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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천의 사건을 종결지은 다물 임금은 내시를 향해 명을 내렸다.
“산적 여두목이자, 천국화라 불리는 매아리를 불러 오시오.”
환국의 여왕이었던 완산일매 매아리는, 기축년 상달 초하루 어전대회 때 여루 임금에게 사면을 받고 임금의 명대로, 그녀의 친모이자 선제 구물의 후궁인 주랑朱朗이 기거했던 바로 그 별실에 당분간 갇혀 지내고 있었다.
그녀가 내시의 인도를 받고 어전에 들어와 부복한다.
“일어나시오.”
임금의 말투가 매우 부드러웠다.
매아리가 일어나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짐을 보시오.”
여전히 솜털 같은 음성이다.
매아리가 천천히 머리를 들어 임금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보니, 두 달 전과 달리, 임금의 표정은 아주 평화롭고 온화하게 바뀌어 있었다.
“내가 여기 모인 만백성 앞에서 그대에게 청혼을 한다면, 그대는 받아주겠소?”
임금이 웃음 띤 얼굴로 매아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임금의 이 돌발적 발언에, 장내의 모든 인사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자고로 임금의 혼사라도 규례와 절차가 있는 법인데, 이건 듣도 보도 못한 괴이한 언행이 아닐 수 없었다.
매아리는 임금이 자신을 조롱한다고 생각해 고개를 떨어뜨린다.
“단, 부탁이 하나 있소. 지금부터 그대가 연마한 미혼술을 버리고, 앞으로 내가 지은 책을 읽으며 나의 뜻에 따라줄 수 있겠소? 그렇게만 한다면, 그대는 명실공히 천국화天國花, 하나님 나라의 꽃이 될 것이오.”
매아리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임금의 목소리가 가일층 온화하면서도 간절해졌다.
“이리 가까이 오시오!”
다물 임금은 그 말과 동시에 보좌에서 일어났다. 그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장내는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매아리가 굳은 표정으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이리 더 가까이 다가와 한 계단 올라오시오.”
매아리가 한 계단 올라가 임금 앞으로 다가갔다.
임금이 느닷없이 낭랑한 소리로 외쳤다.
“나는 그대와 원앙이 되고 싶소!”
매아리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한참 후 그녀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의 숙연한 대답이 나왔다.
“폐하! 산채의 여도적인 천녀가 어찌 감히 폐하의 청혼을 받아들일 수 있사오리까? 게다가 전 이미 맘에 둔 낭군이 있사옵니다. 그 말씀을 거두어 주소서.”
“그게 사실이오?”
놀란 임금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렇사옵니다. 폐하.”
당혹한 임금은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충격에 싸여 한동안 말을 잃고 있던 임금이 탄식하듯 내뱉었다.
“그대의 곳으로 돌아가시오.”
매아리가 뒷걸음질 쳐서 물러가고 있을 때 임금이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아, 잠깐!”
임금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그대의 것이니 받아주시오.”
그것은 한 쌍의 황금환화였다. 여러 해 전 다물이 장당경으로 올라갈 때 산채에서 매아리가 그에게 건네주고, 또 재작년 사해제일관의 매아리 생일잔치 때 매아리가 손수 그의 가슴에 달아준 바로 그 노리개다.
매아리는 황금환화를 받아들고 매우 곤혹스런 표정을 짓다가, 임금의 얼굴을 훔쳐보더니 눈물을 글썽거렸다.
임금은 매아리에게 황금환화를 건넨 후 청중을 향해 물었다.
“우원 대협의 따님, 수련 아씨는 어디 있소?”
“폐하, 지금 별실에 대기하고 있사옵니다.”
내시가 대답했다.
다물 임금은 수련이 제궁에 들어오자마자, 그녀를 천국화 매아리의 별실에 함께 있도록 조처해 놓았었다.
“그녀를 속히 불러오시오.”
수련이 그 앞에 와서 부복했다.
“일어나시오.”
임금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수련아가씨, 당신은 문무백관이 지켜보는 이 자리에서 나의 청혼을 받아줄 수 있겠소?”
임금이 거두절미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수련은 일순간 당혹해 고개를 숙인 채 있다가 다시 엎드려 절했다.
“폐하! 그건 불가하옵니다. 저는··· 이미 혼약한 낭군이 있사옵니다.”
“허허! 그게 사실인가요?”
“폐하! 틀림없는 진실이옵니다.”
다물 임금이 망연자실하고 있다가 내시에게 물었다.
“완산성주의 딸 홍란 아가씨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폐하, 영빈관에 대기하고 있는 것으로 아옵니다.”
“속히 불러오시오.”
