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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하면 땅을 상속받습니다 (마 5:5)
오복은 무슨 복을 말할까요? 오복은 중국의「서경」에 있는 ‘홍범편’에 나옵니다. 첫째 복은 ‘수’ 오래 사는 것, 둘째 복은 ‘부’ 부유하게 사는 것, 셋째 복은 ‘강녕’ 건강하게 사는 것, 넷째 복은 ‘유호덕’ 덕을 좋아하고 베푸는 것, 다섯째 복은 ‘고종명’ 깨끗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말합니다.
경복궁에 있는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에 관한 일화를 보면 셋째 복 강녕이 등장합니다. “강녕은 중간을 들어서 그 남은 것을 다 차지하려는 것입니다. 임금이 마음을 바루고 덕을 세우시면 복을 향유할 수 있습니다. 왕께서는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두어서 황국의 복을 누리소서. 그래서 강녕전이라고 했습니다.”
복을 받고 산다는 것은 이처럼 소중합니다. 사람은 복을 받아야 살고 복을 받아야 사명을 잘 감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먼저 하신 일은 복부터 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7~28절 상반절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예수님 또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공적 사역을 시작하신 후에 산상설교를 통해 복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오복은 육신의 삶을 위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팔복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한 영적인 복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첫째 복은 천국의 복, 둘째 복은 위로의 복, 셋째 복은 땅 상속의 복, 넷째 복은 만족의 복, 다섯째 복은 불쌍히 여김을 받는 복, 여섯째 복은 하나님을 보는 복, 일곱째 복은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음을 받는 복, 여덟째 복은 하늘에서 큰 상을 받는 복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가운데 셋째 복인 온유한 사람이 받는 복에 대한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말할까요? 온유한 사람은 화가 치밀어도 성령님에 의해 감정이 조절되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따뜻한 마음과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평화로움을 느끼게 해줍니다. 온유는 이처럼 성격이 온화하고 친절하고 부드러운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온유의 반대는 차갑고 딱딱한 마음입니다. 자기의 주장을 끝까지 내세워서 반드시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화를 습관적으로 자주 내고, 사납고, 난폭하고, 강포하고, 완악하고, 교만한 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이런 것이 꽉 들어차 있고 깊이 뿌리박혀 있으면 온유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마음이 되면 자신을 파괴하고 다른 사람을 파괴하고 조직을 파괴합니다. 그러므로 이 마음은 하루 빨리 비워버려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목사님이신 한경직 목사님은 온유함의 목회철학을 가졌다고 합니다. 목회자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온유함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목표와 뜻을 가졌더라도 교회의 화평을 깨뜨리는 것은 목회자의 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이 쓰신「하나님의 은혜」라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겸손해야 합니다. 내 주장이 있고 아무리 옳다고 해도 그것을 그대로 안 한다고 상대를 정죄한다는 것은 좀 삼가야 합니다. 지나고 보니 제일 중요한 것은 옳은 신학사상을 가질뿐더러 겸손한 태도이며 또한 우리 신앙생활의 근본 원칙이 되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3장 4절 이하를 읽어 보면 사랑은 가장 먼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피차간에 그리고 믿는 형제간에 오래 참고 온유한 것이며 부드럽게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민수기 12장 3절을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 늘 투덜거리고 대들었습니다. 거기다가 반란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에 맞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이 문제를 들고 나와서 아뢰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시려고 하자 백성을 용서해주시지 않으시면 차라리 주께서 기록된 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고(출 32:32) 했을 정도로 온유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민족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온유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역시 형제 유대인들로부터 수많은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 역시 형제를 위해 차라리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달라고(롬 9:3) 했습니다. 바울의 이 온유한 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사랑하고 아끼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쓴 내용입니다.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딤후 2:24~25).
뛰어난 지도자는 이처럼 온유한 사람들입니다. 온유하게 대하는 사람이 이처럼 화평하게 하며 결국 자신의 위치가 자신도 모르게 높아지게 된 것입니다. 세계사를 보면 천하를 얻기 위해 힘을 기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천하를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힘으로 제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폭군이나 독재자가 세상을 차지하지 못합니다. 온유한 사람이 천하를 얻습니다. 온유한 나라가 천하를 지배합니다. 온유한 교회가 그 지역을 얻게 됩니다. 온유한 성도가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전도도 잘하게 됩니다.
