙습니다, 늘 건강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