잠시 후 내시의 인도를 받고 한 가냘픈 여인이 어전에 와서 엎드렸다.
“어서 일어나 짐의 얼굴을 보시오.”
그녀가 일어나자 임금이 반색을 했다.
“보고 싶었소. 홍란 아가씨. 아가씨는 그동안 평안하셨나요?”
홍란은 임금의 얼굴을 보는 순간 대경실색해 기절할 뻔했다. 완산성에서 여러 해 동안 함께 지내던 그리운 다물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녀는 곧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한시라도 선생님, 아니 폐하를 잊은 적이 없사옵니다.”
“아, 고맙습니다. 중간에 궁으로 올라오는 바람에 공부를 다 마치지 못했군요.”
“계속해서 공부를 가르쳐 주세요.”
그녀가 어린아이 같은 말투로 요청했다.
다물 임금은 물론 문무백관도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좋소! 하지만 당분간입니다.”
“네, 선생님! 아니, 폐하!”
홍란이 시원하게 대답했다.
‘하늘이 내게 지어주신 짝은 결국 홍란아가씨란 말인가?’
다물 임금은 속으로 헤아렸다.
다물 임금은 홍란을 아내로 맞아들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매아리와 수련이 자신의 청혼을 거절한 게 믿기지 않아 정신이 무척 혼란스러웠다.
다물 임금은 애써서 마음을 가다듬고 아득한 정신을 수습하며 명을 내렸다.
“남녘의 천국화와 연루된 사람들을 죄다 이리로 불러주시오.”
그 때 매아리와 수련은 서로 나란히 서 있었는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몹시도 곤혹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완산성주를 필두로 남해기인 월앙일, 서해어부 장공, 완산대렵 우원, 한산의 이확 등이 임금 앞에 나아와 부복했다.
“모두들 일어나 짐의 얼굴을 보시오.”
남녘의 영웅들 역시, 임금의 얼굴을 보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임금의 얼굴과 목소리가 다물 공자와 판에 박은 듯 동일했던 것이다. 아직까지도 그들은 다물의 즉위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임금이 명을 내린다.
“조서에서 밝힌 대로 여러분 모두를 남녘 현지의 제궁 직할 부대로 삼으니, 임지에 내려가 전시든 평시든 예전처럼 가난한 백성들을 돌보아 주시오.”
실연의 아픔이 가슴 속에 사납게 엉킨 것을 의식하며, 다물 임금은 어전대회를 간신히 끝냈다. 여러 해 동안 정들었던 매아리, 수련과 헤어진다니 도무지 현실 같지 않았다. 예전에 모진 마음을 먹고 매아리의 옷자락까지 자르고 떠나왔으나, 이제는 그들 편에서 자신의 청혼을 거부하자 가슴 아프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더구나, 수일 전 다물 임금은, 자신과 구두로 약혼했던 삼삼촌의 여인이, 실은 살아있었으나, 이미 누군가와 혼인하고 말았다는 섭섭한 소식을, 은밀히 파견했던 사자로부터 직접 들은 터라, 세상인심의 무상함과 여인들의 변덕에 심장이 얼얼하게 아렸다.
여루 임금처럼 다물 임금도, 즉위 후 오래 지나지 않아, 극비리에 백일百日미복잠행微服潛行(비밀민정시찰)에 나선다. 임금은 무예와 학식이 탁월한 여섯 명의 시종을 거느리고 번조선 땅과 진조선을 두루 순행한 후 마지막으로 막조선에 들어섰다. 동남해안을 돌아 남쪽에서 북으로 올라가며 백성의 삶을 살펴보았다.
391 봄 다물 27 매아리 22
다물 임금 일행이 완산성 근처에 다다른 것은, 매화가 피기 시작하는 봄이었다. 남문으로 들어서서 곧장 북쪽의 천하제일문으로 빠져나왔다. 천하제일문 밖의 시장터는 예전이나 다름없이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임금 일행은 시장을 돌아보고 북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사해제일관으로 향했다. 사해제일관에 들어서니 손님들로 몹시 붐비는 것은 여전했다. 다물 임금은 감회가 솟구쳐 눈물이 나오려 했다. 그 장원은, 매아리를 처음 만나고 참으로 애증愛憎깊은 시간들을 보낸 곳이다.
임금 일행은 주루로 들어가 식사를 시켰다. 임금의 시종이 사환에게 물었다.
“완산에 미색이 뛰어난 매아리라는 아가씨가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만나본 적이 있소?”
“아, 매아리 아씨 소문을 어디서 들으셨나요? 그분은 이 사해제일관의 주인이십니다.”