본문 5절을 보면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한글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헬라어 성경에는 헬라어로 ‘호티’가 나옵니다. 이 접속사는 이유를 말해줍니다. “왜냐하면”이라는 뜻입니다. 왜 복이 있느냐하면 “땅을 기업으로” 받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때 기업은 ‘유업, 유산, 상속’을 뜻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온유하면 상속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상속은 정복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상속은 힘쓴다고 상속받는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상속은 자녀가 되면 받게 됩니다. 이처럼 온유하면 자녀가 상속받듯이 땅을 상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5절을 보면 “땅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은 무엇을 말할까요? 이 땅이 의미하는 것은 지리적인 의미에서의 땅을 말합니다.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땅을 말합니다. 온유하면 이 땅을 상속받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약속의 땅도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뒤에 정탐꾼의 보고를 듣고는 망연자실했습니다. 이럴 때 온유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 모두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차지했습니다. 백성들이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해도 다투지 않고 자기 옷을 찢으면서 호소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땅을 향해 나아가자고 했습니다. 온유하면 이렇게 약속의 땅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온유하면 마음의 땅도 얻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의 땅도 얻게 됩니다. 억지로 빼앗으려고 하지 않아도 온유하면 저절로 그 사람의 마음을 얻게 됩니다. 더 귀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까지도 얻게 됩니다.
본문 5절을 보면 “온유한”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온유는 어떤 상태를 말할까요? 온유는 헬라어로 ‘프라위스’입니다. 이 말의 용도는 본능, 충동, 격동 등의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것에 사용됩니다. 자신을 평가절하하고, 부당하게 대하고, 해롭게 대하더라도 따뜻하게 친절하게 부드럽게 대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영어성경 NASB는 이 온유를 “gentle”로 표현합니다.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그 가운데 “독하지 않는, 순한”이란 뜻도 있습니다. 이렇게 온화하고 부드러운 상태가 온유인 것입니다.
물론 음식물 중에는 매운 맛, 뜨거운 맛, 톡 쏘는 맛 등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런 입맛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관계는 그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사람을 좋아할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기가 센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사람은 튕겨나서 지리적인 땅도 약속의 땅도 마음의 땅도 차지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가는 곳곳마다 환영받고 사람들이 자석처럼 끌어당깁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고 결국은 땅을 상속받고 높은 까지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처럼 온유하셨기에 세계 모든 나라 중에 가장 뛰어난 이름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해를 당하셔도 입을 여시지 않으셨습니다. 고초를 당해도 멸시를 당해도 십자가에 죽으셔도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투지도 않으시고 목소리가 담을 넘어 골목길에 들리지도 않도록 하셨습니다(마 12:19).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습을 온유하게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넌 이래서 안 되겠다. 너 저래서 안 되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묵묵히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 받아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온 세상, 온 우주, 영원부터 영원까지를 얻게 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온유하신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아멘. 마음이 쉬지 못하는 것은 온유하지 못해 그렇다는 것입니다. 온유하면 마음이 복잡하지 않고 요동치지도 않고 답답하지도 않고 편안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온유하셨기에 모든 성도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시고 그들의 마음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온유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찾아오시면 온유한 성도가 됩니다. 우리 교회에 오시면 온유한 교회가 됩니다. 사나운 민족에 찾아오시면 온유한 민족이 됩니다. 그러면 남북한 평화 통일도 이루어집니다. 온유한 민족이 되므로 두 동강난 한반도 땅을 하나로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축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본문 5절을 보면 “온유한 사람은”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온유한 사람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을 말할까요? 세계적인 영성가인 매튜 헨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조용히 순종하며 모든 사람에 대해 관용하는 사람이다. 불길 같은 성을 내지 않고 참을 수 있으며 잠잠하거나 부드러운 답변을 하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이 성급할 때 침착할 수 있으며 그들이 다른 모든 것을 지킬 수 없을 때 인내로서 자기 영혼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다. 한 번 복수하기보다는 오히려 스무 번의 가해를 용서하려고 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일일이 갚지 않고 잠잠히 참고 기다리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여 아뢰는 온유한 사람은 땅을 상속받게 됩니다. 땅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상속받는다고 했습니다. 힘들여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상속자의 마음에 들어서 상속받게 됩니다. 동물도 세상을 차지하는 동물은 사나운 맹수가 아니라 온유한 초식동물입니다. 식물도 콕콕 찌르는 가시가 세상을 뒤덮지 않고 부드러운 초원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바닷물도 모든 물을 온유하게 받아들이므로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사람도 역시 온유한 사람이 세상을 품게 됩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수하신 어르신에게 물었습니다. “저, 어르신, 105년을 사시면서 많은 사람들이 어르신을 욕하고 해롭게 하고 그래서 열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걸 해결하시고 이렇게 오래 사세요?” “응, 그거야 쉽지. 욕을 하든 말든 내버려두었더니 나를 씹다가 모두 먼저 갔어. 나를 욕하던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도 남지 않았어.”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힘을 좀 빼야 하겠습니다. 눈에, 목에, 어깨에 들어간 힘을 좀 빼고 온유해져야 하겠습니다. 온유한 성도가, 온유한 교회가, 온유한 민족이 땅을 상속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질이 죽었다고 힘을 뺐다고 해서 우리가 죽거나 끝장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살아나고 우릴 통해 다른 많은 사람들도 함께 살아나게 됩니다. 우리 모두에게 평화가 옵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사람을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2~3). 이런 온유한 사람으로 살아서 지리적인 땅과 약속의 땅과 마음의 땅을 상속받으시길 기원합니다.