“오, 그래요? 저희들도 혹시 주인아씨를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사환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 이런 어쩌나? 때를 잘못 맞춰 오셨군요. 그분은 지금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
“멀리 여행을 간다며 방금 한 시간 전에 채비를 갖추고 떠나셨습니다. 아마도 수개월은 지나야 돌아오실 것 같습니다.”
다물 임금은 행여라도 매아리를 만나 볼 수 있을까 기대했으나, 되돌아온 것은 실망뿐이었다.
임금의 시종이 사환에게 다시 물었다.
“듣기로는 이 고장에 유명한 완산대렵이라는 분이 계시고, 그 분의 따님 중 수련이라는 절색의 아가씨가 있어서 매아리 아가씨와 매우 친하다고 하던데, 혹시 그 아가씨를 알고 있습니까?”
“아, 네. 잘 알지요. 수련 아가씨도 매아리 아씨와 이번 여행에 동행했습니다.”
“두 아가씨는 혹시 혼약을 하셨나요?”
시종이 꼬치꼬치 캐묻자 사환이 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건 왜 물으시오?”
“아, 아닙니다. 그냥··· 좋은 혼처가 있어 중매 좀 설까 해서요.”
임금 일행은 이튿날 떠나기로 하고 사해제일관에 투숙했다. 임금은 시종에게 부탁해, 예전에 자신이 머물던 방이 비어있는지 알아보게 하고, 비어있다는 말에 그 방과 옆방에 여장을 풀었다.
저녁 식사 후 다물이 홀로 뜰에 나오니 어디선가 불어오는 봄꽃의 향기가 그를 반겼다. 호젓한 달을 바라보며 예전에 이곳에서 불렀던 노래를 다시 가창해 보았다. 노랫소리를 따라 사면에서 진한 감회가 몰려와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
드넓은 이 세상에 이 몸 둘 곳 없어도
어진 님 품 안에서 내가 편히 쉬겠네
구성진 가락이 달빛을 타고 초목 사이를 맴돌았다.
‘내가 비록 이 나라의 임금이라고 하나, 궁궐은 어쩐지 너무나 불편해. 궁을 아예 떠날까? 떠나가면 가엾은 이 백성은 누가 돌보란 말인가?’
임금은 가련하고 비참한 빈민들을 생각하니 저절로 탄식이 나오고 눈물이 흘렀다.
‘이들을 어떻게 구휼하고, 탐욕에 찌든 포악한 관리들을 무슨 방도로 다스리며, 나라를 어떤 지혜로 안정시켜야 하는가?’
다물 임금은 머릿속에 오락가락하는 생각들을 뚫고, 입으로 자신도 모르게 노래를 되풀이해 부르고 있었다. 그 때다.
“공자님의 취미가 참 고상하군요. 이런 달밤에 그토록 애절한 노래를 부르고 계시니.”
느닷없이 뒤쪽에서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임금이 뒤를 돌아보니, 영롱한 자태의 두 여인이 달빛을 맞으며 멀찍이 서 있었다. 두 눈을 비비고 자세히 주목해 보았다.
아아, 어찌 잊으란 말인가? 멀리서 봐도 그건 틀림없는 매아리와 수련의 자태다.
두 여인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아니, 여길 어떻게 오셨소?”
다물이 얼떨결에 물었다.
“여긴 우리 집인데, 어떻게 오다니 무슨 말씀이신가요?”
매아리가 말한 후 두 여인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킥킥거렸다.
“공자님이야말로 여길 어떻게 오셨나요?”
“······.”
“설마 저희를 만나고 싶어 오신 것은 아니겠죠?”
“네, 지나는 길에 그냥 들렀습니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임금이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아참, 수련아가씨, 혼약을 하셨다는 말씀, 지난 연초에 제가 들었는데, 축하합니다.”
“제가 폐하를 알현하던 자리에 공자님도 계셨었나요?”
수련이 웃으며 물었다.
“네, 저도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공자님.”
“매아리 아가씨도 혼약을 하셨나요?”
“네. 저도 이미 약혼한 남자가 있습니다.”
“오, 그래요? 그거 잘 됐군요.”
다물이 맘에도 없는 말을 쏟는다.
“그가 누군지 알고 싶지 않으세요?”
“글쎄요. 그런 건 알아서 뭐하게요.”
다물이 침통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이번에는 수련이 나서서 물었다.
“그렇다면, 혹시 저와 정혼한 낭군이 누군지 알고 싶지는 않으세요?”
“글쎄요. 그런 건 제가 알아서 뭐하게요.”
다물이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 낭군은 성을 환이라 하고, 방명······.”
수련이 말을 중단하고 매아리를 바라보았다. 매아리도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방명, 방명은, 다물이라고 해요. 환다물.”
“네?··· 그건 제 이름인데, 저 말고도 환다물이라는 사람이 또 있나요?”
“호호호호호!”
매아리와 수련이 동시에 간드러지게 웃었다.
“그건 잘 몰라요.”
수련이 말했다.
원래 매아리와 수련은, 장당경으로 떠나려다 잊고 챙기지 못한 물건이 있어서 매아리의 비밀 가옥에 들렀었다. 물건을 챙긴 후 둘은, 요기 좀 하고 출발하기 위해 사해제일관으로 되돌아왔다.
그 때 사환으로부터 뜻밖의 말을 들었다. 수상한 사람들이 그녀들의 신상을 세세히 캐물었다는 것이다.
짚이는 데가 있었다. 두 여인은, 그 사람들이 전에 다물이 체류했던 방에 투숙했음을 알고 어느 정도의 확신까지 얻었다. 그리고 여관에 머물러 임금 일행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던 것이다.
세 사람은 달빛에 물든 동산을 한 바퀴 돌았다. 꽃향기는 아직도 동산에 감돌고 교교한 월광과 산들거리는 봄바람은 가슴 속에 한 폭의 그림처럼 시심詩心을 수놓는다.
“공자님, 우리 옛날처럼 대구놀이 해요.”
매아리가 그윽한 눈길로 다물을 바라보며 제안했다.
“좋고 말구요!”
다물과 매아리는, 완산의 사해제일관에서 처음 만나 팔괘검 형세 명칭으로 구술 대결을 벌이던 광경이 눈에 선했다. 그 때도 완산에 매화가 산야를 덮던 시기였고 뜰에는 휘영청 달빛이 조요照耀하는 밤이었다. 칠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의 흐름에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매아리가 먼저 운을 뗐다.
“완산에 매화가 활짝 필 무렵,”
매아리의 별명은 완산일매完山一梅다.
수련이 미소로 다물을 바라보며 대응구절을 달았다.
“약관弱冠의 검협劍俠이 나들이 왔네.”
스무 살 때의 다물을 일컫는 말이다.
매아리도 다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다음 행을 이었다.
“꽃향기 유혹에 가슴이 떨려”
매아리는 자신의 유혹에도 요지부동이던 목석같은 사나이 다물이 새삼 얄미워, 그의 가슴이 떨렸다고 읊었다. 이번에도 수련이 대구를 달았다.
“칼날을 봉올에 들이대다가”
다물이 청동단검으로 매아리의 옷자락을 잘라버리고 장당경으로 떠나가 버린 사건을 빗대고 있었다.
두 여인이 사전에 짠 듯, 다물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하하! 칼날을 꽃봉오리에 들이대는, 무자비한 겁쟁이 검객도 있던가?”
다물이 크게 웃었다.
“공자님이 바로 그런 사람이에요!”
“하지만 난 꽃 아래 달린 잎사귀를, 그러니까 매아리 아가씨의 옷자락을 베었을 뿐 봉오리는 자르지 않았소.”
다물은 자신을 변명한 후 연달아 두 개의 구절을 대며 시를 끝맺었다.
“가녀린 자태에 차마 못 잘라, 서슬만 남기고 사라져갔네.”
그렇게 끝내니, 두 여인은 뭔가 찜찜했다.
“그건 너무 허전해요!”
수련이 다물의 결구結句를 고치고 거기에 다시 대구를 달았다.
“서슬만 남기고 사라져가도, 천만리 밖인들 찾지 못할까?”
다물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제가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은데요, 예전에 두 분이 손바닥에 글자를 써서 천국화와 천지단의 의향이 합치되는지 시험해본 적이 있죠?”
그가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두 분과 내가 다시 글자를 써서 우리의 혼인에 관해 하늘의 뜻이 어디 있는지 확인해 보면 어떨까요?”
두 여인의 표정이 야릇해짐을 의식하며 그가 덧붙였다.
“두 분이 한 글자씩 적고 제가 두 글자를 적기로 하죠. 두 분이 상의해서 써도 괜찮아요.”
“너무 가혹해요.”
수련의 말이다.
“언니, 걱정하지 마세요. 될 대로 되겠죠.”
매아리가 수련을 위로했다. 그녀는 숱한 아픔과 실연의 고통을 겪으면서 현실에 대해 많이 초연해 있었다.
세 사람은 방으로 들어가 붓으로 손바닥에 글자를 새겼다.
“자, 우리 동시에 손을 들기로 해요. 하나 둘 셋!”
다물이 외쳤다.
(다음 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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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1. 10. 9. 한글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